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속옷
김 영 득
남편은 집에서 언제나 속옷 바람이다. 식탁에 앉을 때도 속옷차림이고, 시댁 어른 앞에서도 속옷만 입고 있다. 추운 겨울에도 마찬가지다. 신혼 초 시골에서 친정어머니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다니러 왔을 때였다. 이틀째 되던 날 슬그머니 밖에 나갔다 온 어머니가 남편의 잠옷을 사들고 왔다.
“자네 이거 입게. 얘가 회사 다니느라 바쁘네 하고 남편 잠옷 하나 사주지 않은 걸 보니 내가 자네 볼 면목이 없네.”
잠옷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어머니는 나에게 눈을 흘겼다.
남편은 ‘장모님이 최고’라고 능청을 떨더니 어머니가 사다 준 잠옷바지를 그 날 하루만 입고 다음 날엔 다시 벗었다.
오늘 아침에도 역시 팬티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있다. 나는 갑자기 오래 전에 봤던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 대사가 생각났다.
“어떤 드라마에서 배우 송새벽이 쫄딱 망한 영화감독으로 나오는데 청소대행사 직원이 됐거던. 형인 이선균에게 이렇게 말하더라구.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팬티는 5만원에서 몇 백원 빠지는 거 사 입어. 나는 오늘 죽어도 머, 교통사고 당해 죽든, 강도당해 죽든, 병원에 실려가 빨개 벗겨놔도 절대로 기죽지 않게 비싼 팬티 사 입어. 형은 얼마짜리 사 입어? 이건 되게 중요한 거야. 죽어서는 쪽팔린 거 대책 없어. 죽어서 팬티 못 갈아입어. 내가 막사는 것 같아도 오늘 죽어도 쪽팔리지 않게 매일매일 비싼 팬티 입고 비장하게 산다는 거야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드라마 얘기를 귀 기울여 듣던 남편이 말했다.
“골프를 치러 가면 말야, 라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팬티를 서로 힐끔힐끔 쳐다보거든. 사람에 따라 팬티 품질이 많이 차이나. 시원찮은 거 입으면 진짜 쪽팔려. 스타일도 다 제각각이야. 주영이는 빨간색 용무늬를 입고, 세민이는 돈무늬를 입어. 킥킥”
나는 그냥 드라마 대사가 재밌다고 말한 건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당신은 그레이드가 뭔데?”
남편의 느. 린. 대. 답.
“나는 중. 하!”
“팬티가 중하여서 쪽팔린다”고 말하는 남편의 소리가 하루 종일 귓가에서 맴돌았다. 드라마에서 이선균도 기찻길에 누워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 못 죽어. 내 팬티가 비싼 게 아니야”
남자들이 왜 이러지?
팬티 때문에 남편을 기죽게 할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꼭 비싼 팬티를 사주고 싶어졌다. 비싼 팬티라도 입으면 구부정하게 보이는 남편의 어깨가 확 펴질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까짓 팬티 비싼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오후 내내 온 동네를 다 뒤져봐도 남편이 원하는 팬티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도 찾아봤지만 안보였다. 내일은 만사 제쳐놓고 팬티를 사러 서울 백화점에라도 가야하나보다. 이참에 나도 폼 나는 속옷으로 싹 갈아입어야지. 묘하게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마약같다. 나는 오늘 팬티 귀신에게 씌웠다.
첫댓글 제미 있어요.
잘 읽어 보았어요.
35년생 한준수
장모 앞에서도, 라면 좀 뜨악하네요.
ㅎㅎㅎ 그참.
ㅎ
ㅎ
ㅎ
재미있는 한 편의 수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