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22
10월26일[연중 제2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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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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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XJLT1wCE7w
[서울대교구 윤상현 비오(청소년국 유아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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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강력한 경고성 발언은 우리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의 표현입니다!>
젊은 사제 시절, 아이들과 동고동락할 때, 너무 성급했고 미성숙했던 탓에 여린 새싹 같은 그들에게 참 많은 상처를 준 것들, 평생을 두고 반성하게 됩니다.
여차하면 빗나가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으름장을 놓고 강력한 경고성 발언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배경에 그저 아이들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음도 고백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동족 유다인들에게 강력한 경고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주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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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은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주님이십니다!>
올봄에 심은 무화과 묘목들을 돌봐주다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밭에 심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 비유가 현장감 있게 다가옵니다.
과일 나무를 심는 밭주인 입장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요? 너무도 당연하겠습니다. 묘목이 빨리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성장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는 것이겠지요.
저희도 매실나무 밭에 무화과나무 열 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름 여기 저기 묘목 심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물도 듬뿍듬뿍 주고 거름도 넉넉하게 주며 어서 빨리 묘목이 자리 잡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두 그루만 남기고 나머지 8그루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남아있는 두 그루에 지극정성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양질의 퇴비도 추가로 뿌려주었습니다. 무성해진 잡초도 제거해 주었습니다. 정성 탓이었는지,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잎도 무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심어놓으신 한 그루 무화과나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는 밭주인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깊이 뿌리를 내리고, 웬만한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튼실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겠지요. 잎만 무성한 나무가 아니라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실속 있는 무화과나무로 성장하는 것일 것입니다. 겉은 멀쩡한데, 결실이 없는 나무가 부지기수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결실 없는 나무 중에 한 그루입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재배인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복음 13장 7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언제나 우리 편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한번만 선처해주실 것을 신신 당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변호하고 감싸 안아주실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 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복음 13장 8~9절)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와 죄인인 우리 인간 사이에 서셔서, 배은망덕과 고집불통의 명수인 우리를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까 고민하고 노심초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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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90i2xBIw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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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부터의 회개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회개’가 주제입니다. 회개는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까요? 우리가 지은 죄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 회개하려면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인 게 회개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마치 삼 년 동안 열심히 거름을 주며 가꾸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결국엔 잘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몸을 가린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은 믿음이 없음을 상징하고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나 자신을 믿는 삶에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회개해야 했던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뱀을 믿었다는 것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한 행동에서만 회개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삶이 아닙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영화가 ‘밀양’입니다.
영화 ‘밀양’은 회개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분명 전도연 씨는 믿음을 갖게 되어 용서해 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유괴 살인한 범죄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신도 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시골에 와서 돈 많다고 떠벌리고 다녀서 결국 아들이 유괴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은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시 나가지 않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자기도 죄가 있었다고 회개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를 넘어서 ‘나’에게서 회개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만 회개하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있다는 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하느님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죽이는 봉헌이 되어야지 회개지 내가 한 행위에서 아무리 회개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부정’과 ‘하느님 인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의 믿음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게 회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살펴봅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다가 빌리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자신이 깨끗해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을 바친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치면서도 여전히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제물에는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못 박혀 그 피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니 그런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주님께 무슨 가치가 있어서 주님께서 그 제물 덕분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거나 무언가 나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제물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무엇을 바랍니까? 그냥 받은 것에 감사해서 앞으로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는 받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열여덟을 ‘여섯 + 여섯 + 여섯’으로 보고 있습니다. 666. 짐승의 숫자입니다. ‘세속-육신-마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탑은 ‘자아’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으로 씻기만 하면 깨끗해지는 실로암이 있는지 자기를 믿었기에 그 자신에 깔려 죽게 될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은 주님 무상의 선물입니다. 실로암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믿거나 세속-육신-마귀를 탑처럼 세워놓고 은총을 받으려 한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앵그리스트맨’(2014)은 인생의 모든 게 불만인 헨리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춤을 배운다고 해서 연을 끊었고 아내와도 별거 중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인생을 비관하는 의사에게 뇌동맥류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언제든 뇌혈관이 터져 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열이 받은 주인공은 도대체 그러면 얼마나 사느냐고 묻습니다. 의사도 자신에게 다그치는 그 사람이 싫어서 그냥 ‘90분’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곧 터지니 정밀검사를 받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쳐나가 마지막 90분 동안 해야 할 일을 찾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첫 번째는 아내와 화해하는 것, 두 번째는 아들과 화해하는 것, 세 번째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갔더니 다른 남자와 있었고,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동창은 단 한 명 나왔는데 어렸을 때 여자친구를 뺏긴 것 때문에 당장 죽을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터지든 말든 이젠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를 구합니다. 그리고 지금 혈관이 새고 있으니 병원으로 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어내릴 때 이미 자존심까지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 춤 연습하는 곳으로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아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용서를 청합니다. 어렸을 때 아들과 함께 췄던 춤을 춥니다.
주인공은 수술하고 8일을 더 삽니다. 그러면서 아내와도 친구와도 화해합니다.
봉헌은 바로 헨리가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는 것이 아닌 주님께 맡기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더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만 표현됩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끝내 나를 믿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믿을 때 가장 먼저 믿게 되는 게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봉헌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결심입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봉헌되어야 했습니다. 선악과의 봉헌은 더는 뱀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표현입니다. 그 때문에 회개는 봉헌과 직결됩니다. 이 선악과가 구약에서는 십일조가 되었고 예수님도 내라고 말씀하셨고 미사 때 빵과 포도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끝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무서운 결말을 제시하시며 참된 회개의 표징을 봉헌으로 표현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내 피를 제물에 섞어 봉헌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사에 위탁하겠다고 내 자아의 탑을 무너뜨려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봉헌에 내 피를 섞고 그래서 내 힘을 빼고 교회의 성사에 위탁합시다. 이것이 회개의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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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서 뉴욕에서 신부님이 왔습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로 오기 전에 뉴욕의 평화신문에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의 사정을 잘 알기에, 신문 홍보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같은 서울 대교구이고, 전임 신부이기에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힘들면 친정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듯이, 신부님도 아버지의 집에 온 것처럼 편했다고 합니다. 신문사 운영은 제가 5년 동안 있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직원들은 신문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도 알차게 디자인했습니다. 건물이 100년 가까이 되었기에 고치고, 수리해야 할 곳들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지붕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신자분이 공사를 맡아서 조금 저렴하게 계약했지만, 신문사가 감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친정 같다는, 아버지의 집 같다는 달라스 성당에서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서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신앙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직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소유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금연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진정한 금연이 아닙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이고,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이야기는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본인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비우는 사람이, 나누는 사람이, 먼 곳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해서는 더욱 기다려 주시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더욱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 악,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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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1-9: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항상 회개하여 그에 맞갖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을 만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애며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는 나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보도록 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어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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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에페소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각자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우주적인 계획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속량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에페 1,10)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4장 이후로는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여 줍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덕들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여야 합니다.(어제독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실천하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는 교회 안의 여러 직무도 같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려고 주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바라봅시다. 최종 목표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이 커다란 계획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장하고, 우리 각자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4,13) 다다르기까지 성장합니다. 어중간한 삶에 만족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4,1) 살아가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라는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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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3)
당시 사람들은 어떤 참사가 발생하면 그것을 천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 사건은 '천벌'이 아니라 빌라도라는 개인이 일으킨 살인 사건일 뿐이다. 그러니 죽은 사람들은 천벌을 받고 죽은 것이 아니라 범죄의 피해자들이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죽은 사람들이 의인인가? 죄인인가? 에 대한 판단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의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의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멸망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 사건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이 아니지만, 최후의 심판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1) 최후의 심판은 '갑자기' 시작될 것입니다.(루카 12,46) 회개하지 않고 방심한 채로 살던 사람들은 그때서야 회개하려고 하겠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닥치기 때문에 회개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2) 최후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일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고, 피해서 숨을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3)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끔찍한 일이 될 것입니다. 멸망하게 될 죄인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될 의인들에게는 그날이 행복한 날이 될 것이고.) 그러니 모든 사람이 '지금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4-5)
이 말씀의 뜻은 앞의 말씀의 뜻과 같습니다. 탑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은 일은 '사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고는 죄인들에게 내린 천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심판 날이 되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큰 일'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면, 혹시 하느님의 심판이 아닐까?, 또는 혹시 종말의 징조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랬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노아'가 겪은 대홍수의 경우, 그 일은 분명히 하느님의 심판이었지만 종말은 아니었습니다. 인류 전체가 멸망하긴 했어도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인류 전체가 대상입니다. 누구는 당하고, 누구는 피하고, 누구는 구경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또 따로 살아남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슬퍼해 줄 사람도 없고, 기도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당하게 될 일이니 장례식도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자체는 그렇게 되는데, 심판이 마무리되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루카 17,34-35) 그때에는 멸망한 사람들 때문에 슬퍼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의 멸망은 '영원한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지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올해'는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입니다. '내년'은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할 수 있는 올해라는 시간'이 언제까지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내년'이 언제 시작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겪으면서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는 죽음과 상관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이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의지로 자신의 수명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이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의 인생만 허무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회개하고, 잘 준비해서 그것을 얻게 되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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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두 비극적인 사건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유다 총독이던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열여덟 사람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당대의 유다인들은 어떤 재앙이 발생하였을 때, 그 원인을 희생자들의 잘못에서 찾는 ‘인과응보’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위의 두 사건을 보고서도 자연스럽게 희생자들이 저지른 죄악과의 연관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경고로 이야기의 초점을 옮기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어지는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해마다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에 무려 삼 년이나 열매가 없었다는 것은, 무화과나무로 상징되는 하느님 백성이 회개의 열매 맺기를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삼 년, 곧 세 번씩이나 기회를 주었던 주인은 이제 포도 재배인을 불러서 그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재배인은 주인을 만류하며 한 해 동안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는 정성과 수고를 조금만 더 해 보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리는 다양한 성사의 은총은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예수님께서 거저 주신 좋은 거름들입니다. 우리는 분명 은혜로운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운 시기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예 기간이 ‘한 해’라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회개의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은혜로운 시기에 우리는 정말로 회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아버지 하느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여전히 그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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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13,9)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한 치 앞,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내일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1994년 10월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은인들을 모시고 이태리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그 일행 중에는 청주 미평과 일본 예수고난회 관상 수녀님 8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94년 10월 21일 오후, 저희 일행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거의 다 마칠 무렵 관광 가이드로부터 <한국에서 성수대교가 끊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는 소식을 듣고 다들 비탄과 걱정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일행이 동시에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하면서 가족과 친지들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느라 난리가 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런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건이 단지 성수대교 사고뿐입니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대구 지하철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특별히 세월호 침몰 때, 성남시 테크노밸리 환풍구 붕괴 참사로 무고한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된 비극이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고로 돌아가신 그분들이 저희보다 큰 죄를 지었기에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그런 끔찍하고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어느 누가 멀쩡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리라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하리라고, 튼튼해 보이는 큰 배가 침몰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분들 또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질 것이라고, 지하철에서 화재가 일어날 것이라고 또한 배가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무도 그 시간 그 자리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변을 당한 분들도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하리란 사실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하고 비복음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설교 가운데 자신들 교회에 소속한 신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죽어간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변을 당한 것이라 설교하는데, 저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며 하느님의 심판도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그리고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13,2~3.4~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교는 바로 무화과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 포도원 주인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감한다면 예수님께서 이토록 강력하게 말씀하신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13,6.7) 물론 무화과나무 주인은 언제든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주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운명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흥정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채 자신이 마치 주인인 양 행세하며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만일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포도원 주인이 자신을 잘라 버릴 수 있음을 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망각하고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 회개하지 않고 회개를 미루는 까닭은 ‘지금 영세를 받으면 족쇄를 찬 것과 같으니 좀 더 나이 들어서!’라고 다음으로 미루고 또 미루고자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떤 면에서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루다 보면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치고 말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13,9)라는 경고의 말씀처럼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한 채 잘려 나간 가치처럼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다리시고 참아 주시지만, 그 시간이 넘으면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끔찍한 사건 사고에 관한 뉴스는 삶이란 길고도 길지만, 때론 한 치 앞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신앙인은 물론 많은 이들이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던 사실은, 죽음이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준다, 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타인의 재난이나 사건 사고를 접한 우리가 배우고 살아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내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참된 자신을 찾고 참된 자신으로 한정된 삶의 시간 속에서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에33,1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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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심청전을 잘 알 것입니다. 심청이의 효심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청의 한자어를 보면 마음 심(心)에 맑을 청(淸)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름인 심봉의 한자어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마음 심(心)에 봉할 봉, 닫힐 봉(封)을 씁니다. 따라서 마음이 맑은 심청이가 마음이 닫힌 심봉사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아버지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닫힌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투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당수에 풍덩 빠지는 심청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셔서 전적인 투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전적인 투신을 할 수 있는 맑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은 남 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고, 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갖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심청이가 아닌 심봉사 쪽에 훨씬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꽉 닫혀 있어서 전적인 투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만을 주고 있지 않나요?
주님께서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사건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이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을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더 죄가 많았고, 또 잘못을 더 많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판단이 잘못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곧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나무는 하느님의 일에 무심하고 냉담한 우리 모습을 상징합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포도 재배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삼 년은 주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신 공생활 기간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가 바로 우리의 회개와 사랑의 응답입니다.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잘 산다고 해서, 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죄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인 우리는 곧바로 회개하고 사랑의 응답을 해야만 마지막 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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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오늘 오직 오늘>
루카 13,1-9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늘 오늘 오직 오늘>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늘 오늘
오직 오늘
어제는
지난 오늘
내일은
오는 오늘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믿으니
어제도
믿음
내일도
믿음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희망하니
어제도
희망
내일도
희망
늘 오늘
오직 오늘
오늘
사랑하니
어제도
사랑
내일도
사랑
늘 오늘
오직 오늘
어제는
지난 오늘
내일은
오는 오늘
늘 오늘
오직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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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라>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다.’,‘마음이 흔들비쭉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 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 4,8) 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카 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 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이고 땀입니다. 그분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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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비유 속의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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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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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 책임을 다함, 사랑의 공동체 건설>
이런저런 소식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페루 출신 해방신학의 선구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지난 화요일 10,22일 향년 96세로 선종했습니다. 교황은, “나는 오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생각한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이었다.”극찬합니다.
또 어제 교황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선종 750주년을 맞이하여, “두 거룩한 교사들은 크게 영감을 주고 교회를 부요하게 한 영감의 원천이었다”며 두 교회박사를 기립니다. 성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세라핌 박사(The Seraphic Doctor)”로,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사박사(Angelicus Doctor)”로 불립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주신 교황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고통중인 세상에 하느님 사랑의 희망을 가져다 주십시오’,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관상생활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전쟁은 인류의 쓰레기입니다’, ‘사랑이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마리아의 모범’” 순서에 따른 풍요로운 영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부터 행복을 발견하여 행복을 선택하여 사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어제 금요강론 시간 서두 인용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이 소망하시는바 우리 각자 모두 구원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제 찾아온 짧은 시가 자주 저를 행복하게 할 거란 예감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2024.10.25.>
늘 앞에 있는 주님이 제 행복의 원천입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예술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詩人은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 때문에 시를 쓴다.”<다산>
시가 찾아오기에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시로써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예로써 바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한다.”<논어>
‘시삼백,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란 공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래서 시편을 늘 노래로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지혜로운 구원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모두가 풍요로운 영성생활에 좋은 참고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유비무환의 지혜입니다. 언젠가 예기치 못한 일에 앞서 하루하루 충실히 사는 것이 구원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이 왜? 하느님이 왜?...끝없는 물음만 있지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 하여 인과응보도 단편적일 뿐 모두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인과응보의 프레임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불행한 일에 담긴 경고를 배우고 깨닫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빌라도에 죽임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불행을, 실로암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의 불행을 경솔히 죄와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인을 캐기 보다는 각자 신속히 회개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원인 해명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 영역입니다. 원인 해명하다보면 악순환의 미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니 이 또한 유혹입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유구무언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아주 단호합니다. 결코 회개를 미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예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회개의 절박성을 가르칩니다. 포도밭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하느님에게 간곡히 제동을 거는 포도 재배인 예수님입니다. 일단 심판을 유예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계획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도대체 소모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시작해야만 합니다.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 영역이 아닌 하느님 영역이고 오직 현재만 우리에게 해당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그분과 함께 있는 한, 나는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As long as I am with him now, I have nothing to worry about)’. 그분과 함께 회개의 지금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지혜입니다.
회개에 이어지는 지혜로운 구원의 삶은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줍니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각자 받은 은사의 몫에 따라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여 실현해야 할 바오로의 원대한 공동체 이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결코 혼자의 구원은, 혼자서 완성의 구원은 없습니다. 더불어의 공동체를 통한 구원이요 전인으로서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끊임없이 사랑으로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각자 지혜로운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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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몸 의식>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각자가 자기 살 궁리만 하고, 각자가 자기 돈 벌 궁리만 하고, 각자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면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공동체는 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개인은 망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요? 자기 살 궁리만 하는데 자기는 잘 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공멸입니다. 그런데 왜 각자 살 궁리만 합니까? 공멸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인생은 각자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한배를 타고 가면서 각자도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각자가 사는 것을 꾀한다는 뜻이지요. 왜냐면 한배를 탔는데도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는 각각의 지체들이라고.
다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공동체 의식 곧 한 몸 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기에 공생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고 각자도생하다가 공멸하게 될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외롭고 모두 서서히 혼자 죽어갑니다.
독거노인만 고독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하고,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혼술 혼밥의 혼족들이 불쌍하고, 그들의 뻔한 불행을 보고만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한다면 나 혼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살아서는 안 되고, 나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살아서도 안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살고, 같이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지 않으면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되리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이고 오늘 바오로 서간의 가르침입니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혼자 있는 것이 한순간 자유롭고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편한 것이 진정 행복이고 생명보다 좋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저 캄캄한 우주에 혼자 떠돌아다닌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혼자 떠돌아다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까? 자유롭고 편하기만 한 것이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입니까? 이것을 성찰하며 자문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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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ㄴ)
<살기 위한 회개!>
오늘 복음(루카13,1-9)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는 어제 복음이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회개의 중요성', 곧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강한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빌라도의 손에 의해 죽은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처럼, 우리도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73권의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그 완전한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 앞에서, 누구나 죄인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신자'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날마다, 매순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자비를 청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부활하게 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는 비유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당장 잘라버리지 않고, 한 해 동안 더 기다리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드러남'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복음환호송)
'회개'는 '우리가 날마다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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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모든 것은
함께하기에
아름답고
기쁘고 소중합니다.
사랑과 용서가
우리 생명의
참된 회개입니다.
사랑과 용서
성찰과 실천
은총과 맡겨드림
없이는 회개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단풍이 되어가듯
사람또한 회개로
진정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나가야합니다.
사람이
회개합니다.
생명은 회개로
회개는 생명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자신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생명의 하느님을
뜨겁게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살리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죄를 끊어버리는
결단과 봉헌입니다.
회개는 배워나가는
여정입니다.
어리석음과 교만
거짓과
욕망을 통해
회개를 배우고
삶의 가치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회개의 본질은
하느님을 기쁘게
사랑하는 새로운
변화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오늘
되십시오.
서로를 살리는
회개의 주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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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루카 13, 8)
건강한 나무는 건강한 열매를 향해 자라납니다. 열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 여정이 신앙의 값진 여정입니다. 열매를 맺었던 옛날의 흔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해 열매를 맺는 우리들의 삶이 중요합니다.
진짜 열매를 원하시는 열매의 주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때를 알고 열매를 맺는 것이 주님께 드릴 우리 삶의 봉헌입니다. 슬픔의 열매 기쁨의 열매 모두를 봉헌합니다. 봉헌을 통하여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약속한 봉헌에 너무나 허술한 우리의 삶을 반성합니다. 봉헌하는 척하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시 하나씩 다시 시작하는 삶입니다.
기다려 주시는 주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처음이고 마지막인 마음을 봉헌하는 열매의 시간입니다. 마음의 봉헌이 하늘을 물들이는 사랑임을 믿습니다.
참된 열매는 서로를 어지럽히지 않으며 참된 기쁨으로 우리 모두를 충만하게 합니다. 열매는 봉헌이며 나무는 우리 삶의 소중한 여정입니다. 소중한 이 모든 여정을 봉헌합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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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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