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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2.12.09)] / 갇힌 자 된 바울(이장우 목사) from 우림과둠밈 on Vimeo.
[주일설교(12.12.09)]
/ 갇힌 자 된 바울(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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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12.12.09]
/ 사사기 3장(이장우 목사)
[주일오후설교(12.12.09] / 사사기 3장(이장우 목사) from 우림과둠밈 on Vimeo.
에베소서 3:1~6 갇힌 자 된 바울 2012. 12. 9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1절을 봅니다. “이러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앞의 내용을 이어받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므로”라는 앞의 내용을 알아야 뒤의 내용이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이러므로”앞에 무슨 내용이 있었습니까? 2012년 3월 18일부터 에베소서를 시작하였습니다. 9개월 동안 에베소서에 대한 말씀 중에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우리는 소설을 보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은 기억을 잘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데 성경말씀은 5분도 할 것이 없습내다. 그런데 세상의 이야기는 다섯 시간을 해도 끝이 없지요! 생존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끝도 없는데 생명에 관한 이야기는 할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지금 바울사도는 “이러므로” 라고 하면서 연결하는 말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과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자신이 큰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일과 이방인을 위하여 갇혔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갇힌 이유가 무엇인지 바로 앞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2:11~22절입니다. “봉독”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새사람을 만들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왜 감옥에 갇힐 일입니까?
사도행전 21장에서 25장까지 보면 바울사도가 이방인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가지고 이방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도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바울이 데리고 온 이방인을 보고 무리를 충동하여 이방인으로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소동이 일어나자 로마의 천부장이 와서 바울을 구하여냅니다. 그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허락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간증을 합니다. 이 간증은 자신이 바리새인이었으며 스데반을 죽일 때에 함께 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던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과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하자 더욱 죽이려고 하고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40명의 결사 단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하는 수 없이 로마의 황제 가이사 에게 상소를 합니다. 그 전에 바울은 벨릭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이들이 심문을 해보니 로마에 대한 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상소를 하지 않았다면 풀려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죄수가 되어 로마까지 가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었으며 또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0~11절입니다.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소동을 일으킨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 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로마는 이방인 지역의 심장부입니다. 이곳에 가라고 분명히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지으시고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왜 이런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조금 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다시 에베소서 3:1절을 봅니다. 지금 번역은 ‘개역개정’인데 이전에 ‘한글개역’은 이렇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개역개정에는 문장을 연결하기 위하여 덧붙인 말이 “말하거니와”입니다. 그래서 이 글씨는 덧붙였다고 작은 글씨로 표시하였습니다. 이 문장을 보면 동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줄임표만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어디로 연결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에베소서 3:14절로 연결이 되어야합니다. 제가 연결하여 읽어보겠습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로 연결되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일과 이방인을 위하여 감옥에 갇혔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일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3:16~21절을 봅니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말하는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그 사람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알도록 기도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속사람이 강건하여지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고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에는 감옥에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너무나 다른 내용들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가 잘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도 1절에서 기도를 시작하면서 이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과 충만함과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말하기 전에 갑자기 다시 한 번 더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2-4절을 보면 그것을 읽으면 즉 에베소서 3장의 앞부분을 읽으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비밀이 교회에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처소라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감옥에 갇혔기에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3: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이 당하는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것이 너희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이 무슨 영광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라는 전도를 받거나 또는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들을 때에 제일 많이들은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또 교회에서 전도훈련을 받은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부인이며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고 배웠습니까? 또는 그런 전도를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잘 된다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전도를 받고 교회로 왔기에 교회에서 무엇을 챙기려고 하겠습니까? 내가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하여 교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런 마음이 들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어보니 이렇게 저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을 받고 예수님을 잘 못 믿으면 세상에서 실패하고 고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온갖 간증들을 수집하여 당근과 채찍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1:12~14절입니다.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빌립보서도 에베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보낸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지만 복음을 갇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해야 복음이 잘 증거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에 진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또 많은 형제들이 바울의 매임을 보고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빌립보서 1:28~29절입니다.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은 멸망의 증거가 되고 복음으로 핍박받는 자들은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결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훨씬 많은 자들이 복음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런 대적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 은혜란 두 가지입니다. 예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도 은혜이지만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사도는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쉬운 비유로 말하면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고난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며 감사로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겨우 교회로 모이는 것과 아주 작은 봉사조차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10~12절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의 죽으심을 본받기 위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붙잡은 예수라면 나의 이익을 위하여 붙잡은 다른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붙잡혔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요?
이어지는 17~21절을 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주의 종이라고 하는 자들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무엇을 위하여 사역을 하는지 눈여겨 보시기바랍니다. 그 영광이 땅의 영광인지 하늘의 영광인지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베드로전서 2:19~25절을 봅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서4:12~19절도 봅니다. “봉독”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증거가 무엇입니까?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일오후설교(12.12.09]
/ 사사기 3장(이장우 목사)
사사기 3:1~11 2012. 12. 9
3:1~6.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하여 가나안 원주민을 남겨두셨다고 합니다.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 전쟁을 통하여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아니하는지 알고자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험을 하셔서 알고자 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얼마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을 그들의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만나사건에서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안식일에 거두러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안식일에 거두러 갔습니다. 마실 물이 없었을 때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신명기 8: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테스트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10번이나 거역하였다고 합니다(민14:22). 열 번이란 늘 거역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스라엘에게 다시 시험하시는 것은 그들의 불순종을 알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게 하시는 장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쫓아내지 아니한 가나안 원주민들과 함께 섞여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고 합니다. 혼합이 되어버렸습니다. 노아 홍수가 일어난 것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은 대로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네피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장부입니다. 오늘날의 영웅입니다. 명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원주민과 왜 결혼을 하였을까요? 세상이 주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7~11.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합니다.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세상을 다 감찰하십니다. 말과 행위와 마음의 생각까지 다 감찰하십니다(시139편). 그러므로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를 잊어버렸기에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잊어버렸기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십니다.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 붙여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적들이 이스라엘의 손에 붙여져야 하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팔년을 이방의 왕을 섬기게 됩니다. 그 고역을 인하여 부르짖습니다. 이들이 부르짖은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어겼다는 철저한 회개로 인한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단지 고통으로 인하여 부르짖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 구원자를 세워서 구원하십니다.
그 구원자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은 갈렙의 사위이기도 합니다(삿1:13). 사사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10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싸웁니다. 여호와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넘겨주심으로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붙여주시는 전쟁입니다. 옷니엘이 승리함으로 그 땅이 사십년을 평온합니다. 사사기의 패턴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배교, 징계, 고난, 부르짖음, 구원, 안식입니다. 반역과 고역의 시간보다 구원의 시간이 훨씬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시편 30:5절입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이스라엘의 첫 사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 아닌 겐 족속의 사람이 구원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사사가 겐 족속이라는 것은 장차 나타날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외부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으로 오시지만 그 근원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사사기를 통하여 왜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르는지를 더욱 생생하게 맛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