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전현충원을 다녀와서
은빛수필문학회 정석곤
국립대전현충원은 들어서 알지만 낯설었다. 전주 대전 간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다 유성 IC로 들어갔다. 교통 표지판을 따라 공주·동학사 쪽으로 가다보니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정문에 들어서자 길 양쪽에 여러 나라 국기가 펄럭이며 현충원의 위상을 자랑했다.
1955년, 서울 동작동에 설립한 국립묘지에 일제침략과 6·25전쟁 그리고 월남전 등에서 활약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을 추모하는데 안장능력이 한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1979년부터 현 위치에 대전국립묘지 공사를 진행하면서도 안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면적이 약 100만평(3,309,533㎡)이라니 한눈에 볼 수가 없었다. 묘역이 시골 마을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유공자, 장병, 경찰관 등으로 나뉘고 또 고유의 숫자를 부쳐놓았다. 묘역은 셀 수 없이 많은 유해가 묻힌 잔디밭에 묘비들이 전후좌우로 정렬하고 있었다. 묘역 사이로 넓은 2차선 길이 나있고 주차장과 모정도 있었다. 둘레를 삥 둘러보고 싶었다. 걸어서 두어 시간 걸릴 것 같았다.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뒤가 온통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려 쌓이고 경사가 완만한 언덕배기다. 앞이 탁 트여 멀리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게다가 산의 녹색과 멀찌감치 서성거린 가을 하늘의 높은 파란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바람은 벌 안을 꽉 채운 햇볕과 청정 공기를 살살 흔들고 있었다. 풍수지리를 전혀 모른 내가 봐도 앞에 물이 안보여서 그렇지 묘지로서는 최고의 명산이라 엄지 척을 치켜세웠다.
국립대전현충원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짧은 생을 바치신 호국영령 및 순국선열을 모시고 그분들의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려면 이 정도의 천혜적인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어야할 성 싶었다. 여를 남짓한 민족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묘역을 잘 단장해 놓았다. 그리고 참배객들이 편안하게 참배하도록 기다리고 있어 퍽 자랑스러웠다. 벌써 추석 성묘를 하러온 유가족의 참배 모습이 묘역마다 눈에 띄었다.
몇 해 전, 둘째 외숙님의 유해가 장병 묘역 145에 안장되셨다. 길 바로 옆줄로 뒤에서 여덟 번째다. 이름표 대신 병장 김 현자 식자의 묘라 쓰인 묘비가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몇 번을 읽어 봤는지 모른다. 외숙님은 6.25 한국전쟁 끝 무렵에 군복무를 하셨으니 그 조마조마한 마음과 육체적인 고통은 본인만이 알뿐이다. 다른 이는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도 군복무가 어려워 기피자들이 많았다. 군청에서 마을에 기피자들을 몰래 잡으러 오면 정신없이 숨었던 모습들이 누에 선하다. 그런데 외가에 이런 장한 젊은이, 둘째 외숙님이 계셨다는 게 대견스러웠다. 외숙님은 이런 명산에 안장되어 추모를 받으셔야 함은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제 둘째 외숙모님께서 하늘나라 부르심을 받으셨다. 오늘은 외숙모님의 유해가 외숙님을 따라 국립대전현충원에 오셨다. 외숙모님의 유해를 가족과 친지가 지켜본 거운데 외숙님 곁에 안장했다. 숙모님도 국가유공자 부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그 어려운 시절에 남편의 뜻을 받들며 2남 3녀를 남들 부럽지 않게 키우셨다. 두 분이 몇 년간 떨어지셨는데, 이제 93세로 생을 다 하시고,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국립묘지에 국가유공자 부인으로 나란히 안장되어 유족들이 다 좋아했다. 생질인 나와 아내도 마음이 흐뭇했다.
나는 부모님 유해를 효자추모관에 모셨다. 아내는 성묘 갈 때면 부모님 곁에 우리 부부가 들어갈 한 간을 사두자곤 했다. 우리가 죽으면 추모관, 수목장, 자연장으로 할지 자녀들에게 맡길 일이다. 일장춘몽이지만, 나는 죽은 후에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해 달라며 미리 신청하고 싶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13만 8천여 임들의 이름을 후손 대대로 불러 호국정신이 이어지리라 믿는다. 국가 위기에 국방의무를 다하신 둘째 외숙님의 호국정신도 후손 만대에 불리기를 원한다.
(22.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