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살토의 어떤 거리의 코너에서 누군가가 사다리를 찾아 그것에 올라 그 거리의 이름의 첫 단어에 "루이스"라는 이름을 테이프로 붙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했다. 예전에는 호아킨 수아레스로 읽히곤 했다.
이제 그것은 살토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에 대한 오마쥬다. 그 사람은 세계가 그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는 가운데 토요일에 올드 트래포드에 걸어 나올 것이다.
맨유의 파트리스 에브라를 인종적으로 모욕하여 여덟 경기의 출장 정지 기간에서 복귀한지 고작 일주일만에 운명 혹은 기회-무어라 부르건-는 루이스 수아레스를 그에게서 매우 불쾌한 느낌을 받은 사람과 상대하게 만들었다. 그가 받을 환영은 아주 뜨거울 것이다.
수아레스는 논란에 낯선 사람이 아니다. 그의 경력에는 골, 우승 그리고 찬사가 포함되어있지만 또한 다이빙, 상대방 물기 그리고 월드컵 준준결승에서 팀을 구하는 핸드볼도 있었다.
그러나 고국에서 수아레스는 오점이 있는 영웅이 아니다. 이 25세의 선수는 인종주의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는 팬들에게 이빨을 드러낸 미소와 말도 안 될 정도로 재능을 가진 국민적 전설로, 또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씀씀이가 크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수아레스는 짐꾼인 아버지 로돌포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산드라의 일곱 명의 아이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와의 국경 지역, 우루과이 강의 기슭에 있는 살토는 자갈길의 거리와 공원이 있는 마을이었다. 지역민들은 거리에서 조금씩 모여 종종 차와 유사한 허브 음료를 홀짝인다.
그러나 수아레스가 고작 여섯 살일 때 로돌포의 일 문제로 가족은 수도인 몬테비데오로 이사했다. 이사하면서 그는 그를 백만장자이자 국민 영웅 그리고 미움의 대상으로 만든 경기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몬테비데오에 살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가 뛸 팀을 찾기 시작했어요,'라고 그의 어머니가 말한다.
'저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우레타라는 클럽에 대해 들었고, 그래서 그를 거기로 데려갔죠. 며칠 후 그는 친선 경기의 후보였어요. 팀이 2-0으로 지고 있어서 그들이 루이스를 넣자 그는 세 골을 넣어 점수를 3-2로 만들었죠.'
1998년에 우루과이의 가장 유명한 팀인 나시오날의 스카우터인 윌슨 피레스가 수아레스의 재능을 발견했다. '저는 그가 9살 때 어린이 축구를 하고 있을 때 발견했어요,'라고 피레스가 말한다. '그는 그 또래에서 믿기 어려운 능력을 갖고 있었어요. 그는 놀라운 소년이었고 잘 행동했죠. 그가 위대한 선수가 되리라는 건 확실했어요.'
루이스가 도시의 라 코메리칼 지구의 학교에 정착하며 그것이 밝은 미래의 시작이 되었어야 했지만 대신 로돌포가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며 가족이 찢어졌다. '제 부모님이 헤어져서 집에서 아주 힘들었어요,'라고 그는 회상한다.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저는 축구를 그만두었어요.'
그러나 결국 그는 나시오날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는 어려운 삶을 살았어요,'라고 피레스가 말한다. '그는 축구 선수가 되기에 정신적으로 그다지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힘겨운 어린 시절이 그를 그토록 성공에 목마르게 만들었죠.'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수아레스는 부모님의 이혼 이후 유스 팀에서 선발 자리를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단지 가끔씩 그의 진짜 능력을 보여줄 뿐이었다. 10대가 되며 파티와 음주에 한눈을 팔며 클럽에서 쫓겨날 뻔 했다. 그래도 그는 나시오날에 계속 있었고, 낮에는 축구를 하고 밤에는 학교 숙제를 했다. 그는 수학을 즐겼다.
수아레스가 어머니, 할머니와 가까웠지만 소피아 발비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13살의 예쁜 금발 소녀였고, 수아레스는 15살 때 그와 사랑에 빠졌다. 여전히 아마도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15살에 여자친구를 발견했고 이후로 제 머리가 정리되었어요,' 수아레스가 회상한다. '그게 축구가 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피레스는 소피아가 훈련장 근처에 자주 있었고 수아레스가 얼이 빠져있는 걸 기억한다. '그가 어릴 때는 클럽에서 돈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거리에서 동전들을 주워 그걸 그의 여자친구에게 가져가 맛있는 것을 사먹곤 했어요.'
그것은 그녀가 2003년 가족이 있는 바르셀로나로 떠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수아레스는 아버지가 떠났을 때처럼 무너졌다. '소피아가 스페인에서 살기 위해 떠났을 때 저는 다시 축구를 그만뒀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때 제가 이 아름다운 스포츠에 헌신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수아레스는 소피아의 곁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유럽으로 이적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고, 산 에우헤니오와의 경기에서 교체로 들어가 네 골을 넣으며 그 기회를 잡았다.
이후로 그를 멈출 수 없었다. 갑자기 축구가 아주 중요해졌고, 타쿠아렘보를 3-0으로 이긴 한 경기가 끝난 후 수아레스는 샤워실에서 울었다. 그가 득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큰 경기들, 수많은 더비 경기들에서 득점했어요,'라고 피레스가 덧붙인다. '그는 항상 사람들이 그를 가장 원할 때 등장했어요.'
수아레스는 나시오날에서 27 경기에서 10골을 넣으며 네덜란드의 흐로닝언 입단이라는 그의 꿈의 이적을 이뤘다. '우리는 우루과이에서 또 다른 선수를 스카우팅하는 중이었어요,'라고 전 흐로닝언 코치이자 현 헤어런베인 감독인 롭 얀스가 말한다.
'그런데 루이스가 우리의 주목을 끌었죠. 우리는 그에게 열광했고 가능한 빨리 이적 협상을 끝냈어요. 우리가 했던 가장 비싼 영입이죠. 도박이었지만 정말 좋은 것이었습니다.'
이 도박은 80만 유로(66만7천 파운드)가 필요했고 그를 소피아에 더 가까이 데려갔지만 나시오날은 그를 더 갈구하게 만들었다. '그는 여기서 오래 뛰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우상이에요,'라고 클럽의 코치인 구스타보 부에노가 말한다.
'그는 우루과이 전체의 우상이죠. 언젠가 그의 이름을 붙인 경기장이 나타나도 놀랍지 않을 거에요. 그가 여기에 돌아올 때마다 그는 경기장을 찾고 유스팀을 방문해서 그들에게 유럽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줘요. 아주 소중하죠. 여기 우리 모두 그 때문에 리버풀 팬이 되었어요.'
2010년 11월 21일자 네덜란드 신문 텔레그라프의 헤드라인은 '아약스의 식인종'이었다.
PSV와의 격렬한 경기 중에 수아레스는 PSV 미드필더 오트만 바칼의 어깨뼈를 물었고 양팀 선수들이 레드 카드에 대해 다퉜다.
이 사건은 그가 월드컵 가나와의 준준결승 경기에서 골라인에서 핸드볼을 하며 공공의 적 1호가 된 후 불과 몇 달 후에 발생했다.
그는 아사모아 지안이 페널티킥을 실축한 이후 조금도 자제하지 않고 축하했고, 그의 기쁨이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고 심지어 그가 앞니를 바칼에게 박기 전부터 이 스트라이커를 더 넓은 청중에게 소개했다.
물기에 대한 일곱 경기의 출장 정지는 네덜란드 흐로닝언 그리고 이후 아약스에서 그렇지 않았다면 번득였을 기간에 오점을 남긴 일련의 문제들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처음에 그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거에요,'라고 얀스가 말한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고 적응하는데 애먹었어요. 그는 단지 뛰고 싶었는데 그는 리저브에 있었어요.'
'그는 참을성이 너무 부족했어요. 그는 심판들에게 적응하는데 문제가 있었고 약간 무거워져서 몸을 만드는데 시간이 걸렸죠.
'하지만 일단 몸이 제상태가 되니까 그는 아마도 제가 함께했던 누구보다 최고였어요. 그는 진정한 승리자고 지는 걸 참지 못하고 때로는 선을 넘어요.
'어떤 경기에서 그를 교체시키자 그는 정말 기분이 안 좋아서 악수도 하지 않았고 곧장 드레싱룸으로 가고 싶어했어요. 저는 그에게 화가 났죠.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는데 저는 제 우산을 그에게 던졌어요.
'나중에 저는 그에게 네덜란드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고 그가 스스로를 통제해야한다고 말했어요. 다음 경기에서 우리는 3-1로 지고 있었고 10분이 남은 상태였는데 루이스가 두 골을 넣으며 4-3으로 이겼어요. 나중에 그에게 제 우산을 주니까 그가 관중들 앞에서 그걸 들고 퍼레이드를 하더군요.'
전 풀럼 공격수이자 흐로닝언에서 수아레스의 공격 파트너였던 프릭 네블란드도 우루과이 선수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걸 기억한다. '아무도 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선수치고는 흐로닝언이 큰 돈을 썼죠.'라고 네블란드가 말한다.
'그는 영어도 네덜란드어도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팔과 몸을 이용해서 대화해야했어요. 그는 잘 쓰러지고 프리킥과 페널티킥을 얻는 것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건 그의 경기 방식이에요.
'그 때문에 고생하긴 했는데 일단 그가 암호를 풀자 그는 매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했어요. 언제나 그가 엄청난 재능을 가진 걸 보지만 그는 처음에는 고생했어요. 흐로닝언은 많은 농부들이 사는 조용한 곳이에요.
'정말 우호적인 곳이지만 거기에선 할 일이 많지 않았고 다른 곳에 가려면 꽤 먼 길을 이동했야했죠. 그는 스페인어를 하는 선수들과 좋은 친구였고 그의 여자친구는 그가 도착하고 곧 이사해왔어요. 그녀도 꽤 자주 주변에 있었어요.'
소피아와의 재결합은 수아레스에게 거대한 자극제였다. 장거리 연애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그는 다시 행복해졌고 그것이 경기장에서도 나타났다. 중위권의 흐로닝언에서 29번 나와 10골을 넣은 것이 곧 아약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나 예정된 이적은 논란을 낳았다.
수아레스는 3.5m 유로의 제안을 성사시키기 위해 네덜란드 리그의 중재 위원회에 항의했으나 실패했다. 아약스가 곧 7.5m 유로의 제안을 갖고 돌아왔고 그는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아약스의 팀 매니저인 헤르만 핑크스터가 새로운 선수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수아레스를 보자마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경기장 밖에서 그는 아주 잘 준비되어 있었어요. 남미 선수치고는 이상한 일이죠.
만약 세 시에 약속이 있으면 그는 세 시에 그 자리에 있어요. 그는 시간 관념이 철저했어요.' 그들은 친한 친구로 남았고 핑크스터는 2009년 몬테비데오에서 있었던 수아레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큰 파티였죠,'라고 핑크스터가 말한다.
'테이블에 있는 메뉴를 보니까 저녁으로 시작해서 춤을 추고 아침까지 이어졌죠. 믿을 수 없었어요. 소피아는 그에게 너무나 중요해요. 그녀는 아마도 그에게 가끔씩 진정하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거에요.
'그의 결의가 그의 가장 인상적인 면이지만 또 하나 그의 가장 큰 도전이에요. 그가 경기하는 방식을 보면 아실 거에요. 그는 여기에서는 영웅이에요. 그는 최다 득점자였고 그는 올해의 선수였어요. 모두가 그를 사랑했죠.
'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는 PSV 선수들로부터 엄청나게 도발당했어요. 경기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았어요. 저는 그의 눈을 보며 '우리 내일 얘기하자'고 말했고 우리는 그렇게 해서 그 일에 대해 제대로 얘기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죄를 인정했지만 진정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승리가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을 할 필요는 없지요. 선이 있어요. 그는 이기기 위해 때로 그 선을 넘어요. 하지만 루이스는 유럽의 최고가 되기 위해 크게 결심을 하고 있었어요.
'에브라와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모두 '아, 안 돼, 루이스'라고 말했죠. 저는 정말로 그가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단지 가끔씩 경쟁할 때 어떤 선을 넘어요. 저의 걱정 중 하나는 그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말을 할 줄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말들이 가질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해요.' . 네블란드도 이기려는 수아레스의 의지가 그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그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는 단지 축구에 너무 열정적이어서 때로 스스로를 표현할 때 잘못을 저질러요.
'분명 그는 그 점을 개선해야해요. 그의 정열 때문에 가끔씩 정신나간 일을 하게 돼요. 그는 배울 거에요. 특히 그 출장 정지를 통해서요.'
물기, 핸드볼, 다이빙 그리고 이적을 둘러싼 논란은 리버풀에서 그가 겪었던 문제에 비하면 약소하다.
인종차별에 대한 죄가 인정된 후 수아레스는 여덟 경기의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 처벌에 대해 리버풀은 완강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분노의 성명들, 품위없는 티셔츠 그리고 오직 나중에야 억지로 했던 사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의 메시지는 같다.
'인종주의라는 혐의는 완전히 웃기는 거에요,' 얀스가 말한다. '저는 확실하게 루이스가 인종주의자가 아닌 걸 알아요. 그는 수없이 도발당하고 그도 다른 선수들을 경기 중에 위협하길 좋아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어요. 제 아들이 졸업했을 때 선물로 리버풀을 방문하기로 했죠.
루이스가 우리에게 티켓을 구해줬고 제 아들과 친구들을 나중에 선수들 라운지로 데려갔고 또 경기 때 입은 셔츠도 줬어요.'
'우리는 루이스가 인종주의자가 아닌 걸 알아요,' 피레스도 덧붙인다. '그는 흑인 친구들이 있고, 많은 흑인 선수들과 경기했고 여기서 '네그로'라는 말은 완전히 달라요.
'언제나 사용되는 말이고 아무도 상처를 받지 않아요. 저는 사람들이 그라는 이유로 그를 본보기로 삼는다고 생각해요.
'그가 아주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핑크스터가 한숨과 함께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도발하는 가운데 그의 가장 강한 모습을 보여줄 거에요. 그는 위대한 일들을 성취할 수 있어요.'
단지 그가 훨씬 더 많은 논란없이 그렇게 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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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진짜 이런 유형의 선수가 내가 서포터할 동안 리버풀에 있던 일이 없어서 좀 당황스럽긴 하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잉글랜드에서 니그로가 의미하는게 뭔지 모르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오늘 경기 나와서
뭔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면
훈훈하게 마무리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좀더 성숙해졌으면 하네요.. 이러나 저러나 리버풀 팬으로서는 미워할수가 없음ㅠㅠ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풉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번양보해서 인종차별성 발언은 문화차이라고 치자 도대체 왜 사과를 안하는것이며
만국공통 욕 뻐큐날리는건......그냥가 아주많은선수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