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본 미인상,
욕망에 기입된 신체
1.
저 미인상은 당나라 시기에 제작된 것...
미인의 굴곡을 보고 있자면 단박에 경험되는 인상은 오히려 역겨운 추문이다. 그 추문은 미인이라는 형상에서 족히 역주행하고도 남을 불쾌의 반추...
여성의 지위를 저러하게 야만적으로 용인하지 않았던 남성들의 지위라는 위상의 추문. 특히 남성들의 구강 성욕 해소와 연관이 있는 전족의 형태를 보라.
저렇게까지 자연미의 발을 괴이하게 변형시켜 어떤 욕구를 독점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에의 의지가 도대체가 놀랍지 않은가.문명이나 문화란 그만큼 야만의 그림자를 은폐한 토대를 두고 번성한다고 하지만 저건 너무 심한 경우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또 놀라는 것은 성적 취향의 가변성...
지금이야 미인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저 시기에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한 기준이 저 상에 고스란히 투영된, 저러한 육체라면.하기사 당장 한반도의 남북을 두고도 미인의 기준이 제법 현저하게 다르니...또 다른 공간에서 어떻게 진전되어 갈지 모를 일이긴 하다.
어쨌든 당조의 시기에는 오늘날 현대 미디어, 이미지 공간을 사로잡는 쫘악 빠진 디자인의 몸매는 아니었던 모양..가슴과 힙, 허리의 선정적인 선은 아무래도 별 상관이 없고 일단 포동포동해야 한다.
볼은 또한 만질 것이 있고 손을 대면 볼륨이 진하게 느껴지도록 살이 붙어 있어야 한다.
당시의 남성들은 왜 저러한 아담 사이즈의 풍만한 여성에게서 짙은 욕망을 갈구했을까?
거친 대지와 결핍과 싸운 멘탈과 관계 있을까.
아니면 날카로운 권력의 정글에서 마음과 영혼이 피폐해져서 그런 것일까. 좌우지간 일단 나의 시야에 만만한 외형으로 들어오되 손안에 미끄러지듯 감각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 남성의 소유 욕구의 공간에서 여성의 지위는 그 어떤 외부도 경험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지위와 권력이란 자신의 신체가 저 야만적인 남성의 욕구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느냐에 결정될 뿐...오직 그 편에서만 여성이란 젠더의 정체성이 재구성될 뿐...
결국 권력과 지위의 자장안으로 기입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체마저 변형시키는 고통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여성이란 지위의 운명...
2.
자신의 신체를 권력과 걸부시키는 존재는 어디 여성만일까. 남성의 신체는 그렇다면 권력을 위해서 어떤 변형을 욕망하는가.이 지점에서 신체와 권력의 야만적인 관계는 훨씬 보편적인 국면으로 넓어진다.
자신이 신체를 권력화 하는 기이한 행위로는
이를테면 북쪽의 귄력자, 김정은 위원장처럼 정치판의 공연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것이 아닌가.
재일교포의 핏줄에다 연소한 연령이라는 핸디캡을 덮기 위해 건국자 할아버지의 신체를 욕망한...
명백히 J.F.케네디의 스마트한 신체는 대중의 욕구에 부응했고 근검한 간디를 떠오르게 하는 호치민의 메마른 신체, 역시 또한 벳남 인민들의 권위 욕구와 부응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인문학적 가치판단에서의 용인되는 그 욕망의 교양적 위계, 성격.그 생산성의 위계를 넘어 미인을 독점, 소유하고자 했던 야만의 공간에서는 저 시대 양귀비와 그의 남자가 보여주는 사례처럼, 서로가 파멸되는 불운이 이미...
결국은 미인에 대한 욕망은 그렇다면 다시 고전적인 교훈으로 복귀하지 않는가.
소유냐? 존재냐?여성을 소유하느냐,
여성을 성적 동반자로 올려 잡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