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ㅁ Chedda's Top 10 Hiphop Musician : 5th Tupac(N Biggie)
- 90년대 미국 힙합을 좋아했던 이들에게, 1996년이 주는 의미는 특별할 수 밖에 없다. 리저렉션이란 25세에 요절한 한 뮤지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을 글로써 빌리자면 : 갑자기 흰색 캐딜락이 멈춰섰다. 우리는 그 자식들을 바라봤고, 그 자식들은 말할시간조차 주지 않았다.순식간에 총성이 울렸다. 카메라 앵글은 지상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Pac은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바뀌게 될거라고?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지. 젠장! 이젠 아무것도 못하게 됐잖아? "
- 미국 힙합의 역사에서 2Pac이 가지는 의미는 항상 특별하다. 25세의 요절한 뮤지션. 수많은 힙합 유망주들이 탄생하게 된 궁극적인 시발점이자, 힙합을 米 본토 문화의 메인스트림으로 올려놓은 장본인. 힙합을 사회적으로 끌어들여 힙합이 대중 그리고 청소년 들에게 미치는 영향. (흑인을 향한)인권차별, 모독에 대항하는 현대적인 문화 수단의 아이콘. 2Pac은 절대로 단순한 힙합 가수 혹은 뮤지션이라는 단 한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의미에서 1996년은 그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무 악몽같은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가 지금 우리와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라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Elvis Presley, Kurt Kobain, Jim Hendrix와 같은 천재들 처럼 그 역시 너무도 빠른 시간에 우리곁을 떠났다.
- 2Pac이 보여준 것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측면에서 그는 5위에 오를 수 밖에 없다. 단기간의 짧은 임팩트라면 그는 단연 톱을 다퉈야 겠지만, 그가 양산해낸 수많은 명곡들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도 Classic이라고 부를 만큼 힙합본질에 가까운 음악은 없다는 점이나 그가 메인스트림에서 활약했던 6년 남짓의 짧은 시간은 그에 대한 평가를 5위 이상은 올려놓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 투팍은 7,80년대 흑인 과격단체였던 Black Panther의 일원이었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그는 항상 혼자였지만 남자보다 더욱 전투적이었고 투쟁심이 넘쳤던 그의 어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자라났다고 말했다. 2Pac이 본격적으로 힙합에 뛰어든 것은 고교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Pac의 어머니는 그에게 흑인 특유의 Soul(장르가 아닌 원류음악)을 들려주었고, 인종차별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 음악을 배경으로 자라는 그의 정서는 MIC를 쥐게 되면서 사회참여적인 가사와 메세지로 발전하게 된다.
- 2Pac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후 West-Coast의 유명 힙합유닛이었던 Digital Underground의 일원으로 음악계에 진출하게 된다. DU의 일원으로 Grammy Award 후보에 올랐던 영광을 누리기도 했던 Pac은 DU를 탈퇴하고 나와 1991년 2Pacalypse now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 그의 타이틀 곡이었던 Branda Got`s Baby, 그리고 Trapped는 불우했던 자신의 기억들을 생생하게 묘사해내며, 많은 소외된 계층에게서 지지를 얻어내 랩챠트에서 3위까지 오르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0대시절 경찰관에게 총격을 한 것이나, 급우들을 폭행한 예전일을 끄집어내면서까지 그를 비난한 부통령 Dan Quale은 Tupac이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무너뜨리려한다며 비난했고 많은 여성단체와 인권단체는 그가 더 이상 차별적인 발언과 저급한 노래를 멈춰줄 것을 요구했다. Tupac은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고, 힙합이라는 문화를 米전체가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가 공중전화를 걸고 자신의 차로 걸어가려고 할때 마약을 가지고 있다며 그를 일방적으로 폭행한 경찰이 되려 2Pac을 고소하는 등 2Pac은 단숨에 米 음악메인스트림의 핫 이슈로 부각되고야 만다.
- 이 당시 2Pac이 얻었던 관심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부통령 Dan Quale을 중심으로 한 米 정부는 음원에 대한 규제와 폭력적인 가사들 여성비하(Hox, Hoocxx, Biaxxx등)의 핵심이 되는 단어들을 단속하는 것을 마치 정부의 가장 우선 과제인양 미디어를 통해 흘려보내기 시작했고, 2Pac이 공연하러 가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인권위원회와 여성부 회원들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아이러니 한건 인권위원회와 여성부 회원들 중 흑인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2Pac의 Branda Got's Baby는 빈민가의 흑인 여성들이 아무렇지 않게 강간당하고 임신하여 아이를 낳고, 싱글맘으로 지내다 마약 혹은 매춘에 뛰어들게 되어 사회적 빈곤이 반복되는 것을 비판했고, Trapped는 단적으로 흑인 인권에 대한 부당함을 외쳤던 가사이니 당연할 수 있지만, 사회적 부조리를 내뱉어낸 그의 가사를 인권위원회와 여성부에서 앞장서서 반대했다는 것은 웃길 따름이다. (물론 2Pac이 감옥 수감 후 릴리즈한, 즉, Suge Knight와 계약한 후 내놓은 곡들에선 여성을 비하하는 가사들이 맞긴 하다. 그렇지만 이 때는 아니다.)
- 2Pac은 이러한 장애물 속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전국을 돌며 콘서트를 가졌고, 흑인들을 중심으로 혁명적일 정도로 엄청난 지지를 얻고야 만다. 2년뒤 Strictly 4 my n.i.g.g.a.z.가 릴리즈 되고 Keep Ya Head Up이 릴리즈 되면서 그는 좀 더 대중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돈과 명예가 달라붙기 시작하면서 2Pac은 Weed와 Champane에 취한 전형적인 허영투성이 뮤지션으로 전락하고야 마는데, 이 와중에 2집 릴리즈 후 가진 순회 콘서트에서 잠자리를 가졌던 여성이 2Pac을 강간혐의로 고소하면서 그는 8개월간 미 교도소에 복역하게 된다.
- 2Pac은 이 후 생전 회고록에서 본인이 감옥에 들어 가게 된 것은 신의 뜻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유인 즉슨, 2Pac의 몇백개에 달하는 Lyric(2Pac이 죽은 이 후 16년째가 되는 현재까지 2Pac이 죽은 이 후 그가 Suge Kight의 레이블에서 녹음한 라임 중 단 30%만이 공개된 것이라고 밝혀진바 있다. 2Pac의 육성이 담긴 미발표곡은 현재까지 200여곡에 이른다고 추측되고있다.)이 적혀진 곳이지 2Pac 스스로가 힙합음악을 얼마나 많이 원하고 또 간절히 바라는지 깨닫게 된 곳이라고 이야기 했다.
- 출소 이 후 첫번 째 레코딩에서 2Pac은 Dr.Dre의 비트위에 30분만에 곡을 써내며 싱글을 발표했고, 이 앨범은 미 전역내에 2Pac이라는 이름을 아로새기게 된다. 바로 California Love.
- 2Pac이 릴리즈한 California Love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였다. 당시만해도 흔치 않았던 정통 Club Scene음악이었고 이 곡의 릴리즈 이 후 폭풍적으로 현재의 개념으로 CLUB들이 미 전역에 선풍적인 유행처럼 번져가기 시작한다. Dr. Dre의 Chronic(4위가 Dre와 Snoop이라 바로 뒤의 글에서 다룰 예정)을 깃점으로 이러한 모습들은 광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 시발점이 사실상 2Pac의 California Love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상당하다. 이 후의 Hiphop은 (NAS의 글에서 내가 밝힌 것 처럼) 1990년대 최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그야말로 힙합의 대중적 황금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 California Love 이 후 2Pac은 음악적인 교류를 위해 발벗고 나서기 시작하는데, East-Coast의 대표적인 뮤지션이자 절친(당시까지만해도)이었던 Biggie Smalls와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음악적인 교감을 쌓고 동-서 음악의 색깔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Biggie Smalls와 함께있던 중 총격을 당하게 되는데, Biggie가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그의 몸을 5발의 총알이 관통했고, 그는 생사를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의식을 차린 후 2Pac은 되려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던 총격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3집은 그에 맞춰서 발매된다). 2Pac은 감옥에서 생각했던 곡들을 모으고 스스로의 가장 진솔한 모습들을 담아 그의 세번째 앨범인 Me against the World를 제작했는데, 세상과 메스미디어에 비춰지는 본인의 이미지 모습들과 전혀 정반대의 모습들(2Pac의 주장으로는 그의 참된 모습)을 담았기 때문에 정한 앨범 타이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세번째 앨범은 대중적이고 진부한 사랑가사도 들려오는 앨범이었다. 하지만 그는 Dear mama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나타냈는데, 이 곡으로 인해 그에 대한 불신의 시선들이 어느정도 무마되기는 했었다. 그리고 그가 총격사건의 용의자에서 풀려나게 되는 대중적인 분위기를 조성시키게 된 앨범이 되기도 한다.
- 2Pac이 의식을 차리고 경찰의 수사가 미해결 사건으로 마무리 될때쯤, 2Pac은 당시 현장에 있던 Staff과 지인을 통해 사건의 주도자들을 의심하게 되는데, 바로 동부의 최고 거물이었던 P.Daddy와 그의 절천한 동료였던 Biggie Smalls, 그리고 Mobb Deep, Junior M.A.F.I.A 등인 연루되었다고 믿게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그의 정신세계내에서 이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2Pac은 이후 병적일 정도로 East-Coast 뮤지션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내게 되고, 당시 Biggie Smalls가 현장을 떠나자마자 총격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Biggie도 본인을 저격한 일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2Pac은 병실에서 가사를 적었고, 병실에서 퇴원하자마자 순식간에 싱글컷의 작업을 완료하고 곡을 릴리즈하게 되는데, 이 곡이 바로 Hit'em Up.
- Hit'em Up의 릴리즈 이 후 2Pac을 중심으로 한 West-Coast와 Biggie Smalls를 중심으로 한 East-Coast 뮤지션들의 대립은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는데, 힙합뮤지션을 중심으로 형성된 Gang집단들은 그 어떠한 장소에서든 서로와 마주치면 서슴없이 총격질을 가하게 되었고, 2Pac 본인 또한 East-Coast 뮤지션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면서, 현장범으로 다시 한번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그를 오랬동안 지켜봐오던 West-Coast의 거대한 Gang그룹의 수장이자 Death Row레이블을 소지한 Suge Knight는 거액의 보석금을 들여서 그를 석방시키고 자신의 Death Row사단으로 모셔오기에 이른다.
- 그리고 나서 발매된 그의 네번째 앨범 All eyez on me는 3집에서의 성공적인 변신과 더불어 많은 기록과 많은 말들을 남겨놓았다. 힙합 최초의 6백만장 판매, 힙합 최초의 더블앨범과 같은 화려한 수식어보다. 전 세계앨범 최초 앨범의 전트랙 선호도 50%이상의 기염은 바로 이 앨범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사견이지만 음악적인 완성도를 떠나, 米 모든 메스미디어로 부터 얻어낸 주목도와 드라마와도 같았던 릴리즈 과정은 米 HipHop 역사상(Old School 시절제외) 최고의 앨범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여튼 2Pac은 HipHop역사상 가장 화려한 성공으로 명실상부 West-Coast 최고의 래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후 2Pac은 본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Suge Kinght의 강요에 이기지 못해 원치도 않는 West-Coast Gang&Rapper들의 수장을 쥐게 되었고, 2Pac은 몇번씩이나 Suge Kight에게 고사의 뜻을 밝혔지만 Suge Knight는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 2Pac은 이러한 사건 이 후 음악적인 슬럼프를 겪게되었고 그 과정 중 절친이었던 마이크 타이슨과의 경기를 지켜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 흰색 캐딜락에서 발사된 반자동 총격에 의해 허망하게 세상을 뜨고야 만다.
- 2Pac의 죽음에는 Suge Kight가 있다. 밝혀진 사실은 없지만 정황 증거의 대부분이 Suge Kight를 향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6년전 나의 글에서 설명을 했기에 http://cafe.daum.net/ilovenba/34Xk/53784 링크로 대체한다.
- 2Pac의 죽음은 많은 것들을 의미하게 된다. 총격을 가했던 East-Coast와 West-Coast간의 총격이 종식된 계기가 되었음과 동시에 HipHop이라는 음악이 Rock, Pop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대중적인 음악장르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2Pac이 겪었던 시절들은 힙합이 발전하는 과도기 시기였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고, 2Pac이 릴리즈 했던 모든 앨범을 통해 수많은 곡들의 토대가 완성이 되었고, 수많은 래퍼들의 음악 혹은 Gangster Rap이 좀 더 보편화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Pac의 사망 6주기를 맞이하여 올 해 또한 수많은 앨범들이 릴리즈 될 것이고 그 곡들 중에서는 2Pac이 생전 릴리즈하지 못했던 몇곡들도 담겨질 예정이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조금 늦었네요 ㅎ 요즘 일땜에 정신이 없어서리;;
27살에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1971년에 태어나 1996년에 죽었죠. 한국나이로 26. 미국나이로 25입니다.
힙합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절 힙합으로 이끈 래퍼죠. 투팍..정말 10년만이라도 더 살았더라면 좋았을텐데요.
캘리포니아 러브의 발매일이 95.12.28이고, 미 어겐스트 더 월드의 발매일이 95.3.14입니다..선후 관계가 잘못된 거 같은데요...캘리러브는 3집 이후 드레랑 작업한거 아닌가요..?데쓰로로 가면서..이때 드레가 데쓰로에 있었으니까요..글고 힛엠업 이전에 비기가 후슛야? 로 간접적으로 투팍을 디스했죠...거기에 대한 답글(?)인셈이죠.힛엠업은....뒤에 지가랑 비기가 브루클린즈 파이네스트로 다시 씹고...암튼 글 잘 봤습니다..
체다님 People under the stairs 나 The Sound Providers 같은 그룹들도 소개해주시면 안될까요 번외로 +_+
<Me Against The World>은 1995년 투팍이 복역 중 발매된 앨범이고, <California Love>는 보석으로 출소한 다음 데쓰로우 이적 후, 1996년 <All Eyez On Me>앨범 발표 전 첫번째 싱글 커트 곡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윗님 말처럼 전후관계가 좀 뒤바뀐 듯 싶습니다,,,덧붙이면 힙합 역사상 최고의 디스 곡이라 평가받는 <Hit Em'Up>은 <All Eyez On Me> 앨범의 세번째 싱글 <How Do U Want It>의 B-사이드 곡이었죠,,,이 곡에서 투팍은 맙딥(ㅠㅜ)을 비롯, 비기 등의 배드보이 식구들을 죄다 넉다운 시켜버립니다,,,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