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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 - 없음'에서 '없음 - 있음'으로, 극..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있음 -없음'에서 '없음 -있음'으로, 극지의 시, 이성복 시인
(요약)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만든 환상일 뿐이에요. 환상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말, 이름, 관념, 개념, 이미지가 되겠지요.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념에 불과합니다.사실 인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바꾸려하는 몸부림 그대로가 인생입니다.모든 관념 뒤에 욕망이 움직인다고 할 수도 있어요. 관념은 실재가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예요.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지향이 그런 것일테고, 지금 우리가 갈망하는'시 '또한 그런 걸 거예요.
다른 내러티브들과 마찬가지로 시' 역시 '믿거나 말거나'이니까요.
시는 '시'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에요.
뿐만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내러티브에 의거하지 않은 사랑은 없고, 그러한 이상 모든 사랑은 환상이에요.
우리는 누구나 '없음'의 상태에서 나와 '있음'의 상태로 머물다가, 언젠가 '없음'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처음부터 '있음의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없음-있음 -없음...>의 구조를 받아들인다면,
은산철벽이나 무공철추로만 보이는 생사도
어렵지 않게 뛰어넘고, 손쉽게 굴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본문)
항상 정에 굶주려 스킨십을 원하는 아이가 있었다고 해요.
그 애 엄마는 미혼모였는데, 친정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휴가 때나 들러 장난감을 사 주고 갔다고 해요.
그애 외할아버지는 저놈이 내 딸 신세 망쳤다'며 지독히 미워 했대요.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아이는 제 엄마의 불장난의 결과인데,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고 죄 없는 아이를 미워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 태반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해요.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요. 우리의 가치 판단은
인류의 생물학적인 조건에서 시작하여 당대의 체제, 이데올로기, 전통, 관습 등에 묶여 있지요
우리는 삶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는 무지라는 것조차 모르는 무지'일 뿐이에요.
[금강경] 에서는 '보살은 보살이 아니라 그 이름이 보살'이라고 해요.
우리가 '보살'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관념이나 개념에 불과할 뿐.보살이라는 어떤 실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닐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느티나무가 될 수도 있고
아파트가 될 수도 있어요.
틱낫한의 어법을 빌면. 보살은 보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일체가 개념 혹은 관념이며, 이것들은 우리도 모르게 주입된 것이에요.
우리는 이것들을 실재라 여기며,우리 자신의 판단이
전혀 근거 없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아요.
가령 우리가 남자라 해서 남자 백 프로가 아니고,
여자라 해서 여자 백 프로가 아니라 하잖아요.
남자 안에 여자가 들어 있고, 여자 안에는 남자가 들어 있다고 해요.
생각해보면 우리 안에 우리도 모르는 것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우리가 의식 못하는 것들, 모두가 우리를 이루는 것들이겠지요.
우리 안에 있지만 의식화되지 않은 그것을 '타자'라해요.
현대성이란 '타자의 발견'이라고 하지요.
현대시의 출발점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은 처음으로 악을 아름다움의 타자로 인정했 어요.
또한 "나는 타자다"라고 말하는 랭보는 우리 자신이 사고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라는 사실을 선언하지요.
이는 고정된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금강경]의 '즉비' 논리와 맞닿아 있어요.
가령 여성 앞에서 나는 남성이지만 같은 남성 앞에서는 여성이 될 수도 있어요. 나의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에요.
나는 타자의 그림자이며,나의 삶은 타자의 그림자놀이라 할 수 있지요.
흔히 인생이란 바꿀 수 없다고 해요.하지만 인생에 대한 관점,다시 말해 인생관은 바꿀 수 있지요.
그런데 인생관을 바꾼다는 것은 곧 인생을 바꾸는 것 아니겠어요.
[금강경]의 논리에 따르자면 인생은 인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생이니까요.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바꿀 수 없는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희한한 일이 벌어져요.
십자가의 수난으로 부활이 가능하다는 파스카Pascha'의 신비나 고통이 없다면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없다는 사성제의 진리도 이렇게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비울 수가 없다고 하지요.
단지 나쁜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 뿐이에요
욕심을 버리라고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돼요.
욕심을 버리려는 것 또한 욕심이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비웠다고들 하지만 비웠다고 말하는 게 마음이에요.
마음을 비운 사람은 비웠다고 말할 필요가 없고,
겸손한 티를 내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니에요.
텔레비전 보는 아이를 때리면 공부는커녕, 공부에 대한 염증만 커지지, 공부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게 해주고,
그래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나게 하면, 자연히 텔레비전을 안 보게 되는 거지요.
겨우내 강가에는 시든 갈대 천지지만 봄이 되면 하나도 안 보이잖아요.
새잎이 나면 헌잎은 자연히 사라지는 거예요.
무엇을 바꾼다는 것은 이런거예요.
어쩌든지 없애려고 하면 다른 식으로, 더 큰 힘으로 뛰쳐나와요.
공을 바닥에 내치면 더 높이 튀어 오르잖아요.
불교에서 '파사현정'이라는 말은 세 가지 뜻으로 새길 수 있다고 해요.
첫째, 그른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 다.
둘째, 그른 것을 부수고 나면 그 상태가 바른 것이지, 달리 바른 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셋째, 바른 것을 드러내면 자연히 그른 것이 사라지므로,
새삼 그른 것을 부술 필요가 없다.
여기서 특히 세번째 뜻이 재미있어요.
좋은 게 나타나면 나쁜 건 자연히 물러나요.
빛이 나면 어둠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지, 어둠을 따로 퍼낼 필요가 없잖아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만든 환상일 뿐이에요. 환상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말, 이름, 관념, 개념, 이미지가 되겠지요.
그것들은 모두 허망한 분별의식에서 나온 거예요.
일체가 환상이라면 환상에서 빠져나오려는 것 또한
환상이 아닐 수 없어요.
작년에 어떤 분이 책을 보내와서 답장을 드렸어요.
이 삶이 병인데 이 병안에서 다른 병을 앓지 마시라고. 세상이라는 꿈속에서 다시 세상을 빠져나가는
꿈을 꾸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렇다고 모든 환상이 다 나쁜 건 아니에요.
가령 종양에는 악성 종양과 양성 종양이 있듯이.
환상에도 악성 환상과 양성 환상이 있어요.
악성 환상은 세속에 물든 마음으로 나를 괴롭히고 남을 괴롭혀요.
이에 반해 양성 환상은 우리에게 안심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환상 이에요.
새 물을 부으면 흐린 물이 빠져나가듯이,
양성 환상이 들어오면 악성 환상은 자연히 힘을 잃게 돼요.
사실 인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바꾸려하는 몸부림 그대로가 인생입니다.
사르트르의 [자유의 길]의 주인공은 퐁뇌프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껄껄 웃습니다.도대체 자유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해오다가 한순간 깨달은 것입니다
자유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바로 자유라는 것을
인생을 선택하고 결행하는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지요.
'선과 문학'이라는 일본 작가의 책에도 같은 얘기가 나와요. 어릴 때부터 인생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고
살아온 작가는 어느 날 문득 '아, 이걸 가지고 그랬나' 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대요.
인생이 뭔지 질문하는 것이 인생이지, 달리 인생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를테면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가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은 얘기예요.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적 구조에요.
그처럼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을 찾으러 나서면 백 년 천년이 가도 헛일이에요.
옛날 임제 선사가 스승인 황벽에게 '도'를 묻다가 세차례 얻어맞고, 대우한테 가서 깨달은 것이 '이것' 입니다
때리는 게 '이것'이고, 맞는게 '이것'이에요
돌아보니 일거수일투족 '이것' 아닌 것이 없는 겁니다.
'이것'으로 '이것'을 물었으니 도무지 알 길이 없었던 거지요.
말하자면 눈으로 눈을 찾고,애 업고 애 찾는 격이에요.
그래서 은산철벽 이 본래 자기이고, 금강권이 본래 마음이라는 걸 알면 공부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자유'라 하든 '인생'이라 하든 '도'라 하든, '이것'에 대해서는 묻고 답할 수가 없어요.
묻는 것이 '이것'이고 답하는 것이 '이것'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파리 같은 곤충은어디에나 앉을 수 있지만 불꽃 위에는 앉을 수 없듯이, '이것'에는 도무지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추구하는 자 자신이 '이것'이라는 사실이
납득되면 문제는너무도 쉽게 해결됩니다.
이처럼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념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관념 밑에 숨어 있는 메타포를 바꾸는 거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관념 -세상'을 인형극에 비유하자면 커튼 뒤에서 인형을 조작하는 것이 바로 메타포라 할 수 있어요.
어떤 관념도 메타포 아닌 것이 없으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메타포의 손자뻘이 되는 셈이지요.
도무지 우리는 메타포를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 말 또한 메타포예요.
방금 우리는 메타포가 '장애물'이라는 또 다른 메타포를 사용한 것입니다
혹은 모든 관념 뒤에 욕망이 움직인다고 할 수도 있어요.
어떤 관념이든 욕망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어요.
또 모든 관념 뒤에 내러티브가 움직인다고 할 수도 있어요.
욕망, 메타포, 내러티브는 본래 하나예요.
그리고 그것들을 드러내는 여러 문학 장르 또한 서로 다른 것이 아닐 거예요.
시가 메타포를 추구한다면 소설은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 이면에는 욕망이라는 에너지원이 있어요.
메타포가 공간적이라면 내러티브는 시간적이고,
그 둘을 배태하는 자궁이 욕망인 셈이지요.
이제 내러티브로 이야기를 옮겨가볼까요
가령 하강descente과 추락 chute은 똑같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과정을 이야기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라요.
하강은 자기 의지로 행하는 것(내려가기) 인 반면,
추락은 자기 의지와는관계없이 일어나는 일(떨어지기)이에요.
또한 하강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추락은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아시다시피 모든 영웅 신화에는 '하강'의 모티프가 들어 있어요.갖가지 고난을 겪은 주인공이 언젠가는 금의환향한다는 것이지요.
지옥에 내려간 오르페우스가 그렇고 죽음에서 부활하는 그리스도가 그렇습니 다.
이것은 또한 시련épreuve과 불행malheur의 테마로도 읽을 수 있어요
[맹자] 에는 하늘이 귀한 사람을 낼 때는 시련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백석의 시에도, 내가 지금이렇게 힘든 것은
하늘이 나를 귀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구절이 있어요.
그리고 릴케도 그 비슷한 말을 해요.
만약 우리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우리 앞의 괴물은 아름다운 공주로 바뀔 것이라고.이런 말들은 모두 하강 신화의 변주들이라 할 수 있지요.
불행'과 '시련'의 차이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가 구약의 욥이라는 인물이에요.
그는 프로메테우스, 돈 주앙,오이디푸스 등과 더불어
현대에 들어 부각된 인물이지요.
욥의 일대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불행은 시나리오 (내러티브)가 부여되기 이전이고, 시나리오(내러티브)가 설정되면 시련으로 바뀌지요
즉 이 자기 불행을 하느님이 그를 귀한 사람으로 쓰기 위해 마련한 시련으로 이해할 때 그의 불행은 끝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러티브는 인생을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추락'을 '하강'으로
'불행'을 '시련'으로 바꿔주는
내러티브의 도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생사의 강을 건널 수 있겠어요.
말하자면 종교는 인간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 심연 위에 내러티브의 다리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종교 '로 번역되는 religion의 어원이 이어주다relier'라고 하지요.
그 점에서 이 말은 저곳으로 옮겨놓다'는 뜻의 메타포와 다르지 않아요
초월적인 인격신을 믿든 우리 내면의 신성을 믿든
내러티브 아닌 종교는 없어요.
그리고 모든 종교는 '믿음'에 의해 가동됩니 다.
그 때문에 자력 종교에서나 타력 종교에서나
믿음이 제일의 자리를 차지해요.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보이지 않는 '실체의 확증'이라 하고,
불교에서는'도와 공덕의 모체'라 하지요.
그런데 사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잖아요.
가령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지요.
하지만 부활이라는 게 도대체 믿을 만한 일입니까?
그런데 인생을 바꾸는 여러 내러티브 중에는 외재하거나
내재하는 신성에 의지하지 않는 것들도 있지 않을까요.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지향이 그런 것일테고, 지금 우리가 갈망하는'시 '또한 그런 걸 거예요.
다른 내러티브들과 마찬가지로 시' 역시 '믿거나 말거나'이니까요.
요즘 우리 말고 누가 시를 신주단지 모시듯합니까.
시는 '시'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에요.
뿐만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내러티브에 의거하지 않은 사랑은 없고, 그러한 이상 모든 사랑은 환상이에요.
[좁은 문] 의 주인공 제롬은 알리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해요.이탈리아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경치를보았을 때 너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알리사의 답장이 재미있어요.
"내가 거기서 너와 함께 있지 않았니?
고마운 줄도 모르는 제롬
단 하루도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어
내가 헤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상태, 다만 이 상태를 말하는 거야. 헤어져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상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있는' 상태입니다.
당신이 어디 있든 나는 당신과 같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꽃을 보면 당신도 같이 꽃을 보고,
내가 밥 먹으면 당신도 함께 숟가락을 드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그리움'이란 오히려 건전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어요.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우리 안의 그가 우리 바깥으로 나와 떠도는 것 아니겠어요. 늘 함께 있는데
어떻게 보고 싶다는 말이 나오겠어요. 누구나 태어나면
죽어야 하고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헤어지기 마련이지만
이 '믿음'의 자리에서는 이별과 죽음이 없어요.
그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 삶은 참 쓸쓸한 자리가 돼요.
현실에서 우리는 알리사의 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시의 공간, 문학의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어요.
헨리 나우웬HenriJ. M. Nouwen의 표현 을 빌자면.
"당신이 어디 있든 내가 어디 있든 우리 사이에 놓인 땅은 거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대한 믿음이
삶의 재난과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지요.
이 자리, 이 공간과 순간에 대한 믿음 없이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아요.
카프카 식으로 말하면 어떤 행위도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행동의 근저에는 반드시 어떤 관념이 있고, 그 관념은 믿음에 의해 움직이는 거예요.
우리의 삶, 우리가 사는 세상은 '믿음'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드러난 일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별도 죽음도 없는 이 자리를 지탱해주는 믿음은
그 자체 아무런 동력이 없습니다.
잠시라도 방치해두면 시들고 말아요.한 순간 딴생각하면 꺼져버리는 노인들의 성처럼 말이에요.
얼마 전 다큐 프로에서 죽어가는돌고래를 다른 돌고래들이 자꾸만 물 위로 부양시키는것을 보았어요.
어쩌든지 숨을 쉬게 하려는 거지요.
그처럼 믿음을 부양하는 것, 그리하여 매직아이의 구조물 같은 내러티브의 세계를 유지시키는 것, 그것이 '기도'예요.
기도는 만나Manna와 같다고 해요.
만나는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발견한 양식 이라 하지요.
만나의 특징은 보관이나 저장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기도와 닮은 점이에요. 기도의 효능은
기도하는 순간에만 있지, 잠시라도 멈추면 사라져버리지요. 그래서 매 순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인도의 간디는 기도를 '습관적인 열망'이라고 했어요.
하루 세끼 먹는 밥은 거를 수 있어도. 기도를 안 하고는 잠시도 살 수 없다는 거예요.
대체 우리가 어떤 이유로 태어났고, 여기서 얼마나 살아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어도 언젠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이것을 못 받아들이니까 종교라는 가공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거지요.
종교란 '있음'과 '없음'을 이어주는 다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부활이든 극락왕생이든 확인도 증명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이 믿을 수 없는 그러나 또한 믿을 수밖에 없는
가상의 시나리오 없이 어떻게 생사의 강을 건널 수 있겠어요.
그런데 '있음'과 '없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종교적 내러티브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도 있 어요.
'있음 - 없음' 이전에 '없음- 있음'의 구멍을 내는 방식-이지요.
여기에는 굳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고 판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즉 내러티브를 만들기 위해 바깥에서 가공의 요소를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 들어 있는 요소들의 순서만을 바꾸기 때문이지요.
가령 '조삼모사'라는 말은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말이지만
때로는 '조사모삼'이 필요하고 유용할 수도 있어요
또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머리가 먼저 나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이도 산모도 다 죽어요. 그처럼 순서 하나가 생사를 결정짓는 거예요.
제가 해군에 있을 때 들은 얘기인데 미국 배와 우리 배에서 대걸레 빠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요.
미국 배에서는 청소한 다음 뒷사람을 위해 걸레를 빨아두는데, 우리 배에서는 걸레를 빨아 청소한 다음
더러운 채로 놔둔다는 거예요.
청소를 하려면 언젠가 한 번은 걸레를 빨아야 해요.
그렇지만 깨끗한 상태에서 시작해 깨끗한 상태로 끝날 수도 있고,
더러운 상태에서 시작해 더러운 상태로 끝날 수도 있어요.
이처럼 순서의 차이가 우리 자신의 수준과 품위를 결정해요.
우리는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해요.
그렇지만 '죽기 전에 미리 죽으면 죽을 때 안 죽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수학에도 +1과 -1이 반복되는 구조가 있어요.
여기서+ 1을 먼저 하느냐 -1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1-1+1-1•••••>의 순서가 될 수도 있고
<-1+1-1+1••••>` 될 수도 있어요.
이것을 인생에도 대입할 수 있어요.
인생 또한 <있음- 없음-있음...>의 구조가 될 수도 있고.
<없음-있음- 없음••••> 의 고조가 될 수 있어요.
만약 우리가 있음-없음 있음.....> 대신
<없음-있음 -없음...>의 구조를 받아들인다면,
은산철벽이나 무공철추로만 보이는 생사도
어렵지 않게 뛰어넘고, 손쉽게 굴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옛날 고조선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섭섭한 분 있습니까.
또 빙하시대나 공룡시대에 자기가 없었다 해서
공포에 떠는 분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없음'의 상태에서 나와 있음'의 상태로 머물다가, 언젠가 '없음'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 돌아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못 받아들일 수도, 안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기 전 무량겁의 시간은 조만간 우리가 돌아갈 무량겁의 시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는 티끌먼지 때문에 잠시 갈라져 보일 뿐
그 둘은 본래 하나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처음부터 '있음의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지금 여기있는 내가어떻게 없어질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있음-없음-있음... > 대신,
<없음- 있음-없음•••>의 구조를. 취한다면,
부활의 신비나 극락왕생같은 내러티브 없이도
생사를 건널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이처럼 바깥의 힘을 빌지 않고 내부의 순서만 바꿔도 생사의 모습은 달라져요.
청소하기 전에 걸레를 빠느냐, 청소한 뒤 빠느냐,혹는
내 더러움을 내가 치우느냐, 남의 더러움을 내가 치우느냐에 따라 인생의 품격이 달라지는 겁니다
보세요, 이렇게 바로 팔을 뻗으려 하면 무척 힘이 듭니다.
하지만 먼저 뒤로 뺐다가 앞으로 내밀면 훨씬 수월해요.
탁구, 골프, 테니스 등 여러 스포츠에서 '백스윙'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피니쉬'를 용이하게 해주는 백스윙의 원리와 방법은 인생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어요.
그리고 방금 생각난 비유 하나를 들겠습니다.
계란에 구멍을 뚫고 빨아 먹으려 하면 잘 안 나오지요.
하지만 맞은편에 구멍을 뚫어주면 쉽게 흘러나와요.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다면,
있음' 앞에 '없음의 자리를 만들어 두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