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특집
추사 생각 외 2편
전종호
멀리 대정大靜에 와서 고을을 돌아보고
고요의 깊이와 크기를 가늠해 보니
이름은 멋진 은유이되 직설은
한갓지고 후미진 땅이란 뜻이렷다
만 리 세상 끝 고요의 골방에 묶여
뼈저리게 고립된 추사를 생각하노니
바다가 검고 물결이 사나워질수록
영혼의 고독은 불같이 깊어 갔을 것이고
수선화 노랑꽃 청초淸楚를 사랑하여
연행 길에 시를 지어 귀하게 받들던 꽃들이
돌담 아래 지천으로 피어난 천덕꾸러기
제주 수선화를 보며 울고 또 울었으리라
힘주어 거친 먹 갈아 열 개의 벼루를 뚫고
일천 자루의 붓을 꺾어 명문을 썼어도
울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글씨 한 점으로는
삭힐 수 없는 그리움을 밀어내지 못하고
세한歲寒의 늘푸른나무를 노래했으나
항상 알 수 없는 사단에 휩쓸려 일이 꼬이고
정한 길대로 갈 수 없는 삶을 어쩌지 못하여
추상과 파격의 곰솔나무 그림 몇 점으로도
섬 바닥에서 자신을 구할 수는 없었으리라
경서經書에는 없는 삶을 스스로 이끌 수 없어
모진 바람 부는 모슬포 바닷가 유배지에서
이름 모를 자잘한 사람과 꽃풀들을 벗하며
결코 잠잠할 수 없는 마음과 싸우고 있으니
어쩌다 바다가 숨죽이는 깊은 밤에도
추사의 고요는 결국 끝에 닿지 못했으리라
바람을 찍었다
1
하루종일 붙박여서 바람을 찍었다
먼 산의 바람꽃이 일어나 어디로 몰려가는지
바람의 파도는 어디까지 진군해서 소멸하는지
오름 아래 바람이 오름 정상의 구름을 만나
굼부리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흩어지는지
추운 날 더운 날 쓸쓸한 날 배고픈 날
삼백예순다섯 날 언제나 걸어 다니며
찍고 버리고 울고 웃으며 찍고 또 찍었다
오름의 곡선 관능 너머 흔들리는 억새 바다
바람을 맞는 억새들의 저항과 달관을
바람과 나무들이 주고받는 흥겨운 수작을
맹렬한 바람에 흔들리는 꽃풀들의 자잘한 축제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굴을 바꾸는
속을 알 수 없는 바다와
마라도 아이들의 숨은 꿈을 찍고 또 찍었다
2
제목을 부치지 않는 사진에는
평생을 바람을 찍으러 다닌
떠돌이 사진가의 눈물이 번져 있다
탐욕에 곧 사라질 것들과 이미 떠난
사람들의 등짝에 박힌 슬픔이 찍혀있다
결코 세상을 믿지 않는 산간의 늙은이들과
대책 없이 늙어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와
길 잃고 헤매는 짐승들의 발자국에
쏟아지는 햇살의 외로움이 박혀 있다
한갓 이름 모를 들꽃도 허리 굽히는 자에게만
향기를 베푸는 법이라고 믿는 그에게
하늘색과 바다빛과 산색은 고정관념일 뿐
사진 속에서 하늘과 바다와 산은
시시각각 틈 사이로 특별하게 빛났고
언제 어디서나 같은 모양이라도
제주의 해오름과 해거름은
한 번도 같은 빛 같은 색깔일 때가 없었다
3
여행자들은 쉽게 위로를 얻고 떠나지만
몇 푼의 돈을 받고 한 꾸러미의 고통을
받아드는 것은 언제나 섬사람들이었으나
홀가분과 평안은 항상 없는 자들의 몫이어서
가끔 가난과 불편이 삶에 발목을 걸어도
떠나는 사람이나 잠시 들른 사람은
정작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사진에 남아 평화의 빛으로 타고 있다
미친놈처럼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다니고
며칠씩 바람 앞에 주저앉아 정신줄 놓은
외로움과 아름다움의 탐닉은
삽시간의 황홀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섬에 미쳐 사는 것이 기막히고
필름을 위해 밥 먹듯 굶는 것이 기막히고
뽑아낸 사진에 제풀에 놀라
명줄을 놓아버린 김영갑은
차마 눕히지 못하는 억새밭 바람길에서
지금도 허허 바람으로 웃고 있었다
와흘 본향당
서방이 시앗을 보았습니다
시집간 딸이 또 딸을 낳았습니다
웬수 같던 서방이 바다에 나갔다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서방도 없는 시집살이가 너무 고됩니다
노망난 시어머니는 죽지도 않습니다
눈물과 분노가 켜켜이 쌓여서
썩어가는 시커먼 속내를 싸 들고
여인들의 신 본향당 할망께 와서 빌고
주먹으로 탕탕 가슴을 치며 또 빌었습니다
속을 열어 털어낼 것들이 많을수록
하얀 소지素紙를 수십 장 가슴에 대고
울며불며 속엣것을 다 토해내면
눈물과 하소연이 흠뻑 땅을 적시고
눈물 배 누런 소지를 가지에 걸어 두면
할망이 읽고 하나하나
한 많은 이 년의 소원을 풀어 줍니다
울고 빌어 속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당나무 앞에 촛불을 밝히거나
물색천을 나무에 걸어 두거나
색동 치마저고리나 쌀 한 말 바치오니
이 갈가리 찢어진 심정을 안아 주옵소서
이렛당* 폭낭** 숲이
한숨과 눈물의 바다로 넘실거립니다.
* 이렛당, 이렛날마다 열리는 당집
** 폭낭, 팽나무의 제주방언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퇴직했다. 37년 6개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세월이다. 사직이 아니라 정년임에도 불구하고 염치도 없이 내내 도연명을 생각했다. 부당하고 무례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노래하던 귀거래사의 심정을 상상했다. “돌아가자! (…)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 간다. (…) 지나는 길손에게 고향 가는 길을 물을 때 새벽녘 희미한 빛마저 한스럽구나. (…) 구름은 무심히 산골짝을 돌아나가고, 날다 지친 저 새는 둥지로 돌아온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지려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 부여잡고 서성이노라. (…) 날씨가 좋으면 혼자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 세워 두고 김매고 북돋우기도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짓는다.”
퇴직하고 제주에 와서 몇 군데를 둘러보며 내내 물러남과 밀려남을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과, 퇴로를 끊고 돌아가지 않는 사람과, 바다뿐 아니라 운명에 둘러싸여 섬을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유배지 대정마을에 갔다. 대정大靜이라는 고을 이름이 깨달음의 큰 고요가 아니라 멀리 세상 끝까지 쫓겨난 자들의 한적한 곳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정향교와 곰솔나무 몇 그루는 예술가의 혼에 투영되어 세한도라는 이름으로 남았고, 세한도의 쓸쓸한 집 한 채는 추사관의 형상으로 나타났지만, 예나 지금이나 죄는 법과 도덕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힘겨루기에서 결정되는 것임을 다시 생각한다. 돌아갈 길 없이 갇힌 추사의 사무치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생각해 본다. 외국이나 다름없는 섬의 지리적 조건이나 풍물, 문화적 고립, 조악한 음식 등을 참아내는 방편은 가족의 편지 한 장이었을 텐데, 한 달이나 지나서야 알게 된 아내의 죽음에 부친 기막힌 편지 한 대목에 울음이 목울대에 걸린다. “아아, 나는 형구가 앞에 있거나 유배지로 갈 때, 큰 바다가 뒤를 따를 적에도 일찍이 내 마음이 이렇게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려 해도 그럴 수가 없으니 이 어인 까닭인지요? 아아, 무릇 사람이 다 죽어갈망정 유독 당신만은 죽지 말아야 했습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기에 이토록 지극한 슬픔을 머금고 더 없는 원한을 품습니다. 그래서 장차 뿜으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공자의 마음이라도 뒤흔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사는 55세에 와서 8년을 넘게 섬에서 살다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다.
홀려서 이 섬에 들어와 자신을 유폐시킨 사람이 있었다. 바람을 찍은 사람 김영갑. 여기 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두모악 갤러리에 들러 그의 사진들을 보았다. 익숙한 제주의 모습들이 다른 얼굴로 걸려 있었다. 사진의 색들은 내가 아는 자연의 색들이 아니었다. 오름에 서면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그가 삽시간의 황홀을 포착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포인트에서 서서 잡아낸 것들이었다. 갤러리는 온통 오름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시사철 매 순간을 평생을 두고 찍었다는 용눈이 오름은 압권이었다. 돌담과 밭담과 산담 옆에 서 있는 나무들은 바람을 맞고 있었다. 흔들리거나 꺾여져 있거나 누워서 일어나는 모습들이 잡혀있다. 예술로서의 사진을 잘 알지 못하는 내게 갤러리에서의 체험은 신비한 것이었다. 그의 책을 읽었다. 그가 중학생일 때 월남전에 갔다 온 형이 사준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경험들이 그를 사진의 세계에 들어서게 했고, 제주를 몇 번 드나들던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제주에 흘러 들어와 정착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쌀 대신 필름과 인화지를 샀다. 중산간을 헤매던 그는 수상한 자로 오인되어 경찰서에 끌려가기가 일쑤였고, 육지 것이어서 방 한 칸을 빌리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제주가 그를 미치게 했다. 문학평론가 안성수는 “김영갑은 제주의 산과 바다를 바람처럼 떠도는 광인이었다. 우행호시라고 했던가. 우직한 소처럼 기다리다가 호랑이의 눈초리로 찰나의 시간을 낚아챈다. 기다림이 그리움의 시공을 뛰어넘고 굶주린 영혼이 피사체와 하나가 되는 순간 뜨거운 황홀을 낳는다. 무아지경에서 돌려받는 이 한 방울의 눈물을 위해 그는 몰입의 경지까지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였다”고 했다. 루게릭병을 5년 동안 앓으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그는 사진 대신 두모악 갤러리를 남겨두고 떠났다. 나는 지금 그 두모악 갤러리에 와서 그의 예술혼과 삶의 투쟁을 보고 듣고 있다. 그가 즐겨 거닐던 둔지봉 근처에서 그는 어디쯤 서서 삽시간의 황홀을 기다렸을까 상상하면서 무덤 천지의 둔덕을 걷고 있다. 육지 것이라고 눈길도 정도 주지 않고 배척하던 섬사람들의 땅에서 그를 돌아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마흔여덟에 죽었고 살아 있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다.
제주는 1만 8천의 신들이 살고 있는 신들의 고향이다. 설문대할망뿐만 아니라 마을마다 마을을 지키는 본향(마을신)이 있고 모시는 본향당이 있다. 산에는 산신당, 바다에는 해신당, 마을에는 본향당이 있다. 현재에도 450여 개의 신당이 산재해 있다. 마을 신의 부모 격인 백주또와 소천국이 모셔져 있는 송당 본향은 당오름 아래 있고, 본향당의 원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와흘리에 있다. 신당에는 섬기는 신부神父, 신모神母가 있지만, 본향당은 특히 제주 여인들의 영혼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다. 여인들은 일상적으로 본인에게 일어난 일들, 예컨대, 아이를 낳았다, 아프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등 일상사를 보고하기도 하고 남에게 말 못 할 가슴속의 한과 소원을 여신(할망)께 빌기도 한다. 흰 종이 즉 소지를 가슴에 대고 할망께 빌고 나뭇가지에 걸어 두면 소지에 찍힌 보이지 않는 소원을 다 들어준다. 바치는 물건은 양초 하나부터 과일, 쌀, 술, 천 등 자신의 형편에 따라 한다. 잦은 무속 행위와 방화 사건으로 와흘리 본향당은 닫혀있었지만, 까치발로 돌담 너머 팽나무 신목에 걸린 물색천과 소지는 볼 수 있었다. 제주 여인들의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화산섬 박토의 가망 없는 농사와 날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물질, 조공과 진상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중앙과 육지것들의 수탈과 박해, 4·3과 같은 현대사의 국가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어디로 돌아갈 곳은 물론 떠날 수조차 없는 제주 여인들의 가슴속 한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들과 비교한다면, 갈 길을 마치고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는 자의, 도연명을 흉내 낸 귀거래사의 쓸쓸함은 얼마나 하찮고 부질없는 것인가?
떨어지는 꽃들 무심한 활강처럼/ 날아오르는 새들 영민한 편승便昇처럼/ 출처진퇴가 미덕인 시절이 있었고/ 나가고 물러남에 있어 뜻이 중요하고/ 다스리는 이의 심기를 받들 수 없다면/ 죽음은 한낱 지푸라기와 같아/ 뜻을 꺾지 않던 시대가 한때 있었으나/ 다만 나이가 진퇴의 기준이 된 세상에서/ 강직한 뜻 따위가 무슨 대수겠냐마는/ 구차한 밥 한 끼를 위해 가끔 뜻을 접고/ 힘센 바람 앞에 풀 죽어 꽃잎을 떨구며/ 속도에 휩쓸려 정신줄 놓았던/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피고 지는 때를 아는 꽃들의 시계와/ 떠나는 날 날 때를 아는 철새의 촉수처럼/ 자리에서 물러나는 이의 아름다운 모습이란 /뒤돌아서서 굽은 등을 보이거나/ 굳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는 것/ 남루에도 붉은 시간을 메고 당당하게/ 저녁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졸시, 귀거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