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마르코
3,7-12)
Even the people who had
evil spirits, whenever they saw him,
would fall down before him and cry out,
"You are
the Son of God."
말씀의 초대
예수님은 산 이들의
구원을 위한 대사제이시다. 사제는 제단에 바칠 제물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에 제물이 필요
없으시며,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제1독서). 바칠 예물도 없어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갈릴래아의 가난한 병자들이
대사제 예수님께 몰려든다.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머지않아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셔야 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악령들이 고백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생활과 노동에
거침없는 태도를 가진 우리 마을의 가족을 대하면 힘이 느껴지고 행복하다. 이들처럼 무슨 일이건 자신에게 맡겨진 일과 해야 할 일이라면 따지거나
조건 없이 해 내는 이들이 있다.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가족의 먹거리와 빨래는 물론이고, 자식들의 병치레와 용돈, 학교 일까지 챙긴다. 심지어
남편 사업이 잘못되고 빚더미에 앉게 되면 그 뒤치다꺼리에 정신없고, 그것도 안 되겠다 싶으면 파출부로 뛰어서라도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친척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어머니 몫이다. 가부장적 전통에서
세상은 남성이 주무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어머니의 힘이 우리 삶과 역사를 떠받쳐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구역장과 반장, 레지오 마리애 단장 등
소공동체의 책임자들이 본당 챙기는 일에 거침없음으로써 본당 사목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슨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쉴 새 없이 요구되는
궂은일을 묵묵히 감당한다. 이런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 ‘모성’이라 생각한다. 모성은 지식이나 사상이 아니라 인정이며 사람의 도리고 영성이다. 그러나 불행하다. 모성이 사라져 가는 시대!
이는 금융 자본의 경제 구도와 거의 쓸모없는 교육열과 정신노동, 경제 문제로 판단하는 결혼과 자녀 출산 등에서 온 것이다. 재앙이다.
모성은 삶을 창조해
내는 사랑이며 하느님의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병고에 시달리거나 마귀 들린 이들을 무상으로 고쳐 주셨다. 치료받을 길 없는 가난한 무리가 먼
고장에서까지 연일 몰려들어도, 예수님의 연민의 눈길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인 모성은 당신 몸을 돌보지 않으시고 거침없이 받아 주셨다. 어머니와
하느님의 일에는 걸리거나 막힘이 없다. ‘대한민국 어머님들, 파이팅!’
언젠가 어떤
강의에서 흰 옷 입은 여성과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이 나와 패스하는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이 중 흰 옷을 입은 여자들은 몇 번 공을 패스하는지를
맞춰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집중해서 흰옷 입은 여성들이 몇 번 패스하는지를 세었습니다. 패스가 모두 끝나고 강사는 몇 번 패스를
했는지 물었지요. 저는 자신 있게 16번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16번이 실제의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혹시 고릴라를
보셨습니까?”
뜬금없이 웬
‘고릴라’를 이야기하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도 묻더군요. 저는 이상한 점을 전혀 찾지 못했었고, 또한 패스를 하는데 무슨
고릴라가 나왔나 싶었습니다. 강사는 이 동영상을 처음부터 다시 보여줍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중간에 고릴라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나와서 한
가운데에 서서 가슴을 치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패스를 하던 검은 옷을 입은 여성 한 명이 중간에 밖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뒷면
벽을 가리고 있었던 커튼 색깔 역시 바뀌는 것입니다.
다른 동영상을 틀은
것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이상한 점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동영상이 아니라 똑같은 동영상이 분명했습니다.
문제는 제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즉, 흰 옷 입은 여성이 패스하는 것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을 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동영상이었습니다. 즉, 어떤 것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느끼고 깨닫는 것도 달라지는 것이지요. 하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곳에 가고 싶은데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으면 당연히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아닌 다른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주님을 만나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이 보려는 것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불치의 병도 나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바라보고, 또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처럼 무서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알아 뵙고 기쁨에 넘쳐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다(데일 카네기).
미래를
대비하라(김진배, ‘내인생을 바꾸는 유머 한 마디’ 중에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남자편) 1. 건강해야
한다. 2. 돈이 있어야
한다. 3. 딸이 있어야
한다. 4. 친구가 있어야
한다. 5. 마누라가
있어야 한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여자편) 1. 건강해야
한다. 2. 돈이 있어야
한다. 3. 딸이 있어야
한다. 4. 친구가 있어야
한다. 5. 남편이 없어야
한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습니까? 단순히 유머가 아니라고도 말하지만, 어쩌면 여기에 나오는 것보다 더 필요한 분이 계십니다. 주님을 만나고 함께
하지 못한다면, 위에 꼭 필요하다는 것 역시 쓸데없는 것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안전대책 중 최고는
죽음 후 영생
-이기정신부-
안전 불감증으로
사고가 잦은 걸 보면 국민성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
빨리 빨리’를 찾고
공짜나 작은 수고로 큰 효과를 탐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안전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고 인생과 영혼의 안전까지도 생기지요.
목숨안전은 육체의
건강일 테고 인생안전은 노후대책이 아닐까 합니다.
목숨과 인생의 안전
때문에 보험회사들이 그렇게 야단들 아닙니까.
그러나 안전대책 중
최고는 죽음 후 영원히 살 내 영혼안전 같은데요?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코 3,9)”
< 축복의
통로, 옆구리 >
-전삼용신부-
사제의 역할은
신자들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고 또 하느님의 축복을 신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하는 사제가 제물을 바치고 또 축복을 전해주고 하는 것이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옆구리를 통해서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꼴찌를 하다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경북대 총장까지 역임한 박찬석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
前
경북대 총장 박찬석
-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주는 방식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 1호를 잡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멜키체덱의 대를 잇는 대사제로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방식 또한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사제로서 속죄제물인 당신의 피를 들고 주님의 성소인 하느님 앞에서 우리 죗값으로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피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뽑아내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하와에게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갈비뼈가 축복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뽑아낸 피와 물로 태어났습니다.
피와 물은 성사를
의미하는데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태어난 그리스도의 하와들인 것입니다.
옆구리를 찢어
갈비뼈를 빼 내든 피와 물을 빼 내든 그 모든 행위는 바로 참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그 통로로 우리를 당신 안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노아의
방주에 문을 옆으로 내어서 그 밖으로 성령으로 상징되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 그 비둘기를 받아들이는 땅이 축복을 받게 했던 상징적인 행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통로는
바로 교회로 상징되는 짐승들이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축복과 구원의 통로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옆구리를 뚫어 하느님의 축복이 인간에게,
또 인간이 그
통로를 통하여 그분 심장에 계시는 하느님께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멜키체덱처럼 빵과 포도주만을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당신 생명을 봉헌하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며칠 전 인터넷에서
건강한 사람들의 생활 습관을 본적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
책을 많이 읽는
사람,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
남을 돕는
사람,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목표가 뚜렷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주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점수가 깎이지만 대체로 건강한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습관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교회도 건강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유럽교회는
사제,
수도자 성소의
급격한 감소,
신자들의
냉담,
신자들의 고령화와
그로인한 성당의 폐쇄’등으로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황님의
방한,
신자들의
증가,
성당의
신축,
지속적인 성소의
증가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교회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
성소가 감소하고 있고,
청년과 주일학교
학생들을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냉담자들이 늘고
있고,
급속하게 고령화
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바오로
6세 교황의 사도적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
반포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40년 전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었고,
대안을 제시하였던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는 어쩌면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가 다시금 파란불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백령도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 신부가 백령도
본당 신부였고,
동생 수녀가 백령도
본당에서 수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령도로 가는
뱃길이 멀고 험했습니다.
가는 날 파도가
심해서 많은 사람들이 뱃멀미를 하였습니다.
저도 속이 좋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도,
군인들도 힘들어
했습니다.
백령도에 사는
주민들을 보니,
모두들 자리를 펴고
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파도가 심하면 자연스럽게 바닥에 눕는 법을 배웠던 모양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도다.”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뜻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염불을
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저는
감곡매괴성모성당에서 4년 5개월의 소임을 마치고 새 임지로 가게 됩니다. 교구 모태성당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다는 것은 큰 은총이었고 감사와
기쁨을 안고 갑니다. 많은 부족함에도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함을 다듬어 주시는 주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임지에서
오래있지 못한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업무를 파악하고 무엇인가 멋있게 하려고 하는데
“떠나라”는 명령은 미련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복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 속을 다 보여주면 실망할 사람이 많을 터인데 부족한
허물들을 숨겨둔 채 훌쩍 떠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안주할 틈도 없이 떠나는 것도 분명 은총이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은총을 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쳇말로 인기가 대단하셨습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기란 결코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물건입니다. 거기에 편승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이현주). 인기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거룻배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분명 사람의 눈에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악령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원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덩어리
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인기가 치솟을수록 한발
물러서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열매까지 맛보려 한다면 분명
욕심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상선신부-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히브 7,25)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죄도
짓고 남을 미워도
하고 기도도 많이
못하고 남을 많이 돕지도
못하는 내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염려되기도
하지요?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걱정은
붙들어매라고 하네요. 예수님은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사람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그런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신다네요.
그러니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늘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보잘것없는 저를
기억해 주십사 아뢰기만
하십시오.
이미 구원의 길로
들어 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코3,11) -김대열신부-
복음서 곳곳에서
비슷한 내용의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악한 영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먼저 알아봤다는 대목입니다. 참 묘한 생각이
듭니다. 악한 영도 영적인 존재니 그럴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왜
사람들은 그리도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을까요?
항상 그분 곁에서
그분의 모습과 말씀을 듣고 지내던 제자들조차 반신반의 하면서
많은 갈등 속에
있었다는 것을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령 강림
이후에야 비로서 순교를 마다 않는 확신에 이르게 되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천사나 악마처럼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늘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감을 벗어난 것에
대한 판단은 주저하게 되어있고, 판단을 하더라도 확신에 이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만큼이나 믿음에 대해 그리도 많이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을 한다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선과 악의
식별에 자주 실패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악한 영도 선한
영도 악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선을 없애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도구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의 약함을 이용해서 악을 흥하게 하고 선을 없애려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려 하는 것이 악마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한 영은 우리가
악의 유혹을 이기고 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고자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매
순간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해보지요. 우리
모두는 분명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는 쉽지 않은 조건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식별해야만 합니다.
악한 영이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악을 선으로 믿게 하거나, 아예 우리의 마음을 무디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던
철저하게 교묘하고 악한 방법입니다.
선도 최선을 다해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길을 걷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방법이던
철저하게 선한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결정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혹에 이길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기도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
-오래된
미래-
-이수철신부-
아침
영어미사중 입당송의 느낌이 각별했습니다.
"Take
up your cross and follow me, mine is the way to life"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내 생명의 길이다.)
나름대로
주어진 공동체의 십자가란 짐을 충실히 지고
주님을
따라 책임적 존재로 사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자 구원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 장면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공동체가 떠오릅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모두를 포함한 자연친화적 공동체입니다.
'오래된
미래'의 공동체요 교회공동체의 원형처럼 생각됩니다.
외딴
곳의 산에서 기도하시고 갈릴리아 호수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갈릴래아
호수 주변 언덕에 앉은 많은 이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요셉수도원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아쉬웠던 것 하나는 호수였는데
여기
뉴튼수도원엔 호수가 있어 수도원을 참 풍요롭게 합니다.
얼굴
하나야/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호수만 하니/눈 감을 수 밖에
호수곁을
지나며 바라볼 때 떠오르는 정지용의 호수라는 시입니다.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신기합니다.
지난
1.17일(토;미국시간) '호수위에서 기적!'이라는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뻔했습니다.
그
날은 몹시 추운 맑은 날씨에 호수는 약 20cm두께의 얼음으로 덮여있었고
마침
호수 한 복판에서 얼음을 깨고 낚시 하던 맘씨 좋은 미국 형제가 하나 있었기에
핸드폰
사진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은 확 풀린 영상의 날씨에 온종일 장마처럼 비가 내렸고,
이후의
계속 풀려가는 날씨로 호수를 걷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참 좋은 추억을 선물하셨습니다.
한국에
가도 뉴튼수도원의 묘지와 호수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 같아요.-
"듣고
보니 갈릴리 호수 같네요!“
주고
받은 카톡 대화 내용도 생각납니다.
크기는
갈릴래아 호수보다 훨씬 작지만 평화로운 정경(情景)은 갈릴래아 호수를 꼭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활동무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민초(民草)들의
삶의 터전, 갈릴래아 호수는 그대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역시 모두를 받아 들이고 살리는 넓은 연민(compassion)의 호수와 같았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흡사 예수님의 공동체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니
제 카톡 역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현대문명이
선물한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제 카톡의 공동체는 결코 엘리트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바로 예수님의 공동체이자 제 카톡의 공동체입니다.
어제의
아주 평범한 체험도 저에겐 깊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어,
안경 나사가 어디있지?“
돋보기는
책 보거나 기도서를 보는데 필수인데 돋보기를 들으니 안경다리가 뚝 떨어졌습니다.
참
암담했습니다.
그
미세한 안경다리 나사를 찾을 길이 막막했으니 말입니다.
한참만에
눈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나사를 방바닥에서 찾아 조립하니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하던지요.
아무리
좋은 제품도 시시해 보이는 작은 부품 하나만 빠져도 쓸모없어 집니다.
바로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모두가
모여 더불어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공동체입니다.
소수정예를
부르짖는 공동체주의자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비인간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전
풋열심으로 철없을 때는 소수정예를 말했지만 이젠 완전히 철회했습니다.
힘들어도
모두를 품에 안은 연민의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공동체입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엔 대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중입니다.
일하는
미국 노동자들의 공동체도 참 보기 좋습니다.
대부분
구김살이 없고 밝고 활달합니다.
이색적인
것은 20대 처녀 여럿도 함께 일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혼자 일등으로 오는 이가 있다면 주님은 분명 말씀하실 것입니다.
"얘야,
네 동료들은 어디 있느냐? 좀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와라.“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가 어디있는지 담박 드러납니다.
상호치열한
경쟁 속에 상호보완과 협력의 공동체 형성을 어렵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입니다.
이럴수록
공감과 연대의 실천공동체 형성이 절실합니다.
뉴튼수도원
게시판에 붙은 왜관본원의 인사명령지를 보면서도 연민의 공동체를 발견합니다.
모든
수도형제를 살게하는, 살리는 배려 가득한 인사명령처럼 느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바 능율과 효율의 엘리트 소수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이런저런
모든 이들이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연민의 공동체입니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오늘의
복음 장면은 그대로 예수님의 연민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있는
이나 없는 이나, 의인이나 죄인이나, 강한 이나 약한 이나, 건강한 이나 병든 이나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연민의 공동체입니다.
예나
이제나 당신의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대사제이신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스스로 고백하며 뛰쳐나와 저절로 치유가 이뤄지니 예수님의 내공의 깊이가 놀랍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대 사제 예수님은
오늘
역시 당신 연민의 공동체의 중심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히브리서의
아름다운 묘사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대사제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며
우리
모두 당신의 연민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40,8.9참조).
아멘.
하느님을 알아보는
거룩한
여백
-기경호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활약상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께 적대감을 가졌던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작당하여 예수님을 처치하기로 결의했다(3,6). 그래서
예수께서는 피신하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신다(3,7ㄱ). 그럼에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갈릴래아를 비롯해
유다인들이 사는 '모든 지방에서'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들었다(3,7-8).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3,10) 이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말해준다.
먼저
예수님께 몰려든 군중들에게 시선을 모아보자. 그토록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든 상황은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한 인간적 소망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희망하는 이들, 고통과 시련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한숨소리가 예수님을 갈망하고
있다. 아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고, 교회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 예수님의 마음과 손짓으로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해주는 우리가 되어야 하리라. 하느님께 매달릴 힘도 여유도 없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제
예수님께로 눈길을 돌려보자.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자신에게 몰려든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척을
준비하라고 명하셨다(3,9). 군중들은 그분의 놀라운 능력에 끌려 너나 할 것 없이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려고 밀려들었다(3,1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이 기대하던 현세적 권능과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 사이에 불편한 마찰을 피하시려고 거룻배를 띄우신다. 그분께서는 거룻배를
이용하여 군중들과 거리를 두시고 그들을 한적한 곳으로 끌어내시어 당신께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보도록
해주셨다.
나에게
하느님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와 하느님의 능력을 알아차릴 순수함이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11)라고 외치는 더러운 영의 거짓 고백과 유혹에 휘말려 세상적인 힘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집착과 소유와 고착된 습성의 자리,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떠나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경이로운 능력을 받아들이라고
초대하신다. 멈추어 진정 나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며 진정 내 영(靈)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해보았으면
한다.
이제
하느님 앞에 멈추어 내가 해오던 것들, 내 뜻대로 살아오던 삶의 방식들을 다시 보도록 하자. 나의 사소한 몸짓과 일상의 시간들 안에서 삶의
중심이요 혼인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온 몸으로 느껴보도록 하자! 그분의 사랑이 내 안에서 샘솟도록 주님과 나
사이에 빈자리를 마련해드리도록 하자! 하루에 한번쯤은 하느님의 마음과 능력을 회상하며 자신을 다시 보도록
하자!
-한상우신부-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은 필요에 따라
불렸다가 필요 없을
때엔 버려지는
이름이 결코
아닙니다.
어둠속에서도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희망을
보게하는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어둠은 사람들안에 있는
어둠과 더욱 밀착될
뿐입니다.
분산된
마음이 또 사람들을 향할
때는 미궁과 미로
속을 반복하며 헤매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함께
해야 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구원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본질인 일치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경계심과 두려움
없는 고백이 되게 하는
건 먼저 하느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삶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로를 살게 하는
건 기도 속에서
빚어지는 고요와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올려지는 참된
신앙고백이기를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기도를 통한
침묵은 우리의 어둠을
깨끗한 신앙으로
변화시킴을 믿습니다.
새로이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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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