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들판만 그런 게 아니더이다. 나도 곳곳에서 소를 웃긴 꽃을 보았소. 어릴 적 들판에 몰고나간 소들도 풀을 뜯으며 웃고 있더이다. 몽골 초원에서도 보았소. 소뿐 아니라 말과 양과 야크와 염소들이 꽃을 밟고, 꽃을 뜯어먹으며 꽃 위에 뜨거운 똥을 싸더이다. 꽃도 모르는 짐승들 같으니라고, 중얼거렸지만 정작 꽃을 모르는 건 나였소. 녀석들은 꽃을 뜯어먹고 꽃 똥을 싸며, 씨앗 뿌리고 거름 주고 있더이다. 요즘, 쇠고기 먹기는 쉬워졌는데 어느 들판을 지나도 꽃이 웃길 소는 구경하기 어렵더이다. 소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꽃들이 하릴없이 바람에 나부끼더이다.
〈 반칠환 / 시인 〉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 마침 꽃이 한 송이 피어올랐다. 간지러움을 느낀 소는 그 꽃을 살리기 위해 순간, 몸을 들어올렸다. 기우뚱하며 쓰러질 뻔한 소는 겨우 중심을 잡았다.
작고 연약한 꽃이 커다랗고 무거운 소를 ‘들어 올렸’다고 표현하는 것은 시인의 재치다. 시인은 “피는 꽃이 소를 웃”기고, 소를 간질이고, “소를 살짝 들어 올”리고, “하마터면,/소가 중심을 잃고/쓰러질 뻔”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소가 뒤뚱거리며 중심을 잡는 모습이 눈 앞에 동영상처럼 펼쳐진다. 이 엉뚱한 상상이 시를 아연 살아나게 한다.
그러나 한 꺼풀 더 들어가 보면 이건 세상을 살짝 비틀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는 시인의 미적 센스만을 아닐 것이다. 그것은 건장하고 무거운 소나 연약하고 자잘한 꽃, 아니면 자연의 어떤 미물이라도 모두 동등한 가치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의 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 시에는 시인도, 소도, 꽃도 모두 하나의 생명의 그물 속에 있다. 그들은 대등하게 관계를 맺고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그 그물의 소유자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우리 역시 그물의 한 가닥일 뿐.
이 시에 표현된 이면도 진실이다. 즉, 하나의 소중한 생명을 밟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잃은 소를 보는 ‘꽃’은 그의 배려에 얼마나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했을까. 그 신사도에 얼마나 감동했을까. 이 싱그러운 공생! 이러한 공감 능력과 이타성이 소에게도 꽃에게도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현상을 바로 보는 날카로운 시선도 시에서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과 생물, 모든 생명체들이 조화와 공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은 더욱 중요하다.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와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가 만연하는 오늘, 인간과 자연, 주체와 세계가 하나로 만나 생명공동체로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감성적인 시 한 편을 읽는 기쁨!
〈 손진은 / 시인 〉
들판에서 덩치가 큰 한 마리 소가 풀을 뜯고 있습니다. 소의 발은 쇠로 둘러씌운 것처럼 야무지고 튼튼합니다. 움직이는 그 소의 발밑에 몹시 가늘고 연약한 풀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풀꽃이 소를 아주 약간 공중으로 들어 올립니다. 중량이 작은 풀꽃이 중량이 큰 소를 들어 올립니다. 이러는 통에 소는 비틀합니다. 정말 이상하게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송이 꽃은 외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완비한 생명체입니다. 그러니 꽃이 소만큼 아주 큰 무게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핀 꽃을 밟지 않는 소에게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순한 소의 눈망울에는 분명 풀꽃들이 가득가득 피었을 것입니다.
〈 문태준 / 시인 〉
꽃에게 천하장사 타이틀을 바쳐야겠다. 쪼그마한 들꽃이 감히 주제를 모르고 백두급의 실한 소를 번쩍 들어 올리다니! 이 기적 같은 엉뚱한 사태는 무지막지한 힘의 논리가 아닌 연약한 꽃의 간지럼밥으로부터 온다. 또한 짓밟으면 그만일 꽃을 감상할 줄 아는 소의 지순한 덩치로부터 온다. 그 지순한 덩치가 바로 들판이다. 길을 가다 나도 땅에 바짝 붙어서 핀 꽃 앞에서 살짝 발을 들어 올린 적이 있다. 그때 발목을 접질리지 않으려 기우뚱하면서 중심을 잡기 위해 양팔을 들어 올렸을 것이다. 멀리서 소가 보았다면 아마 저이가 춤을 추는구나 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소가 웃을 일들이 좀 더 많아야겠다.
〈 손택수 / 시인 〉
좋은 시가 주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동화의 세계에 온 듯 상큼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시가 윤희상의 '소를 웃긴 꽃'이다. 철학자 모씨가 지하철에 붙어 있는 시 90%가 가짜라고 밝힌 바 있지만 실제 주변의 많은 시들 중에 정서적 충격을 주거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시는 군더더기 없이 발랄한 상상의 진경을 깔끔하게 보여주고 있다.
'소를 웃긴 꽃'의 중심축은 ‘소’와 ‘꽃’이다. 서로 대립하는 사물이 작품 속에서는 상응하면서 아름다운 조화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이를 단지 동화적 상상력의 발현으로 보는 것은 지엽적 독법의 결과이다. 화자가 목격한 것은 웃는 소이다. 그것이 사실의 영역이든 상상의 영역이든 중요치 않다. '웃는 소'가 시의 전면에 제시되면서 독자의 안면에도 웃음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런데 소가 웃은 이유는 소의 발밑에서 '꽃' 이 피어 간지러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실과 이성의 논리로 접근하면 말도 안 되는 풍경이다. 그러나 이 시는 논리와 합리의 세계를 단숨에 훌쩍 넘어 새로운 삶의 구경을 보여준다. '소'의 자리에 ‘인간’을 들여놓으면 시의 자장은 더욱 강하게 움직인다. 동물과 식물, 혹은 인간과 자연의 대립적 개념이 충돌하지 않고 상호 조응하면서 원융무애한 세계가 형상화된다. 옹색한 현실의 틈새에서 새롭게 발견한 시의 공간, 확장된 시의 외연이 읽는 내내 즐거움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8행부터는 시의 내용이 '웃는 소'에서 ‘들어 올려진 소’로 비약한다. '꽃 위에 뜬 소'를 상상해 보라. 그 순간 온몸에 어떤 전율이 인다. 감각의 층위가 변환되면서 인간이 지향하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의 형상이 구체화되어 다가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번한 소는 엉뚱함과 능청스러움으로 다가와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짓게 한다. 시의 향기가 입안에 환하게 번지는 순간이다. 이제 어디 가서 ‘꽃을 웃긴 소’도 찾아봐야겠다.
〈 홍일표 / 시인 〉
윤희상의 <소를 웃긴 꽃>이다. 근래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행복했다. 특정한 개념과 틀에 갇히지 않은 상상력이 이런 유쾌한 시를 생산했다. 엉뚱함의 힘이다. 꽃이 소를 웃겼다고, 소의 발바닥을 간질였다고, 연약한 꽃이 육중한 소를 살짝 들어 올렸다고 한다.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 세상에 시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엉뚱한 발언을 하랴.
〈 안도현 /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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