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반휴머니즘의 편에서 말하는 존 그레이. 그에게 인간이란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그는 '자유로우며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인간에 대한 오래된 가정은 편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J. G. 발라드의 묵시론적 세계관, 그리고 장자의 '나비의 꿈' 등 학과 과학, 종교 경전과 문학 작품을 종횡무진하며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출판사 서평 시대와 인간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시선
'우상 파괴자', '반反휴머니즘의 기수', '염세주의자', 서구 계몽주의 유산에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있는 저자 존 그레이 앞에 늘 따라 붙는 수식어다. 또한 존 그레이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학술적 경력을 막 쌓아 나가던 1970년대 중반, 그는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에 경도되어 대처 정부의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앞장선다. 그러다가 1990년대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으로 돌아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신자유주의 이론가에서 비판가로 급격한 방향 선회를 하게 된 배경과 이유는 전 세계 14개 언어로 번역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False Dawn』(1998/1999)에서 엿볼 수 있다. 신노동당과의 동거는 토니 블레어 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결정하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후 현실 정치 운동과 분명한 선을 긋고,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반反휴머니즘에 천착하는 독자적인 저술 활동에 매진한다.
우에서 좌로, 그리고 급진적 생태주의자로 사상적 이주를 감행하면서 그의 저술 활동도 기존의 정치 이론과 철학적 전통을 넘어서 ‘문명 비판’으로까지 확장된다. 때로는 이처럼 파격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행보 탓에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는 거대 정치 기획과 유토피아적 이상을 일관되게 비판해 온 그의 정치적․이론적 입장을 오독한 결과다. 존 그레이는 우리 시대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그러한 존 그레이의 관점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저서다.
인간은 '지푸라기 개'에 불과하다.
이 책의 원제인 '지푸라기 개Straw Dags'는 고대 중국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희생물이다. 이 개는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지만 제사가 끝나면 내팽개쳐졌다. 존 그레이는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를 자정하지 않으면 가이아(지구)가 자정 능력으로 인간을 '지푸라기 개'처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인간을 '지푸라기 개'로 보는 관점은 단순히 인간 종 중심주의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존 그레이는 서구 문명의 핵심에 자리한 휴머니즘을 인간 종種 중심주의를 지탱하는 원천으로 보고 휴머니즘의 핵심 관념인 "진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낱낱이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세계에 관한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 모두가 비판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한다.
반反휴머니즘의 편에서 인간을 성찰하다
휴머니즘은 인간은 동물과 달리 주어진 본성을 초월할 수 있으며 자기 운명과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존 그레이는 이러한 진보에 대한 확신이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맹목적인 종교적 구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확실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비합리적 교리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진보에 대한 신념은 과학과 철학, 종교와 도덕의 든든한 지지를 받으며 유대-기독교 전통 안에서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과학은 진보는 물론 진리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 발전으로 등장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늘 통제를 벗어나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는 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존 그레이는 특히 서구의 지배적인 철학 전통에서 세계의 관찰자이자 해설자로서 인간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선사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발견한다. 기독교의 일신론은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도덕 원칙을 확립해 다양한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렸다. 또한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자율성과 자유의지 역시 인간의 삶 대부분을 조건 짓는 우연과 필연 앞에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이렇듯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바람은 인간의 삶, 더 나아가 지구 환경 자체를 위협할 뿐이며 인간의 삶 자체도 우리가 진眞, 선善, 미美라고 생각해 온 것들을 배반하는 방향으로, 습관과 임시변통에 의해 좌우될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인간은 우연한 유전적 사고의 결과 지구상에 출현하게 된 고도로 약탈적이며 파괴적인 동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찮은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약탈하는 자)'일 뿐이다. 서구 철학의 지배적인 견해는 이러한 인간의 실체를 무시하고 인간은 자기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탐욕은 견제 장치를 상실해 왔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주장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다.
"진보는 신화다. 자아는 환상이다. 자유의지는 착각이다. 도덕성은 일종의 질병이며 정의는 관습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니 "목적의식적 삶에서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진실
존 그레이는 시공간과 장르의 구애를 받지 않고 다양한 참조틀을 활용해 글을 쓰면서도 방대한 철학적 문제제기를 짧은 문장 안에 밀도 있게 담아 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도 철학과 과학, 종교 경전과 문학 작품을 종횡무진하는 가운데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J. G. 발라드의 묵시론적 세계관, 그리고 장자의 ‘나비의 꿈’ 등에서 얻은 영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상의 향연을 통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자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책이 "겸손"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인간에 대한 신랄한 관점에 분노하며 성급하게 책을 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저자가 던져 준 성찰의 지점들을 다시금 곱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존 그레이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사유의 지평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꼭 만나 봐야 할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