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성산읍 신산리 1037-3번지(신산중앙로1)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관공서(경찰지서) 터
신산리의 경찰관서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44.10.15. 경찰관 신산주재소 설치
1947.05.06. 해방후 성산지서 관할 신산출장소 인가
1947.12.12. 성산포경찰서 신산지서로 개칭
1953.08.12. 대통령령 제1278호에 의거 성산포경찰서가 폐쇄됨에 따라 서귀포경찰서 신산출장소로 개칭
1972.07.22. 청사개축
1990년대 성산파출소 신산분소
2025년 현재 성산파출소 신산치안센터
신산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비교적 인명피해가 적다. 주민들은 그 주된 이유를 2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마을에 지서가 있어서 주민들이 일찍부터 토벌대의 의도에 순응했다는 측면이다. 둘째는 4·3 초기 입산해 있던 청년들을 마을 유지들이 찾아가 설득해 하산시켰다는 점이다.
강봉학(1930년생)의 증언 “신산리에서도 젊은 사람들 15명 정도가 산 사람들의 강요에 못 이겨 일시적으로 산에 올라갔었다. 그런데 신산에서 노력을 해서 아무래도 이 사람들을 가서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되겠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가서 이 사람들을 데려오자 의견을 모았죠. 그래서 대천동 지경 진펭이굴이란 곳에 가서 그 사람들을 데려왔어요.”
그 후 얼마간은 마을로 내려온 청년들이 주민들과 함께 경비를 서며 마을 일에 협조해 이렇다 할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1949년 1월 초순에 얼마 전 마을로 내려왔던 청년들이 성산리 서청특별중대에 끌려갔다가 며칠 뒤인 1949년 1월 9일 이들 중 강문성(31)을 비롯한 9명이 시흥, 고성, 신양리 주민들과 함께 터진목에서 총살되었다.
신산리는 4·3 시기에 경찰지서가 있어서 성산면 남동부의 토벌근거지가 되었다. 1944년 10월 일제 경찰관주재소가 설치되었었고, 그것이 대한민국 시대에도 경찰관서로 이어졌다. 1949년 1월 성산포경찰서가 발족하자 1957년까지 성산포경찰서 관할 지서로 존속했다. 당시 신산지서는 온평, 난산, 신풍, 신천, 삼달리 등을 관할했고 타지에서 온 응원경찰이 주둔하기도 했다. 당시 응원대는 지서주임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해서 주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하옥(1937년생 여)의 증언
“전날 ‘붉은 깃발을…’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무에 삐라를 다 붙이니까, 뒷날은 날이 밝자마자 지서에서 왔어. 집에 있는 분은 다 잡아갔지. 그 때 우리 아버지도 같이 했다고 해서 끌려간 거야. 하도 취조(고문)를 당하니까 바른 말을 하라면서 취조를 당해 놓으니 살아오긴 했지만 아무 일도 못하고 자리보전하며 살다가 돌아가셨지.”
신산지서는 관할 마을에서 붙잡아온 주민들을 고문취조하는 소리가 연일 들렸다고 한다. 그들은 주민들을 문초하다 성산리에 주둔하고 있던 서청특별중대에 인계하는 중간 연결지 역할을 했다. 그들은 터진목에서 학살당하곤 했다.
마을성담은 지서가 있어서 비교적 일찍 축성이 시작되었다. 모든 주민들이 축성에 동원되었고 경비에는 여자들도 참여했다. 민보단과 특공대에 편입된 청장년들이 경비를 서고 토벌작전에도 자주 참여했다. 현재 성담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마을 동쪽 일주도로변 난산리 입구 주유소 앞에 동문, 서쪽 희진주유소 앞에 서문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찰지서가 폐지되었고 그 자리에는 신산리 경노당이 자리잡고 있다.(2020년 『제주4·3유적지Ⅱ-서귀포시편』)
신산향토지의 내용을 옮긴다.
〈그러면 당시 우리 마을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을까. 충격적이고 엄청난 사태에 어찌 우리 마을이라고 고난과 아픔을 순탄하게 비켜갈 수 있었겠는가. 우리 신산리에도 마을 자위를 위하여 1948년 10월 경 민보단(民保團)을 창설(단장 강봉근)하여 마을 방위에 힘썼다. 1949년 2월 경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동원되어 주변 밭담과 집 울타리 담을 허물어 마을 외곽(外廓)에 성담을 쌓아 축성(築城)하였다. 실로 벅찬 고역이 아닐 수 없었으나 절박한 상황에서 이 일을 해냈다. 그리고 수성(守城)에 힘썼다.〉
〈4.3의 중간에 무장대와 진압대가 대치하는 와중에서 우리 마을 청년들은 의용대로 편입되어 신산지서 경찰들과 함께 지서 관할 중산간 부락인 신풍, 삼달, 난산리에 주둔하면서 순찰 및 경계활동을 하였는데, 무장대의 습격 정보가 들어오면 죽창을 들고 선두에 서서 총알받이 역할을 하며 출동하였고 총을 든 경찰들은 안전한 뒤에서 독전하면서 따라갔다고 한다. 당시 의용대원이었던 우리 마을 청년 한경수는 무장대 진압을 지휘하던 한 경관에 의해 무참하게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그때 같이 근무하면서 옆에 서 지켜 본 대원들(현주옥 외)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밤 비극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며칠째 내린 엄청난 폭설로 인해 천지사방이 하얗게 변해버린 1948년 12 월 어느 날 밤.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여 경찰과 의용대원들은 주둔지인 신풍리(강○○의 집을 본부로 사용함)에서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날 따라 더욱 기승을 부리는 시린 눈발에 모두가 지쳐갈 즈음 연락병으로부터 인근 마을 삼달리에 무장대의 습격이 들었다는 급보를 접하여 경찰들은 의용대를 이끌고 황급히 출동하였다. 신풍리와 삼달리 사이에 있는 성담에 도착하여 인가에 불이 치솟는 것을 발견하고 성담을 엄폐물로 삼은 경찰들의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다. 깜깜한 밤에 단지 불타고 있는 인가를 향해 무조건 총격을 가하기를 한참 후 적의 응사가 전혀 없자 사격을 멈추고 상황을 확인한 결과 무장대는 가옥이 아니라 ‘몰고래왕’(말방앗간)에 불을 붙여 경찰을 유인한 다음 다른 곳에서 목표로 했던 사람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이미 철수한 후였다. 무장대의 유인책에 놀아나서 허탕을 친 경찰들은 주둔지인 신풍리 본부로 귀환하였는데 의용대원들은 밤새 추위에 얼어버린 몸을 녹이기 위해 본부 대기실(마루) 화로 주변에 모여 앉아 불을 쬐며 젖은 옷과 양말 등을 말리고 있었다.
당시 주둔지 최고 지휘관이었던 고ㅇㅇ 경위(신산지서장)는 허탕친 출동으로 인해 상부의 질책이 예상되어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고 평소에도 술을 자주 마시는 버릇이 있던 그는 귀환하자마자 방안에 들어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마을 의용대(계급편제는 중대장, 소대장, 분임장, 대원 순이었음)의 중대장은 박인오였고 소대장은 강ㅇㅇ였는데 고경위의 음주행각에 불호령이 떨어질까 모두가 숨죽이고 전전긍긍하였다. 한껏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소대장 강ㅇㅇ가 ‘한경수! 정문 보초교대’라고 난로가에 있던 한경수에게 명령하였다. 한경수는 종일 고생하고 옷을 말리고 있다가 졸지에 정문보초 근무를 서게 되자 출동 안 나갔던 사람도 많은데 왜 출동에서 금방 돌아온 나에게 보초근 무를 시키느냐며 “에이 씨발”하고 투덜거렸다. 이때 방안에서 술에 취해 있던 고 경위가 그 말을 듣고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방금 씨발이라고 한 놈 이리 들어와”라고 고성을 질렀다. 겁에 질려 방문 앞으로 가고 경위 앞 에 선 한경수는 “네가 방금 씨발이라고 했어?”라고 윽박지르는 고 경위의 말에 “안 했습니다”라고 일차 부인하였고, 연이은 추궁에도 계속 부인하자, 옆에 있던 정○○이란 순경이 한경수의 뺨을 한차례 때리며 “이 새끼 나도 옆에서 들었는데 계속 거짓말 할꺼야? 네가 말했잖아.” 하자 한경수는 그때서야 겁에 질려 “예, 제가 말했습니다.”라고 시인하였다. 그러자 고 경위는 “이 새끼 꿇어앉아.”라고 명령하였고 한경수가 그 자리에 꿇어앉자 카빈총을 가슴팍에 겨누며 온갖 욕설을 하였다. 고 경위는 한참을 욕지거리로 일관한 후에 당시 무장대로 분류되어 수감돼 있던 한ㅇㅇ를 떠올리며 “너 이 새끼 한ㅇㅇ이 하고 몇 촌간이야?”라고 윽박질렀고 한경수는 “같은 종씨지만 촌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잠시 생각하던 고경위는 “콩 방울 하나 줄 테니까 집에다 할 말 있으면 해 봐라.”라고 하였다. 이 때만 해도 주위에 있던 의용대원들은 농담인 줄 알고 설마 하면서 태연하게 앉아 있었고 한경수는 고 경위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모른 체 “없습니다.”라고 차분히 대답하였다. 순간 ‘탕’ 하고 총성이 울렸고 한경수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쓰러졌는데 고 경위는 “이 새끼 이대로 정문에 갖다 세워 놔.”라고 윽박지른 후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대원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다들 정신을 차려보니 난로가에 있던 동료대원 홍진남(신풍리)이 허벅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또 한 번 놀라서 상황을 확인해 보니, 워낙 갑작스런 총격이라 총알이 한경수의 가슴을 관통한 후 난로가에 서 있던 홍진남의 허벅지를 2차 관통하였는데 홍진남 본인도 겁에 질려 자신이 총에 맞은 줄 모르다가 한참 후에야 허벅지에 통증을 느끼고 피가 솟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지만 자기 신변에 더 큰 해가 미칠까 두려워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채 고통을 참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 대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시신을 고 경위의 지시에 따라 주둔지 본부 정문 옆에 눕혀 놓고 촐(목초)단으로 임시 덮어 두어 방치하였다가 날이 새면서 겨우 시신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다.
그 후, 쉬쉬하며 한 의용단 청년의 억울한 죽음은 서서히 잊혀져 갔고 분단 이데올로기 시대의 금기 속에 묻혀 있다가 오늘에 와서 그나마 그 날의 진실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4·3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한경수의 넋을 위로하는 뜻에서 마을 충혼비에 이름을 새겨 넣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2005, 신산향토지)
위 연혁자료에는 경찰지서가 자리를 옮겼다는 내용이 없는데 '제주4·3유적지Ⅱ'에서는 현재 경노당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혼란이 생긴다. 2025년 제주문화유산답사회에서 '신산리'를 안내한 최창범 선생은 지금 경찰지서 자리에서 옮긴 적이 없다고 하였다.
《작성 220413, 보완 2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