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서면 안개가 먼저 다가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내력
지상의 열린 틈마다 안개가 스며들고
사람들은 한번쯤 기침을 호소한다
새들은 노래하지 않으며
길은 늘 젖어있다
세상의 새벽은 잠 못 이루는 곳에서 먼저 개어나
충혈된 소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밤새 안개에 젖어 퉁퉁 불은 가로등이
불면의 문장처럼 침침하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곳의 시간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들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면
정오의 햇살이 길의 한복판까지 나와 있다
지루한 변명들이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내 안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처럼
대부분의 안개는 길 위에서 소멸해 버리고
구부러진 생의 길목마다
어둠은 먼저 찾아드는 법
새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을까.
[2005강원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시부문
-"수련과정 거친 솜씨 탁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이번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전국 시인 지망생들이 무려 2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낸 1,500여 편의 시 작품 중에서 오직 한 편만이 당선작으로 뽑힌다. 그래서 시인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시인이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갖는다.
예선을 거쳐 넘어온 12분의 작품 중 조용숙, 최재영, 심은섭, 이순주 씨의 작품들이 최종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네 분 다 일정한 수준에 이른 작품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논의 끝에 최재영 씨에게 당선의 영광을 안겨주기로 하였다.
심사 위원 두 사람이 무엇보다도 관심을 둔 것은 시의 완결성과 참신성이었다. 시의 완결성이란 곧 시의 구조적 통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시는 특히 독자 공감의 의미 구조화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참신성이란 언어 선택과 언어 조합에서 느껴지는 시적 탄력을 말하는 것으로, 신인으로서의 신선한 언어감각과 문체의 힘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 분의 시가 모두 부분부분 구조적 오류와 진부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선택이 어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최재영 씨의 작품은 많은 수련 과정을 거친 솜씨가 돋보였고, 시적 완결성과 참신성 면에서도 높은 가능성이 인정되는 것이었다. 축하하며, 치열한 분석적 성찰을 통해 보다 좋은 작품 창작에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낙선한 분들이 가진 가능성도 매우 큰 것이었다. 도전 의식도 좋고, 상상력도 남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부분과 전체를 관계 짓는 안목에 미숙함이 보였다. 스스로가 지닌 시적 결함이 무엇인지 살피는 ‘눈’을 형성하여 새로운 창조적 도전 있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신승근(강원일보신춘문예75년당선·정선고교사·시인) 박민수(춘천교대교수·시인)
[한라일보 2005 신춘문예/시 당선작]
항아리
-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한라일보 2005 신춘문예/시 심사평]
순도높은 깊은 맛 우러나오길
양의 풍성함과는 달리 질이 그것에 미치질 못해 실망스런 심사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한동안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들이 일정한 수준을 견지했던 점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다. 응모하신 분들이 스스로의 문학적 진지성과 치열성을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대부분의 응모작들이 경험의 지루한 서술이나 단순한 풍경의 묘사에 빠져 의미있는 언어의 장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떤 응모작들은 맥락 없는 언어의 남용, 단절된 이미지들의 혼란, 장식적 비유의 화사함에 갇혀 스스로 시적 품격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또 어떤 응모작들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인지 개별성이 보편성으로 이어지질 않아 유의미한 소통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고 있었다. 주대생 씨의 경우 언어의 재치가, 고옥희 씨의 경우 비유의 참신성이 살만했고, 강란숙 씨는 일상적 체험에 대한 성찰이, 오영희 씨는 서사의 무게가 돋보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주제의식의 밀도라든가, 시적 구조의 짜임새 등이 튼실하지 못하여 더 이상의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최재영 씨는 시적 자질이 그 중 나아보였다. 언어의 운용이 자연스럽고, 시를 얽어매는 솜씨가 꽤나 세련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평범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제의식이 뚜렷한 것과 너무 빤한 얘기를 드러내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다. 언어의 질박함이 미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표현의 수일성의 결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신인임에랴.
정직하게 말하면, 나로서는 어느 것도 당선작으로 밀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젊은 문학도들의 기대와 희망을 헛되게 저버릴 수가 없다는 핑계로 나는 나 자신과 타협을 했다. 아쉬운 대로 최재영 씨의 「항아리」를 당선작으로 내보내는 까닭이다. 최재영 씨는 시의 길에 더욱 정진하여 ‘겸손한 덕담’만이 아니라 정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는 항아리로 성장하길 바란다. 아울러 뽑히지 못한 많은 분들도 실망하질 말고 자신의 시업을 꿋꿋이 가꾸어 나갔으면 한다.
<김승립 시인>
[경향신문 2005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오페라 미용실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쭉삐쭉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리숱이 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심사평]
예심을 넘어온 시편들의 기교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높았으나 개성과 다양성이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 편의 시란, 아무리 작은 규모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재현(현실)의 축과 표현(개성)의 축, 그리고 언어(기호)의 축을 가지고 있게 된다. 어느 한쪽이 너무 과부하를 받거나 결핍되면 진정한 시의 역동적인 생명감이 태어나지 않는다. 시 텍스트는 그러한 삼위일체 긴장의 아비투스 속에서 고유한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된다.
많은 응모작 중에서 심사위원은 최명희의 ‘비닐 하우스’와 이해존의 ‘이곳은 난청이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에 주목했다. ‘비닐하우스’는 현실감각과 현실의식은 뛰어난데 시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전개에서 조금 상투성이 엿보였다.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 같다. 아니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라 하더라도 자기만의 상상력과 언어의 힘으로 표현해낼 때 새로운 자기 작품이 태어난다.
‘이곳은 난청이다’는 아주 단단한 작품이다. 그러나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것 같고 ‘나는 비참하다’라는 엄살기가 조금 엿보인다. 그러나 이미지의 전개에 밀도가 높고 단단해서 적지 않은 재능을 느낄 수 있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을 당선작으로 선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오페라 미용실’은 ‘늙은 측백나무’와 ‘미용실’이 마주 보고 서있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낯익은 마을 풍경을, 신선한 상상력과 생생한 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낯익은 마을 풍경을, 신선한 상상력과 생생한 비유로 하나의 생동감 있는 음악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현실 감각도 없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진부한 재현의 세계는 아니며, 아주 발랄하고 풍부한 상상력인데 그렇다고 낯설게 멀리 나아가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재현의 세계와 표현, 언어의 세계가 잘 어울려 아주 맛있게 배합된 시의 맛을 그득하게 한 상(床) 잘 차려 놓았다. 어디까지나 요약과 압축을 전제로 하는 한 편의 시는 잘 차려낸 ‘모국어의 한 상(床) 성찬이어야 한다’는 시의 매력을 잘 보여준 이 시인은 다른 응모작인 ‘마늘’에서도 그 섬세하고도 단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만삭인 나는 아랫배 쓸어본다./ 아기는 얼마나 여물었을까/ 어머닌 내가 태아였을 때도 씨 뿌려두고/ 탯줄이 잘 이어졌는지, 더듬이가 돋은 마음/ 자라는 것에 먼저 닿게 했으리라”와 같은 아름다운 섬세함과 상상력의 고요한 역동성은 살아 있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광주일보 2005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멜순-
-강윤미-
길섶 가시덤불 속에서
용케도 멜순을 찾아내시는 어머니
?
재잘거리는 내 눈이 서운할까
마주치시는 것도 잊지 않고
말에 간간이 추임새를 넣어주면서도
그녀의 등허리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향해 있다
?
두 눈 부릅뜨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지만,
내 눈에는 엉킨 실타래같은
가시덩굴 뿐
?
선밀 나물은 나를 피해 요리조리 숨어 있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얼른 달려와 다소곳이 앉는다
그 부름으로 환해지는 산보길
멜순도 허겁지겁 봄을 불러와 꽃을 피운다
?
내 입에서 나오는 선밀 나물과 어머니의 멜순
길바닥에서 엉켜 뒹구는 그 말들을 모아
어머니는 버무리신다
데쳐도 향기는 손끝에 남고,
?
어머니 몸엔 멜순향 나는 파스가 숨어 있다
**멜순: 선밀나물의 제주도 방언
[시 심사평]
-덜 길드여진 감수성 높이 사
새롭고 도전적인 목소리를 만나고 싶은 기대를 충족시키기는 갈수록 어려워져가는 것 같다. 투고작들이 일정한 수준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소재나 발상이 비슷비슷하고 시단의 유행을 모방하기에 급급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아쉬움 속에서도 강윤미, 주영국, 문정희 등의 시는 일정한 궤도에 올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정희는 말을 다루는 솜씨가 능란하고 일상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변주해 내고 있지만, 상상력과 어법이 지나치게 낯익은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주영국은 사회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시에 포섭해 들이며 건강하고 뚝심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스케일에 비해 내용이 명료하지 못한 것은 시어가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는 증표일 것이다.
강윤미의 시는 주영국의 시에 비해 감정의 선(線)이 너무 여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선자들은 강윤미의 덜 길들여진 감수성과 발견의 시선을 높이 사서 '멜순'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즐겁게 합의했다. 어머니의 삶과 사랑을 '멜순'이라는 낯선 말을 통해 풀어내고 있는 이 작품 역시 그런 특장을 잘 보여준다. 당선자의 이 새로운 출발이 커다란 공명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강 은 교
▲45년 함남 흥원 생 ▲연세대 문학박사. 현 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월간 '사상계' 시 당선 ▲한국문학작가상.현대문학상 수상 ▲'우리가 물이 되어' '사랑법' 등 작품 다수.
나 희 덕
▲66년 충남 논산 생 ▲연세대 국문과 졸. 현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수영문학상.현대문학상 수상 ▲'뿌리에게' '어두워진다는 것' 등 다수.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
혁필화(革筆畵)를 보며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 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신춘문예 당선작] 시 심사평
#"섬세한 관찰력 돋보여"
본심에 오른 24 편을 읽으면서 세계와 사물을 언어로 대치시키며 자기만의 작품으로 다듬어 가는 솜씨에 감탄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혁필화를 보며' '철마 가는 길' '樹醫師(수의사)의 지구본' '고래의 새벽' 중에서 나름대로의 개성과 언어 구사능력 그리고 새로운 신인으로서의 참신함과 살아있는 패기를 읽을 수 있었다.
'혁필화를 보며'와 '고래의 새벽'을 두고 논의를 거듭하다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일정한 수준에 이른 '혁필화를 보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런 가운데 '노래'는 매끄러운 비유와 함께 시적 성취감도 있었지만 신춘문예가 갖는 건강한 정서에서 다소 거리감이 있어 제외되었다. '철마가는 길'은 다소 안일한 접근으로 무게를 떨어뜨렸고 '樹醫師의 지구본'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시어 사용이 다소 거칠고 시가 가져야하는 깊은 맛이 결여되어 감동을 반감시켰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래의 새벽'은 적절한 비유와 참신성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사물을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긴장미 있는 이미지 창출이 아쉬웠다.
당선작 '혁필화를 보며'는 일상에서 건져올린 예사롭고 평범한 시적공간을 착실히 내면화하면서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였고, 언어를 매만지는 손길에서 성실함을 읽을 수 있었다.
-김명인(시인) 오정환(시인)-
[서울신문 2005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미령
-흔한 풍경-
시청 앞 작은 연못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단잉어가 산다
몰락한 귀족처럼 느릿느릿 헤엄치면
양귀비꽃 수면에 비쳐온다
우리는 그걸 주홍빛 슬픔이라 부른다
허기진 햇빛이 정수리 위에 어른거린다
메마른 광장의 오후 2시가 아가미 속을 들락날락하는
지루한 염천(炎天)의 대낮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듯 지느러밀 움직여
물의 파동을 느껴본다
배에 와닿는 물의 감촉이 따스하다
눈앞이 침침해지고부터는 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좁고 가늘어진 바 람소리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무수한 소문들이 물기를 머금고 부풀었다 사라진 벤치에
빈 종이컵이 실신할 듯 입벌리고 있다
새우깡을 무심히 던지던 손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
生의 마지막 들숨을 쉬듯 물위로 솟구칠 때 무심코
돌아서던 누군가의 하얘진 귓불을 보았을 수도 그때 잠깐 흔들린 듯
눈을 깜빡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서로가 엿본 것은 아무 것도
들킨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동안에도
애초에 누구의 관심거리도 아니었다는 듯
개미들이 떨어진 여치 다리를 십자가처럼 옮기고 있었고
체인을 오래 매만지고 있던 자전거 옆으로 은색 승용차가
서류뭉치를 신생아처럼 안고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외로움을 흙먼지처럼 껴입고 있지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벤치 밑에 조금 구부러진 쇠뜨기풀이 다시 일어서는 동안
내 어슬렁거림은 어떤 사소함에 비유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누구나
제 몸에 딱 맞는 표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모두 서로에게 그림 속 배경일 뿐이라는 듯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어진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두 선자에게 전해진 작품들은 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응모작들에 결정적인 그 무엇이 모자란다는 인상을 주었다. 발상의 참신성이 돋보이는 작품은 흔히 언어의 밀도가 따라주지 않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은 호흡이 짧다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정신을 엿볼 수 있는 패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치열함이나 당돌함이 제거된 시적 수련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념에 젖게 했다.
결국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당선권에 근접했다고 여겨지는 네 명의 응모자의 작품을 추려내 논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김미령의 ‘흔한 풍경’이 마지막으로 낙점을 받게 되었다. 얼핏 보아서 무더운 날의 나른한 도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별 무리없이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 현실의 단면에 대한 담담한 소묘가 돌연 삶의 무상함을 환기시키는 절실성을 획득하고 다가온다.“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나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 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같은 표현도 대범하게 씌어진 듯하지만 응모자의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다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한층 믿음이 갔다. 앞으로 자기만의 개성적인 시세계의 구축에 보다 신경을 쓴다면 한 뛰어난 신인의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최종심에서 논의된 작품 가운데 김영수의 ‘들키지 않은 걸음걸이’나 ‘어두운 독서’는 선자들을 오랫동안 망설이게 했다. 시에 담긴 사유의 깊이가 만만치 않았으나 그것이 시를 너무 건조하게 만든 감이 있고 불필요한 추상어의 남발도 거슬렸다. 이밖에 ‘오징어 등불’을 투고한 이병일과 ‘사나운 연어떼가 밀려갔다’의 박성현도 숙련된 솜씨를 선보이고 있지만 충분한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분발과 정진을 부탁드린다.
김명인·남진우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
즐거운 제사
-박지웅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
[문화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감칠맛 나는 문장 묘한 울림
예심을 통과한 열다섯 명의 작품이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예년과 비교해 볼 때 응모량이 크게 늘어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내용면에서는 전체적으로 삶의 궁핍과 고단함의 구체적 경험을 다룬 시가 의외로 많았다. 형식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보다는 무난한 스타일이 대부분이었다.
신인다운 패기와 독특한 개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박지웅과 노양식씨의 작품이었다. 노양식씨의 ‘푸른, 복어의 집’ 외 2편은 시적 형상화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에서는 주목을 받았으나 의미의 귀결이 단조로운 것이 흠이었다. 한 편의 시에 담겨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결론이 아니라 음미할 만한 어떤 것이다. 이미지와 리듬, 사유 혹은 심리의 전개 과정, 그리고 말을 넘어서는 침묵과 여백까지, 그 모든 것이 언어예술로서의 시에서는 음미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박지웅씨의 ‘즐거운 제사 ’외 6편은 섬세하면서도 격조있는 언어감각으로 눈길을 끌었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삼색나물처럼 붙어다니는 아이들’ (즐거운 제사)에서 보듯 감칠맛이 나는 문장, 마음이 스며 있는 언어, 한 편의 묘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솜씨는 보기 드문 것이다.
다른 시 ‘대관령옛길’도 언어에 대한 빼어난 감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 짝 앞에 찰랑거리는 곤줄박이의 저 맑은, 흥분/…/명자나무의 몹시 아름다운 한때’. 이견 없이 박지웅씨의 ‘즐거운 제사’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을 축하한다.
시인 황동규·최승호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
항해
-손병걸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시 심사평] 정진 가능성에 높은 점수
응모된 시들 중에서 1차로 20여편을 건져올리면서,우리 시의 현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예비 시인들의 관심이 서정시에 가 있다는 점,소재는 일상적 체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발랄하고 참신한 이미지는 내보이나 내면의 깊이가 없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응모 시의 전반에서 실험적인 요소를 찾는다는 것은 힘들었다. 이는 패기 있는 개성적인 시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대신 잘 꾸며진 소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1차로 걸러진 20여편은 시 공부를 한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시편들이었다. 그러나 소품이 갖는 한계를 시적 응집력을 통해 극복하고,새로운 세계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는 시적 정신을 토대로 자기만의 세계를 창출해 보려는 의욕보다는 시의 기교 습득에 너무 기울어져 있는 결과로 보였다.
이런 아쉬움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첩자''소라''항해'였다. 그런데 '첩자'는 너무 기계적인 구도와 시적 언어가,'소라'는 너무나 단정한 틀과 일상화된 이미지가,'항해'는 기성 시에 나타난 이미지의 원용이 각각 문제로 지적되었다. 힘들게 '항해'가 지닌 긍정적 세계 인식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어,이 작품을 가작으로 뽑았다. 정진을 빈다.
시인 이시영·최영철, 문학평론가 남송우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나무도마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존재론적인 고통 생동감있게 풀어 내
당선작을 선정하는 동안,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구성력이 뛰어난 시들이 많아 그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대한 고심이 많았다. 결국 아름답거나 쓸쓸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만이 아닌, 뭔가 고통스러워도 육화되어 있어 속이 후련해지는 작품에 심사의 척도를 두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신기섭의 ‘나무도마’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존재론적인 고통을 풀어냄에 있어서 고통의 근육을 느끼게 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서로 오가는데 걸림 없어 자연스러웠다.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통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가 시를 오래 써온 장인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시의 길을 가는데 있어 몸을 끝까지 싣기를 기대한다.
이번 응모작품들을 통해 한국 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는데, 예술에 온 정신이 팔려 지극히 자아적인 것에 머물러 있거나 언어를 다루는 세련미에 몰두한 흔적들이 엿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아쉽게 했다. 함께 응모한 심은섭의 ‘북쪽 새떼들’과 ‘몸의 악보를 더듬어’의 박신규, ‘대마찌’의 조길성, 등도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김정환 장대송 함민복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母女의 저녁식사-
-윤진화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 히잉! 어머니.
[심사평] 당선작 발상탁월… 우리詩 지평 넓힐것
마지막 후보작 2편도 만만찮은 솜씨
윤진화, 강호정, 이우경의 시들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는 발상이 아주 신선하다.
풀뿐인 식탁-말-아마존의 여왕 히포리테-유방암에 걸린 어머니의 연상도 재미있지만, 이미지가 청승맞거나 구질구질하지 않고 쌈박하고 날렵한 점도 호감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의 시가 내용이나 형식에서 서로 닮아 있는 데 반하여 이 시는 다른 사람의 시와 전혀 같지가 않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리라.
역시 어머니의 잃음을 노래한 ‘두 개의 꿈’도 뛰어난 시다. 슬픔이니 아픔이니 하는 직접적인 표현 한마디 없이도 더 강하게 그것을 느끼게 하는 점, 시인의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강호정의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다. 시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며 진실을 찾아가는 자세도 돋보인다.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며 ‘선언에 대하여’는 시적 완성도나 안정감에 있어 결코 손색이 없지만, 다 죽음을 다룬 시여서 신춘시로서는 좀 무겁다.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우경의 시 중에서는 소시민의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 ‘문패’가 가장 뛰어나다. 이미지도 선명하고 표현도 아주 매끄럽다.
그러면서도 억지가 없고 자연스럽다. 흠잡을 데 없이 날씬하게 빠진 시라는 칭찬이 조금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다른 시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한다. 너무 편차가 심한 점은 조금 안심이 되지 않는다.
이상 세 사람의 시 중에서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가 가진 분방하고 건강한 상상력은 우리 시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것으로 기대되는바, 앞으로의 활동에 크게 기대를 건다.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꽃 이름, 팔레스타인
-경종호
올해도, 고향엔 칡꽃이 흐드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계집 아이 몇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놉니다. 고무줄이 튕튕 울릴 때마다. 호박이며, 박이며, 수세미 꽃이 핍니다. 어느 새 검정 고무줄에도 꽃이 피어, 달맞이꽃으로 피어, 계집 아이 몇은 노래를 부르며 툭툭 튀어 오릅니다. 미사일 날리듯
양지바른 골목길 벽돌 속에 아비와 오래비를 묻고 옵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예루살렘으로 흐르는 계곡마다 넘쳐나는데 칡넝쿨 얽힌 이국의 틈으로 어김없이 달은 떠오릅니다. 어김없이 총알은 밀알처럼 떨어집니다.
폭격기가 지나간 바위 밑 두 눈만 깜박이다, 꿈벅거리다,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버린 못생긴 계집 아이는 어느 새 어미가 되고 전사가 되어 아이를 안고 모래 틈을 가로 지르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군화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바위를 덮고, 돌산 넘쳐나는 꽃이 피었습니다. 동방 외간 사내가 보내는 꽃, 생리를 하고, 배란이 지나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그 꽃이 신화(神話)보다 더 질긴 꽃이었음을, 옆구리에 낀 아이가 그 꽃을 닮았다는 것을 몰랐어도 그녀는 좋았습니다.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그 여느 해보다 응모작이 많고 또한 그만큼 우수한 작품도 많았다. 긴 시간 논의 끝에 경종호의 ‘꽃 이름, 팔레스타인’과 김윤경의 ‘마이너스통장으로 지은 집’, 문정희의 ‘길들여지는 슬픔에 대하여’중에서 당선작을 내기로 하였다.
김윤경은 그늘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고 언어를 다루는 솜씨 또한 매끄러웠으나 오히려 그 점이 감점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평이하고 무난하지만 신인다운 독특한 개성이 아쉬웠다.
문정희는, 밝음(문명)만을 추구하고 어둠과 밤을 타부시하는 고정관념을 깨고 삶에 있어서 ‘어둠’(밤, 잠)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전반부에서 유사한 예를 필요 이상으로 반복하고 결국 그것을 유기적으로 엮어내지 못하여 구조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경종호의 작품은 그 차분한 전개부터가 눈길을 끌었으며 독자의 생각을 오래 붙잡아두는 매력이 있었다. 우선 기법면에서 참신하다. 전쟁상황에 놓인 팔레스타인의 한 여자아이를 먼 이국의 아이로 타자화 시키지 않고, 한국전쟁후 한반도의 골목길에서 고무줄 놀이하는 한민족의 계집아이에 오버랩 시켜 팔레스타인 문제가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님을 효과적으로 환기시켜주고 있다.
시사성 있는 문제,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시대와 동시대인의 아픔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비단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이라크전과 같은 전쟁에 대한 시적 인식을 서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심사를 하여 신인을 발굴한다는 것은 ‘샘’을 파는 것과 유사하다. 샘은 그 수질이 우수해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몇 바가지 퍼내면 곧 그 수원이 고갈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용솟음하며 냇물을 이루고 강에 이어지는 도도한 흐름을 이루어내야 한다. 따라서 당선작 외에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도 면밀히 살펴서 등단 이후에도 우리시단을 더욱 풍부하게 일궈낼 역량과 가능성이 있는가,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종호의 작품에서 갈고 닦아온 내공을 읽을 수 있어 당선작으로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큰 물줄기를 이루어내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송하선(시인), 복효근(시인)
[조선일보 2005 신춘문예] 詩부문 당선작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 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 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종마다 귀 밝은 소리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쏟아지는 자잘한 햇살
실핏줄 팽팽한 뿌리로 모아
풍경 소리를 내고
운판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서 산문(山門)소식 엿듣게 하는가.
[조선일보 2005 신춘문예] 詩부문 심사평
“水壓 센 한국詩의 바다서 보물 건질 능력있어”
문정희·황지우 시인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장성실 ‘소금쟁이 메모’, 이병일 ‘빈집에 핀 목련’, 이다연 ‘가설무대’를 최종심 대상작으로 좁혀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이는 이들 네 작품이 최소한, 누가 읽어봐도 “이게 시야?” 하는 의문이 들지 않게끔, ‘스스로 시를 성립시키는’ 구성의 내구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당선작을 고르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정을 두 번이나 번복할 정도로 우리 두 심사자들을 꽤 괴롭혔다. 이들 네 작품이 두루 괜찮았다는 말도 되겠지만, 동시에 눈에 확 띄게 스스로를 구별시키는 작품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결국 우리가 이번 심사에서 기대하고 예감하고자 한 것은 누가 보다 오랫동안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수압이 센 한국시의 해저에 누가 더 오랫동안 잠수하여 보물을 건져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를 당선작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 시가 그 자체로 잘 다듬어진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과 대등한 수준의 다른 응모작들을 고루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도 그가 계속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한 권의 시집을 가지고 나타나서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부릅뜨게 해 주길 바란다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조-물안개 자욱한 날
-평창강 섶다리
싸릿대 잔솔가지 얼기설기 얽어 입고
옷자락 나부끼던 그 세월 어찌 났을까
거칠은 진흙을 덮고 평창강 지키고 있다
물안개 자욱한 날, 강물 그리 흘러 보내고
새벽 국밥 한술 뜬 눈빛 순한 사람들이
저마다 봇짐을 지고 분주하게 오며 가네
장돌뱅이 허생원도, 누렁소도 건너가고
세상이 흔들리면 섶다리도 휘청거린다
이따금 마파람 불면 헹가래 치듯 들썩인다.
※섶다리=강원도 평창군 평창강에 놓여있는 다리. 소나무 및 싸리 가지를 얽은 다음 그 위에 진흙을 덮어 섶다리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지나 다닌다.
강여울<본명:홍준경·양구군 양구읍 학조리>
[강원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시조부문
시조부문 응모작품 경향을 분석하면,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구획 지을 수 있다. `뼈다귀의 시조’와 `껍데기의 시조’가 그것이다.
`뼈다귀의 시조’는 글 속에 담을 이른바 사상이란 것을 미리 설정해 두고 거기에다 격에 맞지 않은 미사여구를 짜 맞춘, 그러므로 문맥이 자연스런 유기체가 되지 못하고 앙상한 뼈대만 드러낸 정형시를 말한다. 김진실씨의 `생존’과 이기준씨의 `부활’이 여기에 해당된다.
`껍데기의 시조’는 표현 형식에만 매달려 감동적 내용을 담아내지 못한, 알맹이 없는 시조를 의미한다. 박진아씨의 `우수절’과 이석구씨의 `꽃집 앞에서 꽃을 심다’와 같은 작품이 이 계열에 든다. 외중내졸(外重內拙) 즉 겉모양(형식)에 치중하게 되면 내용이 치졸해진다.
당선작 `물안개 자욱한 날’(강여울)은 앞에서 지적한 `뼈다귀 시조’와 `껍데기 시조’의 함정을 절묘하게 극복한 작품이다. 따로 떼어두면 별 의미 없는 이미지들이지만 그것이 제 짝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망을 확충하는, 마치 퍼즐 같은 언어 조립의 미학이 격렬하게 펼쳐진다. 평창강에 놓여 있는 섶다리를 소재로 하여, 이 고장에 뿌리 내리고 사는 백성들의 정서를 강물 푸른 빛깔로 풀어낸 것이다. `새벽 국밥 한술 뜬 눈빛 순한 사람들'을 떠올리는가 하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허생원과 장돌뱅이도 불러들이고 있다. 긴장을 늦출 틈을 허락하지 않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시조 특유의 순간적 임팩트(충격)를 느낄 수 있다.
■심사위원:김영기(강원일보논설고문·문학평론가) 윤금초(시조시인·민족시사관학교대표)
[신춘문예 당선작] 시조
겨울 운문사에서
-박수민
오래된 풍문처럼 밤새 폭설이 내리면
극락전 솔가지는 그리움에 늘어지고
대숲에 바람 드는 소리 하얗게 쌓였다
묵언에 드는 길은 아득히 멀다마는
어둠을 밟아 오르던 저 단아한 예불소리
문 밖에 기대어 서서 미륵 되어 보았다
마음에 때가 끼어 앉힐 수가 없었을까
가부좌 튼 자세로는 벽을 허물 순 없었다
고요에 몸을 맡기면 조금은 알 것 같은데
단층 끝 소리물고기 절간 바람을 흔들 뿐
햇살에 순은이 되는 숲길을 간직한 채
아무도 밟지 않는 길 발자국 하나 찍었다
[신춘문예 당선작] 시조 심사평
#"율조 따른 세련미 탁월"
사설시조는 이 땅에 자유시가 발붙이지 않았을 때 자유시로서의 기능 일부를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창의 입장에서는 달리 설명되겠지만 사설시조는 그 형식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신춘문예의 시조는 정형시로서의 시조를 뽑아야 한다. 그런 연유로 사설시조는 일단 선에서 제외하기로 하였다.
전년에 비해 응모작품 수가 대폭 늘었다.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데 많은 논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선을 거쳐 2심을 거친 작품은 '겨울 운문사에서' '금동반가사유상' '난분을 옆에 두고' '하구에서 서성이다' '紅玉' '바위' 등 여섯 작품이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겨울 운문사에서'와 '하구에서 서성이다' 그리고 '바위' 등이 높은 점수를 얻었다.
그 중 형식의 파괴가 마음에 걸리는 '하구에서 서성이다'를 제외하기로 하고 마지막 두 편을 두고 고민에 들어갔다.
어느 작품이나 장·단점은 있다. 언어의 세련미와 시조로서의 율조를 잘 따른 '겨울 운문사에서'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임종찬(부산대 교수) 전치탁(시조시인)
[서울신문 2005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장창영
-동백, 몸이 열릴 때-
한때는 너도
불 밝히던 심장이었다
눈 밟는 소리에도
온통 가슴 설레어
어쩔 줄 몰라만 하던 붉디 붉은 눈이었다
하기야 그때는
너조차 몰랐을게다
네 몸을 사정없이
훑으며 지나간 것이
한 떨기 바람, 그도 아니면 감당 못할 욕망이었 는지
꽃무리 지고 난 후
다시 또 여기 서 있다
실팍한 가슴 한켠
환한 불씨 동여맨 채
안에서 밀어올려낸 향기 한 올 풀어 건네며
[심사평]
신춘문예는 기존의 작품수준을 월등 뛰어넘는 새로운 패기,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한다.
올해 응모된 작품들은 종전에 비해 수준높은 작품들이 많았다. 우리 고유의 전통시인 시조에 대한 열기가 그만큼 높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웠다.
응모작품 대부분이 시조의 틀을 지키면서도 현대성을 지녔고 소재면에서 다양했으며, 삶의 현장성을 갖고 노래한 것과 우리 역사성을 갖고 노래한 것 등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심사기준은 시조가 갖는 형식을 지키되 어떻게 새로운 리듬, 감각으로 현대적 기능으로서의 기법을 구사했느냐에 초점을 맞췄다.
당선작 ‘동백, 몸이 열릴 때’는 하나의 꽃이 깨어나는 신생의 날카로운 감성과 언어의 배합 같은 것들이 신선했다. 시조의 운율을 갖고 재구성하면서 새맛나는 기량을 보여준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금동반가사유상’(한분옥)은 안정감 있고 상당한 시적 수련이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최종 당선작과 겨루었으나 소재 면에서 신선감이 덜해 선외로 밀려났다.‘광개토태왕비’(방승길)는 고구려 역사왜곡과 잃어버린 고구려의 역사성을 면밀히 관찰하는 투시력으로 힘줄 넘치게 쓴 작품이다. 그러나 힘에 너무 치우쳤고 언어의 조탁에서 밀렸다.‘사랑’(이지윤)은 서정성과 시조다움에 가까운 작품이다. 첫발을 내딛는 신인의 시조로는 문제가 있다는 점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진도아리랑에 부쳐’(이태호)는 시조 가락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현대시로서의 의미, 새로운 감각을 살려내지 못해 아쉬웠다.
이근배·한분순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조]
문을 열고
-이민화
어수선한 사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골 깊은 등줄기에 멍으로 남은 자국
세월의 회초리 앞에 허물을 벗는 시간
혼돈을 움켜쥐고 방황하는 시대가
늦가을 설거지로 타오르는 불 마당에
두꺼운 가면을 벗어 미련 없이 태운다.
들국의 마른 꽃대가 겨울 앞에 꺾이고
새로 움틀 봄을 위해 눈 덮인 들녘처럼
마지막 가을을 빌어 날려보낸 묵은 일기
새로운 베틀 앞에 정좌하여 눈을 뜨고
절망은 가려내고 희망의 씨실 잡아
용서와 화해의 교차 한 필로 짠 순수 무명
[시조 심사평] 수준작 3편 끝까지 경합
문단으로 가는 꽃길 신춘문예,연말이면 문학 지망생만이 아니라 심사자들도 가슴이 설렌다. 어떤 재사가 머리에 빛나는 어사화를 꽂고 그 자랑스러운 모습을 드러낼까. 응모작의 상당수는 그 역량이 인정될 만큼 전반적으로 수준이 향상되어 있었다. 시조의 앞날을 위하여 경하스러운 현상이다. 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경태씨의 '겨울꽃',김종훈씨의 '화첩기행 3',김진수씨의 '하구에서 서성이다',문근식씨의 '채석장',이민화씨의 '문을 열고' 5편이었다. 이들은 한 시절 전 같았으면 다 당선감으로서 손색이 없다 할 만큼의 수준작들이었다. 특히 '하구에서 서성이다''화첩기행 3''문을 열고'의 3편은 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다.
숙의 끝에 '문을 열고'를 당선작으로 낙점했다. 신인작인 만큼 다소의 결함은 접어두고 다음 두 가지가 주목을 끌었다. 먼저 함께 낸 작품들이 대체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기본적인 역량이 인정된 점이요,다음으로는 고뇌와 방황 등 내적 갈등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긍정으로 이끌어 낸 건전한 시정신이 가상타 한 것이었다. 이제 장거리 경주의 총소리는 울렸다. 이 선수,얼마만큼의 신기록을 낼지 다 함께 지켜 볼 일이다.
시조시인 장순하·최승범
[조선일보 2005 신춘문예/시조]
대설주의보
김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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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숨결 허옇게 얼어붙는 역 광장 앞
어디론가 가야 하는 길손들이 서성이고
그 몇은 허방을 딛고 빙판 위로 넘어진다.
제 한 몸 세우기도 버거운 이웃들은
손잡아 일으켜 줄 온기마저 놓아버리고
저마다 제 그림자 옆을 흘깃 흘깃 지나친다.
몇 날 찌푸린 하늘, 끝내 싸락눈 흩날리고
둥지 잃고 날아든 난간 아래 저 굴뚝새들
한두 톨 옹색한 모이, 이 겨울이 너무 시리다.
2
대설주의보 내려진 오후의 늦은 귀가
매운 바람 얼얼하게 외투 깃을 후려치고
움츠린 어깨 너머로 희끗희끗 눈발 설 때
통 속의 군고구마 냄새 웅숭그린 담 모퉁이
추위도 조금씩은 익숙해진 모습들이
장작불 환한 눈빛을 봉지 속에 담아간다.
[조선일보 2005 신춘문예/시조] 심사평
"손에 잡히는 묘사 돋보여"
이지엽·시조시인
시조의 형식적 장치는 풀어지기 쉬운 현실을 긴장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신춘의 신인을 가리는 작업은 이 긴장을 어느 정도 잘 운용하고 있느냐에 있을 것이다. 3·4조의 기계적 율격은 너무 옥조여 숨이 막히기 마련이고 조금만 느슨해지면 시조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완성도에 이르는 것은 시보다 훨씬 어렵다. 이병일씨의 ‘빗방울 화석’은 세밀한 묘사가 돋보였으나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부족했으며, 임채성씨의 ‘모르핀을 꽂다’는 능숙한 가락의 운용에도 불구하고 여과되지 않는 생경한 표현이 걸렸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들 중 김영완씨의 ‘대설주의보’는 단연 돋보였다. 가락을 이끄는 만만찮은 호흡과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한 서사적 얼개가 신뢰를 갖게 하였다. 시조는 형식적 제약으로 인해 관념화되기 쉽고, 그 관념은 손끝의 기교에서 비롯되기에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관념화로 치닫고 있는 시조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킴은 물론, 지치고 힘든 이 시대의 복판을 넘어가는 이웃들에게 “장작불 환한 눈빛”을 전하는 따뜻한 가슴의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조선일보 2005 신춘문예] 동시부문 당선작
"붓꽃"
-최명란
하교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힘껏 뛰었다
게임방 입구에서
잠시 피했다가
다시 뛰었다
피자집 담벼락에
붓꽃 한 송이
우산도 안 쓰고
비를 맞고 있었다
빗줄기가 세차게
때리는데도
눈을 감고 꿋꿋이
이겨내고 있었다
나도 뛰던 걸음을 멈추고
붓꽃이 되어
서 있어 보았다
멀리
골목 어귀에서
엄마가 우산을 들고
붓꽃처럼 웃고 서 있었다
[2005 신춘문예] 동시부문 심사평
“충실한 詩作의 始作”
예심을 거치지 않고 내 손에 들어온 작품이 800여편 가량이 되었다. 응모자 수를 따지자면 200명이 넘는 이들이 응모해 온 셈이었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치열하게 쓴 작품을 만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진지함이 엿보이는 몇 작품이 눈에 띄긴 했으나 그런 작품들은 성인시(成人詩)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1차로 11편을 뽑은 다음 본선에 3편을 올렸는데, 조영수의 ‘바다 생일잔치’와 최명란의 ‘붓꽃’, 김순영의 ‘틀니’ 등이었다.
먼저 ‘바다 생일잔치’ 외 다른 작품들은 숙련이 잘된 뛰어난 작품들이었으나 소재나 어휘 등의 ‘낯익음’이 흠이 되었다. 김순영의 ‘틀니’ 외 6편은 건강한 생활동시들로 고른 수준의 수작들이었으나 재치가 있으되 가볍게 표현된 단점이 있었다. 최명란의 ‘붓꽃’은 미숙하고 서툰 점이 보이긴 했으나 그보다 앞서 소박한 신선함이 눈에 들어왔다.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지는 않았으나 ‘충실한 시작(詩作)의 시작(始作)’ 기미가 엿보였다고 해야겠다. 오랜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가려진 ‘붓꽃’의 지은이는 붓끝을 세워 더 연마하기 바라며, 본선에 든 다른 두 사람에게도 당선작으로 밀지 못한 아쉬움과 격려를 함께 보낸다.
(이상교·아동문학가)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우리 할머니
-김애란
우리 할머니 입은
꽃잎 오므린 호박꽃 같아요
호박꽃 속에서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
들어 보셨어요?
나는 매일 들어요
우리 할머니 입 속에는
벌 한 마리 살고 있거든요
윙윙윙……
남들은 우리 할머니 말
도대체 모르겠대요
그래도 난 다 알아요
뭐라고 하시는지
느낌으로 다 알아요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심사평
대사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 점수
예년에 비해 응모작품 수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 수준은 비교적 낮았다. 신인다운 참신함이나 개성적인 목소리를 만나기 어려웠고, 작품의 완성도에서도 미흡했다.
대체로 동요적 발상이나 어린이의 태도, 어조를 흉내낸 이야기 형태의 산문이 눈에 많이 띄었고, 시적 대상을 설명한다거나 의미가 모호한 작품들도 의외로 많았다. 그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사이다’(이해든), ‘일학년 할머니’(봉필순), ‘가방부자’(유은경), ‘라디오’(박성우), ‘공원 식구’(조영수), ‘우리 할머니’(김애란) 등이었다.
이해든씨의 동시는 독특한 개성과 선명한 이미지가 돋보였으나 감각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데 그쳤고, 봉필순 씨의 동시는 현실 생활에서 동심을 새롭게 발견한 점은 좋았으나, 표현이 다듬어지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유은경 씨의 동시는 아이들 삶의 현실을 잘 포착해내었으나 내용이 참신하지 못했고, 박성우씨의 동시는 시적 발상은 재미있고 새로우나 시상 전개에 작위성의 노출되어 신선미를 잃은 점이 흠이었다.
조영수씨는 보내온 작품 수준이 고르고 동시를 빚는 솜씨가 눈에 띄었으나, 특별히 도드라진 작품이 없어 안타까웠다. 김애란씨의 동시는 평이하면서도 비유가 적절하고 시적 의미가 잘 담겨 있으나, 새로운 시적 발견이나 참신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애란의 ‘우리 할머니’를 당선작으로 올리는데 이견은 없었다. 그가 응모한 다른 작품에도 수준작이 있을 뿐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따뜻함과 진지함이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 권오삼 김용희
[2005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동시부문
그늘비
-최은미
해 그림자가
길어지는 저녁에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길을
지나다 보면
그늘비가 내려요.
먼 나라 초원에 사는
얼룩말 옆 지나가듯
밝음과 어둠이
기다란 줄기가 되어
그늘비가 내려요
한참 후 집에 와도
얼룩말은 따라왔는지
눈 속에서 아직도
그늘비가 내려요.
[2005강원일보 신춘문예 심사평]동시부문
-'시적 상상력 돋보여 동시의 조건 보여줘"
동시와 동화 부문으로 나누어 심사하던 아동문학은 올해 들어 아동문학 전체를 하나의 부문으로 묶었다. 그럼에도 동화와 동시에서 130여명 350여편이 접수되었다. 이렇게 늘어난 편 수는 아동문학이 더 이상 일반문학의 귀퉁이에 간신히 자리잡은 장르가 아니라,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장르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소중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응모된 작품 가운데 두 심사위원이 가려뽑은 작품들은 동시 `하늘엔 눈이 내린다’와 `그늘비’, 동화 `달빛’과 `감꽃나무’였다. 이들 네 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였으며, 우리 아동문학의 미래를 엿보기에 충분한 작품들이었다. 다만 `하늘엔 눈이 내린다’는 참신한 발상이었으나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울퉁불퉁 고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달빛’은 정교한 문장과 시적인 호흡으로 아름다웠으나 시각이 어린이문학의 특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유년기의 경험을 다루었으나, 그 경험을 쓰다듬는 눈은 여전히 어른의 눈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감꽃나무’는 간결한 표현과 동화적 착상이 어우러진 좋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주제의식이 충분히 영글지 못한 채, 추상적인 것으로 귀결되고 말아 아쉬웠다.
`그늘비’는 무엇보다 응모된 작품들마다 고른 성취가 돋보였으며, 특히 `그늘비’는 다소 서술적이기는 하나 시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무릇 대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 새로운 상상력은 좋은 동시의 선결 조건임을 이 작품은 잘 보여주었다. 이제 스스로 우리 동시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자각과 희망을 오래도록 건사해 주기를 바란다.
비바람에
얼굴 파래지도록
나뭇가지에 매달렸다가
밤이면 별빛 모아 받아 둔
이슬 한 방울
또
로
롱
내려오던 길.
제 몸 아픈 줄도 모르고
푸른 잎 두 손처럼 모아 감싸준
애벌레 지나간 길도 보이네.
따뜻한 마음의 길이 보이네.
[심사평] 아이 눈높이의 따뜻함 돋보여.
동시는 동심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눈높이 역시 아이들의 시선에 머물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응모된 많은 작품이 동심에서 벗어나, 어린 날의 추억에 머물러 있었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이정림씨의 '종 속에 사는 아이', 유지은씨의 '나뭇잎 한 장에는'이었다. 우선 두 사람의 작품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신뢰를 갖게 했다.
먼저 '종 속에 사는 아이'는 발상이 신선하고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솜씨도 양호하나 주제가 명징하지 못하고 몇 군데 부적절한 표현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 유지은씨의 '나뭇잎 한 장에는'은 동심의 바탕 위에 아이의 눈높이로 본 시선이 따뜻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구체적인 능력이 돋보였다. 심상의 펼침에도 무리가 없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정진을 빈다.
동시인 하청호·노원호
■ 서울신문
흔한 풍경 ---------- 김미령
시청 앞 작은 연못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단잉어가 산다
몰락한 귀족처럼 느릿느릿 헤엄치면
양귀비꽃 수면에 비쳐온다
우리는 그걸 주홍빛 슬픔이라 부른다
허기진 햇빛이 정수리 위에 어른거린다
메마른 광장의 오후 2시가 아가미 속을 들락날락하는
지루한 염천(炎天)의 대낮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듯 지느러밀 움직여
물의 파동을 느껴본다
배에 와닿는 물의 감촉이 따스하다
눈앞이 침침해지고부터는 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좁고 가늘어진 바람소리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무수한 소문들이 물기를 머금고 부풀었다 사라진 벤치에
빈 종이컵이 실신할 듯 입벌리고 있다
새우깡을 무심히 던지던 손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
生의 마지막 들숨을 쉬듯 물위로 솟구칠 때 무심코
돌아서던 누군가의 하얘진 귓불을 보았을 수도 그때 잠깐 흔들린 듯
눈을 깜빡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서로가 엿본 것은 아무 것도
들킨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동안에도
애초에 누구의 관심거리도 아니었다는 듯
개미들이 떨어진 여치 다리를 십자가처럼 옮기고 있었고
체인을 오래 매만지고 있던 자전거 옆으로 은색 승용차가
서류뭉치를 신생아처럼 안고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외로움을 흙먼지처럼 껴입고 있지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벤치 밑에 조금 구부러진 쇠뜨기풀이 다시 일어서는 동안
내 어슬렁거림은 어떤 사소함에 비유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누구나
제 몸에 딱 맞는 표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모두 서로에게 그림 속 배경일 뿐이라는 듯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어진다
■ 농민신문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 ---------- 최종무
보름 달빛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부러진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여물 냄새를 풍기며 올랐다
봉당 무너져 내린 틈으로 구렁이 허물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얏나무가 뒤울안에 새까만 알들을 수북이 낳아 놓았다
달빛이 알들을 품고 있었다
방에서 아버지 마른 기침소리가 났다
쪽문이 열렸다
이제 왔니
네 기둥은 비스듬히 개울을 향해 누워있었다
함석지붕에 베인 손바닥에서 붉은 녹물이 흘렀다
오래 전부터 나는 파상풍을 앓고 있었다
덧난 생채기에서 바람이 나고 있었다
바람은 집을 감싸고 휘 돌았다
마당귀 미륵 바위 그늘에서
질경이 씨가 여물고 있었다
달빛이 녹슨 괭이 날을 노랗게 벼렸다
오는 봄엔 굵은 물푸레 자루를 박고
비탈 밭을 팔 수 있을 거라고
널빤지 부엌문 앞에서
짤순이가 벌건 쇳물을 짜내고 있었다
보름 달빛 술렁이는 오래된 집에선
까만 알들이 부화되고 있었다
집이 일어나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뚫린 창호지 안에서 까만 눈의 아이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이제 왔니
■ 경향신문
오페라 미용실 ----------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라숱이 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 동아일보
단단한 뼈 ---------- 이영옥
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 불교신문
중심 ---------- 심수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세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 전북도민신문
날아가는 방 ---------- 유성찬
이삿짐을 다 싸두고도 아내는,
허공에 걸어둔 종이학하나 어쩌지 못하나보다
산동네 반 지하 단칸 방, 그 밤 내 이삿짐을 싸다가
방안 가득 걸어둔 종이학들은 거두지 못한 채
잠이 든 척 누운 아내,
허공에다 뭘 저리 걸어두었나
날아오른 종이학 무리들 그 밤 내
어디로든 떼 지어 날아갈 성 싶다
이 방마저 가져갈 수 있다면 좋으려만,
자꾸만 한숨소리에 침몰해 버릴 듯한
半地下의 방,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날 수 있다면,
내일 아침 자고일어나면 어디든
다른 곳에 살고 있다면
좋겠다는 아내
어디로 갈까
막막한 마음에 아무리 떠올려 보지만
좀처럼 갈 곳은 떠오르지 않고
문득, 고향땅 송도다리께를 떠올려본다
아내와 처음 만나 살았던 판잣집
함께 살았던 제비부부는 아직
잘 살고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아내 곁에 누워 잠을 청해보는 밤,
멀리, 담장 너머
누구네 집 天井을 이고 가는 중인지,
한 무리의 철새들
무리 지어 떠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부부 누워 잠든 방을 달고
부지런히 이동해 왔을 저 종이학 무리들,
그 밤 내 떠나가는 철새들 틈에 끼어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학들이 끌고 가는 저 작은 방 속
어쩌면 어느 九天을 횡단해 가고 있을지 모를
아내와 나
■ 대구매일
집시가 된 신밧드 ---------- 서영식
대리석 바닥 틈으로 발을 밀어 넣은 이끼
널브러진 빵조각을 뜯어먹는 푸른 곰팡이
빌붙어 사는 것들도 푸르를 수 있는 그 곳
서울역 지하도 바닥에 사내가 잠들어 있다
종일토록 모래를 이고 날랐을 머리칼 사이
탈출한 사막의 알갱이들도 빌붙어 잠잔다
맹독의 백사처럼 또아리 틀고 치켜든 고개
수건 하나만 사내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신밧드처럼 사내는 저 수건을 머리에 감고
대 낮 온통 사막을 짊어 날랐을 것이다
신밧드를 태우고 날던 양탄자 끝이 풀려있다
드문드문 찢어진 흔적, 상처들이 선명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어둠에 길을 잃은 양탄자
캄캄한 비행, 도시 어느 빌딩 숲을 헤치다
빌딩을 박고 도시 아래로 추락했을 것이다
사고는 어린 신밧드의 꿈들을 바스러뜨리고
양탄자의 나는 기능을 상실케 했던 것이
영혼은 밤이면 막차를 타고 어디로 떠나는가
멀리 해가 뜨는 사막을 비행하는 꿈으로
양탄자를 돌돌 말고 잠든 신밧드
그가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무언가
■ 문화일보
즐거운 제사 ---------- 박지웅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
■ 한국일보
나무도마 ----------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화색(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 조선일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 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 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쏟아지는 자잘한 햇살 실핏줄 팽팽한 뿌리로 모아풍경 소리를 내고운판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어 산문(山門)소식 엿듣게 하는가
■ 세계일보
母女의 저녁식사 ---------- 윤진화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 히잉! 어머니.
■ 전북중앙신문
겨울 강가의 사시나무 ---------- 정지웅
그래 아직은 행복하구나
네 그루터기에
부모 없는 잡풀 몇 키우고 있구나
호주머니에 숨어있는 한 가계의 벌레들
잎사귀에 재우고 나뭇가지에 앉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모두들 잘 보살펴 주었구나
작년부터 꽃 피우지 못하여
영양제 꽂고 긴 겨울을 나더니
올해도 꽃 한 송이 없이 낙엽만 태우고
지붕 없이 살아가는 새들의 엄마가 되었구나
산다는 것은 숨이 내려앉는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목숨들을 껴안고 사는 일
죽어서도 발끝을 모아
가까운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었구나
수면 위에 배 한 척 떠 있지 않아도
강물은 흐르고 갈대는 손을 흔든다
어름치는 네 머리 위를 지나 떨어진
가슴 뜨거운 별을 남몰래 주어 먹고
나는 떨어지는 낙엽들을 주어다
세상 슬퍼하는 사람들과 빵을 구워야겠다
잃어도 모든 것이 온전할 사시나무여
눈 내리는 캄캄한 밤이 오면
너의 가지마다 살찐 빵을 달아주어야겠다
달의 페달 ---------- 이우규
지상에 새벽 달빛이 내려앉는다
삶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가는
낡은 자전거 위 촉촉한 이슬이 스며들수록
삐걱거리는 생의 다리를 동동 구르며
어두운 길 밝혀줄 눈, 생기 있으라고
힘껏 페달을 밟는다
세상 어디든 달려나갈 듯
의지를 펄럭이는 깃발 아래
개미떼 같은 활자들 사이로
유럽풍의 고급 아파트 한 채,
바겐세일 명동 의류 한 벌씩 단단히 끼워 넣고
한층 두툼해진 신문들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신문이 비대해질수록 우리네 삶의
외투 한 벌 두툼해 질 수 있다면
뒤뚱거리는 생의 어깨를 움켜쥐고
어두운 세상 시원하게 밝혀주라고
힘껏 페달을 밟는다, 자꾸만
따라오는 새벽 하늘가의 초승달
누가 저 달에 페달을 달아놨을까
■ 전북일보
꽃 이름, 팔레스타인 ---------- 경종호
올해도, 고향엔 칡꽃이 흐드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계집 아이 몇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놉니다. 고무줄이 튕튕 울릴 때마다. 호박이며, 박이며, 수세미 꽃이 핍니다. 어느 새 검정 고무줄에도 꽃이 피어, 달맞이꽃으로 피어, 계집 아이 몇은 노래를 부르며 툭툭 튀어 오릅니다. 미사일 날리듯
양지바른 골목길 벽돌 속에 아비와 오래비를 묻고 옵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예루살렘으로 흐르는 계곡마다 넘쳐나는데 칡넝쿨 얽힌 이국의 틈으로 어김없이 달은 떠오릅니다. 어김없이 총알은 밀알처럼 떨어집니다.
폭격기가 지나간 바위 밑 두 눈만 깜박이다, 꿈벅거리다,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버린 못생긴 계집아이는 어느 새 어미가 되고 전사가 되어 아이를 안고 모래 틈을 가로 지르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군화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바위를 덮고, 돌산 넘쳐나는 꽃이 피었습니다. 동방 외간 사내가 보내는 꽃, 생리를 하고, 배란이 지나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그 꽃이 신화(神話)보다 더 질긴 꽃이었음을, 옆구리에 낀 아이가 그 꽃을 닮았다는 것을 몰랐어도 그녀는 좋았습니다.
■ 국제신문
혁필화(革筆畵)를 보며 ----------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 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 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 무등일보
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 ---------- 정경미
빵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개미
개미 가는 길을 신발로 가로막지 마라
끓어질 듯 가는 허리에 손가락을 얹지 마라
죽을 때까지 시동을 끄지 않는
개미 한 마리가 손등으로 오른다
언젠가 허리띠를 졸라매던 아버지
바짝 마른 허기가 만져질 것이다
아버지가 털털거리는 생선 트럭을 끌고
돌무지 비탈길을 누비고 다녔다
생선 상자 위로 쏟아지는 땡볕
신경질적으로 바퀴를 두드리는 돌덩이들
왕왕거리는 메가폰 소리를 뚫으며
식식거리며 아버지는 나아가고 있었다
거친 시동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괜찮아, 내 허리띠를 붙잡아라
그날도 아버지는 덜컹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손등에 오른 개미를 가만히 내려놓는 당신
개미 앞길에 놓인 돌멩이를 치워준다
멀어져 가는 아버지,
당신의 눈 속으로 기어든 개미가
시동을 건다 여섯 개의 다리가 붕붕거린다
■ 강원일보
안개 ---------- 최재영
길을 나서면 안개가 먼저 다가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내력
지상의 열린 틈마다 안개가 스며들고
사람들은 한번쯤 기침을 호소한다
새들은 노래하지 않으며
길은 늘 젖어있다
세상의 새벽은 잠 못 이루는 곳에서 먼저 개어나
충혈된 소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밤새 안개에 젖어 퉁퉁 불은 가로등이
불면의 문장처럼 침침하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곳의 시간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들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면
정오의 햇살이 길의 한복판까지 나와 있다
지루한 변명들이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내 안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처럼
대부분의 안개는 길 위에서 소멸해 버리고
구부러진 생의 길목마다
어둠은 먼저 찾아드는 법
새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을까
■ 영남일보
라훌라 ---------- 최해경
-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를 부르며 부르트며 바람이 거리를 휘감는다 어둔 밤 얼룩처럼 드문드문 가로등이 번지고 막차를 기다리는 내 등뒤에서 멀어져라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은 쉰 목소리로 다그치듯 나를 자꾸 떠민다 그는 저 만치서 나를 향해 말없이 서 있을 것이다 자울대다 눈을 거푸 치켜 뜨는 길모퉁이 가게 불빛 사이로 밤은 더욱 자우룩해지고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게 떨리겠지 스무 살 적, 객지에 나를 처음 떨구고 곧 목놓아 울 듯 그렁그렁하던 그 눈빛이 내 가슴에 단단히 말뚝을 박고는 녹작지근한 해질녘이면 어지러이 발길질을 해대곤 했었다 어미 소의 말간 눈망울에 들이치던 석양빛처럼 빛의 눈물 자국 다 떠메고 차마 못다한 말 되새김질하듯 그리움도 순하게 견뎌야한다는 것 오랜 후에야 그 눈의 얼룩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한여름 소낙비가 얼룩져 시린 겨울 강 핥는 여울이 되고 사랑은 얼룩져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돌이킬 밖에 없는 괴물같이 눈부신 추억을 매달 듯 얼룩이 마냥 뼈아픈 얼룩만은 아니지 이제서야 나는 나를 다독여준다 언제나 뒤돌아보면 나의 짓무른 가슴의 얼룩, 아버지가 끝내 저기 서 있다 세상 없어도.
라훌라: 산스크리트명은 라훌라(Rahulla)이다. 장애로 의역되고 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 한라일보
항아리 ---------- 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1
바람 좋은 날에는 가장자리부터 가벼워진다
미세한 햇살조각이 굴절되어 박혀드는 순간에
창을 열듯이 제 가슴을 활짝 열어 벽이 갈리고 있다
거친 난간 위에 포자들은 습한 계곡의 길을 건너고 있을까
밝음과 어둠 속, 빛을 굽는 보름달 아래
숱하게 구멍들이 뚫렸다
담쟁이 넝쿨처럼 곰팡이가 내 몸을 뒤집어썼다
멈출 수 없는 발,
푸른 숨소리 내는 바람 따라 계곡 사이
곰팡이 벌레가 긴 잠을 자고 있었다
2
햇살이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는 속 뜰 가운데
항아리를 묻는다 첫눈을 맑게 틔운 물에
메주, 참숯, 잣, 대추, 고추를 재운다
그 위에 하얀 천을 금실로 싸매고 뚜껑을 덮는다
밤새 애태우다가 헹궈내며 숙성되기 시작한
구수하게 트여오는 숨소리가 밤하늘로 터져버린다
잠에서 깬 새들이 푸른빛을 물어 나르는 아침,
옹글게 견딘 내 몸은 깊은 바닥으로 흩어지는 것일까
어둠에도 눈이 부시는 간기가 흐른다
바가지 닿는 소리가 날 때,
나는 기나긴 여정 속 밥상에 올라와 앉아있을 것이다
■ 부산일보(가작)
항해 ---------- 손병걸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 경인일보
진혼제 ---------- 성유리
어머니 삼베치마를 입은 가오리연이
꼬리로 허공을 차며 솟구쳤다
네 귀퉁이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연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 떠나고 있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가슴까지 휑하니 비운 모습이
추워보였다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고 있는 가는 끈만은
서로 놓아버리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우리는 목 아프도록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난 칼을 꺼내 팽팽한 순간을 그었다
사선으로 끊었다
연은 비로소 가볍게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래 보였다
그런 줄 알았다
아침 까치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연이 걸려 있었다
이슬에 온통 젖어
날 보고 있었다
■ 대전일보
할머니 말씀 ---------- 김성화
할아버지는 새벽 일찍 사냥을 떠났단다
햇빛보다 먼저 일어나 말안장을 챙기고
어깨에 활을 매고는 바람처럼 달려갔단다
할아버지가 모는 말의 힘찬 말굽소리를 듣고
늦잠 자던 길가의 풀꽃들은 화들짝 깨어나고
말굽에 채인 돌멩이들이 이리저리 튀었단다
멧돼지 털빛 같은 안개가 깔린 들을 건넜단다
노루 등처럼 가파른 산도 훌쩍 넘었단다
달리고 달려 백두산 기슭에 닿기도 하였단다
사냥을 끝낸 할아버지는 강가에 말을 세우고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손으로 떠마셨단다
말한테도 물을 먹이고 갈기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단다
어둑해지는 저녁이면 어깨 위에 불타는 노을을 지고
할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단다
부엌의 아궁이 불빛이 따스한 집이었단다
할아버지의 등 뒤로 펼쳐진 들판은 끝이 없었단다
그 너른 만주 들판이 할아버지의 땅이었단다
옛날에는 아무도 할아버지의 땅을 넘보지 못했단다
■ 광주일보
멜순 ---------- 강윤미
길섶 가시덤불 속에서
용케도 멜순을 찾아내시는 어머니
재잘거리는 내 눈이 서운할까
마주치시는 것도 잊지 않고
말에 간간이 추임새를 넣어주면서도
그녀의 등허리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향해 있다
두 눈 부릅뜨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지만,
내 눈에는 엉킨 실타래같은
가시덩굴 뿐
선밀 나물은 나를 피해 요리조리 숨어 있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얼른 달려와 다소곳이 앉는다
그 부름으로 환해지는 산보길
멜순도 허겁지겁 봄을 불러와 꽃을 피운다
내 입에서 나오는 선밀 나물과 어머니의 멜순
길바닥에서 엉켜 뒹구는 그 말들을 모아
어머니는 버무리신다
데쳐도 향기는 손끝에 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