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누가 모임에서 '이 정도면 떡을 치죠'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부자연스럽게 조용해졌다"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떡을 친다'라는 말은 '그 정도의 곡식이 있으면 떡을 빚고도 남겠다.'라는 의미인데 듣는 사람들은 '떡을 치다'라는 성관계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남침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문장을 두고 남침을 남쪽으로 침범이 아니라 남쪽이 침범한 것으로 잘못 해석하여 전쟁을 남한이 일으켰다고 오해하기도 하지요.
심심한 사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심(甚深)한 사과는 매우 깊은 의미의 사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반응이 '심심한 사과? 난 하나도 안 심심한데…. 그게 그렇게 재밌어?' 이렇게 나오면 아주 곤란해집니다.
‘금일(今日)에 만나요.’를 금요일에 만나자고 잘못 인식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하거나 중식 제공이 점심을 준다는 뜻인데도 왜 한식이 아니고 중식이냐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단고기(桓壇古記, 우리나라 상고시대 역사책)를 두고 고기는 한 점으로 세어야 하는데 왜 한 단으로 세느냐 따지는 사람도 있지요.
왜 우리는 이런 문해력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가방 안에는 으레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가방 속에는 사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모바일이 다 해결해 주니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지요.
그런데 전통적인 종이 매체에서 벗어난 모바일 기기를 통한 읽기는 우리 인지 능력에 커다란 타격을 줍니다. 모바일 기기는 대충 읽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를 가졌으니까요.
읽기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아주 독특한 정보습득 행위이자 고도의 지적 행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빨리,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회성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정서적 능력, 그리고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할 수 있는 토론과 사고력입니다.
그 중심에는 문해력이 자리하고 있지요. 문해력을 기르려면 독서를 많이 해야 하고 한문 공부를 성실히 해야 합니다. 한자를 많이 알면 국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는데 국어학자들이 한자를 한사코 마다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한문도 잘못 공부하면 세상 살기 어려워집니다. 박학다식(博學多識)은 널리 공부하여 지식이 많다는 의미인데 박학다식(薄學多食)으로 쓰면 공부도 못하는 게 먹을 것만 밝히는 사람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