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수난 성금요일
이사 52,13-53,12 히브리 4,14-16; 5,7-9 요한 18,1-19,42
2024. 3. 29.
주제 : 예수님이 보이신 삶의 의미
오늘은 예수님께서 수난이라는 표현으로 세상의 삶을 마치시고 죽으신 날,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의 의미를 우리가 기억하고 새기는 날입니다.
세상에 산 그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만드는 삶의 의미보다 그다음에 맞이하는 죽음의 의미를 더 크고 중요하게 말하겠습니까? 세상의 삶에서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내용을 말하거나 생각할 일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오늘 신앙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그 의미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특별히 강조하는 전례를 거행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나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이루신 구원을 위한 결과가 되는 일에 어떤 방법으로 참여하고, 어떤 좋은 결과를 내 삶으로 더할 수 있는지 물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산 사람이 만들고 드러내는 행동이 ‘구원’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세상에서 매우 행복하게 잘 지낸 일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해석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그런 일을 만드는 것처럼 좋은 삶의 모양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구원이라는 결과를 만드는 사람의 행동일 것입니다.
사람의 삶이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면, 그가 세상에서 열심히 살았다는 소리가 되고, 성실하게 살았으며, 세상의 삶을 통하여 훌륭한 죽음을 준비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삶에서는 죽음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한 일이 적고, 다른 사람이 남기는 죽음에 관한 모습에서 희망이거나 즐거운 모습을 본 적은 없다고 말하기가 쉽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나의 삶을 통한 구원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평가할 때, 예수님의 삶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죽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교회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대하는 태도입니다. 교회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처지에서는 그렇게 의미를 생각하는 일이 없거나 적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세상에 사셨지만, 하느님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신 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쉽사리 생각하는 내용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놀라는 일이고, 그분께서 보이신 기적에서 놀라는 행동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표현으로 그 삶을 요약하겠습니까? 이러한 사정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한번 시작한 신앙의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사정과 이유를 앞세우면서 받아들인 신앙에 관하여 냉담하게 대하거나 비난의 소리를 하며 무신론자의 길로 돌아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등지고 떠난다면, 그가 이룬 세상의 삶은 얼마나 좋은 모습이겠습니까? ‘무신론자라는 사람들’과 ‘신앙의 힘과 역할을 거부하는 사람’의 삶에 생길 좋은 일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세상의 일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라거나 다른 사람을 위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일은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의 삶은 일반적으로 내가 베푼 만큼 되돌려 받는 것을 전제로 하여, 내가 사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지. 나의 삶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행복을 앞세우는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이 일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러한 일이 신앙을 먼저 생각하는 일에는 가능하다고 말하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위에서 인간으로서 삶을 마치고 죽으신 일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했는데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으로 나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마지막 행동이었습니다. 그러시면서도 십자가의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순간까지, ‘이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그 순간까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고 그들에게 온전히 하느님의 구원이 도달하기를 바라셨을 거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다고 말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위에서 예수님이 삶을 마치신 것은 당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선택을 우리가 남다르게 본다면, 나는 과연 그 선택을 나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내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신 본보기를 좋게 생각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서야 우리는 나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본보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