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주에는 1920년대 어려운 시절에
고아원을 만들어 부모없는 어린이들을 수용하고
기회가 되면 배움의 터전을 알선하여 성장한 후에
자립을 할수 있도록 자선사업을 하신 분이
신문에 난 기록으로는 두분이 보입니다
한분은 남자분으로 박인묵씨라는 분이고
한분은 여성의 몸으로 이한열(불명 복덕월)이라는 분입니다
박인묵씨는 본디 경상도가 고향인데
충청도 공주군 사곡면으로 거처를 옮긴후
육영사업에 크게 힘을 쓰면서 고아원을 운영하시고
이한열이라는 여사가 사곡면과 계룡산 갑사 팔상전에서 운영하는
계룡 풍덕원의 육영사업을 크게 뒷바라지 하시면서도
근검 절약을 하는 삶속에서도 호계초등학교를 위하여
거금을 희사한 기록이 있을만큼 훌륭한 일을 하신 분입니다
기사에 나오는 내용으로는 1932년 10월에
53세를 일기로 돌아가신것으로 나오니
1880년생이신것으로 보입니다
돌아가시는 그순간까지도 부모없는 고아들을 걱정하며
아드님에게 구제사업을 계승하여 가라고 부탁하셨다 하고
아드님은 약 삼년 뒤에 복덕월 보살님이 운영하던
갑사내의 팔상전에 있는 계룡 풍덕원에 큰 토지를 희사하고
재단법인을 만들수 있는 자금을 대기도 하셨다 합니다
복덕월 보살님은 본디 조선의 궁궐에 계시던 분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궁에서 나와서 결국에는 공주에 정착하고
처음에는 사곡면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다가
나중에 갑사 팔상전에 고아원을 설치하고
고아 70여명을 거두어 기르고 가르치셨다 하니
이 보살님도 참으로 훌륭하다 아니할수 없는데
박인묵씨는 자신도 고아원을 운영하는 동시에
복덕월 보살님의 후원자로써 역할을 크게 하셨으니
당시의 동아일보 기자가 박인묵씨를 지칭하여
현세의 활불이라 칭하였을만큼 훌륭하신 분입니다
기자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고인을 기리면서 공주 인사들이 힘을 모아
그의 적덕을 기념하도록 작은 비석이라도 세우자
호소하는 글이 동아일보 1932년 10월 13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지난해 19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신문으로 본 근대 공주불교"라는 책을 편집하며
암울했던 일제 시대에 마치 횃불을 들고 나와서
"눈있는 자 보라 귀 있는 자 들으라" 하고 외치시며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으셨던 박인묵씨께서
사곡면 어느 지역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몇몇 노인분들께 탐문하였지만 알수 없더니
면사무소에 전화를 하여 찾아봐 주시기를 부탁하였던바
며칠이 지나서 오늘에야 비로소 박인묵씨의 후손들과
연락이 되고 있다는 어르신의 연락처를 받았으니
지금은 서을에 사신다는 박인묵씨의 손자분과 통화를 하면
저간의 변화를 확인할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30년대 계룡 풍덕원을 재단법인화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하셨던 공주 유지 윤용섭님과 장문용님 이운한님
배상인님 박치연님 지헌정님 이강일님 등의 후손들과도
혹시라도 연락이 되면 계룡풍덕원의 후일담을 들을수 있을지 모릅니다
계룡 풍덕원은 복덕월 보살님이 돌아가신 후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다가 육이오가 나면서
지금의 봉황동 풍덕 유치원 자리에 유을희라는 분이
고아원을 만들며 이름을 풍덕원이라 하고 시작을 하셨다는데
풍덕원의 전신이었던 계룡 풍덕원의 역할과 자취를 찾아
지역에 사는 불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불자들 뜻을 모아
그분들을 위한 선양사업이라도 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곡에 계시는 어르신으로부터 박인묵씨가 사시던 집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니 집터도 확인할겸
일간 사곡면으로 발걸음을 하겠습니다
글을 쓰면서 박인묵씨의 손자가 되시는 분과 통화가 되었는데
아직 내가 알지 못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박인묵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사곡면에 있다 하시니
내일이라도 한번 들어가서 비석의 내용을 옮겨적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잊혀진 과거를 오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데
실마리를 찾게해주신 사곡면사무소 직원분들과
어르신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두가 부처님 덕분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
원효사 심우실에서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