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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묵상글 (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 당신과 나 사이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35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4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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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사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당신과 나
사이
한 사람 한 사람
비우고 비워
당신과 나
사이
아무도 없어
사이마저 사라지고
당신과 나
갈림 없이 함께
당신과 나
나누임 없이 하나
당신은
나의 당신이 되고
나는
당신의 내가 되니
나의 당신과
당신의 나
사이
비로소
모든 이가
곱게 깃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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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20 05:31
- 구원의 길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내게서 물러가라”는 주님 말씀을 직역하면
내 앞에 있지 말고 내 뒤에 있으라는 뜻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가실 길을 앞에서 막지 말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데 그 앞을 막고 있으니 뒤로 빠지라는 말입니다.
축성 생활 문헌을 보면 주님의 길을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 번째 길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께(A Patre, ad Patrem)’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왔다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인데
그 사이에 있는 두 번째 길이 ‘타볼산으로부터 해골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라면
피할 수 없는 길이요, 반드시 가야 할 길인데 베드로는
지금 이 길을 앞에서 막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베드로가 이 길을 막고 나선 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만 베드로처럼 잘못 사랑하여
구원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그 길을 막아섭니다.
고통을 이겨내게 하는 것이 참사랑이고 구원의 길인데
고통받지 않게 하는 것이 사랑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계신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 구원의 길인데
힘들게 산을 오르지 않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산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구원의 길인데
인간의 산 정상으로 오르는 것을 구원의 길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시편 저자처럼 읊조립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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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5년 2월 20일 06:40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큰형님께서 일본으로 회사 출장을 갔다가 선물을 사 가지고 오셨습니다. 샤프펜슬이었습니다. 너무나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두 연필을 사용할 때였고, 여유 있는 집의 아이들만 샤프펜슬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샤프펜슬을 쓰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만에 샤프펜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분명히 필통 안에 넣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아침에 내 샤프펜슬이 너무 좋다면서 빌려서 써 본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의심이 가득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 친구만 보게 되었고, 이 친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훔쳐서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의심받지 않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의심은 점점 커졌고, 그 친구에 대한 미움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 후, 문제의 샤프펜슬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책상 서랍 깊숙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찾고 나서도 친구의 말과 행동이 의심스러웠을까요?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과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의심, 부정적인 생각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과연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참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정답을 말한 사람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한 베드로였습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이야기하시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반박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수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고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게 되면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믿음 없는 곳에서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합니다.
사탄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바로 주님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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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아프리카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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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알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 말과 ‘명백히’(행전;담대히,parresia)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 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그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입니다. 곧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 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 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담대히)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렇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신변 안전과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일니다. 비록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기꺼이 걷게 하소서.
비록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때까지 겪는 길일지라도 담대히 걷게 하소서.
어쩔 수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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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봉헌을 하고 성체를 모시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을 만큼 잘 살아야 하는 데 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말씀을 들은 사람인지?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신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속 좁게 살기도 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주님을 모신 감사함을 성당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면 영락없이 주님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맙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8,5). 그리고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8).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베드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는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반박을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껏 스승을 믿고 따라왔는데 당신이 떠나시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마음도 있고, 당신이 불행한 길을 가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성공적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계획이 바뀐다면 그것은 스승님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실패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싶은데 수모와 배척을 당한다니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스승의 깊은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적인 것에 매이는 것,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인데 그것을 반박하고 그 길을 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방해하였으니, 베드로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먼저 하려 한다면 우리도 역시 사탄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나의 잇속을 챙김으로써 얼마나 자주 사탄이 되고 마는지요.
예수님을 따르려면 희생과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통 없이 영광 없습니다. 이 시간 쉽고 편한 일, 쾌락을 즐기며 돈 되는 일을 쫓고, 소유와 지배, 명예에 맛 들이고자 하는 마음, 내 생각이 다 인양 남에게 주지시키려는 사탄의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참고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약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들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손희송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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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표징(sign)과 상징(symbol)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교통 신호등, 결혼반지, 국기 등은 모두 특정한 의미를 지닌 표징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표징을 주셨을까요? 오늘 저는 구약의 무지개와 신약의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과 사랑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창세기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첫 번째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라고 말씀하시며 무지개를 그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 무지개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무지개는 하늘에서 바라볼 뿐, 그것을 통해 직접적인 생명의 은총을 받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떤 표징을 통해 하느님의 언약이 완성될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표징을 주시는 장면을 듣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축복하신 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들어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기념의 표징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무지개와는 달리, 단순한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표징입니다.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는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성체가 몹시 고프답니다.” 당시 최인호는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최인호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면서 우리의 몸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감실(龕室)’이 됩니다. 우리는 최초의 감실이었던 성모님처럼 순명과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하느님과 노아입니다. 표징의 형태는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입니다. 언약의 성격은 홍수로 멸망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신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예수님과 모든 인류입니다. 연약의 형태는 빵과 포도주입니다. 연약의 성격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미사를 통해서 지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외적인 표징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내적인 은총의 표징입니다. 무지개는 인간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가 직접 받아 모시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묵상하며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표징이라면,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언약을 우리 삶 속에서 실현하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실 때,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하느님의 은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맡긴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난의 잔, 십자가, 나눔, 희생을 통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너의 신앙고백을 너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앙고백은 참된 신앙고백이 아니다.” 참된 신앙인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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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고난, 죽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부터는 상상력을 발휘해 보겠습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치유하시는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보고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다 버리고 우리는 당신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고향에 두고 말입니다. 가족들도 일도, 돈도 놓고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서라도 그런 일을 겪으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그저 높은 곳에 오르셔야 하고 그 옆에 저희를 있게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자로서의 주님이 아닌 세상 왕으로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대의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슬픔의 단상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과 같다.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이런 슬픔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이런 슬픔 하나씩은 품고 있으리라.
그 슬픔이 그대 빛나게 하리라.
그 슬픔이 그대 힘차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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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히 빛나는 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
“주님의 무지개, 주님의 십자가”
어제 강론 주제는 ‘개안의 여정’이었고, 오늘 복음은 흡사 예수님이 제자들의 영적 시력을 테스트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제자들 역시 예외 없이 눈멀고 귀먹었음에 개탄한 예수님이셨는데 오늘은 친히 제자들의 영적 시력을 점검하십니다. 동시에 우리의 영적 시력도 점검 받는 느낌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누구인가? 사람들의 동향을 묻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은후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도피할 수 없는 물음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대표하여 정확히 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영적 시력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을 봅니다. 베드로와 더불어 제자들 역시 순조로운 개안의 여정중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이들의 수준이 미흡하기에 침묵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후 성령의 깨우침이 있어야 비로소 주님 파스카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저 같으면 지체없이 고백했을 것입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롭고 좋은 고백으로 얼마나 많이 강론에 인용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꽃같은 하루 꽃같이, 주님 파스카의 꽃같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은 다음 장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심으로 진짜 제자들의 영적 시력을 확인하십니다. 그렇게 멋진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며 나섭니다.
절대로 우리가 기대하고 꿈꿔온 메시아는 그런 고난과 죽음의 메시아는 아니라는 것이며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배척과 고난, 죽음은 물론 부활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체없는 질책이 베드로에게 쏟아집니다. 베드로의 환상을 깨는 충격요법적 표현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졸지에 수제자 베드로가 사탄이 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믿는 이들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십자가를 부인하는 어느 제자든 사탄곁에 있는, 사탄이라는 것입니다(Any disciple who denis the cross stands on the side of Satan).
베드로에겐 평생 잊지 못할 충격적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의 영적 시력은 전화위복! 이런 체험의 결정적 계기로 더 한층 좋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시에 세 차례나 주님을 모른다 부인했던 베드로 수제자였음을 잊어선 안되겠습니다.
참으로 영적 시력의 절정은 주님의 십자가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주님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받아들이고 살 때 이뤄집니다. 영원히 빛나는 새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인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성전 지붕 하늘 높이 한눈에 보이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신약의 주님의 십자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창세기에서 누구나에게 볼 수 있는 비온 후 하늘 한복판의 주님의 무지개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인 주님의 십자가요, 이어 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 위에 사는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겠다.”
스스로 당신을 견제할 제어 장치가 될, 하늘의 무지개를 영원히 빛나는 계약의 표징으로, 구원의 표징으로 삼겠다는 약속이요 또한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비의 표현입니다. 비온후 하늘 한복판에 “주님의 십자가를 안고 있는 하늘길 같은 주님의 무지개”를 상상하면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겠는지요!
혹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 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하늘의 무지개를 연상하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드워즈의 <무지개>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나이가 들어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으로 거둬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경건함으로 매어지고자”
자연 또한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경입니다. 자연의 경건함도 좋지만 대신 “하느님 경외함으로 매어지고자”로 대체해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무지개뿐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감동으로 설레는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빛나는 표징이 바로 파스카 예수님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만으로는 미흡합니다. 무지개를 완전 보완하여 무지개와 더불어 영원히 빛나는 새 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이 주님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옛 현자의 조언도 주님과 나를 알아가는 평생공부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목적없이 공부하면 지식을 많이 쌓는다 해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뿐이다.”<다산>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펼칠 수 없고, 뜻이 없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무후전서>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학문중의 평생 학문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요 학문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새 계약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인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 공부요 학문입니다. 평생공부, 평생교육에 매일 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 주시며 영적 시력도 날로 좋아지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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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다시,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29)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까닭
메시이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아이고,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이며, 라틴어로는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 ‘크리스마는 라틴어로는 ‘기름부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이’라고 불립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하느님께서 그분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기”(사도 10,38)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도 찬미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하느님께서 기쁨의 기름을 당신 동료들에 앞서 당신에게 부어 주셨습니다”(시편 45,8). 그분은 우리를 당신 동료들이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세례 때 성령의 은총을 받기 위해 크리스마 성유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임아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당신께서는 먼저 당신의 것이 되지 않은 사람과는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하느님의 귀를 멍멍하게 할 정도로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당치 않게도 화를 냅니다.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여러분의 뜻이 된다면, 그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의 뜻이 하느님의 뜻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앓고 있다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병이 낫기를 바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여러분의 쾌유가 하느넘의 뜻이 되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뜻이 여러분의 뜻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앓고 있다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내버려 두십시오. 여러분의 벗이 죽어 가고 있다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내버려 두십시오. 보다 확실하고 당연한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옥의 고통과 연옥의 고통과 온 세상의 고통이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면, 우리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336)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마지막 날의 사연들
이 고아원에는 성당의 특별 제단과 통하는 방 하나가 있었다. 히야친따는 자주 이 방에 들어가서 기도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아무에게도 보일 염려 없이 감실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골몰한 태도는, 특히 열정에 타는 눈으로 감실을 바라보는 그 눈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고아원에서 건강 상태가 조금 좋을 때는 사제에게 청하여 이승에서의 최대 희망인 영성체를 하였다.
그 동안의 병고로 기진맥진한 소녀의 허약한 몸에는 고통이 끊일 때가 없었으나 성모님은 천상에서 자주 소녀를 방문하시어 위로하시고 북돋아 주시었다.
어느 날 소녀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친절한 원장이 문병을 왔다. 그러자 히야친따는,
“대모님, 조금 있다 오셔요. 난 지금 마침 성모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며
변용된 아름다운 용모로 성모님이 오실 방향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천상 모후와의 대화가 끝나자 소녀는 연령과 교육을 훨씬 초월한 고상한 사정을 대모님께 이야기했었다. 죄, 전쟁, 사제들에 관한 약간의 생각은 그 원장의 손을 거쳐 기록되어 전해졌다.
어느 날 원장은 그런 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성모님께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제가 생각하기도 했지요. 전 생각하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하고 대답했다.
소녀는 예언도 했었다. 두 언니 훌로리다와 데레사의 죽음에 관해서 그리고 원장과 주치의, 그 밖의 사람들의 장래에 관한 예언이었다. 예언은 잘도 들어맞았다. 이런 일은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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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만을 메시아로 고백해야 할 우리는 /
박윤식 [big-llight] 2025-02-19 ㅣNo.180187
‘야누스의 얼굴’이란 말이 있다. 두 개의 얼굴과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신인데, 인간의 부정적인 ‘이중성’을 표현할 때 쓴다. 신앙에도 이런 이중성이 있다. 늘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희생과 고통은 철저히 외면한다. 봉사 때도 남들 눈에 띄는 걸 좋아하고, 숨어서 해야 할 희생은 거의 하지 않는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지, 그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허상을 만들어 내 맘대로 이용해선 안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면 신앙인으로서 희생과 봉사를 하자. 고통도 ‘선물’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주님의 참된 제자일 테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인근 마을로 길 떠나셨다. 그리고 그 길에서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의 답이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랍니다.” 그분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사실 필리피라는 그 지역은 헤로데와 클레오파트라 왕비 사이에 태어난 헤로데 필리피가 다스렸던 곳으로,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기려 세운 곳이다. 또한 이교도의 중심지였으며, 구약 시대에는 그들 신앙의 ‘바알’ 신의 예배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곳은 이교도인의 유산과 문화를 집대성해 놓은 도시였을 게다. 그 이방인의 마을로 가시면서 당신의 정체성을 묻는다는 건, 바로 제자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게다.
마치 다종교 지역권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도 해당되는 물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고, 죄와 죽음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당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고백하는 참된 신앙인인지를 확인하시려고 계속해 이 질문을 던지시리라. 우리는 주님의 이 질문에, 어떤 대답으로 우리 정체성을 드러낼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사람은 좋아하는 이만 뽑는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다 사랑하신다. 우리는 좋아하는 이만 사랑하기에 차별하고 편애하기 쉽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 하느님께서는 부모님보다 더 많이 자녀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이 하느님의 마음을 꼭 닮아 갔으면 참 좋겠다. 하느님 마음을 잘 안다면 우리는 늘 그분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게다. 꼭 예수님처럼 말이다.
역사상 인간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예수님 질문을 계속 받아 왔다. 이에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도 세상 모습도 달라졌다. 그래서 이 엄숙한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게다.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은 내 뜻, 내 신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닌, 예수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길 고백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그분 제자로 삶으로써 세상 악과 어둠을 없애시는 그분과 어디서나 늘 함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구세주란 고백은 엄청난 신앙행위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을지? 누구나 예수님의 손길을 만날 게다. 그렇게 그분께서 개입내지는 간섭하셨다고 느껴지는 사건 또는 만남일 터이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모든 원인은 당신이십니다.’ 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을 구세주로 선언하는 행위일 것이니까. 기쁘고 좋은 만남에선 쉽다. 그러나 억울하고 힘든 사건에선 괴로울 게다. 평소의 연습이 없다면야 너무 어려운 고백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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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살아가면서 우리가 때때로 되새겨야 하는 물음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참조)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내놓은 답은 모든 이에게 공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교리상의 정답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고백이 담긴 답을 요구하실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는 출제자가 바라는 정답을 맞히고도 칭찬 대신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마도 그가 “그리스도”(8,29)의 의미까지는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섣불리 알리기를 바라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과연 시험을 멋지게 통과한 바로 다음 순간 베드로는 스승에게서 “사탄”(8,33)이라는 극단적인 꾸지람을 듣습니다.
“내게서 물러가라.”(8,33)라는 말씀은 그리스 말 원문을 볼 때 “내 뒤로 가거라.”입니다.
스승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으로 스승의 앞을 가로막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자리로 곧 스승의 뒤로 가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 사탄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진짜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순교를 향하여 가는 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도록” 교우들의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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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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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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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 29)
낮아짐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겸손의
주님이십니다.
언제나
사랑의 발길을
먼저 내딛는
사랑의
스승이십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보여주시는
소중함의 본질이신
소중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삶의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그 어떤 것에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대자유의 삶을
사시는 진정한
자유인이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시며
우리와 함께
고통을
앓으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시는
십자가의
기도이십니다.
마지막 여정이
수난과 죽음을
거치는 부활의
여정임을
보여주시는
참된 부활이시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마지막
고향이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일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시는
맑은
완성자이시며
참된 인생이
되십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는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으로
오늘은 더욱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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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극적인 삶의 전환에 대한 묵상도 은혜롭지만,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에 대한 묵상도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 사도는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은 꼭 저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그리 저와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래서 결심하고, 시작은 잘하는데, 뒷받침이 그렇게 안 됩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삶이 받쳐주지를 못합니다.
첫출발 때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이 달려들던 그 열렬한 마음, 예수님을 향해 활활 타오르던 그 불같은 열정, 순수한 신앙, 그런 초심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는데...생각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일단 용감히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워낙 신앙의 기반이 약하다보니, 의지력이 부족하다 보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분위기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수제자 직분까지 맡다 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속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삶보다는 육적인 생활에 익숙해 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요청과 제자단의 미성숙 사이에 끼여
참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돌아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당신들이 담당하셨던 학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먼저 반장을 불러 혼을 내거나 족쳤습니다.
제자단의 반장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이 맡았던 직책상 무수히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도 엄청 많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엄청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옛 삶의 방식, 옛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하는 제자들,
무조건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엄청난 꾸중을 하시는데, 반장인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의 강도가 엄청납니다.
화들짝 놀랄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베드로 사도의 문제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 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따졌던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한참 기다려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지속적으로 수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한 우리지만, 아직도 고통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부족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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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27-3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관해서 물으신다. 베싸이다의 소경을 치유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의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알아보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알려주셨으나, 제자들이 당신에 관한 생각이 어떤지를 아시고 고쳐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신다. 대답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하신다. 이때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을 칭찬하신다. 그러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펄쩍 뛰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다(32절). 이에 예수께서는 가장 혹독하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고 책망하셨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내 생활 속에,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하여도, 베드로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세상의 행복을 위한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듯이 고난을 겪고 십자가라고 하는 어려운 길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어 모두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분의 삶을 본받아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변화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신비 혹은 고통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십자가와 고통은 항상 영광의 신비로 부활의 신비로 연결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 있어 주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고, 항상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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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조커’(2019)는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악의 화신이 되어 가는지를 담아내었습니다.
광대복장을 입고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게 젊은 아이들은 구타하고 조롱하며 가진 것을 빼앗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시장 밑에서 일할 때 태어난 고담시의 시장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 생활에서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도 어머니의 망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실 아들을 감금하고 폭행하였습니다.
믿을 사람은 어머니 한 분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을 학대하고 이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조커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 온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던 이들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리고 고담시티의 악의 상징이 됩니다.
이 영화는 조커가 끊임없이 관객을 향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처럼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영화는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다 조커가 될 수밖에 없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악이 정당화됩니다.
우리는 한 평범하고 모범적인 직장인이 어떻게 악의 화신이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유용한 시스템을 고안하여 학살을 도운 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승진하려고 나라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적인 게 그렇게 나쁜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적인 것이 좋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을 사탄이 되게도 만듭니다.
아무리 세상의 많은 악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인간이니까 이럴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자신이 짐승이라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적이라는 말은 거의 사탄이 되는 것까지도 정당화하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에서 “생각하는구나.”의 단어는 ‘프로네오’인데 ‘흥미를 가지다, 관심을 가지다.
애정을 두다.’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에 관심을 가지면 사탄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탄이 되려고 해서 사탄이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사탄이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사탄도 자신들은 영원한 종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분개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질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것이 사람을 사탄도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조커가 ‘나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가졌어도 끊임없이 ‘인간이면 다 이럴 거야!’라는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98)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임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느님이 되라는 악마의 유혹에 이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 안에 하느님과 대적할 모든 요소들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을 누르는 길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죄를 짓는다면 이미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체성혈로 하느님의 본성을 모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성체를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하느님이라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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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의 은총’을 얻는 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29-33).”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또는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이 ‘그리스도(메시아)’ 라고 믿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고, 스승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는 “저희는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스승님을 따릅니다.”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꾸면,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
또는 “너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입니다.
대답은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또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유가 처음에는 ‘현세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교리를 잘 모르고, 구원이 무엇인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때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더라도 교리를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알고 만나면서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냥 현세적인 소원을 비는 것으로 멈추어 버리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여기서 ‘불쌍하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외면하고 현세적인 것만 원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만 바라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쌍한 일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신앙인이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병이든지 어떤 사고든지 여러 가지 급박한 상황이 생길 때가 많고, 그럴 때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여정을 더 잘하기 위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만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신 것은,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은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후에야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먼저 믿어야만
‘예수님은 그리스도’ 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할 자격이 생긴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모두 체험하고
믿음이 완성된 다음에 만들어진 책입니다.
기록할 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일 뿐이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마다 받아 적은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을 하실 때마다 적은 현장 기록도 아닙니다.
‘성전 정화’ 장면에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
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말리다가 크게 혼난 일은, 그때까지는 ‘머리로만’ 믿고, 아직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마귀 들렸다는 뜻도 아니고, 사탄의 길을 걷고 있다는 뜻도 아니고, 그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이 사탄이 하는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제자는 스승이 가는 대로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세속에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앞설 수도 있지만,
신앙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면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4-25)”
4)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바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이고, ‘사람의 일’은 사도들의 ‘인간적인 애정과 판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직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모르던 때였고,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십자가의 길’을 말렸을 뿐입니다.
<나중에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되고 믿게 되었을 때에는, ‘온 삶’으로 예수님 뒤를 따르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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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8,27-33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이 쓴 <꽃>이라는 시입니다. 그런데 정말 누군가 내 이름을 알아주고 불러준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의 삶에 참된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그렇지 않은 듯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불러준 베드로가 정작 그분의 ‘수난예고’를 듣고는 그러시면 안된다고 반박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이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해야 내 죗값을 대신 치르는 ‘속죄양’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시려면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오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우리 대신 죽으셔야만 하지요. 하지만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예수님 앞을 막아선 겁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엄중한 질책을 받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 고통과 모욕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주님을 위해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각오도 용기도 의지도 없으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기도하며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드는 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 구원에 아무 의미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지요. 기도를 통해 주님과 깊은 친교를 맺고 기꺼이 그분 뒤를 따라나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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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선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인간이지만 태초에 있었던 어둠의 세력에서 인간은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달콤한 악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로 악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에 하나인 자유를 가지고 달콤한 금지의 사과를 선택한 것입니다.
자유는 소중하고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카인으로 시작해서 세상에는 다시 악이 만연지자 하느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악의 세계를 멸하시기 위해서 홍수를 내리신 것입니다.
의인인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따라서 생명이 있는 세상을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 후손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창세 9,1-3)
그리고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세워 약속의 표징으로 삼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 하라.’시는 말씀이 요즈음 들어 벌어지는 인간과 자연관계를 보면 버거운 것은 아닌지요?
저 출산에 인구는 점점 줄고 동식물에 대한 관리 권한 남용으로 자연이 파괴되어 동식물의 어떤 종은 사라지거나 멸종 위기를 맞는 것도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이런 잘못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이상기후가 도처에 발생한다.’ ‘기온 상승으로 얼마 있으면 북극 남극의 빙하가 수 년 내로 없어질 것이다.’라는 말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러다가는 하느님께서 홍수로 이 세상을 멸망시키셨지만 이제는 인간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이기주의로 인해 인간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처럼 갈릴래아 호수 위 북쪽으로 위치한 카이사리아 필리비 지방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십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에게 늘 비판적이던 바리사이도 율법학자도 없이 아주 한가롭고 평온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안 하시던 당신신원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대답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보고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시지요.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대로 대답했다.’라고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30절)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이렇게 이르시는 말씀을 흔히 ‘메시아 비밀’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이미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몇 차례 바뀌는 침략의 제국들에 이어 로마 제국에서도 숨 쉴 수 없을 정도의 중압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내세우지도 못하는 암울한 미래에 예언자들이 외치는 메시아는 제발 이런 제국들을 제압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지도자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기를 기해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더라도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더욱 정치적 메시아 빛깔이 짙었던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주님의 신원이 잘못 백성들에게 전달되면 정치적인 그리스도로 왜곡 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정치적인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맞는데, 사도들도 유대인이라 적어도 메시아는 영광이어야 하고 뭍 민족들에게 빛나야 하는 기대감이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가 주님께서 사람들로 부터의 배척과 수난을 겪으시고 죽음을 맞으신다는 것과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사흘 만에 부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죽음’이라는 말씀에 가려 베드로는 실망도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안 되신다.’라고 만류하며 주님을 반박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생전에 그렇게 지독한 말씀을 안 하시는데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절)
사도들은 주님의 이 말씀의 참다운 의미를 부활 후에서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못 알아들어도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결정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순명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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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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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우리는 무엇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정보에 많이 의존합니다. 특히 오늘날엔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덕분에 구글이나 네이버에 물어보면 그럴싸한 답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묵상하고 발품을 팔아서 답을 찾는 노력은 쓰잘데없는 시간낭비로 생각되고, 쉽게 남이 찾아놓은 답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을 정답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답은 비슷한 답일 수는 있어도 정답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마르 8,27) 물으시고,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8,29)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비슷해 보이지만 정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가 생각하는 답'을 찾아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 답을 찾았고 예수님은 그게 정답이라고 확인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이야기하는 답은 참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깨달은 사람이 하느님은 이런 분이고, 영성이란 이런 것이고, 깨달음은 이런 것이라 해도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내가 깨닫고 체득한 답만이 정답입니다. 오늘 그 답을 찾는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베드로가 찾은 답은 사실 깊은 성찰을 통해 나온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운좋게도 정답을 맞추기는 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맞지요! 그렇지만 답만 알 뿐, 아직 예수님을 정확히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죠. "맞어.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야.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선 사람의 아들은 먼저 고난과 배척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이 말 알아듣겠니?"
사람의 아들이 죽어야 비로소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된다! 기막힌 교환 아닌가요? 사실 베드로는 못알아 듣지요. 그래서 된통 혼나지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고.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러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그토록 가르쳤건만 아직도 못알아 들은 게죠.
죽어야 산다! 사람의 아들이 죽어야 비로소 하느님의 기름부은 자가 된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비밀을 우리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싶지요? 그렇다면 죽으라네요. 오늘은 한번 죽어 보실래요? 에고(ego)를 죽이고, 욕심과 탐욕을 죽이고, 질투와 시기를 죽이고, 세상 달콤함에서 죽어 보세요.
사랑하니까, 사랑 때문에 죽으십시오. 그러면 벗님 또한 하느님 영으로 도유되어 참 생명과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겁니다. 죽지 못해 삽니까? 아뇨! 살기 위해 죽으십시오. 팍팍 썩으십시오. 그제야 부활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깨우치지 않을까요? 그제야 참 생명을 싹틔워내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조금씩 메시아의 운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회가 되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마르 8,31)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반드시 ... 하셔야 한다."는 말씀은 그저 단순한 의무나 당위성 이상의 비장한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코는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고 합니다. 말은 입밖으로 내는 순간 더 강력한 구속력을 갖게 마련이고, 공적으로 공포될 때는 배 이상의 무게가 얹힐 겁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 당신이 몸소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이 어찌 수월한 과정이겠습니까만, 예수님께서는 방금 말씀하신 당신의 수난 예고를 더 명백히 하십니다. 그건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시면서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의 도를 넘은 반박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르 8,33)을 들어 꾸짖으십니다. 사실 삶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구별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수난 직전에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로 고뇌하실 겁니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의 일(뜻)"에 순명하실 것입니다.
독서는 홍수 이야기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새와 물고기를 비롯한 모든 짐승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창세 9,2)고 하실 때, 인류 첫 조상의 범죄가 떠오릅니다. 겁 없이 인간에게 하느님을 대적할 범죄의 올가미를 놓은 뱀과 그에게 맥없이 넘어진 인간. 하느님의 이 새로운 질서 이후에 다시는 짐승의 꾐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하는 인간은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유독 강조하고 있는 "피에 대한 책임"(창세 9,4)에서는 카인의 살인이 떠오릅니다. 당신이 손수 빚은 사람이 타인, 그것도 혈육의 피를 부른 비극을 겪으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런 것을 싫어한다'고, '혹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니 절대 그러지 말라'고 축복의 자리에서 미리 못을 박으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계약을 세우십니다. 여기에도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 자손들과 계약을 세우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과"(창세 9,10)도 계약을 세우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요구조차 한 적이 없는 짐승들에게까지 그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 주시는 겁니다. 악하고 부족한 인간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이 파멸되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겁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을 겪으시고 고심 끝에 나온 하느님의 뜻이니 꼭 그래야 합니다.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혼자 속으로 생각하고 품으셔도 될 결심을 굳이 인간과, 모든 피조물과 공유하고 계약을 세우시는 이유는 뭘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처럼, 이 역시 인간이나 피조물에게 전달하는 것을 넘어 당신 스스로에게 명백히 하시는 다짐이 아닐까 헤아려 봅니다.
하느님의 후회와 회심으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제 주제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계약의 대상이 됩니다. 이 계약은 나중에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으로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벗님 여러분, 그 계약 덕분에 우리도 서약을 통해 이 계약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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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주님께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삶
<2025.2.20> 아침을 여는 묵상 (눅 5:12~26절)
❝주님께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삶❞
❚ 힘들고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주님께 대한 소망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 힘든 인생 여정에서 보여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 주님의 따뜻함의 손길을 사모해야 합니다(12~16절).
예수님이 어떤 동네에 계실 때에 나병 환자가 예수 앞에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이나이다..’라고 간청했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들은 마을 밖에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나는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인생이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소망도 희망도 없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런 환자를 향하여 예수님은 친히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곧 나병이 떠나갔습니다. 율법에서도 나병 환자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어쩌면 육신의 병 고침을 받는 것보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이 환자에게는 더욱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고칠 수 있었음에도 친히 그에게 당신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 가지 환경의 이유로 인하여 무기력해진 상태 그리고 분별력과 판단력을 상실한 채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영적 나병에 걸린 채 살아가는 인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다시금 희망이 넘치는 삶으로의 변화를 위해서도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손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 전달될 때, 온전한 회복과 삶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치유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영육간의 질병을 고치는 것은 돈도 아니요, 옆에 있는 사람의 도움도 아닙니다.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닿으면 모든 문제와 아픔은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따뜻한 손길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영원히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인생이어야 하겠습니다.
➲ 믿음의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내야 합니다(17~20절).
또 하루는 한 집에 들어가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곳에는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번잡한 그곳을 뚫고 지나갈 수 없었던 한 중풍병자의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놀란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어떤 부류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 속에서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부류는 마치 집나간 탕자와 같이 늘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에 대한 열정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구경꾼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은 어떠한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는가?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얼마나 절실한가?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린 그들처럼 때로는 극단적이고 저돌적인 자세도 필요할 때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있어서는 보다 적극적인 확신을 가지고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적극적인 우리 자신의 믿음이 만날 때, 그곳에 구원의 싹이 트고, 영생이라고 하는 소망의 강물이 흐르게 됩니다. 주님께 영원히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인생답게 적극적으로 은혜에 대한 목마름을 갖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혼의 구원함을 위하여 신실해야 합니다(21~26절).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그러한 선언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을 어찌 예수 당신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 주님은 단순히 중풍병자의 몸만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죄 사함을 통해 그의 영혼과 삶이 온전해 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을 넘어서는 구원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 전체를 온전히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주님께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아야만 구원함의 은총 아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온전한 회복과 구원의 소망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25,26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질병과 영혼의 질병을 모두 고치셔서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요, 우리 인생이 주님께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절망의 끝자락에서라도 주님께 희망을 거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는 믿음으로 기적을 기대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죄 사함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삶을 살아가도록 믿음의 신실함과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눅 5:12~2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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