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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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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징비록(懲毖錄)? / 유성룡(柳成龍)
이장희 추천 0 조회 50 16.01.04 20: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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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懲毖錄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본관 풍산 자 이견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부제학으로 ?비변오책備邊五策? 지어 올림, 군대 양성?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뜬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로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에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 1642년 초간, 이본異本으로
『근포집芹曝集』?『군문등록軍門謄錄』을 제외한 『징비록』 본문과 『녹후잡기錄後雜記』만으로 된 2권본이 있음.
이민수 역, 『징비록』, 을유문화사, 1994.
이재호 역, 『국역 서애전서Ⅰ-1 징비록』, 서애선생기념사업회, 2001.

 

 

 

 

기사(騎射) 유엽전(柳葉箭) 무장(武將)

 

『징비록』 권 1

 

擢井邑縣監李舜臣 爲全羅左道水軍節度使 舜臣有膽略 善騎˚ 射˚嘗爲造山萬戶 時北邊多事 舜臣以計 誘致叛胡于乙其乃 縛送兵營斬之 虜患遂息 巡察使鄭彦信 令舜臣護鹿屯島屯田 一日大霧軍人盡出收禾 柵中但有十餘人 俄而 虜騎四集 舜臣閉柵門 自以柳˚ 葉˚ 箭˚ 從柵內 連射賊數十墮馬 虜驚駭退走 舜臣開門 單騎大呼逐之 虜衆大奔 盡奪所掠而還 然朝無推挽者 登第十餘年不調始爲井邑縣監 是時倭聲日急 上命備邊司 各薦才堪將帥者 余擧舜臣 遂自井邑 超拜水使 人或疑其驟 時在朝武˚ 將˚ 中 惟申砬李鎰最有名 慶尙右兵使曺大坤 年老無勇 衆憂不堪?寄

 

정읍현감井邑縣監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여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순신을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일찍이 조산만호造山萬戶1]로 있었는데 그 무렵 북쪽 변방邊方에 사변이 많았다. 순신이 배반한 오랑캐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로 유인하여 잡아 묶어서 병영으로 보내어 베어 죽이니 이후로는 오랑캐로 인한 근심이 없어졌다. 순찰사巡察使 정언신鄭彦信2]이 순신으로 하여금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3]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어느 날 안개가 많이 낀 속에 군사들은 모두 나가서 벼[禾]를 거두었고 성채[柵] 속에는 다만 10여 인만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오랑캐의 기병이 사면에서 모여 드는지라 순신이 성채 문을 닫고 스스로 유엽전柳葉箭4으로써, 성채 안에서 적賊 수십 명을 잇달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니 오랑캐가 놀라서 도망쳤다. 순신이 성채 문을 열고 혼자서 크게 고함치며 뒤쫓으니, 오랑캐의 무리가 크게 패하여서 빼앗겼던 것을 모두 되찾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추천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武科에 오른지 10여년이 되도록 벼슬이 승진昇進되지 않았다가 비로소 정읍현감井邑縣監이 되었다. 이때 왜적이 동병動兵한다는 소식이 날로 급하게 전하니, 임금께서 비변사에 명하여 제각기 장수될 만한 인재人才를 천거하라 하였으므로, 내가 순신을 천거하였더니 정읍현감에서 수사水使로, 차례를 뛰어 넘어 임명되어서, 사람들은 혹시 그가 갑작스레 승진된 것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이때 조정에 있는 무장 중에는 다만 신립申砬5]과 이일李鎰6]이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용맹도 없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그가 장수將帥의 책임[?寄]7]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1] 조산(造山)은 함경북도에 있는 마을. 만호(萬戶)는 무관직 (武官職)의 하나, 조선시대 각도 (各道)의 여러 진(鎭)에 딸린 종4 품의 군직(軍職)이다.

2] 중종(中宗) 22년(1527)~선조 (宣祖) 24년(1591). 문신(文臣).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명종(明宗) 21년(1566) 별시문과 (別試文科)에 급제(及第), 선조 12년(1579)에는 우부승지(右部承旨)에서 함경도절제사(咸鏡道節制使)로 되고 16년에는 니탕개(尼湯介)가 북변(北邊)에 쳐들어오자 우찬성(右贊成)에서 함경도순찰사(咸鏡道巡察使)로 임명(任命)되었다. 언신은 인재를 잘 알아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 억기(李億祺) 등이 모두 그 막하 (幕下)에 있었다. 17년(1584)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연 좌(連坐)되어 남해(南海)에 유배 되고 다시 갑산(甲山)에 유배(流配)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국조 인물고(國朝人物考)』

3] 지방에 주둔하는 군대의 군량 (軍糧)이나 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경작하던 전지(田地)를 말한다.

4] 살촉이 버들잎처럼 생긴 화살

5] 명종 원년(1546)~선조(宣祖) 25 년(1592). 무장(武將). 자(字)는 립지(立之), 본관은 평산(平山)이 다. 선조 원년 무과에 급제(及第), 선전관(宣傳官), 진주판관 (晉州判官)을 역임하고 16년 온 성부사(穩城府使)로 있을 때 야인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평정 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 (三道都巡邊使)에 임명되어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적군(賊軍) 을 막다가 대패(大敗)하여 부하장(部下將) 김여물(金汝?)과 함께 강물에 투신(投身), 자결(自決)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선조실록』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6] 중종 33년(1538)~선조34년(1601). 무장(武將). 자(字)는 중경(重卿),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명종 13 년(1558) 무과(武科)에 급제(及第), 선조 16년 니탕개의 난 때에 경원부사(慶源府使)로 있으면서 적군을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에 임명되 어 상주(尙州)?충주(忠州)에서 적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전(敗戰), 그 후에 임진강(臨津江)?평양(平壤)등지에서 싸웠으나 큰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선조실록』 『도곡집(陶谷集)』

7] 군사(軍事)의 전권(全權)을 장수에게 위임한다는 뜻이므로 대개 장수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곤(?)은 도성문을 뜻하니 곤기(?寄)는 도성 안의 일은 임금이 맡고, 도성 밖의 일은 장수가 맡는다는 것이다. 『사기』

 

 

무략(武略) 무사(武士) 보검(寶劒) 검(劍)

 

『징비록』 권 1

 

以前義州牧使金汝? 有武˚ 略˚ 時汝?坐事繫獄 啓請貸罪自隨 募武˚ 士˚ 可堪碑將者 得八十餘人 旣而 急報絡繹 聞賊鋒已過密陽大丘 將近嶺下 余謂應南及申砬曰「寇深 事已急矣 將若之何」砬曰「鎰以孤軍在前 而無後繼 體察使雖下去 非戰將 何不使猛將星馳先下 爲鎰策應耶」觀砬意 欲自行援鎰 余與應南請對 啓如砬言 上卽召申砬問之 遂以砬爲都巡邊使 砬出闕門外 自行招募武士無願從者時余在中樞府 治行事 砬至余所 見階庭間應募者簇立 色甚怒指金判書 謂余曰「如此公者 大監帶去安用 小人願爲副使而去」余知砬怒武˚ 士˚ 不從己 笑曰「同是國事 何分彼此令公旣行急 吾所得軍官 可先帶行 吾當別募隨行」因以軍官單子授之 砬遂回顧庭中武˚ 士˚ 曰「來」乃引之而出 諸人皆憮然而去金汝?亦同去 意甚不樂砬臨行 上引見 賜寶˚ 劒˚ 曰「李鎰以下 不用命者 用此劒˚ 」

 

전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던 김여물金汝?8]은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인데 이때 그는 남의 일에 연좌連坐되어 옥에 갇혀 있었으므로 임금께 계청하여 그 죄를 용서해주고 스스로 따라오도록 하였으며 무사 중에 비장碑將될 만한 사람을 모집하여 80인을 얻게 되었다. 조금 후에 정세情勢가 위급하다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와 적의 선봉先鋒이 벌써 밀양?대구를 지나서 장차 조령鳥嶺 아래까지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김응남과 신립을 보고 “적이 깊이 쳐들어왔으니 일이 이미 위급한데 장차 어떻게 하겠소?” 하니 신립은 말하기를 “이일李鎰이 고립된 군대를 거느리고 앞에 나가 있으나 후원하는 군대가 없습니다. 체찰사9]께서 비록 내려가시더라도 싸우는 장수가 아니니, 어찌 용맹한 장수로 하여금 밤새워 급히 달려 먼저 내려가게 해서, 이일을 응원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는데 신립의 의사는 자기가 가서 이 일을 응원하겠다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김응남과 함께 임금을 뵙고 신립의 말대로 아뢰니, 임금께서 즉시 신립을 불러 사실을 물으시고 마침내 그를 도순변사都巡邊使10]로 삼았다. 신립이 대궐 문밖에 나가서 몸소 다니면서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하나 무사들 중에는 가고자 하는 자가 한 사람도 나서지 않았다. 때마침 나는 중추부中樞府11]에서 떠날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거기에는 내가 모집한 군사가 뜰 앞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얼굴에서 불만스런 빛을 감추지 못했다. 신립은 김응남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런 분을 대감이 데리고 가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소인이 부사副使가 되어 가고 싶습니다” 분명한 불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노여움이 딴 것이 아니라, 무사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다 같은 나라일이 아니오? 이것저것 따질 게 무어 있소. 이제 공이 급해 먼저 가시니 우선 내가 모아 놓은 군관들을 데리고 떠나시오. 나는 뒤에 따로 모집해 가지고 천천히 가겠소이다”
나는 군관들의 이름을 쓴 단자單子12]를 그에게 내주었다. 신립은 그제야 뜰 앞에 모여 있는 무사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리로들 오게!” 그가 앞에 서서 나가니 여러 사람들은 멀거니 쳐다보면서 따라갔다. 그들 중에는 김여물도 섞여 있었다. 그는 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 신립이 떠날 무렵 임금은 그를 불러 보셨다. 임금은 그에게 보검寶劍을 주면서 말했다. “이일 이하 그 밑의 사람으로서 그대의 영을 거스르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목을 베어라!”

 

8] 명종 3년(1548)~선조 25년 (1592). 문신(文臣). 자(字)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子)? 외암(畏庵),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선조 10년(1577) 알성문과에 급제(及第), 24년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려 투옥되었으나,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사면되 어 신립과 함께 충주방어에 나서게 되었는데 조령의 지세를 이용, 왜적을 방어할 것을 건의 했으나 신립이 듣지 않았으므 로, 충주 달천(達川)을 등지고 배수진을 쳐서 싸웠으나 적군을 막지 못하고 탄금대(彈琴臺) 아 래에서 신립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9] 유성룡(柳成龍)을 말한다.

10] 왕명(王命)으로 지방(地方) 군무(軍務)를 총괄(總括)하는 특사 (特使).

11] 고려 성종 때의 중추원을 조선 세조 12년(1466)에 고친 이름. 처음에는 왕명의 출납(出納)?숙위(宿衛)?군기(軍機) 등의 일을 맡았는데, 세조(世祖) 때부터 일정(一定)한 장무(掌務)는 없고 현직(現職)을 떠난 문무
당상관의 대기소로 되었다.
12] 남에게 보내는 물건의 수량(數量)과 보내는 이의 이름을 적은 종이

 

 

용사(勇士) 인(刃) 전(箭) 사(射)

 

『징비록』 권 1

 

初誠一到尙州 聞賊已犯境 晝夜馳赴本營 遇曹大坤於路中 交印節 時賊已陷金海 分掠右道諸邑 誠一進與賊? 將士欲走 誠一下馬 踞胡床不動 呼軍官李宗仁曰「汝勇˚ 士˚ 也 不可見賊先退」有一賊著金假面 揮刃˚ 突進 宗仁馳馬而出 一箭˚ 迎射˚ ?之 諸賊却走不敢前

 

성일13]이 처음으로 전지戰地로 가는 길이었다. 상주尙州에 다다르자 벌써 적들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주야로 본영本營을 향해 돌아오다가 중간에서 조대곤曹大坤을 만나 인부印符14]를 교환하였다. 이때 적은 벌써 김해金海를 함락시키고 우도右道 여러 고을을 노략질했다. 성일이 마침 앞으로 나가다가 적들을 만난 것이다. 성일의 휘하 장수들은 적을 보고 모두 겁내어 달아나려고 했다. 성일은 이것을 보고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15]에 걸터앉아 꼼짝도 않고 군관 이종인李宗仁16]을 불렀다.

“너는 용사勇士가 아닌가? 적을 보고서 달아나다니, 이 어찌 남아의 일인가?” 하고 성일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럴 즈음 쇠로 만든 탈[金假面]을 쓴 왜적 하나가 칼을 휘두르면서 달려왔다. 종인이 이를 보자 말을 놓아 달려 나가며, 활을 당겨 한번 쏘니 적은 화살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 모든 적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하나도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13] 경상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을 말한다.
14] 조정(朝廷)에서 지방관에게 주는 인장(印章)과 병부(兵符).
15] 승상(繩床)을 말한다.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관원이 하인에게 들고 다니게 하였다가 승마할 때에 사용하는 걸상처럼 된 물건.
16] ?~선조 25년(1593) 무신(武臣). 자는 인언(仁彦), 본관은 전주이다. 무과에 급제, 선조 16년(1583) 군관(軍官)으로 이제신(李濟臣)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종군, 북방수비에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김해부사로서 진주성이 포위되자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전쟁이 시작된 후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과 함께 끝까지 역전하여 적병을 수없이 죽였으나 마침내 성(城)이 함락되자, 적병(賊兵)을 양팔에 한명씩 껴안고 남강(南江)에 뛰어들어 순국하였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습진(習陣) 갑(甲) 조총(鳥銃) 사(射) 시(矢)

 

『징비록』 권 1

 

是夜賊兵屯長川 距尙州二十里 而鎰軍無斥候 故賊來不知 翌朝鎰猶謂無賊 出開寧人於獄 斬以徇衆 因率所得民軍 合京來將士僅八九百 習˚ 陣˚ 于州北川邊 依山爲陣 陣中立大將旗 鎰被甲˚ 立馬大旗下 從事官尹暹?朴?及判官權吉?沙斤察訪金宗武等 皆下馬在鎰馬後 有頃 有數人從林木間出 徘徊眺望而回 衆疑爲賊候而懲開寧人 不敢告 旣又望見城中 數處煙起 鎰始使軍官一人往探軍官跨馬 二驛卒執? 緩緩去 倭先伏橋下 以鳥˚ 銃˚ 中軍官墜馬斬首而去 我軍望見奪氣 俄而 賊大至 以鳥˚ 銃˚ 十餘衝之 中者卽斃鎰急呼軍人發射˚ 矢˚ 數十步輒墜 不能傷賊 賊已分出左右翼 持旗幟繞軍後 圍抱而來

 

이날 밤, 적들은 장천長川까지 와서 주둔했다. 장천이란 상주에서 거리가 불과 2리다. 그러나 이일의 군중에는 척후斥候가 없었다. 그래서 적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개녕 사람을 옥에서 끌어내어 놓고 말했다. “아직도 적은 아무 소식이 없다. 너는 분명 민심을 현혹시킨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서 그 죄 없는 사람을 베어 죽였다. 억지로 불러 모은 민군民軍과 서울에서 데리고 온 장수 등 모두 합쳐서 겨우 8~9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을 데리고 북쪽 냇가로 갔다. 이일은 진 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산을 의지해 진을 치고, 그 가운데 대장기大將旗를 꽂았다. 이일은 갑옷을 입고 그 깃대 밑에 말을 타고 섰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박호朴?와 판관判官 권길權吉, 사근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일의 뒤에 섰다. 얼마 후에 저만큼 멀지 않은 숲속에서 사람 두셋이 나와서 이편을 바라보고 배회하다가 도로 사라졌다. 이일의 부하들은 적이 우리 동정을 엿보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개녕 사람이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감히 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성중을 바라보니 여러 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이일은 그제야 군관 한 사람을 보내어 탐지해 오도록 일렀다. 군관은 말을 타고 역졸 2명으로 하여금 말고삐를 잡게하여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나 왜군은 그 전부터 다리 아래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조총으로 군관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 머리를 베어 가지고 달아났다. 우리 군사는 이것을 쳐다보고 그만 맥이 풀려 버렸다. 이런 지 얼마 안 되어 적들은 크게 몰려왔다. 조총 십여 개를 가지고 연달아 쏘았다. 총에 맞은 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었다. 이일은 급히 군사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했다. 그러나 화살은 겨우 수십 보밖에 나가지 못했다. 도저히 적의 조총을 당할 수가 없었다. 적은 이미 군사를 좌 우익으로 나누어 깃대를 들고 우리를 포위했다.

 

 

용사(勇士) 사(射) 인(刃) 기계(器械)

 

『징비록』 권 1

 

至龍仁望見北斗門山上 有賊小壘 洸易之 先使勇˚ 士˚ 白光彦?李時禮等 嘗賊 光彦等 率先鋒登山 去賊壘十餘步 下馬發射˚ 賊不出 日晩 賊見光彦等稍解 發白刃˚ 大呼突出 光彦等 倉皇索馬 欲走不及 皆爲賊所害 諸軍聞之震懼 時三巡察 皆文人 不閑兵務軍數雖多 而號令不一 且不據險設備 眞古人所謂 軍行如春遊 安得不敗者也 明日 賊知我軍心怯 數人揮刃˚ 賈勇而前 三道軍 望之大潰 聲如崩山 委棄軍資?器˚ 械˚ 無數 塞路人不能行 賊悉聚而焚之 洸還全羅 國馨還公州 ?還慶尙右道

 

이 군사들이 용인에 이르러 앞을 바라보니 북쪽 두문산斗門山 위에 적의 작은 영책이 보였다. 이광은 이것을 대단치 않게 여겼다. 용사 백광언白光彦?이시례李時禮 등을 시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오라고 일렀다. 광언 등은 선봉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적의 영책 십여 보 밖까지 갔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활을 쏘았다. 그러나 영책 안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날 해가 저물었다. 적은 광언의 군사가 차츰 해이해진 것을 엿보고 긴 칼을 빼어들고 큰 소리를 치면서 쫓아나왔다. 광언 등은 황급히 말을 찾아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졸지의 일이라, 미처 달아나지 못하여 적에게 죽고 나머지 군사들도 이 소식을 듣고는 군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순찰사 세 사람은 모두 문인文人이었다. 다 같이 병무兵務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사의 수는 많았지만 영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또 험한 곳을 찾아서 지킬 준비도 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옛 사람들이 말한, ‘군사 일을 마치 봄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으랴’한 것과 같다. 이튿날 적들은 우리 군사가 겁내는 것을 알고 몇명이 칼을 빼어 휘두르면서 달려 나왔다. 우리 삼도 군사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모두 겁내어 흩어져 달아나니, 그 흩어지는 소리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우리 군사가 무너지며 버린 군자軍資와 기계가 길에 무수히 널려 있어 사람이 다닐 수가 없었다. 적들은 이것을 모두 가져다가 불태워 버렸다. 이리하여 이광은 전라도로 돌아갔고, 국형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우도로 제각기 돌아갔다.

 

 

무사(武士) 사(射) 발검(拔劍) 강궁(强弓) 사(射)

 

『징비록』 권 1

 

望見江南岸 賊兵來聚者 已數百 江中小島居民 驚呼奔散 鎰急令武˚ 士˚ 十餘人 入島中射˚ 之 軍士畏不卽進

鎰拔˚ 劍˚ 欲斬之 然後乃進賊已在水中 多近岸 我軍急以强˚ 弓˚ 射˚ 之 連斃六七 而賊遂退 鎰仍留守渡口

 

바라다보니 강 저편 남쪽 기슭에 적병이 벌써 수백 명이나 모여 있었다. 강 가운데 작은 섬에 사는 백성들은 놀라서 달아나고 있었다. 이에 이일은 무사 십여 명에게 급히 명해서 섬 속에 들어가 활을 쏘라 했다. 그리나 군사들은 겁을 내어 가지 못했다.
이일이 칼을 빼어 베려 하자 그제서야 군사들은 마지못해서 섬으로 갔다. 그러나 적들은 벌써 강을 건너 기슭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 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급히 활을쏘아 연달아 6~7명을 죽였다. 그제서야 적은 비로소 물러갔다.이리하여 이일은 계속 그 곳을 지키게 되었다.

 

 

일자진(一字陣) 검(劒) 조총(鳥銃) 방패(防牌) 편전(片箭) 사(射) 현자총(玄字銃) 화전(火箭)

능철(菱鐵)

 

『징비록』 권 1

 

城中士卒民夫 合三四千 分配城堞 而部伍不明 城上人 或?或密 或人上有人肩背相磨 或連數? 無一人 散掛衣服於乙密臺近處松樹間 名曰疑兵 隔江望賊兵 亦不甚多 東大院岸上 排作一˚ 字˚ 陣列竪紅白旗如我國挽章樣 出十餘騎 向羊角島 入江中 水沒馬腹 皆按?列立示將渡江之狀 其餘往來江上者 或一二 或三四 荷大劒˚
日光下射閃閃如電 或云「非眞劒˚ 以木爲之 沃以白臘 以眩人眼者」然遠不可辨 又六七賊 持鳥˚ 銃˚ 到江邊 向城放 聲響甚壯 丸過江入城 遠者入大同館 散落瓦上 幾千餘步 或中城樓柱 深入數寸 有紅衣賊 見練光亭上諸公會坐 知爲將帥 挾鳥˚ 銃˚ 邪? 漸進至沙渚上 放丸中亭上二人 然遠故不重傷 余令軍官姜士益 從防˚ 牌˚內 以片箭射˚ ˚ ˚ 之 矢˚ 及沙上 賊逡巡而? 元帥發善˚ 射˚ 者˚ 乘快船 中流射˚ 賊 船稍近東岸 賊亦退避 我軍從船上 發玄˚ 字˚ 銃˚ 火˚ 箭˚ 如椽過江 倭衆仰視 皆叫?而散 箭˚ 落地 爭聚觀之

…… 上手取尹斗壽狀啓 示臣曰「昨日已令老弱出城云 人心必搖 何以能守」臣對曰「誠如聖慮 臣在彼時 未見此事 大?觀其處形勢 賊必由淺灘以渡 宜多布菱˚ 鐵˚ 於水中 以備之 上使問此縣 亦有菱鐵否 對有數千介」上曰「急募人 送之平壤」

 

성안에 있는 군사들은 도합 3~4천 명이었다. 이들을 성첩城堞에 각각 분배했다. 그러나 대오가 정돈되지 못하여 사람이 무척 많은 데도 있고 또 몹시 적은 데도 있었다. 어떤 곳은 사람이 빽빽하여 서로 맞대고 있는 데도 있었다. 또 어떤 곳은 도무지 사람이 없어서 을밀대乙密臺 같은 데는 옷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의병疑兵17]을 만들어 적을 속이기도 했다. 강 건너를 바라보니 적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했다. 동쪽의 큰 마을 기슭 위에 한 줄로 일자진一字陣을 벌이고 붉은 깃발과 흰 깃발을 꽂았다.이는 마치 우리나라 만장挽章 모양과도 같았다. 적들은 말 탄 군사 십여 명을 내어 양각도羊角島로 향하여 강물 속으로 들어섰다. 강물은 말의 허리까지 찼다. 모두 고삐를 잡고 벌려 서서 장차 일제히 강을 건너려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 나머지 군사들은 강 위를 오락가락하는데 한두 사람, 혹은 두세 사람씩 큰 칼을 빼어들고 있었다.

그 칼날은 햇빛에 비쳐 마치 번개처럼 번쩍였다. 이것을 보고 누군가가 말했다. “저건 정말 칼이 아니오. 나무를 깎아 칼처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백랍白臘을 칠해서 남의 눈을 속이는 거라오” 하지만 먼 곳이어서 진가를 분별할 수는 없었다. 적병 6~7명은 조총을 가지고 강변 가까이와서 우리 성을 향해서 총을 쏘았다. 그 소리는 몹시 웅장하고 총알은 강을 건너 성안에까지 날아왔다. 그중에서도 제일 멀리오는 놈은 대동관大同館까지 와서 지붕 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몇천 보步나 되는 거리인데도 어떤 것은 성루의 기둥에 맞았는데 몇 치寸나 깊이 박혔다. 붉은 옷을 입은 왜병 하나가 연광정 위에 앉아 있는 우리를 보고 장수들인 줄 알고 조총을 가지고눈치를 보면서 모래벌판까지 다가와서 쏘았다. 그 총알은 정자 위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맞추었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먼 곳이라서 몹시 상하지는 않았다. 나는 군관 강사익姜士益을 불러 편전片箭18]을 쏘라고 했다. 화살은 강 건너 모래 위에 떨어졌다. 이 것을 보고 적들은 두리번거리면서 물러가기 시작했다. 김원수는 다시 활 잘 쏘는 군사를 뽑아 쾌선快船을 타고 중류中流에 떠서 적을 향해 쏘라고 했다. 배가 저편 언덕에 가까워지자 왜병은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우리 군사는 배 위에서 현자총玄字銃19]을 쏘았다. 화전火箭20]이 연달아 쏟아져 강을 넘으니 적들은 이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서 요란스럽게 흩어진다. 화전이 땅에 떨어지자 모두들 이를 다투어 주워 보고 있었다.

…… 이때 임금은 윤두수의 장계를 한쪽 손에 들고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였다. “어제 벌써 노약老弱들은 모두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하니, 필시 인심이 동요했을 것이오. 다시 무슨 재주로 지킨단 말인가?” 나는 대답했다. “참으로 걱정하시는 바와 같사옵니다. 신이 그 곳에 있을 적에는 이런 일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대
개 그 곳 형세를 보면 적병이 반드시 강물이 얕은 곳으로 해서 건너올 것 같습니다. 마땅히 가시철[菱鐵]을 물 속에 깔아서 방비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하나이다” 이에 그 고을에 있는 가시철을 찾아보니 수천 개나 있었다. 임금은 다시 나에게 말했다. “빨리 사람을 시켜 평양으로 보내게 하라”

 

17] 적을 현혹 시키기 위하여 군사(軍士)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18] 짧고 작은 화살. 촉이 날카로워 갑옷이나 투구를 능히 뚫는다.
19] 불화살을 쏘는 대포의 한가지이다.
20] 옛날 싸움에서 쓰던 불을 붙이고 쏘는 화살

 

 

조총(鳥銃) 환(丸)

 

『징비록』 권 1

 

是日 自順安 三更發軍 進攻平壤 適大雨 城上無賊守兵 天兵從七星門入 城內路狹 多委巷 馬足不可展 賊依險? 亂發鳥˚ 銃˚ 史遊擊中丸˚ 卽斃 軍馬多死 祖遂退軍 賊不急追 後軍陷泥?中 不能自拔者 悉爲賊所害

 

이날 순안에서 밤 삼경에 군사를 내어 평양을 쳤다. 때마침 큰 비가 내렸다. 성 위에는 적병이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 군사가 칠성문七星門으로 쫓아 들어가니 성 안은 길이 몹시 좁고 꼬불꼬불하여 말이 맘대로 달리지 못했다. 게다가 적들은 험한 곳에 숨어서 조총을 요란스럽게 쏘니, 이 싸움에 사유는 총알에 맞아 죽었고, 그 밖에 군마도 많이 잃었다. 승훈은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이때 적들은 급히 뒤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승훈의 후군後軍 중 진흙 속에 빠져 도망치지 못한 자는 모두 적에게 죽고 말았다.

 

 

화포(火砲) 거북선[龜船] 대포(大砲) 환(丸) 도(刀)

 

『징비록』 권 1

 

全羅水軍節度使李舜臣 與慶尙右水使元均 全羅右水使李億祺等 大破賊兵于巨濟洋中 初賊旣登陸 均見賊勢大 不敢出擊 悉沈其戰船百餘?及火˚ 砲˚ 軍器於海中 獨與手下裨將李英男?李雲龍等乘四船 奔至昆陽海口 欲下陸避賊 於是水軍萬餘人皆潰

…… 先是舜臣 創造龜˚ 船˚ 以板鋪其上 其形穹?如龜 戰士櫂夫 皆在其內 左右前後 多載火˚ 砲˚ 縱橫出入如梭 遇賊船 連以火˚ 砲˚ 碎之 諸船一時合攻 煙焰漲天 焚賊船無數 有賊將在樓船 高數丈 上施樓櫓以紅段彩氈 圍其外 亦爲大˚ 砲˚ 所破賊悉赴水死 其後 賊連戰皆敗 遂遁入釜山巨濟 不復出 一日方督戰 流丸˚ 中舜臣左肩 血流至踵舜臣不言

戰罷 始以刀˚ 割肉出丸˚ 深入數寸 觀者色墨 而舜臣談笑自若

 

전라수군절도사全羅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이 경상우수사慶常右水使 원균元均,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거제巨濟 앞바다에서 적병을 크게 쳐부수었다. 처음에 상륙하는 적병을 본 원균은 그 형세가 매우 큰데 놀라서 감히 나가 싸우지도 못했다. 전선 백여 척과 화포?군기 등을 바닷속에 내다버렸다. 그는 수하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이운룡李雲龍 등만 데리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황망히 도망해서 곤양昆陽 바다 어귀에 상륙하여 적을 피하려 했다. 이리하여 그가 거느린 수군 만여 명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 원래 순신은 거북선[龜船]을 만들었는데, 판자로 배 위를 깔아 그 모양이 마치 거북과 같고 전사戰士와 노 젓는 수부들은 배 안에 들어가 있고 전후좌우로 화포를 싣고 있어 물위를 마치 베 짜는 북[梭]과 같이 맘대로 종횡했다. 적선을 만날 때마다 화포를 쏘는데 여러 배가 동시에 공격을 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고 적의 배는 그 속에서 수없이 불타고 침몰했다. 이때 적의 장수가 탄,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붉은 비단으로 두른 배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배 역시 거북선의 화포에 맞아 깨어졌다. 적의 군사는 모두 물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 뒤에도 여러 번 싸울 적마다 적은 순신에게 패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부산과 거제로 도망해서 다시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순신은 싸움을 지휘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날아오는 탄환彈丸이 순신의 왼편 어깨에 맞았다.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순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칼을 가져오라 해서 살을 갈랐다. 살 속에 두어 치나 깊이 박힌 탄환을 꺼냈다.옆에서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얼굴빛이 변하고 아연해 했으나,순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이야기하여 평상시와 같았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대완구포(大碗口砲)

 

『징비록』 권 1

 

及權應銖 復永川 晉率左道兵萬餘 進薄慶州城下 賊潛出北門 掩軍後 晉奔還安康 夜又使人 潛伏城下 發飛˚ 擊˚ 震˚ 天˚ 雷˚ 入城中 墜於客舍庭中 賊不曉其制 爭聚觀之 相與推轉 而諦視之 俄而 ?自中而發 聲震天地 鐵片星碎 中?卽斃者 三十餘人 未中者 亦顚? 良久而起 莫不驚懼不測其制 皆以爲神 明日遂擧衆棄城 遁歸西生浦 晉遂入慶州 得餘穀萬餘石 事聞 陞晉嘉善 應銖通政大任醴泉郡守

震˚ 天˚ 雷˚ 飛˚ 擊˚ 古無其制 有軍器寺火砲匠李長孫者創出 取震˚ 天˚ 雷˚ 以大˚ 碗˚ 口˚ 發之 能飛至五六百步 墜地良久 火自內發 賊最畏此物

 

권응수權應銖가 영천을 회복하자, 박진朴晉이 좌도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 성 밑까지 진병해 나갔다. 그러나 적은 북문으로 나와 진의 후군을 엄습했기 때문에 진晉은 하는 수 없이 안강安康으로 돌아갔다. 진은 그 밤으로 다시 성 밑에 군사를 잠복시켜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안에 대고 쏘니 객사客舍 마당에 떨어졌다. 적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다투어 모여들어 구경했다. 조금 있더니 폭탄이 속에서 저절로 터져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나면서 철편이 무수히 흩어지니, 여기에 맞아 즉시 죽은 자가 30여 명이요, 직접 맞지는 않았어도 놀라서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살아난 자들도 한참 만에 일어나서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 제도를 알지 못하니 모두 귀신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이튿날 드디어 모두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진은 경주 성안에 들어가 만여 석의 곡식을 얻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嘉善으로 올렸고, 응수는 통정 通政으로, 대임은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삼았다.

진천뢰란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군기시軍器寺의 화포장火砲匠으로 있는 이장손李長孫이란 자가 창안해 낸 것이다. 이것은 진천뢰를 대완구포大腕口砲21]로 쏘아서 5~6백 보밖에 떨어지게 하고, 땅에 떨어진 뒤 잠시 후에 저절로 터지게 만든 것으로, 적들이 가장 두려워했다.

 

21] 조선시대 화기(火器)의 한가지로, 가장 큰 화포(火砲)를 말한다.

 

 

조총(鳥銃) 대포(大砲) 만궁(彎弓) 화전(火箭) 도(刀) 삭(?) 총환(銃丸)

 

『징비록』 권 2

 

十二月初 惟敬又至 再入城中 留數日 更相約誓而去 所言不聞至是 兵至安州 下營於城南 旌旗器械 整肅如神 余請見提督白事提督在東軒許入 乃?然丈夫也 設椅相對 余袖出平壤地圖持示形勢兵所從入之路 提督傾聽 輒以朱筆點其處 且曰「倭但恃鳥˚ 銃˚ 耳 我用大˚ 砲˚ 皆過五六里 賊何可當也」

…… 時大軍 已到肅川日暮方下營做飯報至 提督彎˚ 弓˚ 鳴弦 卽以數騎 馳赴順安 諸營陸續進發 翌日朝進圍平壤 攻普通門?七星門 賊登城上 列?紅白旗拒戰 天兵以大˚ 砲˚ ?火箭˚ ˚ 攻之 ?聲震地 數十里間 山岳皆動 火˚ 箭˚ 布空如織 煙氣蔽天箭˚ 入城中 處處火起 林木皆焚 駱尙志 吳惟忠等 率親兵 蟻附登城前者墜 後者升 莫有退者 賊刀˚ ?˚ 下垂城堞如蝟毛 天兵戰益力 賊不能支 退入內城 斬戮焚燒 死者甚衆 天兵入城 攻內城 賊於城上爲土壁 多穿孔穴 望之如蜂? 從穴中銃˚ 丸˚亂發 天兵多傷 提督慮窮寇致死 收軍城外 以開走路 其夜賊乘氷過江遁去

 

그러던 중 12월 초에 유경이 다시 와 성안에서 수일을 머무르면서 그들과 회합하여 무슨 약속을 하고 가는 모양이었으나, 그 회담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고 있을 무렵 갑자기 중국 군사가 안주에 이르러 성 남쪽에 영을 치니 깃발과 병기가 정숙하여 마치 신神과 같았다. 나는 제독 이여송에게 할말이 있노라고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동헌東軒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데, 대해 보니 그는 헌헌한 장부였다. 의자에 마주 자리를 잡자, 나는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 놓고 지형이며 군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여송은 나의 설명을 열심히 들으며 내가 가리키는 곳마다 붉은 글씨로 표를 해두었다. 나의 말이 끝나자 그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병들이 믿는 것은 오직 조총 뿐이 아니겠소. 그러나 우리는 대포를 사용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포는 모두 5~6리는 가니, 적들이 조총으로 어찌 이를 당해 낼 수 있겠소?”

……… 이 때는 중국의 대군이 숙천肅川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윽고 날이저물자 그들은 영책에서 내려와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군사들이 진군을 멈추었다는 보고를 받은 제독은 활줄을 당겨 화살을 쏘아 시위소리를 내면서22] 수기數騎를 데리고 순안을 향해 달리는 것이었다. 이를 본 모든 영책의 군사들도 뒤따라 진병했다. 이튿날 아침에 대군은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普通門?칠성문七星門을 치니 적병은 성 위에 올라가 홍백기紅白旗를 내세우고 대항하였다. 이에 이편에서는 대포와 화전火箭으로 치니 그 소리는 땅을 울려 수십 리 사이의 산들이 모두 움직이는 듯 요란하였고, 화전이 비단처럼 공중에 날아 쏟아지니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화전이 성안에 떨어지자 곳곳마다 불이 일어나 수목이 모두 타고 있었다. 낙상지駱尙志와 오유충吳惟忠 등은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개미처럼 성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앞의 군사가 떨어지면 뒤의 군사가 올라 하나도 물러나는 자가 없다. 성안에는 적의 칼과 창이 마치 고슴도치 털처럼 벌려 섰건만 중국 군사는 더욱 힘써 싸우니 적들은 대적치 못하고 내성內城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 싸움에 칼에 맞고 불에 타 죽은 적병은 부지기수였다. 우리 군사는 다시 적의 뒤를 쫓아 내성으로 쳐들어갔다. 적들이 성 위 토벽에 구멍을 많이 뚫어놓아 마치 벌집과 같았다. 적들은 그 틈으로 총을 어지러이 쏘며 대항했다. 이 바람에 우리편 군사가 적의 총에 많이 상했다. 이를 본 제독은 궁한 적을 급히 치다가 오히려 우리 군사가 많이 상할까 걱정하여 성 밖으로 군사를 거두어 적의 달아날 길을 열어 주니, 그 밤으로 적들은 허겁지겁 얼음 위로 강을 건너 달아났다.

 

22] 화살을 쏨으로써 활에서 시위소리가 나는 것, 즉 군대에 진격하라는 신호를 하는 것이다.

 

 

기병(騎兵) 화기(火器) 단검(短劍) 인(刃)

 

『징비록』 2

 

時提督所領 皆北騎˚ 無火˚ 器˚ 只持短劍˚ ˚ 鈍劣 賊用步兵 刃˚ 皆三四尺 精利無比 與之突鬪 左右揮擊 人馬皆靡 無敢當其鋒者 提督見勢危急 徵後軍未至 而先軍已敗 死傷甚多 賊亦收兵 不急追

 

원래 제독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북쪽 기병騎兵이라, 화기火器는 없고 다만 짧은 칼만 가졌는데, 적은 보병을 써서 3~4척이나 되는 날카로운 긴 칼로 휘둘러 좌우로 치니, 인마가 모두 쓰러져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자못 형세가 위태롭게 된 제독은 후군後軍을 불렀으나 거느린 군사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 패하여 혹은 죽고, 혹은 상하는 자가 무척 많았다. 다행히 적들도 군사를 거두고 그 이상 급히 따르지 않았다

 

 

비루(飛樓) 시(矢) 석(石) 조총(鳥銃) 환(丸)

 

『징비록』 2

 

州城本四面據險 壬辰移東面 下就平地 至是 賊立飛˚ 樓˚ 八座 俯瞰城中 刈城外竹林 作大束 環列自蔽 以防矢˚ 石˚ 從其內 發鳥˚ 銃˚ 如雨 城中人不敢出頭 又千鎰所率皆京城市井召募之徒 千鎰又不知兵事 而自用太甚 且素惡徐禮元主客相猜 號令乖違 是以甚敗 惟黃進守東城 戰數日 爲飛丸˚ 所中死 軍人奪氣 而外援不至 適天雨城壞 賊蟻附而入 城內人 方束荊投石 極力禦之 賊幾? 千鎰軍守北門 意城已陷先潰 賊在山上 望見軍潰 一擁而登 諸軍大亂

 

진주성은 사면이 모두 험악한 곳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는데, 임진년에 동쪽으로 옮겨 평지에 쌓았던 것이다. 이때 적들은 비루飛樓23] 여덟 개를 세워 그 위에 올라가서 성안을 들여다보고, 한편 성 밖 대숲을 베어다가 커다랗게 묶어서 가려 세워 시석矢石을 막고, 그 안에서 조총을 비 오듯 쏘아댔다. 왜적들의 조총 소리에 성안 사람들은 감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또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는 전부가 서울 시정市井에서 모집한 무리들이요, 김천일 역시 군사의 일을 몰라 자기 멋대로24] 할 뿐 아니라, 더욱이 서예원과는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던 터여서 주객主客이 서로 시기하고 명령이 어긋나게 되었다. 이러고서야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황진만이 홀로 동쪽 성을 지키고 여러 날 싸우다가 총알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 광경을 본 군사들은 맥이 빠지고 용기를 잃었다. 게다가 구원병이 이르지 않자 사기는 더욱 저하되기만 했다. 설상가상 격으로 때마침 심한 폭우가 내려 성이 무너졌다. 이때를 놓칠세라, 적병들이 개미떼같이 몰려들어왔다. 성안 사람들은 힘을 합쳐 이를 나무로 막고 돌을 던져 막아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야 말았다. 한편 김천일은 북쪽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성안이 필시 함락되었으리라고 미리 짐작한 그의 군사들은 여기저기서 흩어져 버렸다. 산위에서 이 광경을 본 적병이 때를 놓칠세라 일시에 쳐 올라오니, 이로써 제군諸軍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23] 공성용(攻城用)의 높은 가설물(架設物). 성벽(城壁)에 기대어 놓고, 타고 올라가는데 썼다.
24] 남의 말은 듣지 않고서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대포(大砲) 조총(鳥銃) 승자소포(勝字小砲) 결진(結陣) 총(銃) 포(?) 장도(長刀) 인(刃)

 

『징비록』 2

 

有軍器寺破陣軍十二人 隨楊元入南原 皆被兵死 獨有金孝義者得脫 爲余道城陷事甚詳 楊總兵旣至南原 增築城一丈許 城外羊馬墻 多穿?穴 城門安大˚ 砲˚ 數三坐 鑿深濠塹一二丈 閑山旣敗 賊從水陸而至報甚急 城中洶洶 人民逃散 獨總兵所領遼東馬軍三千 在城內 總兵檄召全羅兵使李福男同守 福男遷延不至 連發夜不收催之 不得已乃至 而所率?數百 光陽縣監李春元 助防將金敬老等繼至

八月十三日 倭船鋒百餘 到城下放鳥˚ 銃˚ 頃刻而止 皆散伏田畝間 三三五五作隊 旣去復來 城上人 以勝˚ 字˚ 小˚ 砲˚ 應之 倭大陣在遠 出遊兵交戰 疏行迭出 故?發不能中 而守城卒 往往中賊丸斃 旣而 倭到城下 叫城上人求與語 總兵使家丁一人 挾通事往倭營 以倭書來乃約戰書也

十四日 倭環城三面結˚ 陣˚ 以銃˚ ??˚ 迭攻如前日 先是 城南門外 民家稠密 賊臨至 總兵使焚之 而石牆土壁猶在 賊來依牆壁間自蔽 放丸多中城上人

十五日 望見倭衆 刈城外雜草及水田中稻禾 作大束無數 積牆壁間 城中不測 時遊擊將軍陣愚衷 領三千兵在全州 南原軍日望來援 而久不至 軍心益懼 是日晩 守堞軍 往往交頭耳語 準備馬鞍 有欲遁色 夜一更 聞倭陣中 ?聲大起 略相應和 有運物狀 而一面衆? 向城亂放 飛丸集城上如雨雹 城上人縮頸 不敢外窺 經一二時 ?聲止草束已平濠 又推積羊馬牆內外頃刻與城齊 衆倭蹂躪登城 已聞城中大亂 云倭入城矣 孝義初撥守南門外羊馬牆 慌忙入城 城上已舞人 但見城內 處處火起 走至北門 唐軍悉騎馬欲出門 門堅閉不可易開 馬足如束 街路塡塞 旣而門開 軍馬爭門而出 倭兵在城外 圍?數三重 各守要路 奮長刀˚ ˚ 亂?之 唐軍?首受刃˚ 適月明得脫者無幾

 

군기시軍器寺에는 파진군破陣軍25] 12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양원楊元을 따라 남원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적군에게 죽었다. 홀로 김효의金孝義란 자가 빠져나와서 성이 함락되던 일을 나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양楊 총병總兵은 남원에 이르자 성을 한 길이나 증축增築했다. 성 밖에 있는 양마장羊馬墻에는 대포 구멍을 많이 뚫어 놓고 성문에는 대포 두세 개를 묻어 놓았다. 참호를 두길이나 깊이 팠다. 한산도가 패하자 적은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로 달려들어 왔다. 이 소식이 남원성에까지 들리자 성안의 인심은 몹시 흉흉해졌다. 드디어 백성들은 모두 도망해 흩어지고 말았다. 유독 총병이 거느린 요동遼東 마군馬軍 3천 명이 성안에 있을 뿐이었다. 총병은 격문을 보내어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을 불러 함께 지키자고 했다. 그러나 복남은 천연히 쉽게 오지 않았다. 밤에도 계속하여 사람26]을 보내자 부득이해서 왔으나 데리고 온것은 겨우 군사 수백 명밖에 없었다. 광양현감光陽縣監 이춘원李春元과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등이 계속하여 이르렀다.

8월 13일, 왜병의 선봉 백여 명이 성 아래에 이르러서 조총을 어지러이 쏘아대다가 이내 그치더니, 모두 흩어져 밭두둑 사이로 숨어 버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다시 삼삼오오 떼를 지어 갔다가는 다시 오곤 했다. 성 위에서는 우리 군사가 승자소포勝字小砲27]를 쏘았다. 그러나 왜병의 대진大陣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
다. 그들은 다시 유병遊兵을 내어 교전交戰케 하고, 병사들도 드문드문 교대로 내보냈으므로, 포를 쏘아도 잘 맞지 않았다. 그리나 성안에 있는 군사들은 적의 조총에 맞아 가끔 쓰러졌다. 이윽고 왜병은 성 아래에 이르렀다. 그들은 우리와 이야기 하자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총병은 하인 한 사람을 시켜 통역과 함께 왜영倭營으로 가보라 하였다. 왜영에서 가지고 온 편지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싸움을 약속하는 글이었다.

14일, 왜병은 지난번처럼 성을 삼면으로 포위하여 진을 치고 총을 쏘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성 남문南門 밖에는 민가가 몹시 조밀하게 있었는데, 적이 진군해 오자 총병은 이것을 모두 불살라 버려 오직 돌벽과 흙담만이 남아 있었다. 적들이 담과 벽에 몸을 숨기고 총을 쏘자 성안 사람들이 많이 맞았다.

15일, 성안에서 바라다보니 성 밖 잡초와 논에 있는 벼를 베에다가 다발을 커다랗게 수없이 묶고 있는 왜병들이 보였다. 적병들은 이것을 담과 벽 사이 여기저기에 쌓아놓았으나, 성안의 아군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즈음에 중국의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우충陣愚衷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있었다. 남원에서는 날마다 진우충이 와서 구원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오래 되도록 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군중의 인심은 더욱 흉흉한 참이었다. 이날 밤 늦게 성첩城堞을 지키던 군사들이 왕왕 서로 귀엣말을 주고 받으며, 말안장을 준비하는 꼴이 필시 도망할 기색인 것 같았다. 밤 초경쯤 되었다. 왜진 속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 운반하는 기미가 보이더니 성안을 향해서 총을 어지러이 쏘기 시작했다. 탄환이 성 위에 마치 우박처럼 쏟아지니, 성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내다보지도 못했다. 한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시끄럽던 소리가 차츰 그쳤다. 묶은 풀을 가져다가 참호를 메우고 또 양마장 안팎에 쌓아 올려 삽시간에 성 높이와 같게 하였다. 이에 왜병들은 맘대로 성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내 성안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효의는 처음에 빠져나와 남문 밖 양마장을 지키고 있다가 황망히 성에 들어가 보니, 성 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다만 성안 곳곳에 불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달려서 북문에 이르니 중국 군사들은 모두 말에 올라 성문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말발[馬足]을 묶어놓은 것같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군마軍馬가 앞을 다투어 나갔다. 그러나 왜병은 성 밖에서 두 겹 세 겹으로 포위하고 있는 터였다. 그들은 각각 요긴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긴 칼을 빼어 어지러이 갈기니 중국군사는 목을 늘여 칼을 받을 뿐 이었다. 때마침 달이 밝아 더구나 도망한 사람이라고는 몇이 되지 못했다.

 

25] 적군의 진지(陣地)에 돌격,격파할 수 있는 무술을 가진 군졸로 편성된 일종의 돌격대(突擊隊)이다.

26] 군중(軍中)을 정탐하는 병졸의 칭호다.
27] 화포(火砲)의 일종(一種). 총포(銃砲)의 명칭을 ?천자문(千字文)?의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써 순번(順番)을 매겼는데, 이 승자소포는 승리(勝利)의 뜻으로 승자(勝字)를 매겼던 것이다.

 

 

기병(騎兵) 보병(步兵) 철기(鐵騎) 총환(銃丸)

 

『징비록』 권 2

 

十二月 楊經理麻提督 領騎˚ ?步˚ 兵˚ 數萬 下慶尙道 進攻蔚山賊營時賊將淸正 築城於蔚山郡東海邊斗絶處 經理提督 乘其不意掩之 以鐵˚ 騎˚ 馳擊 賊披靡不能支 天兵奪賊外柵 賊奔入內城 天兵貪擄獲之利 不卽進攻 賊閉門固守 攻之不克 諸營分屯城下 圍守十三日 賊不出

二十九日 余自慶州 往見經理提督 望見賊壘甚靜暇寂無人聲 城上不設女牆 環四面爲長廊 守兵悉在其內 外兵若至城下 則銃˚ 丸˚ 亂發如雨 每日交鋒 天兵與我軍 死城下成積 賊船從西生浦來援 列泊水中如鳧雁

 

12월에 양楊 경리經理와 마麻 제독提督이 기병騎兵과 보병步兵 수만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내려가 울산에 있는 적의 영책을 쳤다. 이때 적장 청정은 울산 동쪽 해변의 험준한 곳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양 경리와 마 제독이 불의에 쳐들어가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으로 습격하니, 적은 견디지 못하고 바깥 성을 버린 채 내성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에 중국 군사들은 노획한 물건만을 수습하는 데 정신이 없을 뿐, 더 진공치 않았다. 적들은 그 사이에 성문을 굳게 닫고 고수하니, 중국 군사가 아무리 공격해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중국 군사 진영에서는 소규모 부대를 내어 성밑을 포위하고 지켰다. 이런지 13일이 지났는데도 적들은 여전히 성 밖에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9일, 나는 경주에서 떠나 경리와 제독을 만나본 다음, 적의 보루를 바라다보니 몹시 한가로워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었다. 성 위에는 성가퀴도 설치하지 않고, 다만 사방으로 줄행랑을 만들어 군사들은 모두 그 안에서 지키고 있었다. 밖에서 아군이 혹 성 밑에 이르고 보면 총알을 비 오듯 쏘아 날마다 싸우는데,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가 수없이 죽어갔다. 적의 배는 또 서생포酉生浦로부터 와서 후원했다. 그들은 물 위에 마치 오리처럼 줄을 지어 정박하였다.

 

 

궁(弓) 시(矢) 선사(善射) 무거(武擧) 무과(武科)

 

『징비록』 권 2

 

舜臣少時英爽不覇 與群兒戱 削木爲弓˚ 矢˚ 遊理閭中 遇不如意者欲射˚ 其目長老或憚之 不敢過門 及長善˚ 射˚ 從武˚ 擧˚ 發身 李氏世業儒 至舜臣始得武˚ 科˚ 補權知訓鍊院奉事

 

순신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씩씩하여 아무도 속박을 할 수가 없었다. 여러 동무들과 놀 때에도 나무를 깎아 활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면 그 사람의 눈에대고 활을 쏘려 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어른들도 이를 꺼려 그 집 문 앞을 잘 지나 다니지 못했다 한다. 차차 장성하자 과연 활쏘기를 잘해서 무과武科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문관文官이었는데, 유독 그만이 무과에 올라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에 보직되었다.

 

 

 

기계(器械) 조총(鳥銃) 궁(弓) 시(矢) 사수(射手) 창(槍) 도(刀) 기효신서(紀效新書) 석(石)

사(射) 포(砲) 방포(放砲) 대포(大砲) 철환(鐵丸) 포환(砲丸) 운제(雲梯) 충차(衝車) 봉(鋒)

창(槍) 갑(甲) 진(陣) 철환(鐵丸) 진법(陣法) 검(劒) 낭선(??) 화약(火藥)

 

『징비록』 녹후잡기

 

…… 昔?錯上言兵事曰「用兵臨戰 合刃之急有三 一曰得地形 二曰卒服習 三曰器用利 三者 兵之大要 而勝負之所決 爲將者不可不知也」倭奴習於攻戰 而器˚ 械˚ 精利 古無鳥˚ 銃˚ 而今有之 其致遠之力 命中之巧 倍?於弓˚ 矢˚ 我若相遇於平原廣野 兩陣相對以法交戰 則敵之極難 蓋弓˚ 矢˚ 之技 不過百步 而鳥˚ 銃˚ 能及於數百
步 來如風雹其不能當必矣 然先擇地形 得其山?險阻 林木茂密處 散伏射˚ 手˚ 使賊不見其形 而左右俱發 則彼雖有鳥˚ 銃˚ ?槍˚ ?刀˚ 皆無所施 而可大勝也

…… 城者 禦暴保民誌所 當以堅固爲主 古人言城制 皆曰雉 所爲千雉白雉者是也 余平時 讀書鹵? 不知雉爲何物 每以?當之 嘗疑?但千百 則其城至小 不能容衆 將何以哉 及變後 始得 戚繼光紀˚ 效˚ 新˚ 書˚ 讀之 乃雉非? 卽今之所謂曲城甕城者也 蓋城無曲城甕城則雖人守一? 而?間立盾 以遮外面矢˚ 石˚ 賊之來傳城下者 不可見而禦之也

紀效新書 每五十?置一雉 外出二三丈 二雉間相去五十? 一雉各占地二十五? 矢˚ 力方盛 左右顧眄 便於發射˚ 敵無緣來附城下矣 壬辰秋 余久留安州念賊方在平壤 若一朝西下 則行在前面 無一遮障處 不量其力 欲修安州城而守之 重陽日 偶出晴[淸]川江上 顧視州城 ?坐深念者久之 忽思得一策 城外當從形勢 別築凸城如雉制 而空其中 使容人 前面及左右 鑿出砲˚ 穴 可從中放˚ 砲˚ 上建敵樓 樓相距千步以上 大˚ 砲˚ 中藏鐵˚ 丸˚ 如鳥卵者數斗 賊多集城外 砲˚ 丸˚ 從兩處交發 無論人馬 雖金石無不?碎 若是則他堞雖無守只使數十人 守砲壘而敵不敢近矣 此實守城妙法 其制雖倣於雉 而功勝於雉萬萬矣蓋千步之內 敵旣不敢近 則所謂雲˚ 梯˚ ?衝˚ 車˚ 者 皆不得用

…… 壬辰四月 賊連陷內郡 我軍望風潰散 無敢交鋒˚ 者 備邊司諸臣 日聚闕下 講備禦之策 而無以爲計 或建議曰「賊善用槍˚ ?刀˚ 我無堅甲˚ 可禦 故不能賊 當以厚鐵 爲滿身甲˚ 長不見物 被入賊陣 則賊無隙可刺 而我可勝矣」衆曰然 於是大聚工匠 晝夜打造 余獨以爲不可曰「與賊鬪 雲合鳥散 貴於捷疾 旣被滿身厚甲˚ 其重不可勝 身且不能運 何望殺賊」數日 知其難用遂罷 又臺諫 請見大臣言計 其中一人 盛氣斥大臣無謀 座上問有何策 對曰「何不於漢江邊 多設高棚使賊不得上 而俯射˚ 之耶」或曰「賊之鐵˚ 丸˚ 亦不得上耶」其人無於而退 聞者傳以爲笑

…… 癸巳夏 余病臥漢城墨寺洞 一日 天將駱尙志 訪余于臥次 問病甚勤 因言「朝鮮方微弱 而賊猶在境上 鍊兵禦賊 最爲急務 宜乘此天秉未回 學習鍊兵法 以一敎十 以十敎百 則數年間 皆成精鍊之卒可以守國」余感其言 卽馳啓于行在 因使所帶禁軍韓士立 招募京中得七十餘人 往駱公處請敎 駱撥帳下曉陣˚ 法˚ 張六三等十人 爲敎師日夜鍊習槍˚ ?劒˚ ??˚ ?˚ 等技

……未久得數百千人 立把摠哨官 分部領之又欲敎鳥˚ 銃˚ 而無火˚ 藥˚ 有軍器寺匠人大豊孫者 以入賊陣 多煮火˚ 藥˚ 與賊 囚江華 將殺之 余特貸其死 令煮焰?贖罪 其人感懼 爲之盡力 一日所煮 幾十斤 逐日分諸各部 晝夜習放 第其能否 而賞罰之 月餘能中飛鳥 數月後 與降倭及南兵之善鳥˚ 銃˚ 者 相較 無不及 而或過之 ……

 

…… 옛날 조조?錯28]는 임금에게 병사兵事를 이렇게 말했다. “군사를 쓰고 싸움에 임해 싸우는 데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형地形을 얻을 것, 둘째는 군사들이 명령에 복종할 것, 셋째는 병기는 좋은 것을 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군사를 쓰는 대요大要인 동시에 승부가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니 장수된 자가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왜병은 공격 하는 싸움에도 익숙하고 병기도 정밀했다. 옛날에 없던 조총烏銃이 있었으니, 그 멀리 가는 힘과 명중命中하는 것이 화살보다 배가 더하다. 우리 군사와 만일 넓은 들판에서 만나 양진兩陣이 서로 대해서 법도대로 교전한다면 그들을 대적하기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대개 우리가 쓰는 활이란 백 보步밖에 못 가는데 조총은 수백 보를 나간다. 그런데다가 바람 속에 우박처럼 쏟아지니 그것을 저당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먼저 지형地形을 골라서 산골짜기 험한 곳과 수목이 우거진 곳에 미리 활 쏘는 군사를 매복시켜, 적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있다가, 좌우에서 한꺼번에 활을 쏘고 보니 저들에게 비록 조총이나 창槍과 도刀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쓸 사이도 없이 크게 이겼던 것이다.

…… 성城이란 것은 도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곳이므로 마땅히 견고堅固함을 주로 하는 것인데, 옛날 사람이 성의 구조構造를 말할 적에 모두 치雉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이른바 천치千雉, 백치白雉라는 것이 이것이다. 나는 평상시에 조솔粗率하게 글을 읽었으므로 치가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하고, 매양 살받이터[?]가 이에 해당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으나, 일찍부터 의심하기를, 살받이터가 다만 천개, 백개 뿐이라면, 그 성은 매우 작아서 능히 여러 사람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니, 대체 어떻게 쓰겠는가 했는데, 왜변이 일어난 후에 비로소 척계광戚繼光29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어서 읽고는 그제야 치雉가 살받이터가 아니라 곧 지금의 이른바 곡성曲城30?옹성甕城31]이라는 것임을 알았다. 대개 성은 곡성?옹성이 없다면 비록 사람마다 한 살받이터를 수비하고 살받이터 사이에 방패를 세우고 외면外面에서 오는 화살과 돌을 가려 막더라도, 적군이 성밑에 와서 붙은 것은 이를 보고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효신서』에 의하면 50타? 마다 1치雉를 두어 밖으로 2, 3장丈이나 나오게 하였는데 2치 사이의 거리는 50탕이며 1치가 각각 25타를 점령하게 되니, 화살의 나가는 힘이 한창 강하고 좌우로 돌아보면서 쏘기가 편리하므로 적군이 성 밑에 와서 붙을 수가 없게 된다. 임진년 가을에 나는 안주安州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나는 생각하기를 적군이 지금 평양에 있으니 만약 단시일에 서쪽으로 내려온다면, 행재소行在所의 전면에는 한 곳도 가로막을 곳이 없으므로, 그 힘은 헤아리지 못한 채로 우선 안주성安州城을 수축하여 이것을 지키고자 하였다. 중양일重陽日32]에 우연히 청천강淸川江 가에 나가서 주성州城을 돌아보고, 잠잠히 앉아서 깊이 생각한지 한참 만에 문득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었으니 성밖에 지세地勢를 따라서, 별도로 뾰족하게 나온 성을 치의 구조와 같이 하여 쌓고, 그 속은 비워서 사람을 수용하도록 하며 전면과 좌우에 포혈砲穴을 뚫어내어 그 안에서 포를 쏘게 하고 위에는 마주 보는 누樓를 세우되 누의 상거相距는 천여 보 이상이 되도록 하며 대포 속에는 새알과 같은 탄환을 서너 말이나 넣어 두었다가 적군이 성 밖에 모여들 때에 대포의 탄환을 두 곳에서 번갈아 발사하면, 사람과 말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쇠와 돌이라도 가루가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 같이 되면 다른 성가퀴[堞]에는 비록 수비하는 군사가 없더라도 다만 수십 명 만으로 포루砲壘를 지키게 되어서 적군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실상 성을 지키는 기묘한 방법이므로, 그 구조는 비록 치雉를 모방했지만 공효功效는 치보다 만 배나 나을 것이다. 대개 천보千步안에 적군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한다면 이른바 운제雲梯?충차衝車33]라는 것도 모두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 임진년 4월에 적은 연달아 여러 고을을 함락시켰으나, 우리 군사는 쉽게 무너져 감히 교봉交鋒하지도
못했다. 비변사의 모든 신하들은 날마다 귈하로 모여들어서 적을 막아낼 방책을 강구했으나 아무런 계교도 나서지 않았다. 그 중 이런 것이 건의됐다. “적들은 창槍?도刀를 잘 쓰는데 우리는 이것을 막아낼 굳센 갑옷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적을 대적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두꺼운 쇄로 갑옷을 만들어 온몸을 감추고 적진에 들어가면 적들은 찌를 데가 없을 것이니 이렇게하면 이길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여러 공장工匠들을 동원시켜 주야로 쇠를 두드려 갑옷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이것을 반대했다. “적과 싸우는 데는 구름같이 모여들고 새처럼 흩어져, 동작이 빠른 것이 제일이다. 그런데 온몸에 두꺼운 갑옷을 입으면 그 무게를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또 물건도 운반할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적을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말했더니 여러 사람들이 과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중지했다. 또 대간臺諫이 대신大臣을 만나 계교를 말하려 했는데, 대신 중 한 사람이 성을 내어 대신들에게 무모하다고 배척했다. 그러나 좌중에서는 그에게 무슨 방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강 가에 높게 목책木柵을 쌓아 적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밑에 엎드려서 활을 쏘면 이길 것이 아닙니까?” 어느 한 대신이 물었다. “적의 총알도 목책을 뚫지 못한단 말인가?” 이 물음에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물러나갔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던 사람들은 모두 웃고 말았다.

…… 계사년 여름에 나는 병으로 서울 묵사동墨寺洞에 누워 있었다. 어느 날 중국 장수 낙상지駱尙志가
나를 찾아와 간곡히 문병했다. 이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군사는 미약한데 적은 아직도 국경에 머무르고 있으니, 군사를 조련해서 적을 막는 것이 가장 급무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중국 군사가 돌아가기 전에 군사 조련하는 방법을 배웠다가, 하나가 열 명을 가르치고, 열 명이 백 명을 가르치게되면 수 년 안에 모두 조련한 군사가 되어 가히 나라를 지킬 만할 것입니다” 나는 이 말에 몹시 감동했다. 즉시 임금이 계신 곳으로 글을 보냈다. 금군禁軍 한사립韓士立을 시켜 서울에서 사람 70여 명을 데리고 낙상지에게로 가서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낙상지는 자기 부하 중에 진법을 아는 장육삼張六三 등 열명을 교관으로 삼아 창?칼?낭선34] 쓰는 기술을 가르쳤다.

…… 머지않아 그는 힘센 사람 수천 명을 얻어 데리고 와서 파총把摠35]과 초관哨官36]에게 맡겨 그 속에 분류하여 배치하게 했다. 또 그들에게 조총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화약이 없었다. 때마침 군기시에 있는 공장工匠 대풍손大豊孫이란 자가 적진에 들어가서 화약을 구워 적에게 주었다고 해서 강화로 잡혀 와서 죽게 되었다. 나는 특별히 그를 용서해 주고 그 대신 화약을 만들라고 시켰더니, 그는 몹시 감동하여 진력해 일을 해서 하루에 수십 개를 구워 냈다. 이것을 날마다 각부各部에 나누어 주어 주야로 조총 쏘는 법을 조련시켜 잘하고 못하는 것을 보아 상벌을 분명히 했다. 한 달이 되자 이들은 나는 새도 쏘아 맞추고, 두어 달 뒤에는 항복받은 왜병이나 남방의 조총 잘 쏘는 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었다. ……

 

28] 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 사람.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의 형명학(形名學)을 배워서 문제(文帝) 때에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고 경제(景帝) 때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 더욱 중용(重用)되었다. ?중국인명사전?

29] 명(明) 나라 세종(世宗) 때의 명장(名將). 자는 원경(元敬)이다. 가정(嘉靖) 연간(年間)에 절강참장(浙江參將)으로서 강서(江西)?복건(福建)을 침범(侵犯)한 왜구를 토평(討平)해서 전공이 특출하여 복건총독(福建總督)에 승진되고 위명(威名)이 남방(南方)에 떨쳐져서 사람들이 ‘척가군(戚家軍)’ 이라 불렀다. 시호는 무의(武毅)이고 저술은 『기효신서(紀效新書)』, 『무비신서(武備新書)』등 병법에 관한 명저가 있다.
30] 성문(城門)을 밖으로 둘러 가려서 곱게 쌓은 성벽(城壁)
31] 큰 성문 밖의 작은 성(城). 원형(圓形) 또는 방형(方形)으로 성문 밖에 부설하여 성문을 보호하고 성(城)을 튼튼하게 지키기 위하여 만들었다.
32] 음력 9월 9일을 말한다.

33] 운제(雲梯)는 높은 사닥다리이고 충차(衝車)는 대철(大鐵)로써 견고한 장치를 한 병거(兵車)이다. 모두가 공성용(攻城用)의 기구이다.

34] 가지가 붙은, 대나무 자루로된 창으로 명(明) 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처음 사용하였다.
35] 각 군영(軍營)의 종4품 무관벼슬이다.
36] 각 군영(軍營)의 위관(尉官)의 하나. 군대 1초(哨)를 거느리는 종구품의 무관이다.

 

 

만궁(挽弓) 대포(大砲) 화전(火箭) 조총(鳥銃)

 

『징비록』 임진왜란 관련기사

 

記壬辰以後請兵事

時大軍已到肅川 日暮方下營做飯 報至 提督挽˚ 弓˚ 鳴弦卽以數騎馳赴順安 諸營陸續進發 明日早朝 進圍平壤 攻普通門七星門 賊於城上 列竪白紅旗拒戰 天兵以大˚ 砲˚ ?火˚ 箭˚ 攻之 砲聲震地煙焰漲天 駱尙志?吳惟忠等 率親兵 蟻附而登 墮而復升 莫有退者賊刀˚ ?下垂城堞如蝟毛 天兵戰益力 賊不能支 退入內城 斬戮焚燒死者甚衆 天兵入城 攻內城 賊於城上 爲土壁 預穿孔穴 鳥˚ 銃˚ 亂發天兵多傷 提督慮窮寇致死 收軍城外 以開歸路 其夜賊過江遁去

 

임진년 이후 중국에 청병請兵한 사실을 기록하다.

이때 명나라 대군이 벌써 숙천肅川에 도착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진영을 치고 밥을 짓고 있던 중에 왜적을 죽인 보고가 전달되었다. 제독이 활에 화살을 먹여 당겨서 시위 소리를 울려 진격의 신호를 하고 곧 몇 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순안을 향해 달리니 여러 진영의 군사들이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나아가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치니 적병은 성 위에 올라 흰 깃발과 붉은 깃발을 세우고 막아 싸웠다. 명나라 군사는 대포와 화약 연기는 하늘까지 꽉 차 있었다.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등은 자기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개미떼처럼 성에 붙어 오르는데 성에서 떨어지면 다시 또 올라가서 퇴각하는 군사가 없었다. 적병의 칼과 창이 성가퀴[堞]에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워져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는 더욱 힘차게 싸우니 적병은 능히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나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는데 칼날에 베이고 불에 타서 죽은 군사가 매우 많았다. 명나라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가 내성을 공격하니, 적병은 내성 위에 토벽土壁을 쌓고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그 구멍 틈에서 조총을 함부로 쏘아대니 명나라 군사가 많이 상하였다. 제독은 궁지에 빠진 적병이 죽을힘을 다해서 저항할까 염려하여 군사를 거두어 성 밖으로 나가서 적군이 달아날 길을 열어주니 그날 밤에 적군은 강37]을 건너서 멀리 도주하였다.

 

37] 대동강(大同江)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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