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안식을 얻다.
김 춘 자
셋째 딸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발령이 나기 전에 마음에 긴장도 풀기위해 북해도 여행을 함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개조해 만든 오랜 역사가 숨 쉬는 호텔에 투숙했다. 경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품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딸아이와 손을 잡고 아침 산책길에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맑은 물이 솟아올랐다.
주위에는 개 두 마리가 짖지도 않고 어슬렁거린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인 없는 들개인 것 같았다. 개들도 산책을 하나 보다고 생각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가이드에게 원천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깜짝 놀란다. 이곳에는 여우와 늑대가 출몰한다고 했다. 아마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 했다. 만약 그것이 여우나 늑대라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오금이 저려 오도 가도 못 했을 것이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는 것 같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산에서 내렸다. 부산은 학창시절 추억이 있는 곳이다. 수학여행을 해운대로 갔었다. 파도가 바위와 부딪쳐 포말을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모습을 보며 내가 포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영도를 지나 태종대로 향했다. 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한가해 보인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 모습이 떠오른다.
조용히 휴식하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바닷가에 세컨 하우스가 한 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다 전망을 바라볼 수 있는 아파트를 찾아다녔다.
처음 소개받은 매물은 수리가 끝나 손을 볼 데가 없는 깨끗한 내부가 마음을 잡았다. 한 면은 산이 그림처럼 보이고 다른 면은 거제도가 보였다. 쪽빛 바다에 수심이 낮아 해수욕하기에도 좋아 보였다.
두 번째 매물로 들른 곳은 도배조차 하지 않은 내부에 조금 실망했다. 해안 도로가 아파트를 끼고 도는 것은 장점으로 보였다. 베란다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니 대마도라고 했다. 일본 땅을 아파트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새로운 느낌이었다. 다른 쪽으로 보이는 곳이 거제도라고 했다. 수리비야 좀 들겠지만, 후자로 계약을 했다.
구조 변경 업체에 견적을 받고 해운대에 사는 동서에게 살펴봐 주기를 부탁했다.
지금은 휴가 때가 되면 아이들이 돌려가면서 쉬러 간다. 우리도 가끔 내려가서 거실에 누워 하늘에 별도 보고 달도 본다. 정박한 배들이 불을 밝히면 불야성이 된다. 바닷속이 면경처럼 맑은 해안 도로를 산책할 때면 가슴에 쌓인 묵은 체증이 실타래처럼 풀어진다. 바다 냄새도 엄마 젖내 음처럼 살갑다. 바위들은 파도에 깎여서 모난 곳이 없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으면 부드러운 방석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둘레를 살펴보니 해녀들이 아침 일찍부터 물질하고 올라오며 숨을 내뱉는 소리다. 가까이 다가가니 전복, 해삼, 멍게를 쏟아 놓는다.
전복 회를 주문했다. 회가 나오기 전에 해녀들이 먹는 아침 식사라며 우럭을 넣어 끓인 미역국을 내준다. 해녀들만 먹을 수 있는 특식이란다. 파도가 촬좌르르 가만가만히 노래를 부른다.
아파트로 돌아와 거실에 누웠다. 태양이 바다에 놀러 오니 금빛 은빛으로 반짝인다. 오늘이 12월 그믐이니 내일 새벽 무진년 새해의 해맞이를 아파트에서 할 수 있다.
다음날 새벽에 우리는 베란다에 이불을 둘둘 말고 나란히 앉았다. 바닷물이 장밋빛으로 퍼져나갔다. 바닷속에서 나온 태양이 장관을 이룬다. 막내를 선두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 아파트에는 액자를 걸지 않았다. 바라보이는 풍경이 대형 액자다. 해 뜨는 새벽도 노을이 지는 바다도 아름답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비행한다. 새우깡을 허공에 던지면 날쌘 제비처럼 부리를 벌려 새우깡을 낚아챈다. 재미있고 신기하여 던지다 보면 갈매기에게 봉지를 탈탈 털어 주게 된다.
바다는 어머니의 품속 같다. 무한대의 바다, 무한대의 자애, 가만히 눈 감으니 나는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기어 포근히 잠들고 있는 듯 한 착각을 느끼며 어렴 프시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이 관대의 정(情), 달콤한 맛은 어머니의 품이 아니면 어디서 맛보랴.
큰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넓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는 시원한 바다를 보라고 하였다.
뭍과 바다가 하나 되는 해변을 우리는 손을 맞잡고 다시 걷는다.
청주의 자랑 무심천
거울처럼 맑은 물이 동에서 서로 청주 중심을 가르며 흐르는 무심천. 유유히 흐르는 물결은 바위를 만나면 몸을 사려 휘어져 나가기도 하고 넓은 모래사장을 만나면 마냥 널브러지기도 한다. 소년들이 검정고무신을 벗어들고 피라미 잡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동심을 자아내던 평화로운 물결. 하늘은 높고 잔물결이 숨소리처럼 곱다. 평화로운 모습이 내면에 오욕을 잠재운다. 50여년 전만 해도 홍수로 제방 둑이 넘쳐 남주동과 석교동 일대까지 큰 피해를 줬었다. 대청댐이 만들어지면서 일대 홍수피해를 보던 상인들은 홍수 걱정 없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근래 들어서는 바닥에 쌓인 흙을 양옆으로 거둬내고 하상도로를 개설하여, 시내로 진입하는 차들과 외곽으로 가는 차들을 분산시켜 원활한 교통망을 구축하였다.
낭성면 머구니 고개를 시작으로 가덕면 한계리 내암리 일대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청주 중심지를 통과하여 미호천과 합류하고 금강을 거쳐 서해에 이른다고 한다. 청주시민들의 넉넉한 마음과 정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봄이면 노란 개나리꽃이 무심천에 피어 황금 물결을 이루어 그 아름다움에 가던 길을 멈추게 된다. 어린 딸과 손잡고 걸었던 추억을 상기시키며 천천히 걸었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개나리꽃 속에 서 있는 딸아이는 나뭇가지에 걸린 달님처럼 얼굴만 동동 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한가로웠다.
개나리 꽃잎이 지기 시작하면 벚꽃이 봉오리를 매달고 싱그러움을 뽐낸다. 무심천을 끼고 양쪽 제방 둑에는 봉오리를 열어 꽃들이 잔치한다.
봉곳한 벚꽃 봉오리가 사나흘 후면 활짝 열리겠다. 천변을 가랑비와 봄바람이 함께 지나간다. 피기도 전인 봉우리가 떨어질까 조바심이 인다.
마음을 쉬고 육체의 피로를 풀기 위해 사람들과 2m 간격을 띄우며 천변을 천천히 걸었다. 작년부터 역병이 창궐한 탓에 무심천 풍경도 달라졌다. 가끔 눈만 반짝거리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과 눈인사라도 나누며 지나가면 좋으련만 서로를 피하며 걷는다.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효자 효부도 있고 정답게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는 젊은 연인도 있다. 등이 굽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있다. 핏기없는 얼굴 풀어진 눈으로 벚꽃을 올려다본다. 부부의 연이 무엇인가? 혼자 몸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데도 꽃구경을 시켜 드리는 부부애에 가슴이 뭉클하다. 할머니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꽃잎을 받는다. 속히 쾌차하셔서 나란히 손잡고 걷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2년 전만 해도 시민들은 생기가 넘쳐나고 멀쩡했던 무심천의 풍경이 지금은 많이 변해있다. 차들이 긴 꼬리를 물었다. 차창을 통해 벚꽃 구경을 하는 시민들이다. 얼마다 답답한 일상인가. 마스크가 필수인 시간을 살고 있다. 숨통을 열고 싶어서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다.
청주시 공무원들이 노란색 상의를 입고 거리 두기 캠페인을 하고 있다. 시민들 모두가 질병관리본부의 지침을 따라 주면 좋겠다. 휴일도 반납하고 봉사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봄이면 온통 무심천 벗꽃 잔치가 벌어지고, 가을이면 길길이 우거진 은 머리 갈대밭에서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봄꽃에 취한 날 어제 런 듯 삼삼한데, 오늘날 갈대꽃 머리에 이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