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20
10월24일[연중 제2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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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가 오늘 11살이 되었습니다. 11년 동안 함께해 주신 형제자매님, 수녀님,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도 단체방에는 어떤 글도 남기지 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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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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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1FVTdMzBDI
[서울대교구 신주환 안셀모(창5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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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
젊은 사제 시절, 방황하는 아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별의별 문제성을 지닌 아이들과 함께 살다보니 매일이 사건사고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학교 담임 선생님 지갑을 털지를 않나, 도시 가스 파이프 라인을 타고 남의 집으로 들어가지를 않나? 수시로 보호자 자격으로 경찰서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중에 가장 두려운 사건은 방화와 관련된 사건이었습니다. 인명 피해라도 나면 뒷감당하기가 너무나 힘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야밤에 주인이 퇴근한 문구사 안에 침입했다가, 추워진 날씨에 불을 피우다가 화재를 냈습니다. 사건을 수습하느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경찰에서도 방화범은 강력계에서 담당합니다. 불 한번 제대로 나면 막대한 재산피해는 물론이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큰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방화라는 것은 반사회적이고 치명적인 범죄이기에 특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이란 일반 방화범처럼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무 이유 없이 질러버리는 그런 불과는 철저하게도 다른 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은 ‘사랑의 불’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사랑의 불입니다. 눈멀고 귀먹은 우리 인간, 켜지지도 꺼지지도 않은 우리, 무기력해진 우리를 각성시키고 일깨우기 위해 강력한 에너지로 충만한 예수님 사랑의 불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시는 예수님께서 무척이나 싫어하셨던 부류의 인간상이 있습니다. 반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큰둥한 사람들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쪽에서는 피리를 불고 춤을 추지만 그저 소 닭 보듯이 멀뚱멀뚱 쳐다만 봅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불러보지만 별 반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인(聖人)들은 우리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한 가지 특징을 공통되게 지니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의 불이 지속적으로 활활 타오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체하지 못하던 사랑의 불을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도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인류의 횃불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면에 지니셨던 사랑의 불은 얼마나 뜨거웠던지 스스로를 완전히 연소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불신과 냉담함으로 가득했던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을 뜨겁게 만드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활활 불타오르게 하심으로써 동토의 땅이었던 온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사고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참으로 유한합니다. 한때 그토록 뜨거웠던 마음을 지녔었는데 불과 몇 년 만에 한줌 재처럼 그 마음이 자취를 감춥니다. 한때 죽고 못살던 그런 사랑이었는데 불과 몇 달 못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사랑이 변합니다. 활활 타오르던 시절이 엊그제였는데 냉랭한 마음, 무기력한 얼굴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변해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의 불을 활활 지피고 계십니다. 냉담했던 우리지만 그분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따스한 그분의 기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그분 사랑의 불을 우리에게 옮겨올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당신 내면 가득 채우시고 차갑고 냉담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우리,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우리를 향해 뜨거운 당신 사랑을 선택할 것인지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을 촉구하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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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5RvkfnQD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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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불이 붙은 리더: 내외적으로 적을 만든다>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해야 할 일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목적은 오로지 보수에만 있기에 일에서 흥미를 찾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고위직에 앉으면 그 회사나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로마 황제 네로(서기 37~68년)를 꼽고 싶습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가서 보면 그의 목욕 욕조가 엄청나게 큰 붉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보다는 사치와 시, 연기 등에 더 관심을 가졌고 로마 대화재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랬다고 뒤집어씌워 박해와 같은 수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에 대한 충실성이 부족하고 제국의 통치를 소홀히 하여 광범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황제를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하는 근위대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원로원도 네로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자신의 체포와 잔혹한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소문을 들은 네로는 처형이라는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기로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대단한 예술가를 잃고 있는가!” 무능한 리더는 내부에서만 적을 만듭니다.
그다음은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도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코닥 필름을 이끌었던 CEO 케이 위트모어(Kay Whitmore, 1990~1993)가 그러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재임 동안 수익성을 유지하고 사진 필름 시장에서 지배력을 유지했습니다. 회사는 표면적으로 여전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고, 그는 특별히 무능하다고 인식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코닥의 리더십은 디지털 혁명을 충분히 일찍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수익성이 높은 필름 사업에 너무 집중하여 디지털 사진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트모어는 업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비전과 사진의 미래를 향해 회사를 전환하려는 결단력이 부족했습니다.
코닥의 디지털 기술 전환 지연으로 인해 경쟁업체가 디지털카메라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고 결국 코닥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코닥이 마침내 따라잡으려고 시도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회사는 2012년에 파산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지금 삼성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열심히는 일하지만, 그래서 겉으로는 수익이 나서 나무라는 사람이 없지만, 이런 사람도 결국 한 나라나 회사, 가정을 말아먹게 됩니다. 할 일만 하는 리더는 내외부에서 다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명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리더로 적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이브러햄 링컨’의 사례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직 내내 극심한 반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도덕적 신념, 비전, 결단력 측면에서 그에게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준 탁월한 지도자의 모델입니다. 그는 노예해방까지 주장하며 남북이 전쟁하게도 했습니다. 사실 노예제도 해방 문제로 전쟁을 해야 할 때 적들에게만 반대를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내부에서도 반대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기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문에 희화화되었고, 정치적 경쟁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심지어 자신이 속한 당의 일부 구성원들로부터 멸시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를 위한 장기적인 비전에 계속 집중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보존하고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실천한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링컨이 오늘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감히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인 우려를 뛰어넘고, 반대를 견디며, 더 큰 이익을 위해 용감한 결정을 내리는 그의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리더에게 강력한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도 불이 붙었고, 그 불의 열정은 자신을 짓누릅니다. 또 분열을 일으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한 사람은 큰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이 붙은 사람은 내부와 외부에서 다 큰 분열을 일으키지만, 결국 한 가정이나 회사, 나라를 부흥시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모델이 고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체의 리더를 뽑을 때 성령의 열정으로 분열을 초래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그 단체의 장래는 밝을 수밖에 없지만, 안정만 추구한다면 그 장래는 밝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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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관 인터넷이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예 안 되면 회사에 연락해서 고치겠는데, 어떤 때는 잘 되고, 어떤 때는 안 되었습니다. 안 되는 때도 정해진 시간이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론 준비하거나, 인터넷 사용을 해야 할 시간에 안 되면 답답했습니다. TV도 인터넷이 안 되면 볼 수 없었습니다. 참고 지내다, 통신사에 연락했습니다. 통신사에서 인터넷 점검을 하였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선에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모르니 모뎀도 바꾼다고 합니다. 교통 신호등은 파란 불과 빨간불이 필요하지만, 인터넷은 늘 파란불만 켜져야 합니다. 가끔 빨간불이 켜져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제 매일 파란불이 보이니 파란 하늘을 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신앙은 늘 파란불이어야 하는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영성체와 관련된 작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주보에 공지했고, 신청을 받았습니다. 교사들은 신청한 학생들만 받아서 1년 동안 교리를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주보를 보았지만 깜빡하고 신청을 못한 분이 있었습니다. 3주간 시간이 지났습니다. 교장 선생님께 부탁했는데, 교장 선생님은 늦었으니, 내년에 신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보충 교리를 할 수 있으니 받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달라스 지역은 타주에서 이사 오는 분도 많고, 한국에서 이민 오는 분도 많은 편입니다. 부모님은 제게 아이가 내년에 첫영성체를 받을 수 있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교실도, 교사도 부족한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아이가 내년에 첫영성체를 받을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번에 한 가지 확실한 걸 알았습니다. 아이는 부모님에게 파란불도 빨간불도 있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아이를 위해서라면 파란불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을 이야기하십니다. 인터넷은 외부선을 교체하고, 모뎀을 바꾸면서 빨간불은 파란불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빨간불이 켜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게 됩니다. 습관적으로 성당에 나오지만, 삶이 기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을 보다 더 세속적으로 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의 약해진 신앙에 성령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사랑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믿음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희망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과일 바구니에 상한 과일이 있으면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일 바구니에 있는 성한 과일들도 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에 있는 ‘암’도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몸의 성한 부분들까지 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열’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과 분노를 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시기와 질투를 덜어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희망의 불, 사랑의 불, 믿음의 불, 성령의 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덜어낼 수 있을까요?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방법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파란불이 켜져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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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49-53: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 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한다고 한다.(로마 12,11 참조) 사랑은 하느님 자녀들의 마음을 다니며 속된 것,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태워버리고 순수한 것으로 단련시킨다. 사랑은 불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이 불을 세상에 지르셨다. 그래서 믿음이 밝게 빛나고 신심이 불타올랐다. 주님께서는 이 불로 사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셨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 이 세례는 피와 순교의 세례인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다. 이 세례는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는 숭고하고도 복된 세례로, 당신의 죽음을 말한다. 짓눌린다는 것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이 고통을 겪고 수난 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면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서나, 가정 안에서나 갈등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답은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공경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는가?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어찌 부모는 알아보겠는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게 되면 나의 이웃도 올바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의 것으로서 올바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다. 이 둘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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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여러 가지를 청합니다. 여기서 청하는 것들은 사람들이 흔히 기도하며 청하는 것들과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평화로운 삶이나 건강, 가정의 화목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기를,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사시기를,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러한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기초로 하여서 살기를 바라고 그것을 하느님께 청합니까? 그렇게 하는 삶은 어떠하리라고 생각합니까? 그 삶은 마냥 평온할 수만은 없을 것이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미친 사람으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서 마귀가 들렸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에페 3,19) 것이라면, 그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이 여느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의 삶은 뒤집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나는 성인이 아니라고, 나는 하느님이 아니라고 말하며 사랑의 요구 앞에서 물러납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3,19) 청합니다. 그런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에페소서를 읽으면서, 이러한 청원을 하느님께 드린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땅만 쳐다보고 땅에 달라붙어서 그저 삶의 사소한 것들을 청하는 것을 넘어,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드높은 은총의 삶을 청하여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3,20)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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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여기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려고 왔다.”, 즉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라는 뜻입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겪으셔야 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했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원사업이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죄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 대신 속죄하신 일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당신이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회개를 거부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고집을 안타까워하시는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13장에 다시 나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도시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전체 인류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대재난을 겪어도 깨닫는 것도 없고 바뀌는 것도 없고 그저 일상생활이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인류의 모습은 회개와는 너무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세속 사람들에게는 일상생활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회개를 통해서 ‘삶’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짓눌리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큰 일’을 겪고 죽을 고비를 넘겨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급할 때에는 하느님도 찾고 예수님도 찾고 성모님도 찾다가 그 고비가 지나가면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일을 잊어버리고 살던 대로 살면서 회개를 미루기만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 또 무슨 일을 당하면 후회하고, 예수님께 애원하고, 그 순간이 지나가면 또다시 변화 없는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는데, 내가 주는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치 내가 분열을 일으키려고 온 것처럼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분열시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화’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참 평화’를 뜻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는 관심이 없고,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간에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하느님 나라는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이 없는, 모두가 ‘함께’ 사는 나라이고, 그래서 분열과 갈등이 없고 참 평화만 있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살지 않고, 또 이웃과도 함께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구들이 갈라져서 서로 맞설 것이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맷돌질을 함께 하고 있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이거나 시어머니와 며느리거나 자매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함께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버려둘 것이다.’로 표현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버림받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 말씀은, 회개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해야 하고, 가족이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회개는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지 않으려면, 가족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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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몸소 평화를 베푸시고(루카 복음 7장 50절 참조), 제자들에게는 평화의 인사를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루카 복음 10장 5절 참조)
무엇보다도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께서 ‘세상의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실 그분의 평화는 많은 재산으로 말미암은 안락한 생활이나 전쟁의 승리로 누리게 되는 일시적인 평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불은 정화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시어 그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세례란 본디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셋째,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은 혈연, 학연, 지연 등의 모든 관계 가운데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에 익숙해진 이들이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얻으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누리기 위한 다짐은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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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과 ‘세례’와 ‘분열’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구약 성경에서 불은 ‘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임무는 무엇보다 세상을 정화하는 불을 일으키시어,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그 불로써 온전하고 합당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루카 3,16 참조) 따라서 그분께서 세상에 지르고자 하시는 불은 우리가 세례로 받게 되는 성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2,1-13 참조)
세례로 받은 성령의 불로 단련되고 정화되는 신앙인들의 삶이란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화의 과정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고통을 겪으시어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세례란 당신께서 겪으셔야 하였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걸어야 할 시련의 길을 몸소 앞장서 걸어 주신 분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보신 그분께서는 신앙인들의 힘겨움을 잘 아시고 위로하십니다.
신앙 여정에는 갈등이 따르기도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은, 오늘 복음 말씀처럼 가장 친밀한 공동체인 가정까지도 분열시킬 수 있습니다. 평화를 주러 오신 분께서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는 역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평화는 단순히 표면적으로 유지되는 안정이나 마음의 평온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온전한 충만함이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충만함으로 향하는 굴곡의 여정에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불’과 ‘세례’와 ‘분열’이라는 용어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 여정을 다시 정의해 보았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믿는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그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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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12,49)
16년 전 돌아가신 저희 수도회 박도세 신부님은 전례 초를 참 소중히 다룰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전례를 하다 보면, 촛불을 켤 때가 있는가 하면, 촛불을 끌 때도 있습니다. 나룻배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읽던 시인 타고르는 촛불과 달빛의 신비한 대조를 경험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촛불을 끄자 신성한 아름다움이 나를 온통 둘러쌌다. 촛불이 꺼지는 순간, 달빛이 춤추며 흘러 들어와 나룻배 안을 가득 채웠다. 촛불 때문에 달빛이 내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고 노래합니다. 시인 신석정은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은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읊었다고 합니다. 이글거리는 촛불은 명상의 마음결을 흩뜨리기 일쑤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듯이 살다 보면 어느 때, 문득 내 안에 양면적인 불이 타고 있고,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나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삶의 오랜 시간 내 안에서 타고 있었지만 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내 마음 안에서 마음의 평정을 흩트리는 감정의 불, 욕정의 불이 훨훨 맹렬하게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시간이 길어지고, 깊어지면서 차마 타오르지 못한 채 개화改火되기만을 기다려 온 영혼의 불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타고르의 비유처럼 촛불이 잦아들고 사그라져 마침내 꺼질 때 비로소 달빛의 신성한 아름다움이 자신의 나룻배 안으로, 영혼 안에 가득 채워지듯이, 예수님께서 주실 그 불이 내 영혼에서 활활 타오르기 위해선, 욕정과 격정의 촛불이 사그라져야 함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더 온전히 머물게 되면 평화이신 주님 성령의 불이 저의 격정의 불을 사그라지게 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주님께 그 불이 타오르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라는 말씀에서 언급한 불은 성령의 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스스로 그 불을 타오르게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불을 우리가 건드리면 타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중물의 개념처럼, 예수님은 이 불을 타오르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으며, 예수님의 이 불을 건드리면 내 안의 분열과 불화의 불은 이내 화력을 잃고 잿더미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를 위해 우리 내면 안에서 격정과 욕정의 불을 끄고자 하는 의지가, 결단이 우선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지만, 참 평화를 살기 위해 먼저 평화를 저해하는 관계의 재정립과 분리의 아픔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가족들 간에 갈라져 맞설 것이며, 마침내 갈라지게 될 것이다.”(12,51.53) 이처럼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위해서 거짓된 평화를 태워버려야 합니다. 불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듯, 거짓된 평화를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를 위해 불을 질러야 합니다. 불은 불로써 꺼야 하며, 불은 불로써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태워버리면 남은 것은 재 곧 죽음뿐입니다. 이는 곧 새로운 것, 참 평화를 위해 생명을 잉태하는 죽음입니다. 처음에는 죽음만이 보일 뿐 새로운 생명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열만 보일 뿐, 새로운 일치와 평화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평화나 일치보다 눈에 보이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뜻 불을 지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셔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불을 지펴서 진정한 일치와 화목, 참된 평화와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태워버리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불로 평화를 저해하고 가로막는 지금까지의 모든 거짓과 어둠을 살라버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십니다.
사실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서 힘들 때 새 생명의 불은 타오르는 법입니다. 우리 내면의 격정과 욕정의 불길은 고통스럽게 타오르지만, 새로운 성령의 불은 온전한 동력이 되고 활력으로 타오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지르러 오신 불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요, 그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기 위해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12,50)라고 말씀하셨으며, 그 불을 타오르게 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화해와 친교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불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 번져 나가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복음환호송/필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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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 저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안 될까요? 세상은 정말 불공평합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되는 것은 없고…. 하느님께서는 왜 저에게 이러실까요?”
몇 년 전, 어떤 형제님께서 식당을 3년 동안 했지만 결국 장사를 접고 제가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함에 대한 한탄이었지요. 그런데 이분께서는 재기에 성공해서 저를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당시에 저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냥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노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노력하는 중이야’라는 기분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노력한다고 성당에도 나가지 않았거든요. 제 마음을 다스리며 기쁘게 살아야 사람들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쉬지 않고 일하는 것만 노력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진짜 노력은 하지 않고, 자기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가짜 노력을 했다는 말씀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많은 이가 이런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가짜 노력으로는 힘만 들고 성과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삶만이 진짜 노력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 함께 살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돈을 비롯한 물질적인 것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이를 얻기 위한 노력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질적인 풍요를 얻어야지만 행복과 평화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 반해 주님을 따르는 삶, 사랑의 삶에서는 이런 물질적인 풍요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하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가치들에 맞서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합니다. 남들은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무시하며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런 비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는 사람에게 그런 비난의 소리와 행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질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갈라지더라도 어떤 행복을 좇아야 할까요? 사랑을 통한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풍요보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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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를 향한 가름>
루카 12,49-53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함께를 향한 가름>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맞는 이와
때리는 이가
어찌 함께하리오
맞음도 없고
때림도 없는
참세상 이루려
맞는 이와
때리는 이를
갈라 세울밖에
그러다 맞을망정
빼앗기는 이와
빼앗는 이가
어찌 함께하리오
빼앗김도 없고
빼앗음도 없는
참세상 이루려
빼앗기는 이와
빼앗는 이를
갈라 세울밖에
그러다 빼앗길망정
짓밟히는 이와
짓밟는 이가
어찌 함께하리오
짓밟힘도 없고
짓밟음도 없는
참세상 이루려
짓밟히는 이와
짓밟는 이를
갈라 세울밖에
그러다 짓밟힐망정
쫓겨나는 이와
쫓아내는 이가
어찌 함께하리오
쫓겨남도 없고
쫓아냄도 없는
참세상 이루려
쫓겨나는 이와
쫓아내는 이를
갈라 세울밖에
그러다 쫓겨날망정
버려지는 이와
버리는 이가
어찌 함께하리오
버려짐도 없고
버림도 없는
참세상 이루려
버려지는 이와
버리는 이를
갈라 세울밖에
그러다 버려질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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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두를 하나로 만듭니다.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분열을 거쳐 불순물을 제거하고 가슴과 가슴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원하는 것과 천상의 바람이 충돌하게 되고 마음의 분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하늘을 희망하기 때문에 고단한 과정을 감당하면서 쌓아 올립니다. 사랑은 끊이지 않는 길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지리라고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평화는 단순히 외적인 안정상태와는 다릅니다. 죄악의 더러움을 깨끗이 태워버려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죽음 앞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속셈을 가려내어 거짓 평화를 무너뜨립니다. 결국, 각자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 …… 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 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 하더라도 영혼이 세속이라는 습기에 젖어 들면 영혼의 불이 타오를 수 없습니다. 열정의 불이 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예수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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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12,49)
<불과 분열의 의미!>
오늘 복음(루카12,49-53)은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고,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지른 불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 불이 지금 여기에서 타오르기를 바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당시 기득권 세력들이 볼 때에, 예수님의 존재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분이셨고, 예수님 자신도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51)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복음(하느님의 나라)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가정의 분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족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불, 지금 우리 안에서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은 요란한 가운데에서 오시기보다는 조용한 침묵 가운데에서 오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ㄱ)
조용히 침묵 가운데 예수님 안에 머물러 봅시다!
정성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그리고 보다 더 진실되게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악과 싸워 승리하는 참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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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불, 세례, 참평화, 기도>
3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강론과 글귀가 있습니다. 세수하던중 물이 가득 담긴 프라스틱 세수대야 바닥의 영문 글귀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Life is beautiful(인생은 아름다워라)”
이 말씀을 주제로 썼던 강론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은 아름다운 시적 문장으로 가득하다 합니다. 시적 문장이 아름다우며 감동과 더불어 치유를 선사합니다. 문장뿐 아니라 언행도 시적이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일까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또스트에프키의 예술관을 응축한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란 오래 전 글을 나눕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의 종이 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옛 어른의 다음 말씀도 시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좋은 지침이 됩니다.
“속이 비어 있으면 길게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변명이라고 일컫는다.”<다산>
“군자는 말을 아끼고 소인은 말을 앞세운다.”<예기>
시적인 아름다운 말이라면 짧고 순수할 수 뿐이 없습니다. 투병중인 최인호 소설가를 찾았을 때 잠시 바닷가를 걸으며 당시 샘터 수습기자이던 한강에게 했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것을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한강은 이어서 씁니다.
“내가 그걸 영영 알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그렇게 반복하셨다...잊지 않을 것이다.”
온갖 고초를 겪고 세상을 떠나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아름다운 소풍 인생이라 해도 좋고, 아름다운 휴가 인생이라 해도 좋습니다. 어제 미사시 입당성가(402장)의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어제따라 깊게 마음을 울렸습니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과 함께 살아가리라.”
예전 “나 죽으면 장례미사시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하는 입당 성가에, 퇴장 성가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부탁하겠다” 말했던 적도 생각이 났습니다. 한 번 뿐이 없는 유일무이한 인생! 누구나의 소망이 아름다운 인생일 것입니다. 시작하면 언제나 늦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부터 심기일전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 말씀이 그 아름다운 인생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첫째, 주님은 사랑의 불입니다. 성령의 불, 말씀의 불입니다. 주님 사랑에, 성령에, 말씀에 불붙어 주님의 불이 되어 아름다운 열정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꺼진 인생이라면 살아 있어도 죽은 인생입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니 끊임없이 주님 사랑의 불이, 성령의 불이, 말씀의 불이 되어 어둡고 찬 세상, 밝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미사와 기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의 불을 붙여 주십니다.
둘째, 주님의 세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주님의 세례에 참여하여 부활의 계기로,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값싼 인생은 없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그러니 우리의 온갖 고통을 주님의 세례에 합류시킬 때 점차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기쁨, 영적승리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셋째, 주님의 참평화를 사는 것입니다. 결코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거짓평화를 주지 마라”(성규 4,25)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범람하는 거짓평화, 가짜평화, 값싼평화요, 이런 평화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을 가르는 주님이요 이런 분열은 파괴적 분열이 아닌 창조적 분열이요 참평화에 이르는 과정적 분열입니다. 그러니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희망이신 주님과 일치되어 살아갈 때 창조적 분열, 과정적 분열을 슬기롭게 인내하면서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고통중에도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깊은 내적 참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교회를 위한 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바오로의 기도를 내기도로 바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결정적인 것이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성령으로 내적인간이 굳세어지기를,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사시기를, 사랑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를,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총도, 값싼 평화도, 값싼 행복도, 값싼 아름다운 인생도 없습니다. 자발적 찬미와 감사, 자발적 기쁨과 노력으로 항구히, 끝까지 주님과 하나되어 온갖 시련과 고난을 통과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날마다 공동전례기도인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수행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이요 일에 전념하는 모습입니다. 기도와 일이, 기도와 삶이 하나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가난한 빈손으로 겸손히 성체를 받아모실 때의 순수한 사랑,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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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뿌리 내리기>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저는 요즘 ‘바비’의 삶을 삽니다. ‘바라고 비는’ 삶을 사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까지 한다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 바라기만 하는 사람은 욕심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사람은 욕심 때문에 바라기만 하지 않고 빌기까지 합니다.
아시다시피 바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에 바라는 것이 있고 진정 좋은 사람 되기를 바라는, 사랑 때문에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바람에도 급이 있습니다. 급이 낮은 사랑과 바람은 세속적으로 잘 되기를, 예를 들어서 세속적으로 승승장구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바오로는 영적으로 차원 높게 사랑합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도 세속적인 것이 하나도 없고 영적입니다.
그는 첫째로 에페소인들의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기를 바라는데 자기들의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굳세어지게 해달라고 빕니다.
둘째로 그는 에페소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되기를 바라고 빕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우리 신앙인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도 사랑하고픈 사람입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죽지 않고 싱싱하고, 그렇지 못한 나무는 메말라 가고 마침내 죽어버리듯이 우리의 사랑이 점차 메말라 가고 마침내 죽어버리게 되는 것은 우리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 없는 우리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조금밖에 충전되지 않은 건전지의 사랑과 비슷합니다. 조금 쓰고 나면 금세 바닥이 나버리는 건전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래서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이 그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라고 빕니다.
관건은 어떻게 그 사랑을 알게 되느냐,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느냐입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알게 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사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사랑할 것이고, 사랑하다가 실패도 할 것이고, 실패하기에 또 기도할 것이고, 그러면서 점차 그리스도의 사랑에 조금씩 뿌리가 내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뿌리 내리기는 전 생애적인 것이고, 기도도 사랑도 중단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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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불과 분열의 의미!>
오늘 복음(루카 12,49-53)은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고,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지른 불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 불이 지금 여기에서 타오르기를 바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당시 기득권 세력들이 볼 때에, 예수님의 존재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분이셨고, 예수님 자신도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복음(하느님의 나라)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가정의 분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족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불, 지금 우리 안에서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은 요란한 가운데에서 오시기보다는 조용한 침묵 가운데에서 오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ㄱ)
조용히 침묵 가운데 예수님 안에 머물러 봅시다!
정성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그리고 보다 더 진실되게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악과 싸워 승리하는 참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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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
뜨거운 불처럼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영원한 사랑을
지향하는
예수님의
삶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타오르는
사랑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영혼도
예수님의 삶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타올라야 세상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우리의 차가움과
어둠을 먼저
밝힙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타오르는
복음의 불을
보아야합니다.
타오르는 불로
우리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불로
흐지부지한
그리고
뜨뜻미지근한
우리 삶에
해답을 주십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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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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