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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전와우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야베스
길가에 앉아 있을지라도(막10;46-5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시기가 차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여리고 성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성을 지나가는데 소경, 맹인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맹인은 디매오와 그의 아들 바디매오입니다.
마태복음에 맹인이 두 사람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아버지 디매오도 맹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맹인이었기 때문에 마땅하게 일자리가 없어서 의식주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 푼 줍소”하면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눈은 멀어도 귀는 열려 있어서 오고가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는데 오늘 그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앉아 있는 길거리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필사적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면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아주 절박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맹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은 무리들은 “시끄럽다. 잠잠해라” 하면서 야단쳤습니다.
이들이 야단을 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맹인들은 더욱 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면서 외치는 것입니다.
이들이 너무 큰 소리로 끊임없이 외치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
멈추어 서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를 불러오라”고 합니다.
무리들은 맹인들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합니다.
그 말은 들은 맹인들은 자신들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서서 뛰어서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며 그들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맹인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을 밝게 해 주실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소경을 열어주어서 환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실 분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합니다.
예수님은 맹인들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곧 바로 그들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벗겨지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나서 아름답고 좋은 세상을 한 번도 밝게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그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도, 지체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1.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구경꾼, 관람꾼은 될 수 있어도 이적의 주인공, 교회의 주인공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분들이었지만 예수님을 에워싸서 따라가는 무리들은 예수님을 따라는 다니는데 예수님을 믿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교회의 기둥들이 되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무리들은 지금은 예수님이 좋은 것 같아서, 예수님이 행하는 이적을 보는 것이 신기하고 좋아보여서, 예수님이 만들어주시는 떡을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만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요’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람들로 변질되어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들의 생명도 다 바치고 헌신하며 순교까지 당합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받지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예수님의 손을 잡아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5병2어의 이적을 통해서, 7병2어의 이적을 통해서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은 사람들도 썩여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떡과 고기를 받아먹은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은혜도, 구원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구경꾼, 관람꾼은 되지 말아야 됩니다.
구경꾼은 아무리 많아도 구경꾼일뿐이지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구경꾼은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손님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산성교회처럼 개척교회에는 구경꾼이 없는 것보다는 구경꾼이라도 많으면 좋기는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가 다 산성교회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기둥같은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를 통해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우리 산성교회를 세우시고 우리 산성교회를 잘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상급과 축복이 있는데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다른 교회가 아니라 우리 산성교회를 통해서만 주시려는 은혜가 반드시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집들이 있습니까?
그 많은 집들이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집에 들어가면 주택 무단침입죄로 감옥에 가야 합니다.
세상에는 회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회사들이 우리들에게 월급이나 품삯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그 회사에서만 우리들에게 월급이나 품삯을 줍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교회들이 있습니까?
크고 작은 교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 가까이에도 저가 부목사로 섬겼던 태평중앙교회도 있고, 우리교단 총회장이신 목사님께서 섬기시는 대전중앙교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교회와 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유일하게 우리 산성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비록 작은 개척교회지만 하나님은 저에게 산성교회를 맡겨주셨지 다른 교회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유독 우리 산성교회에서 교회의 일꾼이 되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산성교회에도 갔다가 다른 교회에도 갔다가 또 다른 교회에도 갔다가 하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 산성교회를 잘 섬길 때 우리 산성교회를 통해서 주시려고 하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손님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교회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다 교회의 주인이 되면 교회가 잘되어지는 것,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구경꾼이든지, 손님이면 교회가 잘되든 말든, 교회가 부흥하든 말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주인공, 이적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2. 길가가 직장인 사람도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오늘 디매오와 바디매오는 직장이 길가입니다. 직업은 거지입니다.
직업인 거지로서 가장 좋은 직장은 길가에 터를 잡고 앉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무리들이 보고서 불쌍한 마음이 생겨서 한 푼, 두 푼 적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길가에 앉아 있는 이들이 맹인들뿐이겠습니까?
길가에는 노숙인들, 거지들, 거렁뱅이들, 장돌뱅이들, 노점상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위 고급스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길가에 앉아 있다는 말씀은 사회적으로 멸시, 천대, 무시, 별 볼 일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 대접을 못 받는 모습입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니까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이지 사람으로, 인간으로서 인격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정동에서 가까운 유천동에는 술집, 성매매업소가 있습니다.
중부경찰서에서 대대적으로 성매매 업소 철거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권을 보장해달라고 데모 아닌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그 거기를 운전하고 다니다보면 밤에는 야시끄리하게 입은 아가씨들이 밤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창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사회에서 냉대당하고, 무시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국가와 사회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쓸모없는 쓰레기와 같은 사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어서 겨우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자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오늘 맹인들을 만나주셨고, 그들의 외침을 들어주셨고, 그들의 소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창녀도 만나주십니다.
창녀로서 몸을 팔면서 살았고 일곱 귀신에 걸려서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듣던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을 괴롭히던 일곱 귀신이 나가고 죄도 용서받아서 깨끗한 여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막달 마리아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온전하게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곳에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붙잡혀서 온갖 모욕과 치욕을 당하는 그 자리에도 마리아는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골고다 언덕에도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묻히시는 무덤에도 갔습니다.
안식일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붓기 위해서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만나주신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처지가 이렇기 때문에, 저렇기 때문에 만나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좋아 보이지 않은 처지요 환경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찾아오시고 만나주십니다.
구경꾼은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일꾼이 될 수 없지만 지금 우리들의 처해 있는 처지가 사회적으로 형편없다 해도 진심으로 주님을 찾으면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면 주님은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참여하는 일꾼이,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더 주님을 찾아야 됩니다.
바디매오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앞을 지나가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면서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무리들이 시끄럽다고. 잠잠하라고 야단을 치면 칠수록 바디매오는 더욱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면서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도 방해꾼들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는데도 방해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려고 하는데 평탄하게 신앙 생활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사탄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온갖 어려움들을 끌고 와서 우리들을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고 갈등하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받게 만들고, 이상한 소리를 듣게 만들면서 우리들을 낙심케 만들려고 합니다.
직장이 온전하게 신앙 생활하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불신가족들이 온전하게 신앙 생활하는 꼴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낙심하고 절망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합니다.
잘되던 일도 잘 안 되게 만듭니다.
고속도로처럼 잘 나가던 사람도 순식간에 쫄딱 망하여 길거리에 나앉게 만듭니다.
철석같이 믿던 사람도 순식간에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는 길만이 은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익한 길이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사모하여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바디메오가 시끄럽다, 잠잠해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면, 중간에 예수님 부르는 것을 포기했다면 그의 눈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중간에 포기해 버리면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어서 자신을 불러주실 때까지 끝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중간에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해 버리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탑은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중간에 무너진 탑은 다시 쌓아올리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려면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다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찾아야 됩니다.
4. 버려야 되는 것은 미련두지 말고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외침을 듣고 가시던 길을 멈추고 그를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하자 바디매오는 지금까지 입고 있던 누추한 겉옷을 벗어던졌습니다.
겉옷은 거지생활하는 사람들, 노숙자들에게는 옷도 되지만 이불도 되고, 밥을 얻는 보자기도 되고, 밥상도 되고, 깔판도 됩니다.
그래서 노숙자들, 거지들에게는 겉옷은 아주 중요한 생활필수품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예수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되는 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품고 있으면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받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 거추장스러운 것들에 더 이상 미련두지 말아야 합니다.
버릴 것은 미련없이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직장도, 좋아하던 것들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가복음10:29-3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먼저 버릴 것은 버리라고 합니다.
버려야 될 것을 미련이 남아서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 싶은 은혜와 축복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먼저 버릴 것을 버리면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더 복된 것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100배로 되갚아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먼저 버릴 것을 버리면 100배나 더하여 갚아주신다고 합니다.
장사를 해도 이런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갑절의 이득만 남겨도 장사를 잘하는 사람인데 100배로 남기는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장사를 해야 합니다.
영생을 주신다고 합니다.
물론 버린 대가로 핍박과 고난을 동시에 받기도 합니다.
핍박과 고난이 무서워서 버리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리면 하나님은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몇 배로 되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5.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포착을 잘해야 합니다.
기회는 순간포착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순간포착을 잘해야 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들의 앞을 지나가버리면 더 이상 예수님은 자신들 앞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에 단 한 번 자신들의 앞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하여 여리고성을 지나서 가는 길입니다.
여리고성을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여리고성을 지나가지 않습니다.
가버나움이나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지역이기 때문에 오늘 만나지 않아도 어쩌다가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다 하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겠지만 여리고는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 아닙니다.
한 번 지나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바디매오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 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는 수많은 길가가 있는데 왜 유독 바디매오가 앉아 있는 그 길로 예수님께서 지나가고 계실까요?
길가에는 바디매오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가에 바디매오의 부자만 앉아 있었을까요?
아니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 맹인들, 걸인들이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기도 하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디매오만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횡재요.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치유를 받는 것도, 주님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지입니다. 거지에게는 먹다 남은 식은 밥이나 한 푼, 두 푼을 주면 됩니다.
그것이면 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도 거루지 않고 계속 날마다 구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맹인이기 때문에 눈만 뜨게 되면 이제는 거지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앞을 환하게 볼 수 있으니 노동하여 품삯을 받으면 얼마든지 거지생활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본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시라면 자신들의 눈도 뜨게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꽉 붙들어 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번에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당당하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눈을 밝히 뜨게 해 달라고 소원을 아룁니다.
이들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소원을 아뢸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예수님을 만날 수만 예수님께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해야지.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소원을 아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원은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항상 자신의 가슴에 그 소원을 품고 있어야 그 소원을 아뢸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금방 자신의 소원을 아뢸 수 있습니다.
소원을 아뢸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원을 아뢸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찾아오면 순간적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환경오염 때문에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옛날에는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똥별은 아주 순식간에, 눈 깜짝하는 순간에 떨어져버립니다.
떨어지는 그 시간에 맞추어서 소원을 빌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원은 늘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2008년의 한 해가 저물고 2009년이 열리면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저의 가정도 수원에 갈 때 강원도 정동진에 일출을 보기 위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영동고속도로를 밤새 달려서 새벽이 도착하여 일출을 본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일출할 시간은 지나가는 것 같은 데 아무리 기다려도 일출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에게 언제 일출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벌써 일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것도 기후가 맑지 않고 좋지 않으면 분명히 일출은 되고 있는데 일출을 보지 못하고 소원을 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소원은 우리의 가슴에 늘 품고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언제든지 우리의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당장 무엇을 해 줄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을 해 달라고 소원을 빌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일주일 내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빌 소원은 바디매오처럼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가 환히 보일 수 있는 영안이 활짝 열리기를 소원합니다. 영안을 열어주옵소서. 영안이 열릴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옵소서.”라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믿음에 영안을 활짝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세계를 믿음으로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장 이루고 싶은 소원을 주님께 비시길 바랍니다.
바디매오의 소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면서 그의 소원대로 눈이 환하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서 아름다운 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이끌고 계시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더 이상 길가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바디매오는 구경꾼으로써, 관람객으로써, 손님으로써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 놓기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실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여 드리기 위하여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일꾼으로, 교회의 일꾼으로, 교회의 주인으로, 이적의 주인공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와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