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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작품 · 독자
- 수필문학의 미래를 위한 고민
허상문(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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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삶의 상황은 갈수록 기술화되고 물질화 되어가는 가운데 이를 체험하는 심미적 영역도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기술과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적 삶이 낳은 물상화되고 비인간적 양상은 예술과 문학의 미적 주체와 자율성을 소멸시키거나 왜곡시켜 가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서나 그렇듯이, 위대한 문학작품을 남긴 작가들의 공통점은 시류에 쉽게 흔들리거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잃지 않은 채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남긴다는 데 있다. 때로 이런 정신은 승화하거나 발전하여 한 시대와 사회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되기도 한다. 진정한 예술과 문학의 정신은 정치와 자본 혹은 문화와 기술 매체들에서 동어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무기력과 타락에서 벗어나게 한다. 시대가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위대한 작가들은 자신들의 문학을 통하여 되풀이해서 반문한다.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로서, 삶을 자율적으로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 또한 이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얼마나 깨어있는 정신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보며 사색하고 있는가.
새로운 방식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삶과 세상에 대한 명상과 사색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삶과 세상을 반성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우리는 ‘전망’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인데, 전망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는 성찰과 분석정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찰과 분석 정신이 부재하거나 해이하게 되면, 인간의식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추상적인 논의 속에 유폐되기 때문에 진정한 사유는 불가능하게 된다. 사유란 삶과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자아와 세상과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고, 자의적 주장이나 추상적 이론에 대한 강요를 탈피하게 한다. 자의적 주장에 의한 소통의 결핍은 공동체 의식의 쇠퇴를 가져온다. 말 그대로 공동체 의식이란 타자와의 소통에서 싹터 나오는 공감대의 확산이 발휘되는 의식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편집증적인 공리주의와 이기주의에 저항하고 사회에 완고하게 드리워진 규범과 코드를 해체함으로써 공동적 인간 삶을 위한 에너지를 생산한다.
우리 시대에 소통이 모자라고 공동체의식이 부재한 가운데 삶에 대한 절망의 강도는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절망은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을 갈망하는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과 시대를 위한 전망이 그 진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절망과 전망은 공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지배적인 좌절과 절망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구체적 해답을 찾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지만, 시대와 역사, 개인과 사회의 불연속성과 불투명성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불만과 불안에 휩싸여 있는 것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문학에서도 삶으로부터의 고립과 단절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지금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진정으로 전망하는 작가들은 흔치 않다. 오히려 많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삶의 상황은 그들이 전투적으로 겪어야 하고 새로운 차원의 현실로 거듭 만들어내기 위한 고투이기보다는 절망하고 좌절하여 자포자기 하는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이른바 포스트모던 혹은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현대문학과 현대의 지적 흐름을 지배하고 있다.
라캉의 이야기대로 진정한 자아는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타자와의 차이 혹은 간극을 자각하지 못하고 거울에 비친 모습만을 자아라고 생각할 경우 유아상태의 ‘거울 단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흡사 제국주의 담론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경계를 설
정하고 자신들의 약탈적 행위를 다양한 문화적·도덕적·환경적 요인을 거세한 채 오직 문명이라는 척도에 따라 생각하는 거와 같이, 세상과 타자와의 관계를 자아 중심으로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순간, 자아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은폐되어버리고 만다.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망적인 현재의 모습에서 미래를 위한 인간과 삶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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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작가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만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 것으로 착각하면서 점점 더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좀처럼 인간과 삶에 대한 전망을 이루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를테면 작금의 한국문학, 특히 수필문학의 담론은 사고의 상투화, 주제의 일상성, 권력의 편재성에 빠져있다.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의 본질은 미셀 푸코가 언명한 바와 같은 ‘문학의 문학’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문학’이란 문학의 본질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체계나 권력에 의한 지배에서 벗어나서, 그 본질을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담론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학의 순수성과 참여성, 작가와 독자, 문단 권력의 이편과 저편의 거리 사이에 가로놓인 채 분화되어 고착된 문학적 기능과 역할을 종합하여 재정초함으로써 그 본질적 의미는 담보될 수 있다. 이런 실천적 노력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떠들어댄다고 해도 우리문학과 수필의 발전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현실을 지배하는 담론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무의식적 수용을 반성하는 메타비평적 의식과 글쓰기를 통해, 문학이 안고 있는 모순과 극복방안에 대해 소통하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그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글쓰기와 글읽기의 사회적 의미, 즉 ‘문학적 소비’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오래된 글이지만, 평론가 김현의 ‘문학적 소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학적 소비란 작품의 무상성을 존중하는 소비, 책읽기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소비이다. 그 소비는, 혼자서 읽는다는 의미에서는 고독한 소비이며,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는 의미에서는 연대적인 소비이다. (중략) 문학적 책읽기는 고독하다는 의미에서 비사회적 책 읽기이며, 연대적이라는 의미에서는 사회적 책읽기이다.
-김현, 「에스카르피의 문학사회학」
글쓰기에서 글 읽기까지의 행위란 일종의 연대적인 소비행위이며, 이는 곧 문화적 힘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음을 김현은 역설하고 있다.
사실 문학에서의 공동체 의식이란 작가-작품-독자의 관계에 의해서 맺어질 수 있으며, 이것은 ‘힘 있는 문화적 행위’로까지 발전될 수 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공감대를 이룰 수 없는 문학은 상품화와 변두리화의 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올바른 문학이 될 수 없다. 오늘날우리 작가들이 경험과 인식의 한계에 직면하여 편협한 세계관에 갇혀있는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독자가 작가의 경험을 이해하는 작업은 작가와의 ‘소통’에 의해 가능할 수 있다.
문학작품을 통한 독자와 작가의 ‘일차적 소통’은 텍스트를 통해서이며, 이것은 흔히 텍스트의 주제 혹은 이미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엄격히 말하면, 주제와 이미지는 그 개념적 범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 중첩된다. 하나의 텍스트에서 주제란 그를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드러내는 이미지에 다름 아닌 것이다. 주제는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고 이미지는 주제를 통해 드러난다. 독자들은 작가가 사용하는 이미지와 주제를 통하여 텍스트와 소통하고 작가와 소통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은 기호에 따라 판단될 수 있는 심미적 판단의 대상이기 이전에 주체적 인간 경험이 드러나는 공간이고, 그것을 읽는 사람의 경험과 합치되는 만남의 자리이다. 오늘날의 삶과 문학에서 확산되고 있는 인간의 ‘고립성’이라는 인식론적 단절을 가장 쉽게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문학 텍스트를 통해서이다. 문학 텍스트의 관계망의 구축을 통하여 ‘작가-작품-독자’ 사이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물론 그 단절도 가능할 수 있다. 문학작품을 매개로 하여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감의 지평 위에서 삶에 대한 심층적인 성찰과 전망을 이룰 때야말로 진정한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이 찾아질 수 있다.
이를테면, 한편의 훌륭한 수필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미지나 주제는 작가가 바라본 대상에 대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에 동화된 삶에 대한 작가의 총체적 경험이다. 한편의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장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필에는 작가의 주관적·정서적 경험이 송두리째 담겨 있다. 그러한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과학자가 꽃을 분석하듯이 이해하거나 해석해서는 안 되며, 작품 속에 담겨있는 삶의 경험이 어떻게 주제화 되었는가를 새로운 체험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한 편의 작품을 올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독자와 작가라는 두 사람의 경험의 동화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럴 경우, 문학작품이란 의식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독자와 작가 사이의 지적·이데올로기적 결집에 의해 완전한 공감은 이루어지게 된다. 다시말해 문학작품이란 그 속에 담긴 문장과 단어와 의미의 객관적 구조면서 동시에 작가의 숨은 정신의 표현이거나 사유의 총화이다. 이는 문학이 ‘어떤 저자의 사유의 총체적 경험’, 이를테면 정신의 최선의 상태가 사유에 있다고 한다면, 그 대상 또한 사유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사유’ 라는 명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윤기의 수필 「오래된 미래」를 살펴보자.
내가 여행했던 무수한 나라 내가 지나쳤던 무수한 도시들은 천천히 내 뇌리를 떠나고 있다. 그 자리에 내 삶의 중심인 고향의 선산 자락이 들어서고 있다. 고향의 선산자락은 변하지 않는다. 신화도 변하지 않는다. 흙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고 ‘장차 올과거’이기도 한다. ‘예스터-모로yester-morrow’, 어제와 내일이 혼재하는 시제(時制)를 나는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살면서 어제와 내일의 이음매가 되고 싶어한다.
- 이윤기, 「오래된 미래」
위의 글이 실린 『시간의 눈금』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이윤기의 사유는 지금의 현재 시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사유의 경계’를 ‘시간의 경계’ 속에서 풀어놓았을 때 비로소 의식의 진화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언제나 네모난 틀에 갇힌 사고를 벗어나고자 하며 그럼으로써 사유의 진화는 가능하게 된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이윤기의 사유는 역사와 신화를 대할 때에도 한 곳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 작가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 앞에서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은 것 등등,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도출하려던 그에게 육체와 영혼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이윤기, 「20세기의 오뒷세우스-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것을 읽어낸다. 전체를 위한 전망은 하나의 중심으로 모든 현상을 모으고자 하는 것이지만, 개별과 단편으로 흩어져 있는 주체들을 관련지어 하나로 집중되고 종합될 때 새로운 전망은 가능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삶의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의 근원은, 지나친 선택의 강요 혹은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요구하는 데 있는 것인지 모른다. 현대적 삶의 양식은 다원화되어 있으며 그 어느 것에도 인식의 근거는 존재한다. 삶의 모든 부면에서는 나름대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근거가 있다. 그 근거의 어떤것도 단언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지식인의 세계관이 노동자나 농민의 세계관보다 올바르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세계관이며, 동시에 거부될 수 있는 세계관이다. 선택의 타당성은 정황에 따라 판단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선택 자체의 진위를 구분할 수는 없다. 하나의 세계관으로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재단할 수 없듯이, 이것은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문학작품들은 나름대로 작가의 상처를 숨은 원리로 간직하고 있다. 그 상처는 개인적 혹은 역사적 삶의 모습을 아우르는 것일 텐데, 최소한 그것들은 피상적이지 않고 깊이 있게 육화된 것이어야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어떤 상처가 당사자들에겐 상처일 수 있지만, 다른 인물들에겐 희망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인물들에겐 절망일 수도 있다. 길항하는 것은 바로 상처들이다.
훌륭한 작품은 길항하는 상처들을, 한 인물이나 집단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거부하고 가능한 한 여러 인물들의 상처로 확대시킴으로써 모든 인간과 집단들에게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현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작품에서 많은 상처는 우리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욕망의 사회학’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은폐된다.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은 제각각의 개체성이 강조되면서 득세하고, 그 현상의 배후에는 각종의 집단적 문화를 형성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앞서도 비추었듯이, 현대문학 작품에서도 개별자들의 고립성이 유난히 강조되는 이미지들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허다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적 소외와 고립, 그리고 극단적 이기주의로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개인들이 흔히 비극적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작가들에 의해 그려지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비극적 존재들이며,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 외부는 물론 내부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개인적 외상과 내면을 살피고, 그러한 개인성을 만든 소외와 고립과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언어의 질서와 직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작가에 의해 그려지는 언어의 질서는 그 자체가 바로 현대적 삶의 풍경이다. 그러나 현대적 삶에서는, 김용준의 수필 「매화」에서 그려지는 바와 같은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은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
나는 먼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어찌어찌하다가 우리는 이다지도 바빠졌는가. 물에 빠져 금시에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 친구 인사나 한 자였다면 건져 주었을 걸’하는 영국풍의 침착성은 못 가겼다 치더라도 이 커피는 맛이 좋으니 언짢으니 이그림은 잘되었느니 못되었느니 하는 터수에 빙설을 누경屢徑하여 지루하게 피어난 애련한 매화를 완상翫賞할 여유조차 없는 이다지도 냉회冷灰같이 식어 버린 우리네의 마음이리까? -
- 김용준, 「매화」
현대사회에서 “냉회冷灰같이 식어 버린 우리네의 마음”은 일상성과 세속성에 갇힌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지만, 무덤과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오이디푸스와 햄릿과 파우스트가 되어 살아남는다. 비록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낙관적인 미래와 삶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지않았다. 사회는 더 이상 전망만으로는 현실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문학은 언제나 더 나은 삶의 전망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인간과 세상에 대하여 인식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들이 왜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고 존재할것인가라는 인식의 기저를 탐색해 왔다는 점에서 문학은 항상 설득적이다. 문학은 인간과 세상의 가장 내밀하고 높은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함으로써 깊은 인식과 전망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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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 본질적으로 작가의 삶의 체험에 기초하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수필은 삶의 과정에서 생겨난 온갖 체험을 통하여 타자와의 ‘소통’을 이루고자 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실 문학의 실천적 과제란 삶과 소통하면서 새로운 삶의 전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아니던가. 문학작품이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의 현실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듯이, 수필문학을 통해 강조되어야 할 소통 역시 새로운 삶의 전망을 향한 상상력과 정서의 형태화이다. 오늘날 삶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너그럽고 풍요로운 정신적 소통의 결핍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수필은 작가가 포착한 인간과 삶에 대하여 독자와 공감함으로써 새로운 전망을 이끌어낼 수 있는 문학양식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수필문학에 반복되는 개인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개인의 시각으로부터 나아가 타자와 세상에 대한 자각과 인식을 통해서이다. 성찰과 소통을 전제하지 않는 문학은 경험적 삶의 모순을 돌파하는 대신 관념적이고 자의식적인 것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활동’(칼 훔볼트)이라는 명제에 반드시 동의치 않더라도, 언어가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눈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문학적 인식의 출발점은 언어와 의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의 추수에 매혹되고 그것을 뒤따르는 사람이 매개가 되어 작가의 삶의 체험을 독자에게 올바르게 옮기고 전달하는 것, 이런 작업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작가의 소명이라 할 수 있다. 이 소명들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에야 건강한 인간공동체는 이루어질 수 있다. 작가들은 계속해서 개인을 호명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행자들이어야 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과 희망에 대한 꿈은 일차적으로 모든 개인들이 온전한 ‘문제적 개인’(루시앙 골드만)일 때 가능할 수 있다. 억압이나 지배의 굴레에 묶이지 않은 창의적이고 해방된 사유를 가진 자유로운 개인이 결국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 선명해지고 문제적 개인이 된다면 사회를 위한 공동체의식은 보다 뚜렷한 관계로 성립된다. 문학의 위상이 잡지의 통속적인 추문과 같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는 오늘날, 문학의 힘에 대한 요구가 더욱 강력하게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과 세상에 공감하지 못하는 문학과 문학작품은 상품화와 주변화 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은 한 시대의 진정한 문학으로 기여할 수 없다. 작금의 포스트모던 시대일수록 작가의 작품은 세상과의 다양한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문학적 전망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 우리 수필도 작가와 독자 사이의 폭넓은 공감의 형성과 확산을 통해 우리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중요한 문학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하며, 한국문학에서 문학적 실천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녀야 한다. 이 시대 우리들의 삶과 문학에는 절망과 전망사이의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그 심연을 어떻게 온전히 건널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전적으로 작가와 독자의 몫이다.
약력
- 『오늘의 문예비평』 『녹색평론』 『문학과 사회』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평론가로 활동
- 문학평론집 『폐허속의 비평』, 산문집 『오로라를 기다리던 시간』, 영화평론집 『우리 시대 최고의 영화』, 번역서: 『생명의 불꽃, 사랑의 불꽃 –D.H. 로렌스의 에세이』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신곡문학대상, 한국에세이평론상 등을 수상한 바 있음
- 문학평론가,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영남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로 있음
츌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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