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RSHAL OF VICTORY pp.56-60
After making our acquaintance, the schoolmaster assigned us to our seats, placing the girls on the left and the boys on the right. I wanted to sit at the same desk as Alexei, but the teacher said that since Alexei did not know a single letter as yet and was small he would have a seat up front, while I was put at the back. After school Alexei told me he would try to learn the alphabet quickly so that we could sit together. But that never came to pass. He was invariably at the bottom of the class and was often detained after hours for not knowing his lessons. Being a very docile sort of chap, he was never sore at his teachers.
얼굴을 익힌 뒤에 교사는 여자 아이들은 왼쪽에 남자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자리를 지정하여 주었다. 나는 알렉세이와 같은 책상에 앉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알렉세이가 아직 글자도 모르고 키도 작아서 앞자리에 앉을 것이며 나는 뒷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수업이 끝난 후 알렉세이가 알파벳을 빨리 배우겠다고 내게 말해서 우리는 같이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반에서 바닥을 기었고 그가 배운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수업 후에도 자주 남아야 했다. 매우 온순한 부류의 아이여서 그는 결코 선생님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Our schoolmaster was Sergei Nikolayevich Remizov, a fine person and an experienced teacher. He never punished anyone without reason and never raised his voice. He was respected and obeyed by his pupils. His father was a priest, a very quiet and kind old man who taught us scripture.
우리 선생님 세르게이 니콜라이예비치 레미조프는 인품이 좋고 경험이 많은 교사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이유 없이는 결코 벌을 주지 않았고 목소리를 높인 적도 없었다. 그는 그의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학생들은 그에게 순종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매우 조용하고 친절한 노인이었다.
Sergei Nikolayevich and his brother, Nikolai Nikolayevich, a doctor, were atheists and attended church services merely for appearances’ sake. The two brothers sang in the church choir. Alexei and I both had good voices and were included in the school choir.
의사인 세르게이 니콜라이예비치의 형제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는 무신론자이면서 예배에는 명목상으로만 참석하였다. 두 형제는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였다. 알렉세이와 나는 모두 목소리가 좋았고, 학교 합창단에 속하였다.
All the boys from our village were moved up to the second form with good marks; all except Alexei, who despite our collective assistance, flunked scripture.
우리 모두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성경과목에 낙제한 알렉세이를 뺀 우리 동네의 아이들 모두는 좋은 성적으로 2학년이 되었다.
My sister also failed and stayed in form two for a second year. Our parents resolved that it would be better for her to quit school entirely and look after the house. Masha cried bitterly, arguing that she was not to blame, that she was not promoted because she had missed many lessons caring for our kid brother Alexei when Mother was carting. I stood up for my sister, stating that though the parents of the other children were also working, none of them took their children away from school, and that all my sister’s playmates would be continuing school. Eventually, Mother gave in, making my sister very happy. I was also glad for her.
내 여동생도 실패해서 2년 동안 2학년에 머물렀다. 우리 부모님들은 그녀가 학교를 완전히 그만두고 집안을 돌보는 것이 더 낫겠다고 결심하였다. 마샤는 어머니가 수레를 끄는 동안 어린 동생 알렉세이를 돌보느라 많은 수업을 빼먹어서 승급하지 못한 것이 그녀 탓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무척 슬프게 울었다. 나는 내 여동생을 위해 일어나 다른 아이들의 부모들도 일하고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았으며, 내 여동생의 놀이친구들은 모두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이라고 연설을 하였다. 어머니는 항복하였고 내 여동생은 행복하게 되었다. 나도 그녀 때문에 기뻣다.
We were sorry for Mother. Though we were still children we knew that she was having a very hard time of it. Besides Father, who was in Moscow to earn some money, sent us very little, and that irregularly. Previously, he had been able to send us two or three roubles a month, but of late he would send no more than a rouble now and then or even less. The neighbours told us that everyone in Moscow was drawing paltry pay nowadays.
우리는 어머니에게 죄송하였다. 우리는 아직 아이들이었지만 어머니가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편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었던 아버지는 아주 적은 돈만을 보냈으며, 그것도 불규칙했다. 예전에 그는 한 달에 2-3루블을 우리에게 보낼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자주 1루블 이상이나 그보다 적게도 보내지 못했다. 이웃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요즘은 변변찮은 임금을 받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In late 1904 Father came home. My sister and I were happy and expected him to give us presents he had brought from the city. But our hopes were dashed. Father had come home after twenty days in hospital, following an appendectomy, and had had to borrow his fare home.
1904년 말에 아버지가 집으로 왔다. 내 여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도시에서 산 선물을 우리에게 줄 것이라는 기대로 행복하였다. 하지만 우리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아버지는 집에 온 후 20일 동안 병원에 있었고, 맹장수술 후에 집까지 오는 차비를 빌려야 했다.
Father was respected by his fellow-villagers. They always heeded his advice. At village assemblies he usually had the last say. I adored Father and he spoiled me. Still, now and again he punished me for some fault, taking it out on me with his belt and demanding an apology. I was stubborn and no matter how hard he thrashed me I bit my lips and never asked for pardon.
아버지는 마을의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그의 충고에 주의를 기울였다. 마을회의에서 그는 항상 마지막에 발언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흠모하였고 그는 나를 응석받이로 키웠다. 그럼에도 가끔은 어떤 잘못에 대해서 그는 내게 벌을 주었고 그의 허리띠를 꺼내 그것으로 내게 사과를 요구하였다. 나는 고집이 세었고 그가 아무리 때려도 나는 입술을 깨물고 결코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One day he gave me such a flogging that I ran away from home and spent three days hiding in a neighbour’s hemp field. Only my sister knew where I was. She kept my hiding-place a secret, and brought me things to eat. My parents hunted high and low for me but did not find me. Then a neighbour stumbled on me and took me home. Father gave me one more licking, then took pity and pardoned me.
하루는 아버지가 내게 매질을 했고 나는 집에서 도망을 나와 이웃의 삼밭에서 3일 동안 숨어서 지냈다. 내 누이동생만이 내가 있는 곳을 알았다. 그녀는 내 은신처의 비밀을 지켰고 내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다. 내 부모님은 아래위로 나를 찾아 다녔지만 나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한 이웃이 우연히 나를 발견해서stumbled on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아버지는 내게 한 번 더 졌고licking, 그리고는 나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었다.
I remember how one day, when Father was in a good mood, he took me to have tea with him at the tavern in the neighbouring village of Ogub. The proprietor, Nikifor Kulagin, the rich man of the village, also kept a grocery store. The menfolk and the young chaps were fond of congregating there to discuss the news, play a game of cards or lotto, or have a drop, whether there was occasion for it or not.
나는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셨던 어느 날 이웃 마을인 오굽Ogub의 선술집에 차를 마시러 나를 데리고 갔던 것을 기억한다. 그 주인 니키포 쿨라긴은 마을의 부자였고 식품점도 운영하고 있었다. 남자들과 어린 녀석들은 그곳에 모여서 뉴스에 관해 토론하거나 그것이 되든 말든 카드게임이나 숫자 맞추기 게임lotto, 또는 한 잔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I liked having tea at the tavern with the grownups who told so many things about Moscow and St. Petersburg. I said to Father I would always keep him company when he went there so I could listen to grownup talk.
One of the waiters at the tavern was my godmother’s brother Prokhor. He had a lame leg and everybody called him Limping Proshka. He was an avid hunter, however, shooting ducks in summer and hares in winter: the neighbourhood abounded with them at the time.
나는 모스크바와 성 페테르부르크에 관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 어른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이 좋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그곳에 갈 때 나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항상 그와 함께 있겠다고 말하였다. 선술집 급사중의 한 명이 나의 대모의 형제 프로호르였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절었고 다들 그를 절름발이 프로시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열정적인 사냥꾼이어서 여름에는 오리를 쏘았고 겨울에는 산토끼를 쏘았다. 그때에는 이웃이 그것들로 가득하였다.
Prokhor took me with him pretty often. I was jubilant, and especially so when he bagged a hare I had flushed. We went to the Ogublyanka or the lake. Prokhor never missed and it was my job to retrieve the ducks from the water. I still love hunting. Possibly, it had been Prokhor who taught me to love it.
프로호르는 나를 꽤나 자주 데리고 다녔다. 나는 의기양양했고 특히 그가 토끼를 잡을 때 나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우리는 오구브리양카나 호수로 갔다. 프로호르는 실수가 없었고 물에서 오리를 찾아오는 것이 내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사냥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것을 사랑하도록 가르친 것은 프로호르일 것이다.
Father soon went to Moscow again. Before he left he told Mother that factory workers in Moscow and St. Petersburg, driven to desperation by unemployment and ruthless exploitation, were going on strike more and more often.
“Better keep out of it,” Mother said, “or else the cops’ll have you!”
“With us workers,” Father replied, “it’s one for all and all for one.”
For a long time we heard nothing from him and were terribly worried.
Soon we learned that in St. Petersburg on January 9, tsarist troops and the police had shot a peaceful procession of workers who had come to ask the tsar to grant them better conditions.
아버지는 곧 다시 모스크바로 갔다. 그는 떠나기 전에 어머니에게 실업과 가혹한 착취로 절망적인 상황에 내 몰리고 있는 모스크바와 페테스부르크의 공장노동자들은 점점 더 자주 파업을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에 관련되지 않는 것이 낫겠어요.” 어머니가 말하였다. “안 그러면 경찰이 당신을 잡을 것이에요.”
“우리 노동자들과 함께,”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무척 오랫동안 그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했고 무척 걱정스러웠다.
곧 우리는 1월 9일에 페테스부르크에서 차르의 군대와 경찰이 더 나은 조건을 허락해 달라고 차르에게 요청하기위해 나온 노동자들의 평화로운 행렬을 향해 사격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In the spring of the same year, 1905, strangers began to frequent the villages. These were political agitators who urged the people to rise up against the landowners and tsarist autocracy.
같은 해인 1905년, 낮선 사람들이 마을에 자주 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지주와 차르 전제정치에 맞서 봉기하라고 권하는 정치적 선동가들이었다.
Although in our village the peasants staged no revolt, there was great ferment. They knew of the political strikes, the street fighting and the December 1905 armed uprising in Moscow. They also knew that the uprising, as well as working-class action in Moscow and other cities of Russia, had been harshly suppressed by the tsarist government and that many of the revolutionaries had been murdered, incarcerated or sentenced to hard labour. They had heard, too, about Lenin, the man who spoke for the interests of the workers and peasants, the leader of the Bolshevik Party, a party which sought to deliver the toiling folk from the tsarist regime, the landed proprietors, and the capitalists.
우리 마을의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키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정치적 파업, 가두 투쟁, 그리고 1905년 모스크바의 무장봉기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모스크바와 러시아의 다른 도시의 노동계급의 행동뿐만 아니라 봉기가 차르 정부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다는 것과 수많은 혁명가들이 살해되고 투옥되거나 중노동형에 처해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차르체제와 지주, 그리고 자본가들 치하에서 힘들게 일하는 민중들을 구하려 모색하는 정당인 볼세비크 당의 지도자이며 노동자 농민의 이익을 위해 연설하는 사람인 레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All this information was brought by our fellow-villagers earning a few roubles on the side in Moscow, St. Petersburg and other cities and towns of Russia.
이 모든 정보는 모스크바와 페터스부르크 구석에서 그리고 러시아의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 몇 푼씩 버는 우리의 동료마을 사람들이 날라 왔다.
Father returned home in 1906. He said he would not go to Moscow any more as the police had forbidden him to live in the city, allowing him to reside only in his home village. I was happy Father had come back home for good.
아버지는 1906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경찰이 그가 도시에서 사는 것을 금지했으며, 그의 고향마을에서만 살 것을 허용해서 더 이상 모스크바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영원히 집으로 돌아와서 기뻤다.
That year I finished the three-year parish school. I had top marks in all forms and was awarded honours. The family rejoiced at my progress and I was happy too. To mark the occasion Mother presented me with a new shirt, while Father made me a pair of boots.
“Now that you know your letters,” he said, “we can apprentice you to learn some trade in Moscow.”
“Let him stay here another year or so,” Mother remarked. “Let him grow up a bit.”
그 해에 나는 3년제 교구학교를 마쳤다. 나는 모든 과목에서 1등을 하였으며 명예 상을 받았다. 가족들은 나의 발전에 매우 기뻐했고 나도 행복하였다.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어머니는 내게 새 셔츠를 선물하였고 아버지도 새 장화 한 켤레를 만들어 주었다.
“너도 이제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그가 말하였다. “네가 모스크바에서 장사를 배우는 도제로 보낼 수 있겠구나.”
“그 애를 1년 정도 여기에 더 있게 해줘요.” 어머니가 말하였다. “좀 더 어른이 되도록요.”
In the autumn of 1907 I turned eleven. I knew that it was my last autumn at home and that when winter passed I would be apprenticed. I had many cares at home. Mother made frequent trips to town for goods for the shopkeepers, while Father slaved at his cobbling from early morning till late at night. His earnings were negligible because, owing to their poverty, the village folk could seldom pay for the job. Mother often nagged Father for charging them so little.
1907년 나는 열한 살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고향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가을이라는 것과 겨울에는 견습생이 되어서 보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걱정이 많았다. 어머니는 가게 주인들에게서 물건을 사러 자주 마을로 나들이를 하였고, 아버지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노예처럼 신발을 수선하였다. 가난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거의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들에게 너무 적은 비용을 받는다고 자주 잔소리를 하였다.
But whenever Father did turn a few extra roubles making a pair of boots, he usually came home from Ugodsky Zavod tipsy. Sister and I would go out to meet him on the way and he would always have a bun or some sweets for us.
In winter, whenever I had spare time, I mostly went out fishing, skating on home-made runners, or skiing from the Mikhalyovy Hills.
하지만 아버지는 한 켤레의 장화를 만들어 몇 푼의 루블을 벌 때 마다 우고즈키 자보드에서 얼큰하게 취한채로 집에 왔다. 누이동생과 나는 도중에 그를 만나러 마중을 나갔고 아버지는 항상 우리에게 줄 건포도가 든 빵bun(건포도 등이 든, 단맛이 많이 나는 작고 동그란 빵)이나 사탕을 가지고 있었다. 겨울에 여가 시간이 있으면 항상 낚시를 하러 나가거나 집에서 만든 스케이트를 타거나 미할료비 언덕에서 스키를 탔다.
At last the summer of 1908 arrived. My heart ached at the thought that I would soon have to part with kith and kin and leave for Moscow. I was conscious that my childhood was over — if, of course, my earlier years could be called that, though I, naturally, could not expect anything better.
드디어 1908년 여름이 되었다. 나는 모스크바로 가기위해 일가친척kith and kin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이 끝났다는 것-물론 나의 어린 시절earlier years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나는 본질적으로 그보다 더 나은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었지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