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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7. 큐티
창세기 33:1 ~ 20
에서와 화해하는 야곱 - 거울의 법칙
관찰 :
1) 거울의 법칙
- 1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 야곱은 이제 뛸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면서 걷는 것도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는 앞서 요단강을 건너 보낸 가족들과 만나 형 에서를 맞이하고자 준비합니다. 레아와 라헬, 그리고 두 여종이 각기 자신들의 자식들을 데리고 에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2절.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 야곱은 먼저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에서를 먼저 맞이하게 합니다. 그리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 맨 마지막이 라헬과 요셉이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아내들과 자식들에 대한 경중에 따라 그렇게 배치한 것입니다.
- 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 야곱은 절뚝거리며 그의 형 에서에게 나아갔습니다. 일곱 번 땅에 굽히면서 절을 하고 나아갔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형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야곱의 진심이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야곱은 자신의 인생의 본질이 “야곱”, 즉 사기였고, 죄된 인생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었음을 인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지만, 죽지 않게 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최소한 이 때만큼은 야곱이 어떤 술수로 형 에서에게 나아갔다기보다는 형 에서와 화해하고자 하는 진심으로 이렇게 행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 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들, 군사와 같은 이들을 데리고 야곱을 죽이려 달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야곱이 받았었습니다. 에서가 순수한 마음으로 동생 야곱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면, 사백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남아있던 에서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절뚝거리며 일곱 번 절을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야곱을 보고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안아주고, 입을 맞추고 울었습니다. 에서의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만지시고 움직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 5절.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 에서는 야곱에게 여인들과 자식들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에서도 대략 이들이 야곱의 아내들이고, 또 야곱의 자식들이라는 것은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을 77년간 알았던 에서의 생각에 아내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에서가 생각하기에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영향을 잘 받은 야곱은 이렇게 아내들을 많이 맞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야곱은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순수하게 표현하는 야곱의 신앙이었습니다. 라반의 꼬임에 넘어가서 발생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들이 자신을 두고 경쟁적으로 자녀를 낳는 중에 두 여종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자녀들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6절.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 야곱의 설명에 감동받은 빌하와 실바, 그리고 그녀들의 자식들이 나아와 절하며 시아주버니 에서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자녀들은 처음 본 큰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 7절.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 레아와 레아의 자식들도 절하고, 라헬과 요셉도 나아와 절했습니다. 다른 자녀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데, 요셉의 이름만 등장합니다. 요셉이 라헬의 독생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향후에 요셉이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의 중심 인물로 부각되기에 모세가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들 모두를 에서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에서가 화내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기뻐하는 모습에 야곱은 큰 시름을 덜게 되었습니다.
- 8절.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 에서는 또한 자신이 만났던 양 떼와 염소 떼와 소 떼와 낙타 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드린 예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러한 예물에 대해서 아까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 9절.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 에서는 이미 큰 부자였습니다.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리는 존재였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연로해서 이삭이 직접 재산을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에서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 이삭의 재산 중에 상당한 부분을 유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거부였기에 에서가 그 영향으로 큰 재물을 이미 소유했을 것이기에 야곱이 에서에게 보낸 예물에 대해서 큰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 10절.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 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 야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보낸 예물을 형 에서가 받아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언급을 하게 됩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을 보았는데, 형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브니엘을 몇 시간 전에 경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야곱에게 형 에서의 얼굴이 그렇게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진짜 에서가 하나님의 얼굴을 담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던 야곱에게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이 남아있었고, 그 영광이 에서에게 비춰짐으로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야곱에게 비춰진 하나님의 얼굴이 에서의 얼굴에서 반사되었는데, 야곱은 그로 인해서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거울의 법칙입니다. 모세는 이 부분을 너무나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았고 경험했기에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광채가 빛났습니다. 그 거룩의 빛을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을 얼굴에 써야만 했습니다. 이 때 야곱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 11절.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 야곱은 형 에서가 자신이 보낸 예물을 받아줄 것을 강권했습니다. 에서도 야곱이 그렇게까지 예물을 주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화목제물이었고, 에서도 그것을 받아주어야 야곱이 자신에 대해서 마음 편하게 여길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물을 받지 않고 불편하게 지내기 보다는 예물을 받고 편하게 지내고자 한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만남에서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있습니다.
2) 엘엘로헤이스라엘
- 12절.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 에서는 야곱과 같이 가나안 땅, 그리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일로 가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모님 이삭과 리브가를 만나고자 했을 것입니다. 리브가가 이 때까지 생존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리브가의 유모가 이 때 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리브가도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13절.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 같이 동행하자고 하는 형 에서의 제안에 대해서 야곱이 거절하고 있습니다. 거절의 이유는 가축의 새끼들이 빠르게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맞는 논리이지만 명백한 거절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같이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 14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 야곱은 에서에게 먼저 가면 자신이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따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서는 사백 명의 장정들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기간 숙박을 준비하지 않고 달려왔기에 천천히 이동하게 되면 에서와 장정들이 불편하고 힘들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장정들을 배려하면서, 또 한편으로 불편한 동행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 15절.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 형 에서는 눈치없이 자신의 종들을 붙여서 에스코트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리고 에서가 자신을 자유롭게 행동하게 해 달라고, 그것이 자신에게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16절.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 야곱이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계속해서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된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습니다. 에서와 야곱, 이 형제들은 이렇게 서로 사사건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서는 그것을 인정하고 동생 야곱과 야곱의 가족들을 본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갔습니다. 야곱을 죽이고자 분노하며 사백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거칠게 달려온 에서가 허무하게 세일로 돌아갔습니다. 야곱이 준 예물을 받고, 화해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 야곱과 화해를 이루게 된 것이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예물이 아니라 야곱의 모든 것을 사백 명의 장정들과 더불어 약탈하고 그것을 몽땅 가지고 가도 누구도 할 말이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의 마음이 녹았고,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발하고 있는 야곱을 용서하고 한 마음을 갖기로 마음이 바뀌게 되어 순순히 세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 17절.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그곳에서 정착하고자 합니다. “숙곳”은 짐승이 사는 ‘우리’ 또는 칸막이를 한 ‘오두막’을 가리키는 ‘쑥카’의 복수형입니다. 즉 야곱은 이곳에서 정착하여 상당 기간 머물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처음 직접 경험한 벧엘이나 아버지 이삭이 있던 헤브론이 아니라 숙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이유는 위골된 환도뼈로 장거리 여행이 쉽지 않았고, 많은 가축들을 무리해서 장거리 여행을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디나가 어렸는데, 처녀가 되기까지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 18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 하란의 밧단아람에서 숙곳이 있는 세겜에 오게 된 과정이 평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반과 에서로 인해서 두 번 죽을 뻔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을 “평안히” 이르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 여정을 평안히 이동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한 내용은 숙곳에서 정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이 숙곳에서 정착함으로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 19절.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 야곱은 심지어 땅을 구입했습니다. “크시타”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승되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짐작으로 양 한 마리의 가격이라 추정합니다. 만약 맞다면 이 때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산 땅은 큰 땅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정착을 위해서 장막과 우리를 세우는 차원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땅을 구입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 20절.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것과 같이 이동 중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란에서의 여정에서 행하지 못했던 단을 쌓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서원을 이행하고자 한 것입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벧엘에 임재하시고, 언약해 주신 것과 같이 자신과 하란에서 20년 동안 동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스라엘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심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서 믿음의 조상의 계보를 이어감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가르침 :
1)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꼼수를 썼지만, 브니엘의 체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야곱 스스로도 걷는 것도 힘든 몸이 되었기 때문에 형 에서와 사백 명의 장정들에게서 피할 길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면서, 형 에서의 마음을 얻고자 절뚝거리며 일곱 번 절을 하며 나아갔습니다. 그 때 에서는 야곱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했습니다.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고, 그 영광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에서의 마음이 녹았습니다. 분노하고 야곱을 죽이겠다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서 동생 야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을 건드리지 않고, 야곱의 소유물에 대해서도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야곱을 끌어안고 울며 그 감동을 나누었습니다. 야곱은 그 과정에서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얼굴 빛이 야곱을 통해서 에서에게 반사된 것이었습니다. 거울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과 에서를 감동시키심으로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나안에서 마음 편히 정착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은 야곱과 맺은 언약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그리고 헤브론으로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숙곳에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 상태가 움직이기 어려워서 그랬을 것이고, 또 가축들을 이미 무리해서 이동해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계속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디나 강간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세겜의 족속들과 너무 가까이 하게 됨으로 혼합의 위험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00 크시타에 구입한 밭은 세겜 족속들과 너무 가까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세운 야곱의 장막들은 안전했지만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3) 야곱은 이제 자신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된 것에 대해서 기쁨이 있었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자신이 이스라엘이 되어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간 것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제사를 통해서 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고백이 벧엘로, 헤브론으로 이어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족속들과 혼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이 부자가 되는 것, 야곱이 안전하게 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셨습니다.
적용 :
1) 야곱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가나안으로 평안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야곱이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을 통해서 가나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셨다는 것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서를 만남에 있어서도 진실함으로 대하고, 에서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을 얼굴을 보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향후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모든 성도들의 신앙 고백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고백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져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도 주님을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주님이 죄인인 나를 구원해 주시고, 져주심으로 이스라엘이 되게하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2)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벧엘로, 헤브론으로 가야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머물고자 한 곳에서 다시 긴 시간 발목이 잡혀 머물게 됩니다. 내가 신앙에 있어서 발목잡히고 있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은혜로 발목잡힌 것에서 벗어나 주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