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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 시인
1987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건축역사이론비평석사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가 나일 확률』(2019, 문학동네),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2023, 문학과 지성)
산문집 『식물 스케일』(2025)
시와 건축에 매달려 산다. 건축전문출판사인 도미노프레스를 운영중이다.
2020년 제11회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2014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_ 알 / 박세미
알 / 박세미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지나가던 개가 아무렇게나 싸놓은 똥처럼
거기엔 무단 투기 금지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당당했지
버려진 적 없으니까
어느 날 거기 옆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누가 널 낳았니
이름이 없어 좋겠다
털이 있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
정체가 발각되는 것이니까
집을 나오는 길
두 발이 섞이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얼굴과
머리카락이 엉키고
몸의 구분이 모호해질수록
흩어져 있던 영혼의 조각들이 뭉쳐질수록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쓰레기로 완성되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내 정체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분류하지 않는 곳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간다
자, 이제 신앙에 대해 말할 수 있지
바깥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
욕조 안으로 들어가면
반쯤 잠기는 몸
최초의 기분은 여기에 있지
출렁인다
다리 하나가 기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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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손에 쥔 알… 깨지든 태어나든 마주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시간들을 놓칩니다. 어쩌면, 놓습니다. 당선 통보를 받던 순간에도 주저앉아 울거나 소리라도 시원하게 질러 볼 타이밍을 보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꼭 남아 있습니다. 금방 터질 것 같은데, 아직 터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끌어안은 채 나는 시를 만납니다.
그녀들의 언어와 인격은 겹쳐지며 반짝입니다. 너무나 눈부신 나의 김행숙 선생님과 이원 선생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문드러진 나의 스무 살, 뼈를 심어 주셨던 우성환 목사님. 늘 그립다는 말을 이제 전합니다. 나의 가족. 박종주, 홍미숙, 박대인. 가장 뜨거운 세 개의 이름. 그리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발음해 주는 사람들. 나는 당신들이라는 숲에서 크게 숨을 쉽니다.
시나락 아이들. 우리 오랫동안 함께 걷자.
미숙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신 황현산 선생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합니다. 조심스럽게 알 하나를 손에 쥡니다. 깨지든, 태어나든. 어떤 것이라도 마주하겠습니다.
▲ 박세미 / 1987년 서울 출생. 강남대 건축공학과 졸업 .
[ 심사평 ]
세계를 향한 끝없는 질문과 대화의 자세 돋보여
본심에 올라온 10명의 작품은 예심위원들의 젊은 안목 덕분에 정형화된 신춘문예 스타일과는 다른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의 심사는 한 편의 ‘잘 빚어진 항아리’를 선택하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개성적 독법과 화법’을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여러 번 읽는 과정에서 수사적인 표현에만 의존한 시, 지나치게 관념적인 시, 낯익은 발상에 머물러 있는 시 등이 우선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것은 박세미, 김잔디, 이현우의 작품이었다.
김잔디의 시는 이미지를 조형해 내는 솜씨가 섬세하고 감각적이라는 점에서 호감이 갔다. “풍경을 의심하는 초식동물의 눈은 까맣다”라든가 “우유곽 바닥을 훑는 빨대 소리에 놀라 수목은 뿌리를 내리고” 등 매력적인 구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과 이미지들이 파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뚜렷한 구심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현우의 시는 상상력이 활달하고 다양한 소재를 유니크하게 소화해 낸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은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실러캔스, 달의 착란, 손금의 태계, 프로토아비스…. 그는 무엇이든 시로 만들 수 있지만 어떤 시에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걸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소재주의적 경향이 그의 유창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망설이게 했다.
박세미의 시는 간결한 언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증폭시켜 내는 특유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비극적 인식을 경쾌한 어조로 노래하는 그는 시적 대상의 슬픔과 고통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끌어안는다. 당선작인 ‘알’에서도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상투적 연민이 아니라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새로운 난생설화를 탄생시킨다. 화자의 교체나 장면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행과 연을 조율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세계를 향해, 바깥을 향해, 끝없이 질문하고 대화한다. 그 질문과 대화의 자세로 오랫동안 좋은 시를 쓸 것이라 믿고, 또한 지켜볼 것이다.
심사위원 : 나희덕(시인), 황현산(문학평론가)
몇 퍼센트입니까 / 박세미
숨어 있는 문이 있다는데
항상 열쇠를 쥐고 다녀야 한다는데
배우가 되려면 목구멍 깊숙이
눈물을 잘 흘려야 한다는데
당신 옆을 지나칠 때 우연히
내 걸음이 놓친 것들 나를 통과한 말들
진심이 진심에 덮여 사소해질 가능성
내가 나일 확률
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
낮과 밤의 경계에서
누군가는 동물이 된다는데
몸속을 뒤집어 가장 순결한 보호색을 띤다는데
당신이 당신일 확률
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
그릇이 깨지는 날엔 손이 가벼워졌다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다는데
스스로 밧줄을 쥐고 있을 가능성
당신 얼굴을 그리고
손가락으로 외곽을 문지르면
당신이 흔들린다
내가 흔들린다
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
나는 뜀틀과 넘어진다
빛나는 나의 돌 / 박세미
발밑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돌이 빛나는 유일한 자리죠
언어가 끝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은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발바닥으로 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배반합니다
내 손으로 내 돌을 깨뜨려 옆 사람을 겨냥했다가
수면제를 삼키듯 증거를 인멸하면
새까맣게 타버린 돌은 잠 속으로 들어와
주로 악몽을 짓는 데 쓰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맞댄 두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꿇어앉아 하늘을 향해 포갠 발바닥에 있습니다
거기엔 빛나는 돌이 놓여 있죠
하지만
누군가 내게 와서
서로의 발바닥을 맞댐으로 사랑에 빠지자,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졸도할 것입니다
두 발바닥을 활짝 펴고서
무게는 소리도 없이 / 박세미
카스텔라가 무너진다
넌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가장 가벼운 말이었어
아무도 카스텔라의 무게를 나누어 들지 않는다
갑자기 집안이 조용해진 적이 있지
드디어 누구 하나 죽은 것일까
기둥이 있다는 건 공간을 나누겠다는 것
이건 달콤한 개념이지
공간을 나눈다는 건 목적을 가지겠다는 것
그러나 나는 목적도 없이
방안에 다락방을, 다락방 안에 텐트를,
맨 마지막엔 인디언 텐트를 지을 거야
선풍기 바람에 방문이 서서히 닫히는 걸 본 적 있지
가볍고도 간결한 덩어리
카스텔라가 있었다
소리도 없이
떼 / 박세미
메뚜기 한 마리가 뛰어다니면 그건 메뚜기다
메뚜기들이 공중을 메우고 땅을 차지하고 지붕을 덮어버리면
그건 재앙이다
사람들에게 재앙은 메뚜기일 리가 없다
방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오면
나는 ‘나들’이 되어있고,
엄마는 나를 못 본다 그건 재앙이다
엄마에게 재앙은 나일 리가 없다
밤이 된다는 것은, 눈을 깜박이는 순간의 어둠들이
떼로 몰려들 때
침대에 누워
엄마를 죽이고 아빠를 죽이고 애인도 죽이면
그건 ‘나들’이다
꿈꿀 때 나는 재앙이 될 수 있다
떼를 지어 다니는 내가
오늘 하나 더 죽으면
나는 내일 하루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
밤마다 눈을 감는 것은,
수많은 거울을 만드는 일
계속해서 나를 거울로 되돌려 보내는 일
오늘 밤은 내 방문 앞에 모여있다
지각하는 이유 / 박세미
젤리를 만져보느라 그래
꾹꾹 눌러보다가, 가끔 비위가 상하기도 하는데
그럴 땐 옆에 잠시 쌓아두면 돼
개미떼가 온 몸에 다닥다닥 붙을 때까지
불투명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선인장을 죽이느라 그래
초록의 몸은 싱그럽고 징그럽지
거기엔 도롱뇽의 꼬리가 있고 아기의 솜털이 있어
그러니까 선인장의 본질은
가시가 아니지
그걸 하나씩 뽑으며 기다리다가
누군가 함부로 정해놓은 시간이 지나면
출발해도 돼
발을 질질 끌며 천천히 걸어가도 돼
그러니까 지각하는 사람의 본질은
지각하는 곳에 없지
밥과 국은 그대로 남긴 채
젤리를 만지작거리는 4인용 식탁 앞에서
내가 도착하고 싶은 곳은
더 이상 수저 놓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또는
하루에 하나씩
선인장이 죽어나가도
아무도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는 곳
기분은 디테일에 있다* / 박세미
소매에 자꾸 얼굴을 비비는 고양이
빨갛게 퉁퉁 부어오르는 나의 팔목
이런 귀여움과 가려움 사이에
동그란 구름 지나간다
중년 남자의 기침과 어린 남자의 웃음 사이에서
쫑긋해지는 귀
말랑하게 익은 아보카도와 바삭거리는 시리얼 사이로
달콤한 우유
레이스 브래지어와 실크 셔츠 사이의
얇은 바람
얼마나 더 정교해질 수 있나
고양이가 비빈 나의 팔목으로 지나간 구름의 기침을 들은 귀로 바삭거리는 바람이 나를 살리고 있다면
창끝으로 너의 풍선을 터뜨릴 텐데
* 『신은 디테일에 있다』— 미스 반 데어 로에
파티의 언어 / 박세미
거대한 사탕이 포장지만 남기고
사라질 뿐이라면
매일 밤 새로운 행성이 탄생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거나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습관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파티가 시작됩니다
당신은 오목하게 말하거나
볼록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이
볼록의 아래에서 오목을 말하듯이
아이스크림을 파먹고 난 자국에서
자신의 무덤을 의심하듯이
당신의 운명을
처음 보는 과일처럼 건네받게 될 것입니다
두 손으로 물을 뜨는 흉내를 내어도 좋습니다
반쪽을 옆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도 좋습니다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입니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씨의 기원에 대하여
웃고 있는 뒤통수에 관하여 말입니다
생산 라인 / 박세미
white shirt 공장
이곳이 내가 선택한 품위다
마흔 가지가 넘는 와이셔츠 공정에서 칼라와 커프스를 다는 것이 지난 이십년간 지켜온 나의 업무
숙련된 자들에게선 고르고 안정적인 소리가 난다
원단을 가르는 가위로서
박음질하는 미싱기로서
뜨거운 김을 내뿜는 다리미로서
이십 년이다
그러니 검붉은 피가 번지는 일
노릇하게 구운 냄새가 나는 일
옆자리의 동료가 사라지는 일
결코 실수가 아니다
하얀 옷감이 하얀 옷감을 오염시키는 걸 매일 목격하는
이곳에서
목과 손목을 여미는 품위로부터 나는
달아날 수가 없고
축 늘어진 와이셔츠의 소맷자락을 잡고 질질 끌며 걸었던
밤거리마다 단추가 놓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단추를 달고 실밥을 처리하고 다리미질을 마친 와이셔츠는 출고 작업에 들어간다
나의 동료는 어깨를 제일 먼저 다렸다 항상
퇴근 시간을 알리는 라디오 디제이
그리고 동료의 얼굴을 나는
모른다
Balkon* / 박세미
나의 딸 리자는 발코니를 건물의 정면에 정박해 있는 작은 배라고 한다**
오늘도 리자는 작은 배를 타고 항해중이다
등 뒤에서 다른가족들이 식사를 하든 말든,집안 청소를 하든 말든,노랫소리가 들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앞에 펼쳐진 바다만을 경험한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방금 돛을 펼친 사람처럼
어느날 리자가 말한다
사실 발코니의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빠그렇지요?
(아무것도 없다고 해야 할지, 무언가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진을 찍어보는건 어때?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를 계속 찍으면 무엇이 보일까? 그건 나도 모른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길 발코니 아래
끊어진 닻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Orhan Pamuk, Balkon, Steidl,2019.그는 2012년 12월부터 2013년 4월까지 5개월 동안 자신이사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8천5백여 장의 사진을 찍었고,그중 5백여 장을 묶어 책으로 냈다.그의 아파트 앞으로 항해하는 배가 지나가곤 했다.
**지오폰티, 건축예찬 김원 옮김, 열화당,1979.
모빌 / 박세미
그림자에 매달려
그림자처럼 살던 사람
전시를 열기로 한다
여행을 떠나기위해
몸에서 가장 먼곳부터
아프지 않을 만큼
오렸다
실에 걸었다
그림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잘라냈다
전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시장에 그림자가 가득 찼다
감정에 매달렸다
그사이
사람 모양 그림자
전시장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끊어진 실이 그림자의 그림자에 매달려 간다
가난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방* / 박세미
이 방에서 아무것도 예술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면,그 렇다
이 방에서 모든 것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역시 그렇다
이곳에는 책 한 권을 펼쳐놓을 테이블이 있고,
그림 하나를 세워두거나 걸어둘 벽이 있고,
조명이 있고 의자가 있고 작은 창고가 있고...... (이것들은 미술 수집가의 방이 아니더라도 어디에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는 매일 한권의 도록을 꺼내는 사람
그날그날의 기쁜 페이지를 펼쳐 테이블 한가운데에 두는사람
전화를 받다가 정확히 거기에 커피를 쏟는사람
한 달에 한 번 회화 작품을 프린트해 벽에 붙여두는 사람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시를 쓰는 사람
필요하다면 그것을 떼어 바닥에 깔고 짜장면을 먹는 사람
침대에 누워 시스티나성당의 천장을 바라보는 사람 이윽고 코를 고는 사람
*알바 알토, <부유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집> 『몸부림』 에로시스, 2021 변용.
꾀병 / 박세미
곧 아플 겁니다.
슬픔이 오기 전에 아플 거예요.
물에 빠진 개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침 나는 차가워졌고
조금 늦게 감기에 걸렸습니다.
아프고 나면, 정말 아플 겁니다.
스스로를 믿는 힘으로
갑자기 손이 아프면 혼나지 않았습니다.
열이 나지 않아도
따뜻한 손이 이마를 짚어주었는데
온몸이 아픈데
온몸이 그렇게
여기 있습니다.
그대로
다이빙대에 올라
검은 구멍 속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우아한 몸짓으로 뛰어내렸는데
온몸이 이렇게
여기 있습니다.
죽은 개의 얼어붙은 꼬리를
꼭 붙잡고 매달려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속는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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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병 한 번 부리지 않고 어른이 되는 경우는 드물 거예요. 스스로 꾀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내가 있고, 알면서도 혼을 내는 대신, 많이 아파? 그러면서, 이마에 얹어주는 따뜻한 손이 있을 때 꾀병은 성립하지요.
다양한 꾀병의 역사 속에서 어른이 된 나는 꾀병의 지혜를 갖게 되지요. 아픈 척을 해서 하기 싫음을 피하는 것이 어려서의 대응법이라면, 슬픔이 올 것을 예감으로 아니까, “곧 아플 겁니다./슬픔이 오기 전에 아플 거예요”, 미리 아픈 거예요. 그러니까 물에 빠진 개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침 차가워지는 엄살은, 예열이면서 선언이면서 슬픔에 마중 나가기지요.
“우아한 몸짓으로 뛰어내렸는데/온몸이 이렇게/여기 있”는 아이러니의 반복이 “아프고 나면, 정말 아플 겁니다”의 배짱을 갖게 된 사연. 이러한 비로소 어른의 탄생은 사실은 꾀병의 내력에서부터.
많이 아픈 순간에도 꾀병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조금은 견딜 만하고, 조금의 힘도 생기지요. “개의 얼어붙은 꼬리를/꼭 붙잡고 매달려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죠. 그러니까 누가 꾀병을 부리는 것 같으면, 어쩌면 매우 아파서 ‘다이빙 다이빙 그런데도 온몸은 계속 있네’의 상태인지도 모른다고 여겨주세요. 스스로에게 속는 힘을 발휘 중인 것은 스스로를 믿는 힘을 기르는 중인 것이니, 살짝 눈을 감아 주면서 우아한 꾀병에 힘을 실어주기로 해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툭, 이마에 손을 짚어준다면 더 좋고요.(이원 시인)
알비노 / 박세미 (1987~)
평생 페인트칠을 하던 그는
새하얀 복도 끝에서 내려다보곤 했다
어둑한 버스 정류장을
서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가끔
그럴 때면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이름도 병명도 없이
간호사들 사이에서 낭만주의자라고 불렸다
안과 밖의 색이 같아지는 아침이 되면
밤에 꾼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 하나를 지었다고
벽을 시멘트로 바른 집이었다고
페인트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는 코를 틀어막았고
눈은 금방 충혈되었다
그의 꿈은 모든 것이 선명했지만 유일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은 집의 주소였다
그럴 때마다 다시 복도 끝을 서성거렸다
유난히 로비가 시끄럽던 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사람들은 그 집을 상상했다
모두가 다르게 벽을 색칠하고
익숙하게 냄새를 맡았다
⸺시집 『내가 나일 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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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노’는 백색증으로도 불리는 유전병의 일종이다. 시인은 알비노를 두고 평생 페인트칠을 하던 그를 떠올린다. 이 시를 읽으면, 새하얀 복도 끝에 서서 어둑한 버스정류장을 내려다보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칠 것만 같다. 그렇게 안과 밖의 색이 같아지는 아침이 올 것만 같다. 이른 시간부터 동료 시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어젯밤 쫓기는 꿈을 꿨다고. 그의 꿈속에 나왔던 가파른 계단을 상상했다. 아마 상상과는 전혀 다른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처지는 너무 익숙해서 다 안다고 착각한다.( 이소연 시인)
잠의 마천루 / 박세미
손잡이를 쥐어본 적 없이
입장
빌딩 꼭대기에 옷이 걸린 채 매달려 있으며
곧 추락할 것이며
곧 바닥이 나타나리라는 잠의 거짓말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며
세차게 수직으로 흐르는 유리창에 좀처럼 손이 닿지 않을 것이며
그러나 곧 양손에 커다란 이불이 펼쳐질 것이며
다리를 흔들어 보게 될 것이며
바닥이 없는 이 도시에서
발바닥에 눈을 달고
떨어지는 눈물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정수리에 툭 떨어진 한 방울에
위를 올려다보면
맑다
맑아서
위와 아래로만 생성되는 골목
다리가 길어지다가
이불을 놓친다
사치 / 박세미
몬스테라의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온다
흰 부분에 대한 직감
말린 새순이 조금씩 펼쳐질 때마다 선명해진다
아름답게
보인다…는 느낌은
나와 몬스테라
둘 중 누구의 유전적 형질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나의 오른쪽 수정체에 드리워진 흰 막
몬스테라의 무늬와 겹쳐질 때
강력한 초점이 되어
타오른다
비극의 위치 / 박세미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움직입니까
태풍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휘돕니까
숲속 오후 기분 좋은 토끼처럼 뛰어다닙니까
아니면 언제나 눈꺼풀처럼 깜박입니까
당신이 내게 다다르는 경로를 짐작하지 못하므로
이불을 펄럭이고
형광등을 켜고
노트를 펴고
꾸벅꾸벅 좁니다
손에 든 펜이
당신의 좌표를 점치는 동안
오늘은 먼지를 잔뜩 마셨습니다
먼지의 성분을 헤아려보면서……
당신이 포함되었다는 확신
폐에 파고든 당신을 영원히 배출할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깨끗하게 씻긴 폐를 양날개 삼아 날아오르는
꿈을 꿉니다
돌연
날개가 거침없이 부풀어오를 때
당신과 동시에
터지길 나는 바랍니다
파사드 / 박세미
벽에 문이 그려져 있다
손잡이가 그려져 있다
문을 열려고 하면 문은 열릴 것이다
믿으면서
벽 앞에 섭니다
거울 내부에서 당신이 나를 향해 걸어올 때
뒤돌아보지 않아야 하므로
『오늘 사회 발코니』 (문학과지성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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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그는 현존하는 작가 중에서 가치 높은 작품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작업한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회화는 2018년 열린 경매에서 무려 1000억원이 넘는 금액에 거래된 적도 있습니다. 그러던 그가 몇 해 전 태블릿PC를 활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한 기자는 호크니에게 왜 전자기기로 그림을 그리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호크니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늘 문에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참고로 오늘 시의 제목인 파사드는 건축물의 정면을 칭하는 말입니다. 새로 문을 그리기에도 혹은 이 문을 열기에도 좋을 시기입니다.(박준 시인)
뒤로 걷는 사람 / 박세미
그에게 세상은 한 발자국씩 넓어지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걸을 때
옆에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한 발자국, 사과나무는 불타며
두 발자국, 사과나무는 검게 식으며
세 발자국, 사과나무는 썩은 사과 한 알이 되며
네 발자국,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에 맴돌 때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
그는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이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
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
달려오던 점은 그의 코앞에서 최대화가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을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를 툭 치고는 그의 바로 옆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혔다
썩은 사과들이 눈밭에 우르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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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뒤를 보라 한다 / 김동원
우리는 대개 앞으로 걷는다. 그런데 여기 「뒤로 걷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박세미의 시 속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는 왜 뒤로 걷는 것일까. 뒤로 걸으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시가 답할 것이다.
시는 첫 구절을 통해 뒤로 걸으면 세상을 보는 시각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가를 알려준다. 뒤로 걸으면 눈앞의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그 결과 세상이 “한 발자국씩 넓어지”게 된다. 세상을 폭넓게 볼 수 있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 얘기는 반대로 우리가 앞으로 걸을 때는 세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지만 대신 세상을 보는 시각의 폭이 좁아진다는 점을 시사한다.
시각의 폭이 확대된다고 하면 우리는 그때의 폭을 좌우로 생각하게 된다. 즉 넓게 본다는 것은 시각이 좌우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세미에게 있어 그 폭은 특이하게도 좌우가 아니라 앞뒤로 확대된다. 시인은 이를 ‘이를테면’이라는 가정의 부사를 내세운 뒤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예에 따르면 그가 뒤로 걸을 때 옆으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 사과나무의 양상이 걸음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뒤로 옮길 때마다 크게 달라진다. 첫 발자국을 옮겼을 때는 불타는 사과나무가 보이고, 두 발자국에선 그 사과나무가 검게 식고 있으며, 세 발자국째에선 사과나무가 썩은 사과 한 알로 축소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네 발자국째에선 이 놀라운 일이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놀라운 일인데도 그 놀라운 일이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를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뒤편에서 일어나는 일로 생각했다. 뒤로 걷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세상의 이면을 마주하는 일이다. 만약 뒤로 걷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냥 사과나무를 지나쳐 앞으로 갔을 것이며 사과나무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대개 그렇게 산다. 세상의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하나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나친 사과나무가 불타서 검게 변하고 썩은 사과가 달리고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산다. 아니 정확히는 알면서도 외면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이면을 보고 나면 그 이면의 세상은 우리의 행동을 요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쉽지가 않다. 행동하려면 우리의 삶을 걸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외면한다. 박세미는 그것을 세상의 이면에 눈을 감는 것으로 보고 있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에 맴돌 때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는 구절이 바로 그때의 우리들 모습이다. 사과 한 알이 작은 것일 수도 있다는 점도 우리가 세상의 이면을 외면할 수 있는 이유로 작동한다. 시인은 그런 것에 눈감는 것을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이라 정한다. 우리들이 이렇듯 세상의 이면을 보고도 행동에 나서지 않을 때면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교묘한 논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뒤로 걸으면서 썩은 사과를 보았을 때도 대개는 그 썩은 사과를 사과나무 탓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썩은 사과는 우리들의 탓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사과나무의 썩은 사과는 정말 사과나무의 탓일까. 혹시 그것이 앞만 보고 뒤를 보지 않는 우리들 모두가 불러온 것은 아닐까. 박세미는 그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의문은 “눈이 오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을 통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점으로 보였다는 사실은 그 의문이 처음에는 아주 작아서 우리들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혔다. 하필 그날은 눈이 오던 날이었다. 눈은 세상을 덮어버린다. 그러니 그날이 세상의 이면에서 마주한 사실들을 덮어버리고 외면하려 했던 마음이 컸던 날이었을 수 있다.
시인은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 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고 했다. 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리가 있고 손이 있으며 그에게 웃음까지 보였으니 그 점은 사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아울러 그는 뒤로 걷고 있었지만 점인 줄 알았던 그는 앞으로 걷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를 향해 걷고 있었으니 보행의 속도는 뒤로 걷는 그보다 더 빨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뒤로 걷는 걸음은 느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이 그냥 일반적인 걸음걸이였을 수도 있다.
이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뒤로 걷는다는 것이 거꾸로 걷는다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던 사람이 앞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뒤로 걷고 있는 그 또한 사실은 앞으로 걷던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뒤로 걷는다는 것은 거꾸로 걷는 것이 아니라 뒤를 보며 걷는다는 것이다. 뒤로 걷고 있어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 점은 그의 앞에 이르고 만다. 시인은 “그는 그것이 자신을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를 툭 치고는 그의 바로 옆으로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즉 앞으로 마주한 점의 느낌은 그를 안아줄 것만 같았지만 점은 그 느낌을 배신한다.
시인은 뒤로 걷던 그가 “뒤를 돌아보는 대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혔다”고 말하고 있다. 뒤로 걷는 사람이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쳐간 사람을 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앞의 방향이다. 대신 그는 뒤로 걷던 자신의 방향을 그대로 지킨다. 어떻게 되었을까. 점으로 시작하여 그에게 다가온 사람의 뒤가 보였을 것이다. 앞으로 걸어간 사람의 뒤에선 “썩은 사과들이 눈밭에 우르르 쏟아졌다”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다. 말하자면 썩은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간 사람이 남긴 것이었다. 앞만 보고 달리며 사람을 안아주지 않고 그의 곁을 지나친 사람이 사과를 썩게 한 것이다.
박세미의 시 「뒤로 걷는 사람」은 비유를 통해 세상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보여준다. 처음에 시 속에서 썩은 사과는 사과나무의 탓이었다. 그러나 시는 이를 앞을 보며 걸어간 사람의 책임으로 뒤집는다. 이렇게 시각이 뒤집히고 나면 뒤로 걷는 사람 또한 걷는 방향이 앞으로 걸어간 사람과 같다는 측면에서 썩은 사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앞으로 걸어간 사람의 뒤는 사실은 우리 모두의 뒤이다.
비유가 시의 특징이긴 하지만 지유는 동시에 모호한 측면이 있다. 가령 썩은 사과는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연하질 않다. 시의 놀라운 점은 그 비유가 비유의 모호함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로 건너와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현실적 답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박세미의 시도 그런 경우의 좋은 예이다.
사실 내가 이 시를 읽으며 곧바로 떠올린 것은 박정희의 군부독재 시절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 시절은 세계가 기적이라 칭한 놀라운 경제 성장의 시기이다. 박정희는 그 성장을 이룬 영웅이다. 시는 그러한 인식이 앞만 보고 걸어간 사람들의 눈에나 그런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 시절의 이면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박정희 시대는 정권의 안위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처단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군사독재 시절에 불과하다. 뒤롤 걷는 걸음은 그 시대의 인권 유린에 대해 눈뜨게 한다. 그 시대의 썩은 사과이다.
박정희 독재 정권의 인권유린을 말해주는 간첩 조작 사건의 하나로 인혁당 사건이 있다.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박정희 군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가 정권을 지키기 위해 고문을 통해 조작한 사건이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나고 18시간 만에 8명을 사형에 처해 사법살인이라 불리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애쓰다 결국 한국에서 추방되었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박정희 정권을 가리켜 악마의 정권이라 칭했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경제 성장이라는 박정희 시대의 선물은 악마의 선물이 된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아무리 달콤하고 풍요롭다 해도 그것이 악마의 선물이라면 어느 누가 그에 선뜻 손을 내밀 수 있겠는가. 시는 박정희의 시대에 독재에 맞서 싸우지 못했다고 해도 최소한 경제 성장을 앞세워 박정희를 찬양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시대의 인권 유린은 박정희만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앞만 보고 달려간 우리들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이 시의 전언이다. 눈밭에 우르르 쏟아진 썩은 사과에 대한 외면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멀리 박정희 시대까지 거슬러 오를 필요도 없다. 아주 가까이서 이 시를 직접 살아보는 것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 뒤로 걸어보는 것이다. 강남역 사거리로 가면 그러한 경험이 가능하다. 그곳엔 삼성전자가 있다. 앞으로 걷는 사람에게 삼성은 그들의 주장대로 세계 초일류 기업이다. 그러나 삼성으로부터 뒤로 걸어 강남역에 이르면 우리는 사거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철탑의 꼭대기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김용희이다. 삼성의 부당해고에 맞서 2019년 6월에 철탑에 올라 농성을 시작했다. 몸도 제대로 펼 수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2020년 1월이면 벌써 그의 농성이 8개월째에 이르게 된다. 그는 삼성에 노조를 설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어 삼성에서 쫓겨났다. 노조라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노동탄압의 민낯이 삼성의 뒤편에 놓여있다. 세상의 뒤편을 마주했을 때 그 세상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겐 철탑에 올라 싸우는 혹독한 것일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작은 것으로도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 그 작은 것은 김용희의 복직을 외치며 이루어지는 그곳에서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마음을 나누어주는 일이다.
시간을 맞춰 목요일날 명동을 찾으면 우리는 또한 시를 살아볼 수 있다. 그곳엔 세종호텔이 있다. 겉으로 보면 우리가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은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곳에 자리한 고급 호텔이다. 그러나 목요일엔 그 앞에서 뒤로 걸음하면 해고 노동자들의 목요집회를 만난다. 호텔측의 부당 전보에 항의하여 시작된 목요집회는 2012년에 시작되어 9년째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된다. 노동자들의 싸움은 힘겨운 것이지만 그것을 목도한 사람은 그보다 훨씬 쉽게 실천에 나설 수 있다. 바로 그 집회에 참가하여 노동자들의 숫자에 머릿수 하나를 보태는 것이 그것이다. 시는 우리가 단순히 시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시를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시는 비유로 이루어져 있으나 비유에 머물지 않는다. 시는 우리의 현실, 그것도 아주 구체적 현실로 건너와선 우리에게 뒤를 보라 한다. 그것도 뒤로 걸어서 뒤를 보라 한다. 단순히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는 앞이 뒤를 내보이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앞은 그만큼 교묘하게 뒤를 은폐하고 있다. 그 은폐된 뒤에 눈뜰 때 우리는 세상의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뒤로 걷는다는 것은 후퇴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전진이다. 그때의 우리는 천천히 걸어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시대에 우리가 책임을 지는 그 걸음에 더 이상의 썩은 사과는 없을 것이다.
⸺계간 《모:든시》 2020년 봄호
박세미의 「부정적 유산」해설 / 양경언
남영동 '밀실'의 발소리와 경련을 시는 겪는다
박세미의 두 번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에 수록된 몇몇 시편은 이 세상에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시선을 회수하는지 촘촘하게 분절하여 기록한다. 이를테면 ‘순환세계’에서 시인은 새로운 아파트를 들이고자 원래 있던 80년대식 주공아파트를 허물어뜨린 자리에 파인 “협곡”을 향해 “두 눈동자를” “내던”진다. 그러면 “눈동자”가 “덕지덕지 붙어” 그곳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의 사연을 “오늘”의 이름으로 지우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보도블록 언덕”이나 “벚나무의 검은 가지”, “자전거 보관대” 주위에서 놀던 아이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시는 거기에 살았던 “아이”가 “잃어버”린 것이기도 할 “눈동자”가 끝내 감기지 않는다는 얘기를 마저 꺼낸다. 압도적인 재개발의 현장을 만드는 “협곡 위 가장 구체적인 두 손”을 의식하는 자리에 ‘그것’이 내내 남아 있을 거라고.
시란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다양하게 실험될 수 있는지 사물의 언어를 설계함으로써 보여주는 장르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세미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의 확장적인 시도 그 자체보다, 사물의 자리로 회수된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에 대해, 그것이 지금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가늠해보고 싶어진다.
부정적 유산 / 박세미
1976년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받은 설계 의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을 것이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 눈에 띄지 않을 것.
눈을 가리면 모든 것이 두려울 것.
이곳에서는 거짓이 진실이 될 것.
그리고 건축가는 홀로 그 목록을 오랫동안 읽다가 마지막 문장을 추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은 완벽할 것.
건축은 완벽에 가깝게……눈이 가려진 채 들어온 자들은 살아서, 혹은 죽어서 나갈 때까지 그 실체를 몰랐으며, 눈을 당당히 뜨고 다니던 자들은 건축이 제공하는 미와 쾌적함을 알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건축가는 죽었다.
또 그로부터 30년 후 촛불이 서울의 곳곳을 밝혔다.
건축물의 정치적 이용 가치는 시대를 막론하고 입증된다
그것과 상관없이, 2020년에 우리는 겪는 것이다.
도면 위 원형 계단 그리는 소리와 몇 층인지도 모른 채 끌려 올라가는 자들의 발소리가 겹치고, 좁고 깊은 창문으로 뚫고 들어온 실빛에 상처 입은 자들의 경련이 벽을 타고 내려오며, 밀실의 용도와 치장 벽돌 쌓기의 무관함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 2023
시의 원문에는 “건축물의 정치적 이용 가치는 시대를 막론하고 입증된다”는 구절이 ‘민주와 인권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집, 2019)에서 인용해왔다는 안내가 각주로 달려 있거니와, 이 시는 건축가가 의뢰받은 목적에 부합한 건축물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해 말한다. 혹은 이렇게 얘기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세상에 위압적인 힘을 내보이기 위해 ‘말 없는’ 건축물로 많은 이들의 시선을 회수해갔던 정치세력이 있었노라 ‘말하는’ 건축물이 우리 역사에 분명히 있음을 보여준다고. 2024년의 우리는 안다, 기술적인 “완벽”에 이르기 위해 활용됐을 “치장 벽돌 쌓기”도 밀실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가리기 위한 용도였을 뿐임을. 저 건축물 곳곳에 내내 남아 있을 “발소리”와 “경련”을 역사로부터 등 돌리지 않으려는 몸짓으로 받아들일 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 실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 또한 제대로 세울 수 있다고.
양경언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