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상공업(商工業)
한 나라에서 생산된 공산품은 상업인을 통해서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그렇다면 상업상태를 살펴보면 그 나라의 공업형태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상업과 공업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의 상공업 상태를 상업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시찰한 외국인들은 「이 나라의 상계(商界)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극도로 부진하고 미개상태에 있다」라는 공통적인 견해를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오래 체류하고 있던 H. B. Hulbert는 「The passing of Korea」라는 책에서 「한국의 상업이란 물물교환의 범주에서 거의 진보하지 못한 상태」. 한 일본인은 기행문에서 「조선인이 상업을 중요시하게 될 때는 앞으로 100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상행위가 노점상 위주였기 때문에 일 것이다.
당시의 우리나라 상행위를 중세기적이라던가, 전근대적이라고 했는데 이런 표현 갖고는 그 실상을 표현할 수가 없다. 외국에서는 멀고 먼 옛날부터 상행위는 건물 안에서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만큼은 「장터(鄕市:향시)」라는 공터가 마련되어 있어서, 여기서 일어서거나 쭈그리고 앉아서 하게 된다. 주민들은 농산물을 갖고 나와 물물교환식의 거래로써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는 것인데 이때 물건을 파는 쪽은 「장돌림」이라는 행상인이었다. 주로 보부상(褓負商)이었는데 일부는 자유행상인도 끼어있었다.
보부상(褓負商)
보부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이다. 보상은 포목(布木), 주단(綢緞), 화장품, 기타 방에서 쓰는 물건을 보에 싸서 짊어지고 행상하는 상인이며, 부상은 도기(陶器), 철물(鐵物), 목기(木器), 건어(乾魚), 기타 일용기구를 지게로 지고 다니면서 판매(장에서)하는 행상인을 말하는 것이다. 보부상들은 「보부상회」라는 조직을 갖고 있는데, 그 우두머리를 「통령(統領)」이라고 했다. 그들은 패랭이라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특색으로 하며 보부상 상호간의 암호와 또 특이한 인사 범절과 언어가 있었다. 횡적연계가 완전하여 서로 두둔, 보호하고 대외적으로는 단체적 행동을 했다. 엄격한 규약이 있어서 만일 회원 중에서 그 규약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면 다시는 「장」을 돌며 행상할 수 없도록 가혹한 제재를 가했다.
전국에는 약 1,100개소에 달하는 「장터」가 있었는데 「5일장」이라고 해서 한달에 6회의 「장」이 서게 된다. 그래서 전국에서는 한달에 6,600번의 「장」이 서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상행위는 「보부상」이라는 행상인에 의해 수매, 운반, 판매되는 구조였다는 결론이 된다. 순전히 인력에 의해 한 나라의 모든 물량을 수송한다는 것은 수송기관이 발달되지 못했다는 점도 있으나 그보다는 우리나라의 물동량이 얼마나 미미했느냐를 잘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국민들의 생활은 자급자족 상태의 경제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좌상(坐商)
이상과 같이 「시장바닥」에서 행해지는 장사 외에 건물 안에서 상행위를 하는 소위 「전방(廛房)」「가게(가가(假家)」,「도가(都家)」라는 것이 있었다. 주로 서울을 위시해서 각 도의 감영 소재지(名道 監營 所在地) 등 대도시에만 있었다. 현재 사용하는 국어사전에도 「전방」이나 「가게」라는 단어가 남아 있는데 모두 건물과 관계되는 말이다. 조금 부연해서 설명한다.
- 전(廛), 방(房), 가게
정부는 일정한 지역에 상점용 건물을 지어주고 점포료를 징수했다. 정종(定宗) 원년에 ―자혜정교(自惠政橋)에서 창덕궁 입구까지― 좌우로 800여칸의 행랑(行廊)을 지었다. 이것이 「시전(市廛)의 시초이다」라고 나온다. 정부는 이들 「시전」에 「난전(亂廛)」을 금하는 특권을 부여했는데「난전」이라는 것은 함부로 상점을 열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정부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은 이곳에서 납품을 했으니 독점권을 가진 어용상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는데 정부나 벼슬아치의 착취가 심해 영업상 채산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전」중 가장 규모가 큰 것 6개를 「육전(六廛)」,「육의전(六矣廛)」또는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고 했는데, 일종의 도매상이었다.
1) 선전(주단, 포목상)
2) 면포전(綿布廛)
3) 면주전(綿紬 또는 明紬廛)
4)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
5) 지전(紙廛)
6) 저포전(苧布廛: 모시, 대마포상)
이상 「육전」은 시대에 따라 일부 내용이 달라졌으나 대동소이했고 나중에는 도가(都家)라는 명칭을 붙여서 부르게 됐다. 그러나 「도가」라는 것은 흔히 도매하는 집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조선시대에서는 「공동창고 겸 상점」이라는 뜻이다. 즉 「도(都)」라는 글자는 「많은 양의 상품」을 매매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동창고 겸 상점」의 건물이 크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술도가」는 술을 양조하는 곳이니 건물이 클 수밖에 없다. 청포(靑布)전도가, 어물전도가도 큰 건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방」한칸가지고 장사가 되는 업종도 있다. 소경방(昭鏡房), 금은방(金銀房), 복덕방 등이다.「방」보다 큰 장사집도 있다. 그러나 살림집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게(가가:假家)이다. 곡물 파는 곳에는 창고가 필요했다. 그래서 「쌀집」,「쌀가게,「쌀전」이다. 음식점도 규모가 컸다. 그래서 「상밥집」,「장국밥집」이라며「집」자를 썼다. 한문으로도 「상식가(床食家)」「탕반가(湯飯家)」라며「집가(家)」를 붙였다. 영어에서 Beer House나 Steak House와 같다. 술집도 큰 것은 「술전」이라고 했는데 「술전」은 후에 관(館)으로 개칭했다.「명월관」이 그 예이다.
전국적인 연쇄점 조직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개성상인이 운영하는 조직의 지방출장 상점을 「송방」, 서울상인의 것을 「경방」이라고 했다. 서울 종각 뒤에 동상전(東床廛)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백화점으로서 주단포목, 혼수용품, 관립모자(官笠帽子) 등 여러 상품을 한 건물 안에서 분야별로 나누어, 좌판(坐板) 즉 앉아서 판매했다. 따라서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동상전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소요물품을 거의 모두 살수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연립군"이라는 거간꾼이 진치고 있어 물건을 소개하고 매매를 성사시키면서 구전을 챙겼다.
- 서울의 상가
당시 서울에는 종로(鐘路) 복판 일원에 있는 「육의전」,「무슨도가」하는 몇 개 상점과 「동상전」 , 전동(典洞)에 있던 「가죽 및 모물상(毛物商)」,「보료상」 동현(銅峴)의 「신발가게」,「약종상」,「건재상」, 남대문 내에 있었던 「오방재가(五房在家: 경방, 송방과 같은 연쇄점 조직)」, 종로 뒷골목의 「입전(笠廛: 모자 판매점)」, 「소경방(거울 등속 판매점)」「금은방」등속에 있었는데 이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이들 업자가 취급하는 물건의 종류가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공산품의 전부라는 뜻이 된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어느 정도였을까? 흔히 만호한양(萬戶漢陽)이라고 했으니 서울에는 집이 10,000호 미만이었다는 뜻이다. 한 집에 7~8명이 거주했다면 서울인구는 7~8만명이다. 조선조시대의 서울이라는 도시는 이 정도였을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