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221. 묵상글 (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13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27 추가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주님 중심의 참된 제자의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 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시편33,12-13)
예나 이제나 인간의 관심사는 동일합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참된 삶을 추구합니다. 부단히 희망을 길을 찾습니다. 희망을, 길을 잃었을 때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나오는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지금도 여기 수도원 피정집 마다 제가 쓴 3권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이미 품절된지 오래된 책들입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책 제목들이 삶의 길을, 삶을 방향을 제시합니다. 또 한권의 책을 낸다면 책 제목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하고 싶습니다. 이 세권의 책들중 우선 찾아 보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 합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잘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음은 더 구체화되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바뀝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류 모두가 따라야 할 길이신 예수님이심이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참 삶의 길이자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여기가 루카는 “날마다” 말마디를 추가합니다. 참 삶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새삼 하느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이자 화신인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됨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예수님 대신에 누구를, 무엇을 이 삶의 중심 자리에 놓을 수 있겠는지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을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느냐?”
참으로 유일무이한 목숨을 구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뿐임이 강조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고백하며 당신을 따르라 하시며 용기백배 힘을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절개없고 죄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나 이제나 절개없고 죄많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혼탁한 와중에서 참된 삶의 길은,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 까지, 초지일관, 시종여일 따르는 평생 여정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중심한 삶에 주님을 날로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수록 자발적 기쁨으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기 버림, 제 십자가를 짐,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현이요 주님 사랑의 힘이 샘솟는 힘의 원천이, 원동력이 되어 항구히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바벨탑”이야기는 상징하는 바 참 깊습니다. 참된 제자의 삶에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바벨탑을 세우는 사람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이 없습니다. 이들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뭔지 모를 두려움과 외로움이, 불안이, 깊은 내적 공허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바벨탑 쌓기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지요? 지위, 명예, 권력, 재물등 탐욕이 끝없이 추구하는바 내외적 바벨탑 쌓기요, 탐욕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두려움의 악마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곳곳에 치솟는 고층 건물 아파트들을 볼 때마다 또 하나의 바벨탑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로 확실히 자리 매김할 때 마음의 바벨탑 쌓기는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 거창한 바벨탑은 두려움의 표현이자 내적공허의 표현인 것입니다. 말그대로 참으로 위태한 사상누각에 하느님 중심 없는 획일화된 집단 삶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을 가는 이 집단을 살리기 위한 비상조치로 이들을 뿔뿔히 흩으십니다. 새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함을 배웁니다. 인간의 원초적 내적 두려움과 외로움, 공허감을 해소시켜 주실 유일한 분은 하느님이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생명이자 사랑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새롭게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거짓 안전의 내외적 바벨탑 쌓기를 중단시키고,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과 내적공허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다시 한 번 되뇌어 보는 제 좌우명 기도 고백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21 04:07
- 내 십자가는 내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어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당신 제자라면 당신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에 저는 ‘내 뒤를 따르려면’이라는 말씀을 눈여겨보지 않았기에
그저 ‘나를 따르려면’으로 대충 알아들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주님 뒤를 따라야 함을 명확히 깨닫게 되고 묵상케 된 것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제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이유도 묵상해봤습니다.
저는 여자 꽁무니를 따르느라 주님의 꽁무니를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느라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똘마니가 되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기에
인간 누구를 추종하다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때 저는 주님보다 프란치스코에 더 열광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뭣 때문입니까?
나 때문입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은 단연코 나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라고 하시는데
그 버려야 할 나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자주 나의 길, My way를 걸으려고 하기에 주님 뒤에 있지 않고,
주님과 상관없이 떨어져 있거나 있고 싶은 곳에 자유로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겠습니다.
나의 길을 가는데 주님께서 내 앞길 편한 길 되도록 도와달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기보다는 꽃길을 가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님 말씀을 따를 수 없겠지요.
그리고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해도 지지 않고,
자기 십자가인데도 남의 십자가라고 하며 남들에게 미룰 것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제가 제 십자가를 남의 것이라고 하며 제 십자가를 지지 않기에
마치 자기 짐을 지지 않는 자녀의 짐을 부모가 대신 지듯이
주님께서 제 십자가를 대신 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의 길 제5처를 할 때마다
시몬이 주님을 도와 주님의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시몬이 져야 할 십자가를 주님께서 대신 지신 것이라고 묵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십자가를 남에게 또 주님께 미루지 말고,
내 십자가로 우선 받아들일 것이고 그다음엔
그것을 내 십자가를 대신 져주시는 주님과 함께 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 십자가를 대신 져주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시몬처럼 대신 져드리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5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일 지는 일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내 십자가는 내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짐해야 할 것이겠습니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21 06:06
제가 컴퓨터를 처음 접했을 때는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컴퓨터 본체의 가격은 25만 원으로, 짜장면 한 그릇에 500원 할 때이니 엄청나게 비싼 기계였습니다. 형과 저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께서 큰돈을 들여서 사주신 것이었지요. 이렇게 비싼 기계이니 평생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Apple II’라는 당시의 컴퓨터는 그렇게 오래 쓰지 못했습니다. 그 뒤, 대학에 들어간 형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컴퓨터를 샀습니다. IBM 데스크톱 컴퓨터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저장 장치인 플로피 디스켓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렇게 오래 쓰지 못했습니다. 군대 제대 후, 노트북을 구입했습니다. 메모리 1M, 하드디스크 용량 40M, 이 큰 용량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노트북의 용량이 너무 적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빠른지를 분명하게 체감합니다.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예전에는 최신 기기에 밝다는 소리도 듣던 저였지만 요즘에는 컴맹, 기계치 등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달리 우리의 빠른 변화를 재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늘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변화의 길로 들어서길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는 어떻게든 맞춰 살려고 하면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변화는 늘 뒤로 미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발전만큼 빠르게 변할 수는 없지만,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신앙인으로의 변화를 늘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바로 지금부터 이루어져야 함을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장차 겪게 될 고난에 대해 예고하신 뒤에,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의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끝내는 진정한 목숨을 얻어 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맞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는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지만,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주님 뜻이라면 고통의 십자가라도 기쁘게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변화가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지금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
오늘의 명언: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미소, 악수, 격려의 말, 친절한 인사, 도움의 손길... 이 모든 것이 사랑을 향해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다(헨리 나우웬).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 곧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지를 깨닫는 일을 바탕으로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 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비울 수가 없으며, 이미 자신을 비우신 그분에 의해서 비워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의탁하여 그 길을 갑니다. 만약 자신이 스스로를 비운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신을 실현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분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신앙의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혹 십자가를 생각한다 해도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마음이 예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사는가입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제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섬김보다는 대접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부끄럽습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은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길 희망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진화의 메커니즘은 ‘돌연변이’에 있다고 합니다. 돌연변이는 환경의 변화와 위기의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도 합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팬데믹 위기를 가져왔을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면역체계를 가졌다면 인류는 더 큰 재앙에 빠졌을 겁니다. 그러나 인류는 저마다 다른 면역체계가 있어서 코로나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더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입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갈등과 분열이 생기지만 그보다 더 좋은 제도를 찾지 못하였기에 대부분의 나라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파시즘, 봉건제도, 제국주의가 하나로 힘을 모아서 좋을 것 같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인류는 그런 제도로 인해서 많은 전쟁과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형식은 왕을 인정하는 국가가 있지만 정치의 형태는 대부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벨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단순히 하느님께 반역한 인간이 벌을 받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자리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합니다. 최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창조 질서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DNA 돌연변이를 연구하고 유전자 편집을 시도하는 이 시대는, 어쩌면 또 다른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 왔습니다. DNA 돌연변이는 인간의 생존과 적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여러 환경 속에서 다양한 인류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다양성은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이는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나의 틀에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각자가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지혜를 맹신할 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유전자를 조작하고 인간을 통일된 존재로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바벨탑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면, 인간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며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교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인간의 통일과 협력을 방해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참된 조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다양한 민족과 문화, 언어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분열"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는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하나의 문화만을 강요하며,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의 혼란은 신약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치유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 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임하자, 사도들은 여러 언어로 복음을 전했고,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그 말씀을 이해하였습니다. 바벨탑에서는 인간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려 했고,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하지만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참된 뜻입니다. 인간이 강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모습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없이 자신을 통일하려 하면, 그것은 오히려 파괴와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일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모든 사람의 목표는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돈을 많이 벌길 원합니까? 행복하길 원합니까? 유명해 지길 원합니까? 행복해지길 원합니까?
세상에 살면서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받다가 하늘에서는 행복 속에서 사는 사람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수많은 성인이고, 수많은 순교자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 보여주신 길을 고대로 걷고자 희망했습니다. 또한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주님과 함께 살길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하늘에서 행복하려고 말입니다.
나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 열쇠 없이 주님 곁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지상에서 사는 동안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께 나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고 주님께 가는 날까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짊어진 그 십자가로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하길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십자가는 하늘의 행복을 얻는 열쇠라는 것을 우리가 늘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하루는?
말이 거친 사람은
화가 많은 사람이고
남을 욕하는 사람은
제 삶이 초라한 탓이다.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불안함이 많은 사람이고
허세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이 별볼일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 주변 사람에게
칭찬과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제 삶이 행복하기 때문이고
부드럽고 긍정적이게 말하는 사람은
마음에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곧 인성이고 인성이 곧
그 사람의 하루를 만들어 낸다.
-쇼펜하우어-
오늘 하루 어떠한 말들을 했는지 반추해 보고, 더 좋은 하루를 만들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따르는 길>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십자가를 지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십자가를 짊일밖에
낮추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낮춤일밖에
비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비움일밖에
품으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품음일밖에
베푸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베풂일밖에
섬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섬김일밖에
돋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돋움일밖에
이루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이룸일밖에
살리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살림일밖에
십자가를 지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십자가를 짊일밖에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6)
세상에 대한 올바른 사랑
그대는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창조주를 세상보다 앞세워야 합니다.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훨씬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감미롭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더욱 감미롭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짓누르지 않고,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사랑하지 않도록 힘껏 노력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도록(참조: 신명 10,12; 마태 22,37) 지상 사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하느님의 선물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가 돌보아 주고 있는 이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가 선물을 준 사람을 얄잡아 보고 선물을 준 사람보다 선물을 더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선물을 준 사람은 더 이상 그를 벗으로 여기지 않고 원수처럼 경멸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주는 선물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더 사랑하듯, 하느님께서도 당신께서 주신 지상 선물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고통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고, 성모와 모든 성인이 누리고 쌓은 행복과 완덕을 하느님의 뜻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아픔과 쓰라린 고통을 달갑게 견뎌야 할 것입니다. 잠시라도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어, 그 결과로 하나 됨이 이루어지면,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께서 나와 더불어 자신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낳으실 것입니다.
“나와 더불어 그분 자신 속에서”라고 한 것은, 내가 그분과 하나가 되었고, 그분도 나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 됨 속에서 성령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일과 자신의 운명을 하느님과 나에게서 받습니다. 왜냐하면 나야말로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이 모든 것을 나에게서 받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하느님에게서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식으로도 나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모세게는 백성을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영광이 그 자신의 행복보다 더 귀했습니다. 그만큼 모세의 뜻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했던 것입니다.(337)
✝️ 금요일 성인의 날✝️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아우구스티노는 지치지 않고 기꺼이 많은 편지들을 쓴 사람이다. 그는 다방면으로부터 주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조언을 주고 해야 하는 바쁜 상황에 있었고. 주교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해 오는질문들에 섬세하게 대답하는 성실함을 가졌었다. 그렇게 하여 기록한 그의 펀지들은 종종 작은 소책자로 엮어져 사람들 사이에서 읽혀지곤 했다. 프로바라는 과부에게 기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쓴 편지 130도 이러한 종류의 소책자로 엮어졌다. 과부인 프로바는 410년에 고트족의 알라리크(Alarichs Goten)가 로마를 점령할 때 피난하여 아프리카로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우구스티노는 당시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인, 로마가 점령당하기도 하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은 이 부유한 로마인의 불쌍한 처지에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되어 섬세한 마음으로 배려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위로받을 곳이 없는 비참한 삶의 현장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처지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했다. 어떤 즐거움도, 어떤 재물도 인간 안에 깊이 들어 있는 행복을 향한 동경을 채워줄 수 없다. 외적으로 채워지는 것들은 단지 피상적인 욕구들을 잠시 잠재워주기만 할 뿐이거나 사람을 속이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깊은 동경은 결국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피상적인 것들로는 결코 만족하게 채워질 수 없다.
도입
그리스도의 봉사자이고 그리스도의 봉사자들의 봉사자인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신심 깊은 하느님의 봉사자인 프로바 자매께 주님 안에서 인사드립니다.(240)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자신의 십자가 진 자만이 행복의 길을 /
박윤식 [big-llight] 2025-02-20 ㅣNo.180211
신자 수가 늘어난 만큼 주님의 참된 길 걷는 이들이 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체험으로 실감한다. 이는 분명 우리 신앙의 위기가 심각한 뜻일 게다. 과학이 발전하고 로봇이 일상의 많은 영역을 대신해 주면 인류는 행복해질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런 혁명의 혜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 자산과 권력 가진 이들에게만 돌아가는 특혜가 되기 쉽다. 공정한 분배와 바른 민주의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과학의 혜택도 사회의 양극화 현상만 첨예화할 수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목숨 구하려는 이는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잃는 이는 구할 것이다. 온 세상을 얻고도 목숨 잃으면 소용이 있느냐?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가 있을까?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나와 내 말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사실 예수님 제자의 길 걷는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 그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낯선 지경이다. 그것은 신자,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의식과 그분 제자의 길이 일치할 필요 없다는 생각을 은연중 가졌기에. 이는 십자가 지고 예수님 따르지 않아도 의당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이들이 많아진 게, 오늘 교회가 겪는 여러 갈등의 뿌리인지도 모를 게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분명히 제시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무한 경쟁에서 목숨 구하려고 남 짓밟는 일이 반복되는 한, 인류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없다. 죽길 작정하고 숨길 약점이 있는 한 더하다. 십자가 질 때는 이웃을 용서하고 함께 할 게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를 서로 져 주는 나라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수난의 길을 막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엄히 꾸짖으셨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거다. 곧 그분께서 하시려는 게 옳다고 믿는 행위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을 넘어서는 거다.
이렇게 예수님 따름은 그분 사랑하는 거고, 그 사랑은 그분 닮는다는 것이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따르라시면서 “제 십자가를 져라.” 라고 단서를 다셨다. 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열에 참여하여, 오늘의 내 삶의 현장에 능동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죽음의 길을 가자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해나 박해를 감당할 모험이나 투신 없이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으니까. 이처럼 십자가 지고 그분 따르려면, 이 세상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삶은 고독할 게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 구하려는 이는 목숨 잃을 것이고, 당신과 복음 때문에 목숨 잃는 이는 구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죽고 사는 것에 연연지 말라는 거다. 그러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셨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 그게 무엇이든 결국 영원히 사는 거라면 지지 못할 십자가는 없다. 지금 바로 그 십자가 끌어안자. 그분 제자 되고자 그 십자가 붙들자. 예수님 말씀 하나하나 실천해 가며, 그 십자가 진자만이 참 행복의 길을 걷으리라.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고도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세상살이에서 필요하고 유리할 때는 내세우지만 불리하고 걸림돌이 될 때는 감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면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기 위한 두 가지 조건으로 제시하신 ‘자기를 버림’과 ‘십자가를 짐’은 사실 힘겨운 일입니다.
힘겨운 일도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순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순교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를 잊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물론 목숨을 스스로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참생명을 찾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혼자 그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명령하신 것을 우리가 실행할 수 있도록 몸소 도와주십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더해 주시도록 그분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55)
==========================================================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
나무도
여행도
버려야
가볍게
떠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길이
곧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주님께
나아갈 수 있고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려야
맛보게 되는
평화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진정한
이정표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십자가를
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변화가 있기에
십자가는
부활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할
우리 삶의
실존입니다.
우리자신이
죽어야만
완성되는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여정은
밀알 하나의
여정입니다.
죽어야만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죽으십니다.
우리자신이
죽어야
하느님이
사시는
사랑의 힘찬
변화입니다.
참된
변화를 믿고
참된
변화를 따르는
오늘 되십시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꼭 끌어안으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는 예수님의 강력한 권고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제 가슴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르는 사람’ 즉 당신의 제자(弟子)가 되기 위한다면,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① 자신을 버리고. 40년 가까이 버리고 또 버린다고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산더미 같습니다.
징글징글한 악습,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무력감과 우울감, 끝까지 남아 괴롭히는 깊은 상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자만심...
버리는 일, 말은 쉽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고, 나 자신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린 어느 날, 그토록 염원했던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리라 확신합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기꺼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토록 염원했던 주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②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떤 것들인가? 생각해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니게 되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큰 십자가입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현실 또한 만만치 않은 십자가입니다.
매일 백번 천번도 더 탈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달픈 삶의 현실 역시 큰 십자가입니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는 십자가 중의 왕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십자가들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보다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십자가들을 짊어지라 하십니다.
주어진 십자가들을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라 하십니다. 꼭 끌어안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십자가는 점차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성장과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선물 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③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매일 새롭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한 고을에 오래 머무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셨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이동도 이동이지만, 영적인 이동 역시 거듭되었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삶으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어찌 그리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
다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런 순간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참했던 순간들, 죽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깊은 상처,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 큼지막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흑역사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들, 부단히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어제의 나를 딛고 기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34-9,1: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절) 따라야 한다고 한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이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더욱 당신을 닮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습,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희망, 믿음, 기쁨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8,34-9,1)”
1)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다.’ 라는 말은, “관계를 끊다. 관계 맺기를 거부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누구든지 나를 믿기를 거부하고,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또는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면”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는 마지막 날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그 자신이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는, 영혼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죄 속에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는,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재림하실 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하시는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2)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한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3,37-39).”
이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박해자들과 죄인들도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대상’입니다.
<아무도, 그 어떤 죄인도 구원사업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인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기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입니다.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는,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그날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반대로, ‘지금’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어떤 어려움’은 일상생활의 ‘작은 불편’에서부터
목숨을 잃는 일, 즉 ‘순교’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누구든지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희망하기 때문이고, 그 구원을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나의 희망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입니다.
바로 그 확신에서 ‘기쁨’이 생깁니다.
희망, 믿음, 기쁨이 곧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처음부터 신앙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이 힘들기만 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잘못되었거나, 즉 잘못된 것을 희망하는 사람이거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4)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희망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사람은 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입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8,34-9,1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분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말의 순간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끝까지 간직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그분께서 선포하신 자비와 사랑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삶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오해를 받고 배척을 당하며 고난을 겪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될 수도 있지요.
그 모든 고통과 시련에도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을 깊고 강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임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밝히는 것, 그리고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삶을 사는 것. 그렇게 사는 이들에게는 ‘박해’가 따릅니다. 세상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휩쓸려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 뜻대로 사는 이들을 시기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은 길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음에도 여러가지 이유나 핑계를 대며 그렇게 하지 않으니 마음 속에 늘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는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 죄책감이 자신을 아프게 찌르기에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 드는 겁니다. 그들의 방해는 치밀하고 계획적이며 또 집요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간직하려면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고 여기는 소극적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부끄럽고 부담스러워서, 혹시나 불이익이나 차별을 당할까 두려워서 남들 앞에서 드러나게 성호경을 긋고 기도하지 못한다면 그건 주님과 그분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일입니다. 자기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아이들이 자주 하는 잘못이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 부모를 모른 척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부모는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망설이게 될 겁니다. 나를 모른척 했던 자식이 밉고 원망스러워서가 아니라 내 사랑이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봐 걱정되서 그러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길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주눅들게 만들어 그분으로부터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받을 기회를 놓치게 되지요. 그건 하느님께도 우리 자신에게도 너무나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향한 나의 믿음과 사랑을 아낌없이,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행동과 삶으로 드러내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면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알아보고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겁니다.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대홍수 후에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주해서 자리를 잡은 장소 이름을 창세기 저자는 히브리어로 ‘신아르 שנער’ 라고 밝힙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거대한 탑을 쌓자고 제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하여 벽돌을 굽고 그것을 가지고 바빌론 탑을 건설하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바벨탑’이라는 복합단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אֶת-הָעִיר וֶאֶת-הַמִּגְדָּל)’보시고(창세 11,5)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
느님께서 한 겨레이고 같은 말을 쓰기 때문에 탑을 건설하는 것으로 보시고 사람들의 말을 흩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자 사람들이 서로 말이 틀려 서로 알아듣지 못하자 탑을 세우는 것을 중단한 것입니다.
바빌론 제국의 이름에서 왔으리라는 바벨(בָּבֶל)은 희랍어 칠십인 역(LXX)에서 바뷜론(Βαβυλών)을 번역하였습니다. 바벨의 의미를 성경가자가 이미 설명한대로 ‘혼동’ ‘뒤섞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성경의 내용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바빌론의 지구라트(Ziggurat)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엘람도시의 탑, 떠 우르 제3왕조 시대에 재건한 달의 신인 난나르에게 봉헌한 지구라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모델로 삼은 것은 창조의 신, 마루둑(Marduk)을 주신으로 삼는 지구라트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계단식 탑이며 신전은 하늘의 신(神)들과 지상을 연결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창세기 저자가 바빌론의 이 지구라트의 영향을 받아 이를 토대로 바벨탑의 이야기를 전했으리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주제는 이방의 거대한 지구라트나, 바벨탑도 다 하늘 아래에 있고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 어떤 것도 비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의 의미가 주어지듯, 결국 인간은 서로 다른 언어 때문에 소통이 되지 않아 바벨탑을 쌓는 것이 중단 되고 맙니다. 창세기 저자는 바벨탐의 사건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창세 11,8-9)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그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으로 초대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고선 이론적으로나 머리로는 그 모든 것을 해나가는 못하면 구원에서 제외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한 자신의 구원이라고 가르치시며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36-3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라는 반대되는 말씀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풀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생명을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면 그는 죽은 것 같지만 사실 생명을 얻데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고통을 안고 삽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고통으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고통으로 바뀌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때로 고통과 희망을 섞어가며 사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나의 발걸음 인도하며 걸으시는 주님을 확실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 때 가서는 분명히 볼 수 있는 식을 줄 모르는 희망이 우리의 발을 비추는 것입니다.
자신을 세우려고만 하는 바벨탑의 교훈을 새기며 십자가를 기쁘게 지며 오늘을 살아가는 참다운 신앙이 되는 은혜를 청해봅니다 .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
우리의 성소는 기쁨입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기쁨을 찾아가는 여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과정입니다. 이 여정이 바로 제자뿐 아니라 군중까지도 행복으로 이끄는 예수님 추종의 길이지요. 오늘의 말씀들은 왜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8,3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데 필요한 조건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포기 이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그나마 자신 좀 더 잘 버리려면, ‘버려야 하는 자신’을 먼저 잘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알지 못하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자신의 어둠과 죄악을 알아차리는 순간, 주님 친히 빛을 비추시어 나를 비워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들 가운데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으로 인식했던 바오로 사도나, ‘가장 보잘것없는 종’이라 했던 성 프란치스코야말로 자신을 알아차려, 온전히 자신을 버린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지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바램, 시기와 질투, 미움과 차별, 탐욕과 거짓 등 이기적 자아를 비워낸 사람입니다. 결국 ‘자신을 버리는 것’은 자신이 누군인가를 분명히 깨달아 자기중심에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로 향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환란과 시련은 물론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라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요 복음 자체이신 주님과의 깊은 유대 안에서, 현세의 소유에 기대지 말고 오직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처지와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과 대인관계, 사건들, 현재 겪고 있는 일들, 내 안의 갈등과 욕구 등 모든 것을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놓는 자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내놓기보다는 살리려 애쓰기 십상이지요.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것이 바로 ‘동기’입니다. 버리고 고통을 견디며 삶의 십자가를 질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8,35)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마음이 내켜서,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른다면 위선이요, 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과 행복은 바란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빈그릇을 준비하고 일부가 아니라 ‘전존재’(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의 어둠을 똑바로 알아보게 하시고, 죽음을 호흡하듯 절박하고 진지하게 매 순간 내 생명을 내놓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50221.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예수님 안에 거하여 변화된 삶
<2025.2.21> 아침을 여는 묵상 (눅 5:27~39절)
❝예수님 안에 거하여 변화된 삶❞
❚ 은혜의 복을 누리는 변화된 삶을 위해서는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인생의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27~32절).
예수님은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인 레위라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27절).. 동족으로부터 멸시받던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레위를 예수님께서는 관심 있게 지켜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는 곧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절)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사명이셨습니다. 이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28절).. 그리고는 그동안 자기 배만 채우기에 급급했던 레위는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개하여 비방합니다. 그들은 죄인은 그저 멀리해야만 하는 존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면, 예수님은 죄인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사람을 그리고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볼품없고, 비천한 존재라 할지라도 주님의 손안에서는 존귀한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 부르심에 순종할 때,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둠에 속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겠노라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내 손에 쥐고 있는 삶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나 중심적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으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인생의 삶의 궤도를 수정해 주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다가가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의 변화를 다시 한 번 결단해 봅니다. 참으로 허물투성이고, 연약한 자를 부르셔서 존귀한 자로 변화시켜 주시고, 귀한 사역의 자리의 이끄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내 인생의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33~35절).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을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34~3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은 혼인 집 손님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을 만난 그것 하나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날마다의 삶이 혼인 잔칫집 같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시고,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은총의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입술에서 불평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여전히 죄악 된 옛 생활을 버리지 못한 결과요, 스스로의 판단만을 앞세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주도면밀하게 주위와 상황을 살펴서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을 보고 판단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의미를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불평할 요소들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찾음으로 매일의 삶이 주님과 더불어 잔칫상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새로운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36~39절).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율법주의라고 하는 낡은 옷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은혜라고 하는 새 옷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 넣은 사람 역시 없을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38절). 바리새인들에게는 경건 생활에 대한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의 감격도, 자녀 됨의 기쁨도, 죄 용서의 은혜도 모르는 형식적인 그들의 경건 생활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새로운 삶의 기쁨과 은총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날마다 우리 마음의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내야 합니다. 요즘 일하는 아내를 대신해서 설거지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세제로 그릇에 묻은 음식물을 씻어 깨끗하게 된 그릇을 볼 때면 마음이 흐뭇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담아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그릇으로 깨끗해져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낡은 생각들과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 그리고 이기적인 생각과 교만을 버려야만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자신들의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변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변화되지 않으려는 생각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땅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기쁨을 담을 만한 새 부대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의 참된 방향을 지시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정한 기쁨이 있는 삶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담기에 합당한 부대가 되도록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5:27~3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