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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사대미녀(Sida Meinu, 쓰다메이뉘)는 서시(西施: Xi Shi, 시쉬), 왕소군(王昭君, Wang Zhaojun, 왕죠쥔), 초선(貂蟬: Diaochan, 됴찬), 양귀비(楊貴妃: Yang Guifei, 양귀페이)를 꼽는다. 이들 중 3명은 실제 역사적 인물이지만, 이들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많지 않아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전설에 의해 미화된 것이 많다.
전설에 따르면, 사대미녀는 고대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그들은 왕과 황제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서 이런 평가를 얻은 것인데, 그 결과 그들의 행동방식은 중국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대미인 중 3명은 그들 무릎에 왕국을 굴복시켰고 네 사람 모두가 비극적이거나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생을 마쳤다.
사대미인은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왕조에 살았다. 연대순으로 사대미녀는 다음과 같다.
서시(西施: Xi Shi) 춘추시대(春秋時代: BC6-5세기)
서시는 황홀하게 아름다워서 그녀가 물가를 거닐면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물속으로 가라 앉았다고 한다.
왕소군(王昭君: Wang Zhaojun) 서한(西漢: BC 1세기)
왕소군의 아름다움은 하늘을 나는 새도 유혹해서 떨어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초선(貂蟬: Diaochan) 삼국시대(三國時代: 3세기)
초선의 나타나면 그녀의 용모를 보고 당황한 달빛이 뒷걸음질 쳤다고 한다.
양귀비(楊貴妃: Yang Guifei) 당조(唐朝: 719-756)
양귀비의 용모는 모든 꽃들이 수줍어할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일부 중국 문학작품에서는 사대미녀는 각기 독특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서시는 찡그리지 않았을때 용모가 어느 때 보다 눈부시게 빛났지만 고질적인 가슴통증으로 괴로워했다. 그녀는 또한 당시 어떤 중국 여성보다 큰 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양귀비는 아마도 심한 겨드랑이 악취로 고생한 것 같은데, 그녀는 호화로운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향수를 뿌렸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뚱뚱했었다고 한다. 왕소군의 자존심이 강하고 완고한 체질은 중국 왕실의 궁정관리들의 반감을 사는 원인이 되었고, 그 결과로 그녀는 당시 이민족으로 여겨진 종족에게 보내던 “정치적인 신부/평화”로 지명되었다.
사대미녀 중 다른 세 사람과 다르게 초선의 역사기록문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무장 여포(呂布: Lu Bu)와 정사를 벌여 관능미로 유명하던 그녀의 자질은 여포와 그의 양부 동탁(蕫卓: Dong Zhuo) 사이를 갈라놓았고, 후대의 악평을 없애기 위해서 한조(漢朝: BC206-AD220)의 전복을 시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녀가 죽은 지 천 년이 넘게 지난 명조(明朝: 1368-1644)의 소설 “삼국지”에 고대사대미녀의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 당시 초선에 관해 언급된 기록문서는 없다.
한조(漢朝)의 공식기록인 후한서(後漢書: Hou Han Shu)에서 동탁(董卓: Dong Zhuo)의 하녀가 여포(呂布: Lu Bu)와 벌인 정사에 대한 기술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하녀가 초선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것을 연결해줄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무엇보다도, “초(Diao)는 중국의 일반적인 성이 아니다. [초선(Diaochan)은 통상 진조(晋朝: 265-420)시대에 공식적인 머리장식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초선은 사대미녀 중에서 실존 가능성이 없는 유일한 인물이다.
서시(西施: Xi Shi, 이하 시쉬) 춘추시대(春秋時代: BC506-?)
시쉬는 춘추시대(BC 722-481)말 월국(越國: Yue)의 수도 제기[諸曁(诸暨): Zhuji]에 살았다고 한다.
시쉬의 아름다움은 정말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연못 안의 물고기를 바라보기 위해 난간에 기대면 물고기들이 눈이 부셔서 헤엄치는 것을 잊고 수면에서 점차 가라 않았다고 하며, 새들은 나는 것을 잊어 하늘에서 떨어졌고, 달은 모습을 감추었고, 꽃들은 그녀와 비교하기 부끄러워 꽃잎을 닫았다고 한다. [이렇게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기 위해 “침어낙안, 폐월수화(沉魚落雁, 閉月羞花)”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일찍이 월국의 구천왕(句踐王: Goujian)은 오국(吳國: Wu)의 부차왕(夫差王: Fuchai)과의 전투에 패한 후 투옥되었다. 월국은 그 뒤로 오국의 속국이 되었다. 구천왕은 비밀리에 복수를 계획하였는데, 대신 문충(文种: Wen Zhong)이 미인계를 제안했다. 다른 대신 범려(范蠡: Fan Li)는 시쉬(西施: Xi Shi)와 정단(鄭旦: Zheng Dan) 찾아내 BC 490년에 부차왕에게 선물하였다.
시쉬와 정단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부차왕은 국정을 돌보지 않고 그녀들의 유인에 따라서 그의 진정한 충신 오자서(伍子胥: Wu Zixu)대장군을 죽였다. 부차왕은 심지어 소주(蘇州: Suzhou) 서쪽 15m 거리의 영암산(靈岩山: Lingyanshan) 기슭의 황실공원에 관왜궁(館娃宮: Guanwagong)지었다. 오국의 국력은 약화되었고 BC 473년 구천왕은 군대를 보내 오국 군대를 대파하여 몰아냈다. 부차왕은 오자서의 충언들 듣지 않고 자살하도록 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녀의 운명에 대해 서술한 하나의 기록에는, 구천왕은 부차왕과 같은 그녀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 시쉬에게 호수에 몸을 던져 자결하도록 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오국이 멸망한 후 범려는 관직을 그만두고 안개 낀 광활한 태호(太湖: Taiho)를 신선같이 유람하며 시쉬와 어선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 후론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제기[諸曁(诸暨): Zhuji]시 남쪽 Zhu Lou 산기슭의 서시사(西施寺, 시쉬쓰)에 봉안되어 있다. 항주(杭州: Hangzhou)의 서호(西湖)는 시쉬의 화신이라고 하여 서자호(西子湖: Xizi)라 부르는데, 서자는 Lady Xi를 의미하는 시쉬의 이명이다.
창작이나 풍자로 등장한 또 다른 유명인은 동시(東施: Dong Shi)라는 인물이다. 말 그대로 시쉬와 구별되는 “동쪽”의 의미인데, 동시의 이름과는 다르게 그녀는 시쉬와는 정반대로 아주 못생기고 현대의 기준으로 뚱뚱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시쉬와 같이 얼굴을 찡그렸다고 하며, 이는 ”동시효빈(東施效顰)”이란 말로 변화되었는데, 이는 근본이 다름에도 똑 같은 흉내를 내면 자신의 추함만 내보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시쉬에 대한 문장에서 가장 혀가 꼬이는 것은:
서시사시사십사, 사십사시서시사(西施死時四十四,四十四時西施死:
Xishi si shi si shi si, si shi, si shi Xishi si: 시쉬 쓰 쉬 쓰 쉬 쓰, ← ) 이다.
왕소군(王昭君: Wang Zhaojun, 이하 왕죠쥔) – 왕장[王(嬙:牆:檣)]
왕죠쥔은 흉노(匈奴: Xiongnu) 선우(單于: Shanyu) 호한사(呼韓邪: Hu Hanxie: BC58-?)의 부인이다.
왕죠쥔은 서한(西漢: BC206-AD9) 남쪽의 남군[南郡 -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Hubei) 흥산현[興(兴)山縣(县): Xingshan] 자귀[秭歸(归): Zigui]지방의 명망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한원제[漢(汉)元帝: BC48-BC33)때 궁녀로 들어갔다. 내궁(內宮)에서 생활하는 동안 왕죠쥔은 황제의 방문을 받지 못했고 궁전나인에 머물러 있었다.
BC 33년에, 호한사(呼韓邪: Hu Hanxie: BC58-?)는 한나라와 흉노족과의 조공관계에서 공물을 바치러 장안(長安: Changan)을 방문했다. 그는 황실의 사위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할 기회를 얻었다. 공주와 함께 할 영예를 얻지 못했으나 호한사는 중국 황실궁녀 5명을 하사받았고, 이들 중 한 명이 왕죠쥔이다.
호한사의 어떤 이야기에서는 왕죠쥔이 호한사와 결합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궁에서 선발되었을 때, 그녀의 아름다움은 황실의 조관(朝官)들을 놀라게 하였고 황제가 흉노족에게 그녀를 보내기로 한 결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왕죠쥔은 호한사선우의 총애를 받아 두 명의 아들을 출산했다. 그들 중에서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 Yituzhiyashi)만 생존했다. 그들은 또한 적어도 한명의 딸 운(雲: Yun)을 낳았는데, 그녀는 Yumuo 공주가 되어 후에 흉노에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BC 31년 호한사가 죽자, 왕죠쥔은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성제(漢成帝: BC33-BC7, Cheng)는 흉노의 역연혼(逆緣婚) 관습을 따르라고 명령했고 그녀는 다음 선우가 된 남편의 장자의 아내가 되었다. 재혼을 통해서 그녀는 두 딸을 낳았다. 그녀는 평화를 이끌었다는 의미의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해졌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하여 남편이 죽은 후 자결했다. 그녀의 삶은 “소군출새(昭君出塞)”의 이야기가 되었다. 중국과 흉노의 평화는 6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중국과 그녀 그리고 그녀의 후손과의 관계는 끊어졌다.
3세기 이후 죠쥔의 이야기는 다듬어졌고 비극적인 여걸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한족(漢族)과 중국 소수민족간의 통합의 상징으로 그녀를 이용하고 있다. 죠준의 묘는 내몽고에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죠쥔묘(昭君墓)는 내몽고 후허하오터(Hohhot: 呼和浩特)에서 남쪽으로 9km 떨어진 Da Hi 강변에 위치해 있다. 죠준묘는 13,000
㎡의 면적에 33m의 높이로, 지역의 문화재이다. 죠쥔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당조(唐朝: 618-907) 두우(杜佑: Du You)의 통전(通典: Tong Dian)에 있다.
이곳에선 “Iron Wall”을 의미하는 테무르 우르코?(Temur Urkhu: 特木爾烏爾虎)라 부른다. 별칭은 청총(靑塚: Qin Zhong)인데, 풀과 나무들의 색이 바랜 가을에도 계속 푸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초선(貂蟬: Diaochan, 이하 됴찬)
됴찬은 169년 출생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여포(呂布: Lu Bu)는 동탁(蕫卓: Dong Zhuo)의 하녀와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이 하녀의 이름이 초선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이는 불가능해 보이는데, 초(Diao)는 통상적으로 중국에서 성으로 사용하지 않고, 됴찬(Diaochan)은 당시 고관들의 관모를 장식했던 담비(貂: diao)꼬리와 매미(蟬: chan)모양의 옥장식과 같기 때문이다
전통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의 됴찬은 여포를 설득하여 그의 양부 압제자 동탁(蕫卓: Dong Zhuo)을 죽이려는 대신[사도(司徒: 삼공의 하나)] 왕윤(王允: Wang Yun)의 계략을 돕는다. 그녀는 이렇게 동탁의 후처가 되는 동시에 여포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질투와 그녀의 매력을 이용해 양쪽을 조종했다.
통탁의 책사 이유(李儒: Li Ru)는 무희가 군주와 장수를 동시에 유혹한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는 동탁에게 됴찬을 두고 다투는 대신 여포에게 주자고 제안했다. 이를 들은 동탁은 이유를 죽이려 하며 그에게는 어떤 장수도 됴찬만 못하다고 공언했다. 이유는 됴찬을 넘지 못했다
그녀는 여포에게 동탁과 함께 있는 것은 기쁘지 않고 여포하고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여포는 격분하여 동탁제거를 모의하기 위해서 왕윤에게 갔다. 이어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동탁의 장수들에게 패해 피신했다.
그러나, 그는 한번 더 됴찬과 지낼 수 있었다. 하비(下邳: Xiapi)가 함락되어 복양(濮陽: Puyang)의 조조(曹操: Cao Cao)성으로 여포가 끌려갈 때까지 여포는 됴찬과 함께 전국을 여행하며 지냈다. 이 후 소설에서 됴찬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원조(元朝: 1271-1368)문학에서 됴찬은 여포가 죽은 후 장비(張飛: Zhang Fei)에 의해서 관우(關羽: Guan Yu)에게 소개되지만, 전리품으로 취급한 관우는 그의 검으로 목을 벤다. 이 사건은 다른 역사기록이나 소설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오페라나 이야기극 같은 수 많은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다.
또 다른 작품에서 그녀는 관우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관우는 그녀를 수도승이 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를 전해들은 조조는 그녀를 곁에 두길 원했고, 이를 전해들은 됴찬은 자결했다고 한다.
양귀비[楊貴(杨贵)妃: Yang Guifei, 양귀페이 – 양옥환(楊玉環: Yang Yuhuan)]
양귀비는 한태 태진(太眞: Taizhen)이란 이름의 도교 수도승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당현종(唐玄宗: 712-756)의 사랑스런 후궁이었으나, 결국 안사[安史: Anshi,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현종이 수도 장안(長安: Changan)에서 성도(成都: Chengdu)로 피신할 때, 호위병들이 양귀비의 사촌 양국충(楊國忠: Yang Guozhong)과 그녀의 나머지 가족들에게 반란의 책임을 묻자 결국 죽임을 당한다.
출생
양옥환(楊玉環: Yang Yuhuan)은 장래 남편 현종시대 초기인 719년에 출생했다. 그녀의 증조부 양왕(楊汪: Yang Wang)은 수양제(隋煬帝: 605-618) 통치기에 핵심관료였고, 수나라가 붕괴된 후, 수나라 계승자의 한 사람인 왕세충(王世充: Wang Shichong)을 따르다가 왕세충이 당나라 군대에게 패한 621년에 죽었다.
양옥환의 아버지 양현염(楊玄琰: Yang Xuanyan)은 지금의 사천성(Sichuan) 성도(成都) 촉주(蜀州: Shu)에서 조사관을 역임했고 그의 가족도 그곳에 함께 갔다. 그는 양옥환를 포함한 4명의 딸을 낳았다. 양현염은 양옥환이 어렸을 때 죽었고, 양귀비는 하남부(河南府: Henan)의 하급관리였던 그의 숙부 양현교(楊玄璬: Yang Xuanjiao)에 의해 길러졌다.
왕자비 그리고 수도승
736년 이전 한동안, 양옥환은 현종의 후궁 무혜비(武惠妃: Wuhuifei))의 아들 수왕[壽王: 13자(현종은 26명의 부인에서 아들 23명, 딸 29명을 낳았다)] 이모(李瑁: Li Mao)와 결혼하여 왕자비가 되었다.
736년 무혜비가 죽자 현종은 아주 슬퍼하였고 누구도 궁내에서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현종의 환관은 양옥환 왕자비가 매우 아름답다고 귀띔했고, 현종은 그녀를 면전으로 호출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현종은 그녀를 곁에 두기로 하였고, 태진(太眞: Taizhen)이름으로 궁내의 도교승으로 머물게 하였다. 그는 비밀리에 궁에서 태진을 맞아 들였다.
태진은 완벽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음악을 알았고, 행동은 민첩했으며, 현종을 어떻게 기쁘게 하는지 알았다고 한다. 한 해를 넘기지 않아서 그는 무혜비를 아끼던 것처럼 양귀비를 아끼게 되었고 그녀는 낭자(娘子, Niangzi)라 불리면서 궁에서 황후와 같은 영예를 얻었다. 744년 현재, 관리들이 그녀의 자매들에게 특혜를 받기 위해 뇌물을 바칠 만큼 그녀는 권력을 가졌다.
황제의 후궁으로
745년 현종이 장군 위소훈(韋昭訓: Wei Zhaoxun)의 딸을 이모(李瑁: Li Mao)의 새로운 부인겸 왕자비로 내리고, 그는 태진을 황제의 후궁으로 공식화하고 무혜비(武惠妃)에게 내린 혜비(Huifei)란 칭호보다 더 높은 귀비(貴妃: Guifei)란 칭호를 새로 내렸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 양현염과 어머니에게도 시호(諡號)를 수여했다. 또한 그녀의 숙부 양현규(楊玄珪: Yang Xuanqui), 사촌 양섬(楊銛: Yang Xian)과 양기(楊錡: Yang Qi)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했다. 그녀의 세 언니들에게는 각기 한(韓: Han) • 괵(虢: Guo) • 진(秦: Qin) 부인이란 작위를 내렸는데, 황실 회의에 언제나 참석할 수 있는 작위였다고 한다. 심지어 현종의 누나 Yuzhen 공주 이지영(李持盈: Li Chiying)도 그녀들보다 높은 자리에 감히 앉지 못했다.
현종은 또한 무혜비가 낳은 딸 태화(太華: Taihua, 25녀)공주를 양기(楊錡: Yang Qi)와 결혼시켰다. 양섬, 양기, 한(韓: Han) • 괵(虢: Guo) • 진(秦: Qin) 부인의 5대 양가(楊家)는 엄청난 영예와 부를 누리고 모든 관리들이 앞다투어 아첨하였다. 같은 시기에, 그녀의 이종사촌 양쇠[楊釗: Yang Zhao, 후에 양국충(楊國忠: Yang Guozhong)으로 개명]도 양귀비에 의해 현종에게 소개 되었고 그의 아첨에 따라 점차 승진하기 시작했다.
양귀비는 항상 말을 타고, 호위내관 고력사(高力士: Gao Lishi)가 수행하는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녀의 옷을 바느질 하기 위해 700여명의 노동자가 징집되었다. 관리들과 장수들은 진귀한 물건을 제공하며 아첨했다.
746년, 그녀의 질투와 무례함으로 인해 현종의 노여움을 사자, 현종은 그녀를 그녀의 사촌 양섬의 저택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날 이후, 현종은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심기가 불편해졌고 환관들은 경범죄로 혼이 나기 일쑤였다. 고력사는 현종이 양귀비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고 양귀비궁의 보물들을 그녀에게 보내자고 했다. 현종은 동의하며 황실의 식사를 추가해서 그녀에게 보냈다. 그날 밤, 고력사는 현종이 양귀비가 궁으로 돌아오는 것을 승낙하도록 요청했고 현종은 쉽게 동의 했다. 그 후, 그녀는 더욱 사랑을 받았고 황실의 다른 후궁들은 아무도 현종의 호의 받지 못했다.
747년 영향력 있는 군 지휘관 안녹산(安祿山: An Lushan)이 현종을 배알하기 위해 수도 장안에 도착했을 때, 현종은 그에게 많은 호의를 보이며 궁 안으로 들어올 것을 허락했다. 그는 양귀비와 그 일가를 만났다.
750년, 양귀비의 말에 화가 난 현종은 그녀를 다시 본가로 돌려보냈다. 관리 길온(吉溫: Ji Wen)은 현종에게 과민 반응했다고 말했고 현종은 그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황실의 식사를 보냈고, 그녀는 환관이 배달한 식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무례함은 죽어 마땅한데, 다행히 황제폐하가 나를 죽이지 않고 집으로 돌려 보냈다. 나는 영원히 궁을 떠날 것이다. 나의 금, 보석, 그리고 보물은 모두 황제폐하가 내린 것이고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니 황제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나는 감히 폐하께 드리겠다.”
그녀는 머리를 조금 잘랐고 환관은 그것을 가지고 현종에게 돌아갔다. 현종은 고력사에게 그녀를 호위해서 궁으로 돌아오라고 했고 얼마 후 그녀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다.
751년, 안녹산(安祿山: An Lushan)은 다시 장안을 방문했다. 안녹산의 생일인 2월 20일에 현종과 양귀비는 그에게 옷, 보물, 음식을 내렸다. 2월 23일 안녹산이 궁으로 호출되었을 때, 양귀비는 현종을 기쁘게 하기 위해 거대한 아기 포장을 만들고 안녹산을 그 안에 감았다. 나인들과 환관들 사이에 웃음이 폭발했다.
현종이 무슨 짓이냐고 묻자, 양귀비의 시녀는 양귀비가 3일전에 그를 낳고 그녀의 아기 녹산을 씻기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현종은 우스운 장면에 기뻐하며 양귀비와 안녹산에게 상을 내렸다. 그 후, 안녹산이 수도를 방문할 때면, 그는 궁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 받았고 그녀와 안녹산이 관계를 가진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현종은 소문을 무시했다.
안녹산의 난과 양귀비의 죽음
양국충(楊國忠: Yang Guozhong)과 안녹산은 이내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양국충은 장안에 있는 안녹산 저택의 하인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는 등 안녹산의 반란을 계속 자극했다.
755년 마침내 안녹산은 난을 일으킨다. 양국충이 반란을 자극했다고 믿는 백성을 달래기 위해, 현종은 황태자 이형(李亨: Li Heng)에게 옥좌를 물려주려고 했다. 양국충은 이형과는 절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태를 두려워했고 양귀비와 한(韓: Han) • 괵(虢: Guo) • 진(秦: Qin) 부인들을 설득하여 이것에 반대하도록 하였다. 현종은 당시에 왕위를 물려주지 못했다.
756년 가서한(哥舒翰: Geshu Han)이 안녹산의 반란군에게 패한 후, 양국충이 대치하고 있던 마지막 주요 방어선 동관(潼關: Tong Guan)이 안녹산에게 함락되었다. 양국충은 검남(Jinnan)의 성도(成都: Chengdu)로 피신할 것을 제안했다. 7월 14일 현종은 장안백성에게 비밀을 유지하면서, 그를 경호하는 황실경호대를 이끌고, 양귀비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직계 가족들과 장안을 탈출해서 성도로 향했다. 그를 호위하는 것은 양국충, 동료재상 위견소(韋見素; Wei Jiansu), 관리 위방진(魏方進: Wei Fangjin), 장군 진현예(陳玄禮: Chen Xuanli) 그리고 일부 환관과 나인이었다.
7월 15일, 현종의 행렬은 마외역[馬嵬驛: Mawei,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Shaanxi) 함양(咸陽: Xianyang)]에 도착했다. 황실경호대는 식량이 바닥나자 양귀비를 원망했다. 진현예(陳玄禮: Chen Xuanli) 도 이런 불행의 원인이 양귀비였다고 믿고 양귀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형(李亨: Li Heng)의 환관 이보국(李輔國: Li Fuguo)을 통해 이형에게 그의 계획을 알렸으나 이형은 주저하면서 어떤 승인도 하지 않았다.
한편, 남쪽의 황제를 뒤따라온 토번(吐蕃: Tufan)밀사들이 양국충을 만났지만 그들도 음식이 없음을 불평했다. 황실경호대 무사들은 양국충이 토번밀사들과 함께 반역을 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 무사들은 양국충과 그의 아들 양훤(楊暄: Yang Xuan), 한(韓: Han)• 진(秦: Qin) 부인들, 그리고 위방진(魏方進: Wei Fangjin)을 제거했다. 위견소(韋見素; Wei Jiansu)소 또한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심각한 상처를 입은 마지막 순간에 참사를 면했다.
무사들은 그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현종이 밖으로 나와 위로했음에도 해산을 거부하며 현종막사 주변을 에워 쌓다. 진현예가 양귀비 처형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자 현종은 처음엔 거절했다. 위견소(韋見素; Wei Jiansu)의 아들 위악(韋諤: Wei E)와 고력사(高力士: Gao Lishi)가 더 강하게 청하자, 현종은 마침내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력사와 유골함을 양귀비에게 보냈고 그녀는 목을 매 자결했다. 고력사가 시신을 진현예와 다른 황실경호대의 장수들에게 보이자, 호위병들은 마침내 해산했고 이동을 준비했다. 한편 양국충의 아내 배유(裴柔: Pei Rou), 아들 양희(楊晞: Yang Xi), 괵(虢: Guo)부인과 괵부인의 아들 배휘(裴徽)는 도피를 시도했으나, 붙잡혀 처형됐다. 양귀비는 관도 없이 자색담요에 싸여 마외(馬嵬: Mawei)에 묻혔다.
757년 이형(李亨: Li Heng)이 옥좌를 물려받은 후, 장안을 수복하고 태상황(太上皇: Taishang Huang) 현종이 마외역(馬嵬驛: Mawei) 통해서 장안에 돌아왔다. 그는 양귀비의 시신을 영예롭게 재 안치 하기를 원했다. 이규(李揆: Li Kui)는 반대하면서 말하길, 그렇게 할 경우 황실경호대가 보복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종은 비밀리에 환관을 보내 관속에 재 안장 했다. 그들이 시신을 수습했을 때 시신은 부패되었으나 그녀와 함께 묻은 방향주머니는 아직 향기로웠다고 한다. 환관들은 방향주머니를 가지고 돌아왔고 현종에게 그것을 바치자 현종은 몹시 통곡하였다. 장안으로 돌아온 후, 현종은 별궁에서 양귀비의 초상화를 그렸고 종종 이 초상화를 보기 위해 그곳에 갔다.
문화유산
양귀비는 당시 아주 인기 있던 약간 통통했던 외모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잘못 인용하여 종종 지나치게 살찐(Obese) 사람으로 그려진다. 양귀비를 묘사할 때 “살찐” 이란 말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아주 뚱뚱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안된다. 그녀는 종종 한성제(漢成帝: Cheng, BC 51-7)의 아름다운 아내 효성황후(孝成皇后: BC 32-1) 조비연(趙飛燕: Zhao Feiyan)과 비교되고 대조되는데, 양귀비는 통통한 체격으로 알려져 있고 조비연은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의 범주를 표현하는 “연수환비(燕廋環肥)”라는 4자성어가 되었다.
여지(荔枝: Lychee)는 양귀비가 아주 좋아한 과일인데, 황제는 중국남부에서만 자라는 이 과일을 황명을 전달하는 빠른 말을 이용해 조달했는데, 기수들은 서구의 조랑말우편과 같은 방식으로 밤낮으로 달려서 장안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오늘날 광동(廣東: Guangdong)에서 조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사천성(四川省: Sichuan)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어떤 신화에는 그녀가 몸을 피해 일본으로 갔고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녀를 요키히(Yokihi)로 알고 있다. 다음 세대에서, 백거이(白居易: Bai Juyi, 772-846)는 장한가(長恨歌: Song of Everlasting Sorrow)라는 장시(長詩)를 남겨,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사랑과 그녀를 읽은 더 없는 슬픔을 노래했다. 장한가는 고전이 되어, 중국인들의 후손들에게 알려지고 기억되었다. 양귀비의 이야기와 장한가는 일본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었고, 왕과 후궁 키리츠보(Kiritsubo)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으로 시작되는 전통소설 “겐지 이야기”의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중국의 사대미녀(四大美女: Sida Meinu, 쓰다메이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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