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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을 잊은 예루살렘
겔 16:15-22
15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16 네가 네 의복을 가지고 너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17 네가 또 내가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18 또 네 수 놓은 옷을 그 우상에게 입히고 나의 기름과 향을 그 앞에 베풀며
19 또 내가 네게 주어 먹게 한 내 음식물 곧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네가 그 앞에 베풀어 향기를 삼았나니 과연 그렇게 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드려 제물로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21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겔 16:15-22 / 그런데도 너는 내가 도와준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네 아름다움과 명성만을 뽐냈다. 이제 너는 기고만장하게 되어 지나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네 아름다움을 가지고 유혹하였다. 너는 아무에게나 네 몸을 내맡기고 음행을 저질렀다. 16) 너는 내가 만들어 준 색동옷을 꺼내다가 우상들을 섬기는 곳에 펼쳐 놓고 그 위에서 음란한 짓을 벌였다. 너는 그렇게 다른 남자에게로 가서 음란한 여인이 되었다. 17) 너는 내가 선물로 준 금과 은도 가져다가 사내의 형상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과 음란한 짓을 하였다. 18) 너는 내게서 선물로 받은 색동옷들도 가져다가 그 사내의 형상들에게 입혀 주었고 또 나의 기름과 향도 가져다가 그것들 앞에 제물로 바쳤다. 19) 또 내가 별미로 준 음식, 곧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로 구운 떡도 가져다가 그것들 앞에 차려 놓고 기쁘게 해주었다. 네 행위가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20) 그뿐이 아니다. 너는 훨씬 더 흉악한 짓을 하였다! 너는 우상들과 음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네가 낳은 내 아들들도 그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쳐 잡아먹히게 하였다. 21) 너는 네가 지은 죄만으로도 부족하여 내 자녀들을 짐승처럼 잡아서 그 우상들에게 불살라 제물로 바쳤다. 22) 너는 이제 그런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되었다. 네가 피투성이 알몸으로 허허벌판에서 버둥거릴 때에 내가 해준 일이며 오늘날까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워 주고 입혀 주었는가를 너는 모두 잊어버렸다.
하나님은 강보에 싸지도 않고 핏덩이로 들에 버려진 예루살렘을 거두어 아름답고 영화롭게 성장시켜서 왕후의 지위까지 올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이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다고 탄식하시며, 그들이 어떻게 우상 숭배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진 예루살렘(15-19) 하나님에게 사랑받고 왕후가 된 예루살렘이 자신의 화려함과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며 우상을 섬기는 변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명성과 화려함을 하나님보다 더 믿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영화와 명성을 오히려 우상 숭배와 바꾸어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산 위와 골짜기에 산당을 꾸몄습니다(16). 심지어 그곳에 남자 우상을 만들고 수놓은 옷을 그 우상에게 입히고 하나님께 드릴 기름과 향으로 우상을 섬기며 행음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금, 은장식품으로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이 주신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맺은 결혼 계약을 배신하는 행위였습니다.
여호와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예루살렘(20-22) 유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를 위하여 그들의 몸과 제물, 음식물과 심지어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과 딸들을 몰록신에게 바치기 위해 불더미 속을 걸어가게 하거나 두 불기둥 사이를 통과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물로 삼아 불살라 버리기도 하였습니다(Matthew Henry). 본 구절에서는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한 것을 강조하며 회복할 수 없는 잘못임을 지적합니다. 이방민족의 가증한 우상 숭배 풍습을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벌거벗은 핏덩이요 버림받은 아기와 같았던 자신을 구원하고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가증한 일과 우상 숭배를 일삼았습니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배신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기억하고, 그분께 온 삶을 드려 헌신해야합니다.
적 용: 당신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간과 건강 그리고 물질과 재능 등이 당신의 손에 들려 있다면 빈손으로 이 땅에 태어났던 것을 기억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상에게가 아니라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해졌을 때 사람들은 쉽게 하나님을 떠나 세속화 되어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어떻게 하면 배신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들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지키며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고 또한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우상에게 내어 주지 말라
에스겔 16:20-21 / 김근중 목사
본문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은혜를 설명하고 그에 반한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망덕한 배역 행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1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근본은 이방 족속이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배꼽 줄도 자르지 않고 소금물로 정결케 하지도 않고 강보에 싸지도 않고 피투성이 채로 광야에 버림받은 아이와 같이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족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치 버림받은 아이를 불쌍히 여겨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기름진 음식으로 먹이고 장신구를 채워 주고 교육을 시키고 훌륭한 처녀로 기른 것처럼 양육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부요하게 되자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우상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우상에게 제사하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심지어는 몰록 우상을 섬기면서 자녀를 제물로 드리기 위해 불사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겔16:1-21).
우리도 근본이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구원하고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오늘날까지 말씀과 성령으로 양육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영적인 은혜뿐 아니라 육체와 물질에 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고 다른 대상 곧 보이지 않는 우상을 음란하듯이 사모하며 따라갑니다. 그것들이 현재와 미래에 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학식이 성공과 행복을 줄줄 알고 그것들이 모든 고통과 고난과 죽음에서 건져 줄줄 알고 인생의 모든 자본을 거기에 투자합니다. 그 증거는 자녀교육에 대한 부분에서 잘 드러납니다.
1. 정신적으로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1. 돈을 따라가게 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돈에 결부시키고 돈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도 돈 놀이하는 게임을 하게 합니다. 그 정신이 오로지 돈을 목표로 하게 하여 황폐화 시키고 있습니다. 수년 전에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어떤 식당에서 점식 식사로 갈비탕을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식당 주인인지 종업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아주머니의 어린 딸이 들어왔습니다. 그 어머니는 딸에게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인사를 시켰습니다. 얼마 동안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아마 햄스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 머리에 충격을 주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햄스터를 사 달라고 하면서 "엄마 돈 많이 벌어서 사줘 응?" 그 아이의 사고는 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돈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그 생각이 지속된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풍요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2. 육체를 따라가게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절대화 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어머니에게 고등학생 딸이 있습니다. 그 학생의 모든 사진 포즈는 손으로 V자를 그리며 얼굴을 가립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이 그 어머니에게 그 딸의 사진을 모두 보여 주며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의 의도는 그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받은 상처로 자존감을 상실하므로 모든 일에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은 충격적입니다. "이번 방학 때 코 수술 해 주어야겠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물들여 주고 악세사리 달아주고 화장해 주고 살 빼게 하고 수술시켜 주려고 하니 아이들은 당연히 외모 지상주의 사고를 가지게 됩니다. 외모의 컴플렉스를 느껴 외모 때문에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직업을 가지려 할 때 외모를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옳지 못한 세속적 관념에 노예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가 어떻게 생겼든지 건강한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좋은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3. 학식을 따라가게 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인생의 목표로 삼게 하고 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 가운데 목사님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신학교를 가라고 해서 신학교를 갔습니다. 그런데 1학년 마치고 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신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학력고사를 봐서 일반 대학을 들어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자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놀러 오라고 해서 그 집에 갔습니다. 학교생활에 대해 무르니 여학생들이 자기를 아주 잘 따르고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중에 자기는 제자들이 여학생이지만 성적이 떨어지면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린답니다. 그러면서 "너희들 공부 못하고 대학 못 들어가서 나중에 공장이나 백화점에 취직해 종일 서서 일하고 다리가 퉁퉁 붓는 그런 사람되고 싶냐?"고 하면서 훈계한답니다. 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 친구는 목사 아들로서 신앙도 좋고 품행도 단정하고 공부도 잘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대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백화점 점원이 어때서!" 물론 공부를 잘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모두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대학을 학교 성적의 평점으로 가는데 모든 과목을 잘해야만 평점이 잘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모든 과목을 잘해야 성공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만 잘 발휘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못하는 부분 때문에 자신감까지 잃게 할 것이 아니라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잘 계발시킬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부모가 하지 못한 것을 자녀를 통해 이루고 보상받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랄 때 기회를 놓쳐서 공부를 원하는 만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에게는 어떻게든지 학생 때에 공부를 시키려 합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학벌이 약해서 인생에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녀가 공부를 못해서 우리와 같은 인생을 답습할까 봐 두려워서 자녀에게 강요해서라도 공부를 잘하게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를 통해서라도 이루기 위해 자녀에게 인생의 마지막 희망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은 다릅니다. 자기 인생 자기를 위해 살고 싶지 자기 인생을 부모를 위해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모를 위해 살아 줘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 알고 그 능력에 맞는 정도에서 만족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거기서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욕망은 너무 크고 자녀의 현실은 따라 주지 못합니다. 20등인 아이가 있다면 자신은 최선을 다하면 10등 정도 한다는 것을 압니다. 최선을 다해 10등을 했는데도 부모가 "잘했지만 좀 더 잘해야 하겠다"고 한다면 아이는 혼동하게 됩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공부를 하며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며 원하는 것 다 해주는데 왜 1등을 하지 못하느냐'고 한다면 자녀는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자녀는 그런 부모의 행동을 보며 자기를 위해 공부하라고 하고 희생하는 것이 모두 부모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큰 상처를 받게 되고 분노하게 됩니다.
에스겔 당시 몰록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녀를 몰록에게 드렸습니다. 몰록을 섬기는 자들은 재앙이 그 신이 내린다고 생각해 그 신의 노를 풀어드리고 안녕을 얻기 위해 아이를 인신제사로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몰록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신상으로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손을 불로 달구어 그 위에 아이를 놀려 놓으면 아이가 타져 죽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신이 진노를 풀고 가정과 마을에 평안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의 잘못된 인식과 욕망 때문에 죄없이 고통의 죽음을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분노했겠습니까? 에베소서6:4에 "또 아비들아 저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로마에서 절대부권을 가지고 자녀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라는 절대부권이 있었습니다. 부권을 가진 자는 자기 가족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노예로 팔기도 하고 쇠사슬에 묶어 일을 시키기도 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가 출생하면 아버지 발밑에 놓게 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그 아이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자녀들이 얼마나 분노하겠습니까?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부모라는 권위로 자녀를 억압하고 학대하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엄연히 개인적 인권을 가진 자를 자기 자녀라고 해서 자기 소유물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자녀를 자기 못다 이룬 꿈을 이루려 하고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가장 합법화된 폭력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자녀에게 상처를 보상받으려 말고 지금부터라도 자기 인생을 보람되게 사는 길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자녀도 행복하게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쓰실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는 길입니다.
2. 인성적으로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녀의 기를 살려 준다는 명목 하에 자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줍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조금만 자기 뜻대로 안되어도 참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요즘 어린 자녀를 기르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인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가족의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맞았는지 그 아이가 엄마에게 고자질을 했습니다. 아이의 말을 듣자마자 그 엄마가 하는 말 "니도 가서 콱 때려부러!" 아마 발음을 보니 아마 전라도 사람이었는 모양입니다. 우리 나라처럼 식당에서 아이들 떠드는 것 놔두는 선진국은 없습니다. 선진국에 가보면 뛰어 다니는 아이들 없고 혹 뛰면 부모가 반드시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도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 것 빼앗다가 싸우면 자기 아이를 설득시키지 않고 다른 아이를 설득시키려 합니다. 과자를 가지고 싸우면 자기 아이에게 주고 다른 아이는 자기 아이에게 하나씩 얻어서 줍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분별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디지털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인성입니다. 미디어 형태가 급속도로 발달해 감에 따라 사람들의 심성도 단순화되고 획일적이어지고 개인주의화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사람의 감성은 가치있게 다루어질 것이고 건강한 인성을 가진 자가 각 분야에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퍼센트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머지 85퍼센트는 좋은 인간관계였다." 고 말했습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입사시험에서 인성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인성검사에서 레드 판정을 받은 사람은 면접 기회도 안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인성검사에서 레드 판정을 받은 사람은 채용하지 않는 방침을 세운 회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점점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경우엔 컴퓨터로 50분이나 인성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유니버설 측은 온라인 인성검사를 채용에 반영한 결과 직원들의 근속 기간이 늘었으며 고객 만족도도 늘었다고 밝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갈수록 안정된 인성과 풍부한 감성을 가진 자가 성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성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사회 공동체에서도, 교회 공동체에서도, 가정 공동체에서도 인정 받지 못합니다. 결국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이들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개발시켜 주는 것은 좋지만 인내심과 의지력도 길러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합리성과 양보심과 배려심 등 공동체를 리드해 갈 수 있는 인성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이 21세기 리더쉽을 '섬기는 리더쉽'(Servant Leadership)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리더는 인내와 배려와 협력과 통합의 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건강한 인성을 갖는 데에 역행하는 행동을 할 때는 근실히 징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잠언13:24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하였고, 잠언 23:13-14에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채찍을 아끼면 자녀를 버린다"고 했습니다. 와일드는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얼마 후엔 부모를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자녀의 잘못을 보고도 근실히 징계하지 않는 자는 자녀를 인생에서 실패하게 하는 자입니다 (삼상2:12-17,22-26).
3. 신앙적으로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녀의 신앙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공에 대해 외모나 공부에 비해 신앙의 비중을 거의 두지 않습니다. 청소년 사역에 전문성을 가진 홍민기 목사님이 강남교회에서 학생부를 맡았을 때 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집사님 부부의 아들이 주일날 교회를 나오지 않아서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집사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 우리 애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어요" 하더랍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아들이 주일날 교회 가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더랍니다.
수년 전에 불교 조계종의 기관지인 '불교신문'에서 최고위층 인사들의 종교 현황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독교 42명, 천주교 20명, 불교 9명 순이었습니다. 1998년 인구센서스에 나타난 종교 인구 현황이 불교 23.2%, 기독교 19.7%, 천주교 9% 순이었던데 비하면 신앙 교육을 받은 자가 비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마크쥬크스의 논문에 보고된 청교도 신학자 죠나단 에드워드의 7대 후손을 보면 729명 중 복음전도자가 300명, 교수가 65명, 부통령과 국회의원이 16명, 대학학장이 13명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 세상적 목적으로 살아가는 한 가정의 7대손은 1200명 중 300명이 일찍 죽었고 대부분 감옥 생활자나 알코올 중독자나 창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죠나단 에드워드 가속은 영국에서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던 청교도들의 후손입니다. 청교도인들은 알파벳 A를 가르치면서 아담을, B를 가르치면서 바벨탑을, C를 가르치면서 가인을, D를 가르치면서 다윗을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현재 미국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 이른바 WASP (White, Anglo, Saxon, Protestants) 그룹도 그들의 후예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이 대부분 와쉽 그룹입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언약적인 신앙을 가진 야곱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자기 가족과 민족을 흉년 가운데서 살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어렸을 때 이집트 궁정에서 신앙이 좋은 유모(어머니)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민족을 구원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엘리 제사장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여호야다 제사장의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의 선한 왕이 되어 40년 동안 치리했습니다. 에스더는 부모도 없고 노예로 붙잡혀 같으나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투철한 외삼촌 모르드개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페르시야 왕후가 되었고 페르시야에서 일시에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유다인을 구한 자가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렸을 때부터 믿음 좋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교회 교육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딤후3:4-17).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6:6-7에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인격이 되게 하고 삶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커서도 그 말씀의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의 법이 되어 죄에서 떠날 것이며 좌절할 때에 말씀에서 힘을 얻어 일어날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 말씀이 생각나서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잠언 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사가 사람의 계획과 노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9:11). 살아가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일어서게 하는 힘은 신앙입니다. 세상 사는 원리를 근본적으로 제시하는 하나님 말씀이 그를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불행한 자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과 육체와 세상에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우상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교육은 부모 의식이 결정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훌륭한 자녀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학대했던 것을 용서하옵소서. 이제는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신 목적에 따라 교육하려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녀로 기르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기르는 자가 아니라 돕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풍조가 나로 하여금 육욕을 따라 교육하기를 유혹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게 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