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숟가락과 젓가락, 냄비
그리고 남루한 밤을 덮을 나이롱 이불에다가
밥상을 겸한 앉은뱅이 책상으로
학창시절의 거친 시간을 건넜다.
자크가 기역자로 구부러지며 열리고 닫히는
간이 비닐 농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그런 호사는 자취 생활의 예외였고,
곧 어딘가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돌 같은 것이 자취라고 믿으며
굽이치는 세월의 강을 첨벙첨벙 건넜다.
자취생활을 벗어나면 무언가
자취와는 다른 생활이 기다리리라는 기대가
졸업장 모서리를 슬쩍 눌러왔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조금씩 불어나는 이삿짐을 싸는 동안
긁힌 냄비가 화려한 전기밥솥으로 바뀌고
앉은뱅이 책상이 책꽂이를 겸한 호마이카 책상으로 바뀌고
연탄불이 빵까지 굽는 오븐으로 바뀌었을 뿐
신분 상승된 입맛을 향해 밥이 익어 가는 속도와
도금된 숟가락으로 여는 아침은
삶이 여전히 자취의 연장임을 깨닫게 한다.
살아가는 일이 결국
우리가 떠난 자리에 불땐 자국을 남기며
시간의 능선 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식구가 늘어남에 따라
냄비의 크기가 좀 더 커지고
밥상에 오르는 반찬의 가짓수가 다양해지고
어쩌다 절친한 벗이라도 찾아 오는 날이면
숟가락의 숫자가 좀 더 많아질 뿐
우리는 여전히 자취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취가 끝난 다음에 도착할 어떤 곳을 떠올리면서.
- 시집 『정신의 뼈』(시선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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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읽어 주는 라디오에서 들었다.
내 부모님 세대에는 숟가락, 젓가락만 들고
새 살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거기에 곤로까지 갖추면 사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요즘은 그런 풍토가 자취를 감추었다.
집과 생활권이 양재동에 있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차례 강조했던 사람
주로 강남에서 논다는 것을 이야기 흐름과 상관없이 집어 넣던 사람
고향인 이 곳, 대구에서도 사는 곳을 수준으로 생각하는,
무언의 알력이 우스울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들은 비버리힐즈인을 만나면 안 된다. 혼란스러워질테니까.
직장 사람들조차 둘러 앉아서 아파트 이야기를 했던 2000년대 후반, 미친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소유의 아파트가 있는 사람은 인생의 대부분을 성공한 듯한 안도감을 가졌던,
없는 사람은 무리한 대출을 해서라도 하나 장만해야만 할 것 같았던,
재미없지만, 불과 얼마되지 않은 이야기
쇠재질의 접이식 상
지퍼가 기역자로 구부러지며 열리고 닫히는 비닐 농은
연탄불 피우던 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직장 가까운 곳에서 간소하게 살 때,
위해 준답시고 "자취하는 사람은......" 어쩌고 하는 말을 들을 때
나를 후지게 보는 것 같아서
구지 "자취가 아니라 독신이다"고 나를 '도금'했었다.
잠시 공간과 물건을 활용하며
나 자신의 삶은 내가 책임져야하는,
삶은 철저한 자취인 걸!
정진명 시인의 시를 보았다면
자취이다 아니다
구지 설명하지 않았을 걸.
이승에서의 자취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나는 자취생이어야 한다.
첫댓글 이제는 있고 없고가 아니라 즐거이 사는냐 아니냐의 문제거든요.
나도 집 치우고 싶어요.
♪인생은 나그네 길~사랑으로 왔나가~사~랑만!남는거지♪
볏짚에서 연탄으로 연탄에서 석유곤로...
그리고 가스렌지...불땐자리 하나 남겨려
자취하나 남기려 살아온 생~추운 날
마음에 장작불을 지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