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하였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시자
이를 말리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다.
한편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하며
교회의 부활 신앙을 선포하였다.
복음서에 나오는 언급들 말고는 그의 생애에 대하여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인도로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의 유해를 에데사(현재 튀르키예의 우르파)로 옮긴 7월 3일을
6세기부터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토마스 사도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증언에도 그는 주님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고,
그제야 그는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으로 고백한다(복음).
토마스 사도는 믿고 따랐던 스승님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험한 일을 겪은 것입니다.
토마스는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큰 의심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토마스는 예수님께 가장 완전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크게 무너져 보아야 큰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작은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상에서 큰 변화 없이 생활하는 사람은
큰 깨달음을 얻기가 힘듭니다.
의심도 이와 비슷합니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는다고 합니다.
큰 의심을 거치지 않은 믿음은 비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의심은 신앙으로 건너가는 다리라고 봅니다.
믿음은 의심과 절망을 넘어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둔 밤’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을 겪는 것도 하느님께 가는 데 거쳐야 하는
어둔 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큰 깨달음 뒤에는 일시적인 행운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사라질 무상한 것과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토마스 사도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에나 쉬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한때는 열심했건만 무슨 연유인지 식은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원인은 많습니다.
신앙의 의미를 못 느껴 성당에 가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삶이 힘겹고 바빠 잠시 쉰다는 분도 있습니다.
교우들과의 상처 때문에 성당에 발길을 끊기도 하고
성직자들의 차가움에 발길을 돌렸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들은 믿지 못할 뿐입니다.
계기가 오면 십자가 앞으로 다시 나올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 토마스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의 생각과 판단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한 번 더 발현하시어 그의 믿지 못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안아 주셨습니다.
토마스가 돌아선 것은 예수님의 애정 때문입니다.
스승님의 배려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을 때 감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은총으로 대해 주시는 예수님을 먼저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살다 보면 ‘냉담은 현실’입니다.
가족 중에 ‘쉬고 있는 이’가 있다면
오늘은 토마스 사도에게 도움의 기도를 청해야겠습니다.
그들도 감동하고 감복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 주시길 청해야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20,28)
이 소리는
인생의 길목에서
문득.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우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중얼거림이라네.
이 소리는
진퇴양난의 고난 속에서
간절히
하느님께 부르짖는 이들의
마지막 신음 소리이며
이 소리는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사의 찬미가라네.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