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던 고건 전총리가 돌연 사의를 표명하였다.
사회갈등요인을 해소하고 봉합하는 역할이 이 위원회의 존재이유였음을 감안할 때, 그의 용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한마디로 현 시국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강변인 셈이다.
이는 “누구 탓이냐”를 물을 사안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갈등처리 능력 내지 소통문화의 수준을 드러내주는 일례일 뿐이다.
종종 “국회가 온통 싸움판이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어요?” 하며 푸념하는 말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뒤집어 말해 준다. “나는 국회가 오히려 해야 할 싸움을 덜 해서 문제라고 보는데요.
국회의원들이 싸움을 잘 해줘야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는 것 아닐까요. 정책싸움 말이에요.
국회의원들은 국민 대신 싸워달라고 뽑힌 사람들이잖아요.”
이래저래 답답한 마음뿐인데, 1990년대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한 재시 잭슨 목사의 유명한 연설을 접하게 되었다.
순간 전율에 가까운 감동이 밀려왔다.
“나의 경쟁자 듀카키스의 양친은 의사와 교사였고 나의 부모는 하인이요 미용사였으며 경비원이었습니다.
듀카키스는 법률을, 나는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종교와 인종의 차이, 경험과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란 나라의 진수는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듀카키스의 선친은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고,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앞 세대가 무슨 배를 타고 미국에 왔든지 간에 그와 나는 지금 같은 배를 함께 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 가지 실,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천으로 만든 이불이 아니라 누비이불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의 유년 시절 어머니께선 털 헝겊, 실크, 방수천, 부대자루 등 그저 구두나 간신히 닦아낼 수 있는 조각천들을 모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조각천들을 꿰매어 훌륭한 누비이불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힘과 아름다움과 교양을 상징합니다. 이제 우리도 이른바 ‘누비이불’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은 거의 완벽한 짜임새와 철학으로 우리에게 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다채로운 존재들이 서로의 ‘차이’를 뽐낸다. 이는 ‘경험’과 ‘관점’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리의 소명은 그것들로 ‘누비이불’을 만드는 것이다.
누비이불은 ‘힘’과 ‘아름다움’과 ‘교양’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말에 공감이 간다.
누비이불은 ‘힘’이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들이 연합하여 시너지를 분출하는 대자연의 다이내믹이다.
누비이불은 ‘아름다움’이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들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예술의 극치다.
누비이불은 ‘교양’이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지 않는 관용의 발로다.
지금 우리 앞에는 ‘다름’이 미결의 과제로 턱하니 태산처럼 가로막고 있다.
남과 북, 우와 좌, 그 밖에 수많은 이해집단들이 이 다름으로 인하여 진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누비이불의 미학은 아직 저 태평양 건너 전설로 들려올 뿐이다.
차동엽 로베르토 신부 | 미래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