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성 원동 수덕실에서 시일식 후 고성군 개천면에 위치한 개천교구를 들러다. 주소는 고성군 개천면 명성1길 31-13
원동수덕실에서는 차로 15분 거리. 잡초, 넝쿨 등을 정리하고 오다.
교구 내에 비치되어 있는 [대신사순도백주년 기념사보] 책을 가져오다. 이 책은 1964년 대신사 순도 백년기념으로 대구 달성공원에 수운대신사동상 건립추진위원회에서 발행한 것으로 <천도교史傳> 중 제1 편 수운대신사의 행적과 법설을 싣고 뒤에는 부록으로 성금록을 싣고 있다. 아마 이 책의 가치는 뒷부분 성금록으로 1930년대 발행된 [천도교창건록]이후 한 세대만에 발행된 인명록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성금록에 실린 인명은 8천여명이다. 1 특히 원적을 표시하여 북한출신 교인들의 비중 등을 통계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여겨진다.
참고로 고성군에는 고성교구 / 회화교구 /개천(영천)교구, 3개의 교구가 있을 정도로 많은 천도교이들이 있었다. 그 연혁을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연혁 출처는 1980년 10월 발행된 [눌암 황태익선생실기]
1. 고성(固城)교구의 연혁
경남에 동학이 들어온 유래는 임진년인 1892년(포덕32년)에 영남두목인 백락도(白樂道, 진주군 삼장면 당성 사람)씨가 전북 장수군에 있는 유해룡(柳海龍)씨로부터 도를 받고 돌아와 포덕에 종사함으로써 진주를 중심으로 점차 영남일대에 퍼져 갔던 것이다. 영남 각 지역의 포덕의 개척자를 들어보면, 백락도에 이어, 손은석(孫殷錫, 진주인), 정용태(鄭龍泰,남해인), 김성용(金成龍, 남해인), 김학수(金學守, 진양인), 황복수(黃福守,진주인), 박운기(朴雲基,진주인), 황태익(黃泰益,고성인), 신용구(申鏞九, 단성인)를 들 수 있다.
고성교구의 연혁은 1899년 1월 15일에 천도교 전신인 동학에 입도한 눌암(訥菴) 황태익선생이 포덕에 종사하여 1900년에 자기 가친인 황우의(黃佑義) 공을 입도케 하여 도가완성을 하였다.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에서 고성군 구만면의 음나무재를 매일 넘나 들면서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위하여 포덕에 종사하여 1905년~1906년 사이에 전봉환(全奉煥,三山인), 이상규(李象奎), 이현규(李鉉奎), 이옥규(李玉奎), 이범규(李範奎, 馬岩인), 박기팔(朴基八), 황문익(黃文益,고성인), 김성원(金聖源,巨流인), 손준철(孫準鐵,마암인), 장남수(張南守,구만인), 황호익(黃鎬益,구만인), 김경윤(金景允), 정화룡(鄭和龍, 거류), 장윤규(張允奎, 구만), 김계천(金桂天,거류), 황상규(黃尙奎,고성), 강윤상(姜允尙, 삼산) 등을 입도시켜 고성군내에 포덕의 기틀을 잡았다.
1904년 갑진개혁 운동 때는 이들 동덕을 주축으로 북접대도주 손병희 선생의 명령으로 진주에 대접소를 두고 해접주(該접주), 중정 수접주(首접주) 수창대령 등 중책을 황태익 선생이 수명받아 활약하였다.
민회를 조직하였을 때는 영남지역의 회장에는 전희순(全熙順) 부회장에는 황태익이 임명되었고 동시에 고성회장에 황태익 부회장에는 이상규가 맡아 민권신장 운동을 하면서 단발·흑의로 일어서 민폐를 끼칠까 염려하여 이상규는 식량과 경비를 전담하여 교회사업과 개혁운동을 펴자 교도들도 늘어났다.
동학도로서 황태익이 입도한지 10년 만인 1909년에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에 초가 두칸을 20냥을 주고 사들여서 처음으로 고성전교실을 설치하여 황태익은 전교사로, 전봉환은 경리부장으로, 이상규 동덕 등으로 교역자로 짯다.
시일기도를 드리는 집단교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교화사업이 정착화 되자 많은 저명인사들의 입교도 늘어났다. 1914년에는 강대현(姜大顯) 등 거류인이 입교하고 이해 6월 4일 황태익의 전교로 묵암 신용구(단성 평거)가 입교하게 되었다. 묵암은 후일 영남연원 대두목으로 활약하였으며 천도교 최고 지도자인 교령을 역임하였다.
저명인사들의 입교로 1915년 고성종리원으로 승격되고 이해 4월 1일 황태익이 종리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 전에 의암성사께서 중앙대교당 신축명목으로 교호당 10원이상씩 헌납할 때, 황태익과 교역자들은 가산을 팔아 헌금을 하여 그 돈은 독립만세 운동기금으로 충당되기도 하였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태익선생은 고성과 진동의 3·1만세 의거에 교인들을 이끌고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0년에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경남결사대라는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총독 등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다음 거사를 위하여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산중의 노응범 집에 은신 중 노광천의 밀고로 왜경의 습격을 받아 이해 5월 중순 대장 황태익을 위시한 강재순, 임태준, 김의진, 노성화, 황호익, 노응범, 강대규 등이 체포되어 진주형무소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오랫동안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적세원수와의 투쟁으로 왜경의 박해는 심했으나 교도들은 굴하지 않고 싸웠다. 심지어 왜경들이 교도들을 위협하여 천도교를 믿지않겠다는 시말서를 받아 내었으나 장남수(고성 구만면 용와리) 동덕은 왜경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 내 뼈와 살이 깍아져도 천도교를 믿겠다”고 항거하였다.
교세는 박해 속에서도 굳어져 1921년에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산에서 나무를 나르고 고성교도들은 나무를 다듬고하여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에 교당을 새로 지어 이전하였다.
그후 황태익은 원주직인 순회교사, 부령, 교훈, 봉훈, 포덕사, 도사, 현법, 사법정 등을 역임하고 경상도 교회정립에 공헌하였다.
1922년에 고성군 고성읍 동외동 정동마을의 토호였던 박정수(朴挺守) 하랑 기와 5칸과 부속건물 4칸 대지 200평을 7천환으로 사들여서 고성읍으로 교당을 옮겨 군중심지에서 집단교화사업을 펴 나갔다.
1930년에 고성종리원으로 승격되어 이해 3월 20일 눌암 황태익이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1월 14일 재임명되었다.
1947년 5월 4일 세 번째 종리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12월 13일, 고성교구에서 교역자가 모여 묵암 신용구선생을 모시고 경상도 교역자회를 조직하였다.
1963년 3월 20일, 순원포 연원회라 개칭되었다.
1970년 3월 25일, 경상도 연원회라 개칭되었다
고성교구의 지도원직의 도정으로는 1962년 평암(平菴) 배순칠(裵順七)동덕이 추대되었다.
1977년부터 진양군 고성군의 지도원직으로는 도정 충암(忠菴) 정상문(丁尙文) 전국 순회강사가 추대되었다.
1975년 구교당을 팔아 고성읍 동외동 404-4번지에 대지 101평 36평의 교당을 건립하였는데 부족한 금액은 해암(海菴) 황용수(黃龍水) 일본 경도교구장의 성금으로 충당되었다.
고성교구의 역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1대 눌암 황태익 2대 평암 배순칠 3대 敦菴 姜用雲 4대 月菴 申泰桓 5대 本菴 黃鳳術 6대 梅菴 朴基宅 7대 金炅元 8대 金永鐵
9대 恁菴 黃鏞甲 (주: 충암 정상문 도정의 감수를 맡음)
2. 회화교구의 연혁
會華교구는 東菴 方基用(회화면 당항리)선생이 창업하였다. 동암 선생은 천도교의 포덕을 펴려고 천도교의 이상인 인내천의 원리에 입각하여 내세적 천당이나 극락에 둔 것이 아니요, 현세적 현실신비주의로 만인평등 사해일가이 동귀일체를 인간의 최고목표지향의 신앙이라 주장하면서 포덕에 종사함으로써 이곳의 신도는 늘어나 집단교화의 기틀을 잡아 놓았다.
이렇게 교세가 민중 속에서 내리자 1953년 6월 26일 평암 배순칠(마암면 성전리) 동덕이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여 회화교구로서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교세의 확장을 위해 창립자 동암 방기용 선생이 유언에 따라 그이 아들 方鐵煥동덕이 부지 55평을 기증하였다.
초대 교구장 평암이 1953년부터 1967년까지 15년간을 교구를 이끌었다.
2대 교구장, 寬菴 李東植(마암면 장산리), 1967~1970 3대 교구장, 士菴 李甲洙(구만면 용와리), 1970~1972 4대 교구장, 許鎭泰, 1972~1975 5대 교구장 金榮浩, 1975~1977 6대 교구장 韓聖德, 1977~
회화교구는 27년간의 연륜을 지내면서 한때 교세이 쇠퇴와 폐교의 위기까지 직면한바 있으나 교역자들이 동귀일체하여 교구를 유지하여 왔다. 1980년 9월에는 포덕대회를 열어 포덕배가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회화교구의 도훈으로는 이갑수, 허진태 두 동덕이 맡고 있다. (주: 박순한 동덕 자료 제공)
3. 개천교구의 연혁
눌암 황태익으로부터 평암 배순칠에 의하여 입교한 충암 정상문(개천면 마암면 월곡인)이 이웃 10여명의 동덕을 포덕함으로써 1942년 11월 11일 개천면에 전교실을 설치하여 집단교화에 들어갔다.
이때 法信堂 朴少根 周仁堂 金周粉 내수도들이 내성당임(內誠當任)의 역할을 맡아 교세를 넓게 포덕하여 1949년 12월 5일 개천 具禮교구로 승격되었다. 다시 교세가 늘어나 영오방면으로 퍼져나가 1951년 3월 8일 영오면 범계리로 옮겨 영천교구라 하였다. 그후 1957년 10월 5일 개천면으로 옮겨 개천교구라 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1대~3대(포덕93~104) 澤菴 姜三秀 4대~7대(포덕106~112) 澤菴 姜三秀 8대, 104년, 용암 金龍煥 전교사 9대 , 115년, 용암 김용환 10대, 118년, 浩菴 姜大浩
현역 교역자
충암 정상문 직접도훈 종의원 忍암 金聖洙 법사 碩암 강갑석 신훈 법신당 박소근 교훈 택암 강삼수 법사 종의원 蔡宗守 신훈 호암 강대호 전교사 (주: 자료제공, 석암 김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