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주논개(朱論介)"표준영정 ♡
의암 주논개(朱論介)"표준영정 ♡
의암(義巖) 주논개(朱論介)의 생애 1, 주논개의 가계( 論介)는 이름, 호는 의암 성은 신안 (新安) 주(朱)씨이면 출생지는 현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이다 , 그의 선대 (先代)는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문공 (朱文公) 熹의 후손이된다 고려시대 예부상서인 인장이 가문을 빛냈으면 조선 초에 와서는 의정부 우찬성을 지낸 승천원(勝遷)우승지을 역임 공으로 세계를 계승하여 7대조가 금교 찰방 무현에 이르게된다6대조 응표 (應杓)는 통덕랑 (通德郞)을 증직 받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여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 방지동으로 이사를 하여 대를 이어 살게 되었다논개의 조부는 통정대부 주용일로서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살았는데이 마을은 주씨 (朱氏)들만 모여 살았기 때문에( 朱村)마을 이라 했다논개의 부친은 달문 (達文)으로 주촌마을 서당훈장(書堂訓長)이었다 논개의모친은 밀양 박씨(密陽 朴氏)로서 그의 선조는 팔도병사 로 황석산성싸움에 공적을 남긴 박명박 장군이다 조부읜 용일에게는 달문과 달무의 두 형제가 있었다 달문의 아버지의 높은 학문과 도덕을 배워 문장과 덕행이 주위에 널리 알려졌다 용일의 학식과 덕망은 산등서이를 넘어 대곡리 사람들에게까지 소문이 나서 결국은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서 대곡리로 초빙되어 이사 까지 하게 되었다 2, 주논개의 출생주달문 은 일찍이 안의현 서하면 봉정리 밀양 박씨집 규수 (閨秀)에게 장가들어 단란하게 가정을 꾸려오던 가운데 남아를 얻으니 대룡이라 이름 지어 귀하게 길렀으나 불행하게도 나이 15세세에 괴질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후사가 없은 주달문 부부는 명산 장안산에 들어가 정성것 기도를 올려 주씨가문의 대를 이어갈 자손을 점지해 줄 것을 천지신명에게 빌어었으며.그 보람이 있어 박씨 부인의 나이 40중년에 태기를 얻어 부부는 무척 기뻐하였으나 여아를 분만하였다 논개의 탄생일 서기1574년9월3일 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주로 따지면 사갑술이된다 곧 갑수년 갑수월 갑수일 갑술시 이다 술은 지지 (支持)로서는제11이에 해당하면 띠로는 개띠가 된다, 사 갑술에 태여난 논개의 사주를 보고놀란 주문달은 걱정했으나 조선의 왕 중에서 영조가 사갑탄생인지라 위안하고 천한 이름은 오히려 길한 운명을 부른다는 판술에 따라 놓은 개라는 뜻을 가진 논개 (論介)라 이름을 지었다 3, 장수현감 최경회 (催慶會)와의 만남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비해 
영득하였다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이였다 논개 나이 다섯 살 되던해에 뜻하지않게 아버지를 여의었다 논개 어머니 박씨 부인은 외동딸 논개를 되리고 어려운 생활을 꾸려 나가던중 시동생으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박씨 부인과 논개 모녀가 더 이상 고생하지말고 시동생 주달무와 한집에서 지내자는 것이었다살림살이를 합치면 농사와 다른 고된 일은 남자인 달무 자신이 맡아서 할 테니박씨 부인은 그저 집안 살림이나 돌봐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여러 날 궁리 끝에 박씨 부인은 시동생 달무의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여 살림을 합쳤다한편 달무는 형님 달문이 죽고 난 뒤 이웃에 사는 김풍헌으로부터 은밀하게 묘한 제의를 받았다, 김풍헌은 동네에서 끼니 걱정 않고 부유하게 사는 자었다 그런 그에게 나이가 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몸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장애인 이었다,비록 살림살이는 홉족하다 하지만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해 그의 아들은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김풍헌은 마침 달문이 죽고 홀로된 박씨 부인의 가정 형편은 응색하기 그 지없었고 더구나 달무라는 위인은 술고 도박으로 세월을 축내며 사는데다 적지않은 빚까지 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 하였다 김풍헌은 달무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달무의 조카 논개를 김풍헌집의 민며느리로 들여보내주면 그동안 달무가 시달려온 채무 전익을 갚아주는 것은 물론 상답으로 다섯 마지기를 얹어주겠다는 제으를 해왔다. 달무는 다른 생각할 계를도 없이 속으로 결정을 내려버렸다. 그리하여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박씨 부인과 살림을 합치자는 제의를 했고. 박씨 부인이 망설이는 사이 쉴 새 없이 채근 질을 했다 끝내 살림살이를 합치게 되자 달무는 김풍헌과 은밀하게 계약을 체결했다. 논개를 김풍헌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오기만 하면 땅문서는 그 즉시 넘겨준다는 약속도 함께 받았다.달무는 손에 큰돈을 쥐게 되자 그 길로 노름판에 뛰어들어 집을 잊고 지냈다.나쁜 소문은 걸음이 빨랐다 박씨 부인이 시동생 달무가 저지른 비행을 알계 된것은 며칠 뒤였다 박씨 부인은 그제야 시동생 달무가 그토록 살림을 합치자고 종용했던 이유를 알았다.살림을 합친 이상 논개에 대하여 달무도 친권 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토록 서들렸다는것을 뒤늦게야 알고서 후회했다.박씨 부인은 궁리 끝에 논개를 데리고 도망을 치기로 결정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논개를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그것도 돈과 토지를 받고 논개를 인신매매한다는 세상의 비난을 듣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재를 넘어 경상도로 도망쳤다, 우선 박씨 부인 친정마을인 안의현 봉정마을( 지금의 함양군 서하면 봉정)피신 했다.박씨 부인이 논개를 데리고 달아 났다는 소문을 들은 김풍헌은 달무를 찾았지만 달무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어쩔수 없이 김풍헌은 장수 현감에게 주달무와 박씨부인을 처벌해달라는 고소장을 냈다.
혼인하기로 약속하면서 건내준 혼이 예물을 장만하기 위한 돈을 힁령한 채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장수 현감인 최경희는 즉시 박씨 부인과 주달무를 체포 압송하라는 명을 내렸다,주달무는 행방불명이었고. 친정 마을에 숨어 있던 박씨 부인과 논개는 장수 현감 최경희 앞으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재판을 받았다.재판에서 박씨 부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이제 겨우 네댓 살 박에 안 된 어린아를 민며느리로 데려갈 생각을 했다는 거짓... 차체만으로도 이미 김풍현은 인륜을 모독한 죄를 범한 것이며. 처음부터 반 인륜 범죄를 목적으로 하여 체결된 주달무와의 모든 계약은 무효이며, 따라서 주달무에게 지급한 금품은 김풍헌 스스로의 책임일 뿐 노개 모녀에게 반환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내용의 판결을 내렸다.김풍헌도 오히려 곤장을 맞고 재판은 끝이 났다. 그러나 논개 모녀의 사정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어린 딸을 껴안고 울던 박씨 부인이 최경희 현감에게 호소했다. 원래 살던 주촌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곳은 이미 시동생 식구들의 원망과 저주가 그들을 기다릴 뿐이며. 설혹 주촌으로 돌아가 살게 된다 하더라도 김풍헌이 장차 무슨 보복을 해올지 두렵다고 했다.그러므로 어디 살 만한 곳이 생길 동안만이라도 장수현관 안에서 머물게 해달라는 눈물 어린 호소를 했다.최경히는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인 논개 모녀를 며칠 동안만 관아에서 지내다가 떠나라고 했다. 돌아갈 곳이 없게 된 논개 모녀의 소식을 들은 최경희의 아내 김씨는 그들을 내아로 불렸다.박씨 부인한테서 자초지종을 듣고 난 박씨 부인의 덕성스러움과 예절에 호감이 갔고. 우엇보다 어린 논개의 총명함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하여 김씨의 보호 아래 논개 모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김씨는 논개 모녀를 친척처럼 여기게 되었다 최경희는 1579년 무장현감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김씨가 최경희에게 논개 모녀도 함께 데려가자고 권했다. 박씨 부인의 바느질 솜씨와 부억살림 솜씨를 무엇보다 박씨 부인은 노비로 삼아도 좋으니 함께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최경희는 김씨의 의논한 긑에 관아의 침방 (針房) 간비 (官婢)로 논개 모녀를 등재시킨 뒤 정식 수행원으로 삼았다 무장으로 데려갔다. 그때부터 논개 모녀는 김씨의 보살핌을 받았다 특히 논개의 총명함은 김씨의 가르침에 의해 경이롭게 빛을 더해갔다.박씨 부인은 논개에게 일찍부터 몇 가지 일에 대한 반복 교육을 시켰다 첫째는 최경희 현감과 김씨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경희는 논개 모녀에게 두 가지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박씨는 믿었다. 끝없는 가난과 궁핍에서 모녀를 건져내 주었고 달무와 김풍헌이 모의한 인신매매의 함정에서 구원해 주었다고 믿었다 . 이 은혜를 갚지 못하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논개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최경희는 계속 변방으로만 옮겨 다녔다 1583년 영암 군수에서 1584년 영해 부사로 영전했다. 영해 부사로 있던 중에 사도시정(司導시正)이란중앙 관직을 임명받았다 사도시정이란 궁중의 미곡과 간장 등의 공급과 관리를 맡아보던 관리로 최경희는 혼자 서울로 떠날 수박에 없었다.그 때 부인 김씨는 벌써 여러해째 지병을 앓고 있어서 서울로 따라가기 어려웠다. 최경희는 56세였다누구든 따라가서 음식과 의복 수발을 들어줄 필요가 있었고. 그 책임은 나주 김씨에게 있었다 김씨는 논개를 유심히 살폈다, 2년 전에어머니 박씨를 여의고 혼자가 된 논개는 그때 열네살에 불과했지만 웬만한 살림은 능히 보살필 수 있었다. 그동안 나주 김씨가 가르쳐온 덕분이기도 했다 김씨는 최경희에게 논개를 데려가서 음식과 의복 수발를 받으러고 권했다 논개는 최경희를 따라서 서울로 갔다.1590년 초봄 최경희는 다시 담양 부사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그때 최경희 나이 쉰아홉 살이었고 논개는 열일곱 살이었다 담양 부사로 부임하면서 최경희는 어머니 순창 임씨(淳 昌林氏)의 상을 당했다. 담양 부사를 사직하고 고향 하순으로 떠날 때 최경희는 논개에게 장수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권했다.부모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 첩실을 데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논개는 공손하게 이 권유를 받아들였다. 이미 최경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초자연적 자신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논개도 자신이 무섭게 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최경희도 그런 그런 논개의 변신을 느겼다. 4. 최경희의 의병활동과 진주성 전투(1).최경희의 의병활동의병활동 1592년 (임진년)에 역사상 980여회의 외침 중 가장 처참했는 임진왜란 이 발발했다. 상중인 최경희는 전라 우도 의병장이 되어 8월에 남원으로 옮기 군사를 증원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만큼 군사 중원은 쉽지 않았다. 그는 다시 본거지를 장수로 옮길 결심을 했다. 지난날 장수 현감으로 있을 때 베푼 여러 가지 선정의 결과도 있어 의병 모집이 다른 지역보다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장수에는 논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의병 동원과 왜군에 대한 공격거점으로서의 역활을 위해 장수 사람들의 지원응 받아 내는 데는 논개의 역할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기대한 만큼 장수 사람들은 협력해주었다 .장계 월강평야에다 의병청을 세우고 장수는 물론 인근의 무주 .진안 금산에까지 의병 모집을 위해 사람을 파견했다 논개느 눈에 뛰지 않게 의병모집과 훈련 중인 의병들의 뒷일을 도왔다 논개는 마을 여성들을 동원하여 의병 훈련에 필요한 여러 일드을 함께 해냈다,조국수호 의지로 불타는 청년들의 속속 모여들었다. 훈련을 거쳐 정에병 800명선발할수 있을 만큼 많은 의병 지원자들이 집결했다 한 달여의 맹렬한 훈련 끝에 마침내 최경희의 의병대는 정식으로 부대의 이름과 깃발까지 갖추었다. 조정으로 부터 공인된 부대 명칭은 골 (골)자부대였다. 골자가 찍힌 깃발도 만들었다. 부대 명칭은 최경희가 만든 것인데. 골립아군 즉 송골매가 날아들면 갈까마귀 떼가 놀라 흩어진다.는 듯이었다.1592년 9월 중순 최경희의 골자부대는 맨 첫 번째 전투인 무주 전투를 저 유명한 고바야시가와 부대와 벌였다. 최경희는 적을 속이기 위한 전술을 폈다,볏짚을묶어 말위에다 싣고 사람은 그 뒤에 앉아 고함을 지르게 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이 지새도록 그렇게 맞섰다. 왜적들은 조총을 쏘거나 화살을 퍼부었다.대부분의 탄환과 화살은 볏짚에 꽃힐 뿐이었다. 골자부대는 왜적의 탄환가 화살이 바닥나기 기다렸다. 새벽 몬동이 트고 아침 해가 떠오르려고 할 대 골자부대는 칼과 창로 공격을 지작했다 왜적들은 탄환과 화살이 부족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적들의 참담한 패배였다 이때부터 왜적들사이에서 골자부대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금산 전투에서 승리한 왜적들은 일단 무주까지 들어왔다가 전투에서 패하자 다시 금산 방으로 퇴각한 후 경상도 지역인 김천. 개령.성주.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최경희는 왜적들의 퇴로로 예측되는 곳에다 골자부대를 매복 시켰다. 지형이 험악하고 좁은 길이 외가닥으로 나 있는 곳으로 박에는 적들이 퇴각할 수 없 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퇴각하던 왜적들은 곳곳에서 매복해 있던 골자부대의 기습을 받아 괴멸되어 갔다말을탄 왜장 한 명이 수 십명의 군사를 데리고 다가오는 모습이 발견되었다.이른바.우지치 에서였다.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남도거창군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시의 경계지점인 경북 김천시 대덕면 덕산 2리 주치(走峙)고개다. 최경희는 화살을 겨누었다 그의 활솜씨는 일찍이 소문난 것이었다. 활은 왜장을 명중 시켰다. 죽은 왜장한태서 그림 한 점과 칼 한자루를 노획하자 골자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렸다. 그림은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 였고 칼은 여덟 자나 되는 큰 칼어었다.현재 전남 화순의 해주 최씨 문중에서 보관해오고 있는 칼이 바로 1592년9월중순 고바야카와 부대와의 우지치전투에서 최경희가 왜장으로부터 빼앗았던 바로 그것이다. 칼의 손잡이 세 군데에 오동나뭇잎 문양이 새겨져 있다. 손잡이 안쪽에서 바깤쪽을 향하여 상. 중.하단으로 나뉘어 오동나뭇잎 문양이 7-5-5 형식으로 된 것 (七五桐) 상당의 오동나뭇잎은 7개의 무늬로 중단과 하단의오동나무잎은 각각5개의 무늬로 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소지했던 칼이라한다. 그보다 한 급 낮은 것은 5-3-3형식 상단의 오동나뭇잎은 5개의 무늬로. 중단고 하단의 각각 3개의 무늬로 되어 있다)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다이묘 (大名)급 장군에게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하사한 칼이다. 전남 화순의 해주 최씨 문중에서 보관해오는 칼은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칼은 무로맟치 막부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서 기마 부대에서 사용하는 나카마키 형식의 칼이다. 단검 .중검. 장검. 가운데 약 2미터 길이의 이 장거은 말에 탄 사람이 상대방 말의 발목을 자르는 데 주로 사용하느 것으로서 약 30년간 유행되었던 칼이다또한 이 칼은 만든 사람인 모루미치. 는 일명 미노칼.이 한분과였다. 오다 노부니가 의 고향이자 그의 무기고 역할을 했던 미노 지방의 모루미치 가문은 1532년경 부터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여 루로마치 시다 (1394-1595)에 전정기를마지했던 일본 칼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이 시기는 제철 기슬이 발달하고 무사들의 영토 확장 욕구가 강해진 나머지 매일 칼이 전쟁이 버러젔던 전국시대로 같은 외형상의 때보다는 실용성과 견고함이특별히 중시되던 시대였다.이와 같은 역사를 지닌 칼이 해주 최씨 문중으로 들어온 뒤 그 칼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금산.무주.지방에서 패한 고바야기와 부대와 다른 왜적들은 일단 성주와 개령 방면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경상우도 지역이 다시 위험에 빠졌다.경상우도 순촬사 조종도는 최경희의 전라우의병에게 속히 도와달라는 원군 요청을 해왔다. 최경희는그의 골자부대 의병들에게 경상도 지원을 위한 출정을 명령했다 그러자 대원들은 경상도 방어에 대한 부당함을 들어 완곡하게 거부해왔다.왜적의 기세가 사방으로 확산되고 있는되 어째서 호남지방을 버리고 먼 영남지방을 구원해야 하느냐는 것이였다 그러자 최경희가 그들을 꾸짖었다..호남지방도 우리나라 땅이요 영남지방도 우리나라가 아닌가. 의를 위해 장수가 된 사람들이 어찌 지역의 멀고 가까우것을 따쳐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느나그때 최경희는 지역적 차별성 때문에 국가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게 될 것을 크게우려했다. 또한 전쟁 사기인데도 당쟁과 지방색의 페단으로 국가의 시련이 더욱 커지고 있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여겼다.최경희의 정치적 중립성은 이후 그의 행적에 절대적인 여양을 미쳤다.그리하여 그는1592년 7월 26일 의병을 일으켜 1592년 10월 경상도로 들어온 후 죽을 때까지 9개월 동안을 줄곧 경상도에서만 지낸 유일한 호남 의병장이었다.불평하는 부하들을회유하여 남원을 출발한 최경희의 군은 운봉 함야을 지나 산음 으로 행했다 한편1592년 10월 초. 왜장 도요토미는 호소카와 가토. 하세기와 기무라 등에게 명령하여 5만며의 왜군을 이끌고 부산에서 진주로 진격하도록 했다. 10월3일 적병은 길을 나누어서 진주로 진격해 왔다. 한부대는 말티고개 를 다른 한 부대는 불천에서 진주를 바로 공겨했다. 이대 병사 유승인이 나아가 막다가 진주성으로 물러났으나 진주성에 영주가 둘이 되면 명령이 통일되지 못한다고 하여 유승인의 진주성 진압이 거부당했다. 성안에서는 김시민을 수장으로 하여 항전을 준비했다. 이때 성 안에는 3.700여명의 남녀가 있었는데 여자에게도 모두 남장을 시키고 성문 위에는 용대기 를 꽂고 일려로 대오를 지었다.6일 아침 1천 여 명의 홰병 총수가 일제히 성 안을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천지를 뒤흔드는 이 혼란한 시기를 이용하여 왜병 3만명이 일시에 성안으로 달려드려고 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악공을 시켜 일부러 누대 위에 올라가서 피리를 불게 하고 궁시와 탄환은 되도로 아꼈다. 그리고 도끼 .낫 물 긇이는 가마솥을 준비시켰다 10일 밤 사경 무렵 왜병은 퇴각하느 듯하다가 모든 햇불은꾼채 동문으로 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적은 사다리를 놓고 개미떼같이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김시민의 군은 성 위에서 탄환고 화살고 불덩이 끓는 물과 동메이를 폭포같이 쏟아 부었다 적의 시체는 산처럼 쌓였다. 이때 김시민은 적이 쏜 탄환에 왼쪽 겨드랑이를 맞고 다음날 오전 8시경 적은 퇴각했다.
이 싸움에서 곽재우는 전주성 북쪽 비봉산에 진을 쳤고 의병장 최경희는 남강 건너편 두골평 에 진을 치고 적의 후면을 위협했다 의병장 김춘민의 군대는 사천에서 응원하고 최경희의 군은 어속령에서 맹공을 가했다 제1 차 지주성전투는 안팎의 전략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결과였다.제1차 진주성 전투 때 최경희의 군은 직접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으나 진주 인근에서적의 후방지원을 차단시키면서 진주서 안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적들은 진수 외곽으로 후퇴하여 성주와 개령을다시점령하였다 제1차 진주성 전투 이후 최경희 군의 전투는 주로 진주 외곽 지역에 산재해 있는 왜군을 격파하는데 주려했다. 최경희 군은 산음에다 군사를 주둔하고 김면 군과 합세하여 개령을 공격했다 그러나 개령에서 패배했다 다시 전라도 관군과 전라도 의병 및 경상도 여러 군사가 합세하여 성주로 진격하였으나 또 실패했다 군량미와 무기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경상도 의병장들은 지역 유지들에게 통문을 뛰어 원조를 요청하였다.
진주성이 함락 되고 최경희 논개 부군도 자결함. 그후 논개에 대한 내용 기록함 1592년9월 우지전투때 왜장에게서 빼앗은 그 칼과 공민왕이 그린 천산백운도, 그리고 입고 있던 관복을 버서주면서 그 물건들을 고향 화순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조카 홍우가 떠나고 나자 김천일이 달려왔다 성이 함락되었음을 다시 확인했다 인종인, 이잠. 강화복 .오유는 최후까지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결국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는 성 함락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자결하기로 맹세했다 세 사람은 시뻘건 황토물이 범람하는 남강에 투신하겨 목숨을 끊었다. 성을 완전히 장악한 왜병들의 광란이 시작되었다. 성 안에 살아 있는것은 모조리 도륙 당했다 성 안 곳곳에 시체가 뒹굴었고 .촉석루에서 남강 북안에 이르기까지는 쌓인 시체들이 서로 겹치거나 헝클어진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청천강에서 오봉까지 5리 사이에는 시체가 싸여 강물을 막았다 . 강바닥부터 쌓인 시체들이 강뚝높이까지 차오르자 강물은 핏물로 변해 강기슭에있는 집들의 안마당까지 질퍽거렸다 군인 복장을 한 시체보다는 피난민들 시체가 훨씬 많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들 시체 곁에는 역시 뼈가 앙상한 젖먹이들과 어린아이들 시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왜적들의 미친짓은 좀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성안 구석 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죽은시체들을 두 번 세번 거듭해서 찌르고 토막 냈다 가축도 예의는 아니였다 눈에 뛰는 대로 모조리 죽었다.이제 살아 있는 것은 왜적 자신들뿐이 었다.그때부터 그들은 도끼를 들고 성 안에 서서 있는 나무는 모조리 찍어 베어버렸고 우물마다 독을 풀었다 이제 서 있는 것도 모조리 살아졌다 마지막으로 진주성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평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 지시받은 데로 진주성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그런다음 다시 군대를 두 갈래로 재편성하였다 진주성 외곽지대의 초토화에 나섰다 제1대는 단성. 산청. 등지로 나갔고 제2대는 섬진강을 따라 구례 곡성까지진출하여 약탈과 살상을 자행하다가 7월9일 모두 진주로 복귀했다7월초였다 가토 휘하의 여러 부장들은 제1대에 배속되어 단청, 산청. 등지를유린하고 전라도로 떠난 부대들보다 일찍 진주로 돌아왔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된 그들은 전승 축하연을 준비했다 원낙 격전을 치렸기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나고 병사들의 사기도 침체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질탕하게 한판 노는 것이 좋은 방법임을 다들 알고 있었다전승 축하연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려면 술과 여자가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진주 관기들을 모조리 소집하기에 이르렸다. 진주 관기는 엣날부터 유명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가 계속되던 중에도 진주 관기를 대표하는 한 나이든 기생 김천일을 찾아와 격렬한 항의를 한 적이 있었다 진주성 안에 들어와 전투를 벌리고 있던 관군 중 몇몇이 기생들이 거주하는 집으로 들어와서 기생들을 겁탈하는가 하면.밤낮을 안 가리고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기생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들 대표가 김천일을 찾아가 항의한 것이었다. 그러자 김천일은 그 기생을 건방지다고 목을 베어버린 일도 있었다. 지난 전투때 죽지않코 살아남은 관기들은 왜적들의 소집에 전율했다 그때 진주서 밖의 작은 암자에 숨어서 목슴을 부지하고 있던 논개는 성 함락 이후의 소식을 낱낱이 듣고 있었다 최경희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논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은혜와 사랑 모두를 승화 시킬 묘책을 찾고 있던 중 진주 관기들을 소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전승 축하연에 둘어갈 수 있는 조선 사람은 진주 관기들뿐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논개는 마침내 그토록 오래 꿈꾸어오던 기회가 왔음을 깨닮으면서 한충 더 냉청해졌다.은밀한 수소문 끝에 진주 관기들이 7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에 촉석루로 집결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여 촉석루까지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각오를 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왜장 한 놈은 죽이고 자신도 죽을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자신이 기생 신분으로 가장하여 왜장을 죽인 다음 생기게 될 세상의 오해와 능멸 따위로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망설여졌다. 최경희의 부실로서 최경희를 따라 자결해 버린다면 한결 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결해 버린다면 정절을 지킨 열녀가 되어 해주 최씨 가문이고 신안 주씨 가문의 영예가 될 것이고 논개 자신은 열녀 반열에 오를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손쉬운 삶이 주는 명예보다는 더 높고 큰 삶은 살고 싶었다 진주성 싸움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민중들고 함게하고 싶었다 문제는 관기들 틈에 끼여서 촉석루까지 가는 과정이었다 .고심하던 끝에 논개는 장수를 떠날 때 몸에 지녔던 약간의 금붙이로 모시를 구해 치마 적삼 한 벌을 급히 만들었다. 관기로 치장하기 위한 극단적 모험이었다.일부러 머리도 감았다. 머리를 곱게 빗어 비녀를 다시 찌르고 새 모시옷을 입었다. 죽음과의 입맞춤을 위해 정신적 변신으로 거듭 난 논개는 이제 갓 스무 살의 눈부신 여인이었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희고 부드러워 향기 나는 피부였지만 죽음을 속이기 위해 마지막 화장을 했다.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해 들어서기 시작할 때 논개는 저만치 뒤 처져서 고개를 숙인채 천천히 그들을 따라 걸었다. 지난 전쟁 중에 여러 명의 관기가 죽거나 달아났고 더러는 중상을 입거나 해서 움직이지 못했기 대문에 수가 많이 줄었다. 관기들의 발걸음은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어쩌면 이번 걸음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관기들은 저마다 수심이 컸다. 그런데 그날에 촉석루 가는 길에는 살아남은 진수 관기 외에도 적잖은 여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전쟁에서 죽지 않은 일반 여인들이 왜병들에게 끌려가면서 발악하거나 울고 있었다.옆 사람에게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논개는 차라리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족석루에는 주로 왜장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 족석루 아래 땅바닥엔 왜병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논개는 차라리 마음이 갈아 앉아 있었다. 촉석루에는 주로 왜장들이 모여앉아 있었고 촉석루 가까이 다가가면서 주위를 살폈다 .관기들 속에 섞여서 촉석루까지 올라가선 안 된다고 여겼다 촉석루에 올라가면 노래와 춤 그리고 술잔 시중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느 불안감 때문이었다. 논개는 한 번 더 자신의 `위장 잠입 목적을 떠올렸다. 먼저 자결한 최경희의 직위만큼 높은 계급을 지닌 왜장을 죽일 수만 있다면 다시없는 기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댜 냉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누가 직위가 높은지를 짐작으로 가려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때 촉석루 아래 강가에 작은 바위 하나가 보였다. 순간 논개는 그바위가 자신의 목적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 직감했다. 유인책을 쓰자는 생각이었다. 미끼를 향해 달려들도록 꾀를 짜냈다. 장맛비가 잠시 그친 닷에 그 바위 면는 아슬아ㅡ슬 하게 물 위에 들어나 있었다 남강은 범람을 그치긴 했으나 아직도 시뻘건 황토물이 소용돌이를 이르키면서 무섭게 흐르고 있었다 논개는 매우 위험한 모험에 도전했다 자신이 바위 위에 올라가 미끼 노릇을 할 때 어떤 왜장이 걸려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도리어 능멸을 당할지 모른다왜장들은 벌써 거나하게 술기가 올라 있었고.병사들도 술에 취한 모습들이었다논개는 아주 천천히 마치 산보하듯이 강가를 건너기 시작했다 촉석루에 올라간 관기들은 몹시 두려워서 주저하다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논개는 강가를 건닐다 말고 저만치 안쪽에 끝부분만 드러나 있는 바위를 바라 보았다. 危巖 (위암) 이란 바위였다 물에서 위암까지는 어른 팔로 한 발은 됨직한 거리였다 그때 촉석루 위 남쪽 난간에 기대어 앉아서 술을 마시던 왜장 하나가 아래쪽 강기슭에 흰옷을 입고 거닐고 있는 논개를 발견하고는 저 여자를 과연 누가 차지할 것인지 내기를 걸자고 했다 그러자 촉석루 위에 있던 왜장들은 일제히 강가에 서 있는 흰 모시옷을 입은 여인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다른 관기들도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지만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그때 논개는 자신의 계획이 큰 차질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제 남은것은 왜장을 유인하는 일이엇다. 논개는 물속의 위암에 다시 눈길을 주었다.좋은 장소라는 확신이 들었다. 위암 사방은 물길이 무섭게 휘감고 돌아 다시없는 죽음의 자리였다.논개는 신을 벗어 들고 힘껏 뛰어 위암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촉석루 쪽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띤 채 서있다가 다시 옆모습을 보이면서 우수에 찬 억굴로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경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나간 19년의 세월 모두가 최경희의 사랑 위에서 피어난 꽃이라 여겨졌다.그때 왜장 하나가 어느새 달려 내려와 논개를 향해 뮈라고 지껄였다. 논개는 사내를 쳐다보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왜장은 당당한 체구었다. 계속 뭐라고 지껄였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건장한 체구의 왜장이 재미있다는 듯이 손짓을 해대는 것이... 논개더러 뭍으로 나오라는 시늉 같았다. 그러자 논개가 조금더 환하게 웃어 보이면서 도리어 왜장 더러 위암 쪽으로 건너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촉석루 위에서는 왜장들이 함성을 지르며 웃어댔다 왜장은 몇 번이나 망설였다. 논개가 계속 손짓을 한다. 강아지를 부르는 시능의 손짓이었다 마침내 왜장은 성큼 위암으로 건너뛰었다 한쪽 발이 바위에 닿자마자 왜장은 논개를 껴안았다. 술 냄새가 확 풍겻다.논개는 왜장에게 안긴채 왜장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왜장은 싱글벙글 웃었다 논개의 두 팔이 왜장의 허리을 살며시 휘감았다.왜장은 몹시 만족한 듯 논개에게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논개는 왜장의 허리뒤로 돌려진 손끝으로 양손에 끼워진 옥 가락지를 확인한 다음 깍지를 꽉 겼다. 앞으로 슬쩍 왜장을 잡아 당겨 보았다.왜장의 몸이 기우뜽거렸다 왜장은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으로 논개를 잡아끄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촉석루 위에서는 계속하여 함성이 터저 나왔다.논개는 숨을 몰아쉬면서 위암 끝에 섰다. 한 번 더 최경희를 떠오렸다. 살아서 함께 못다 한 사랑이 목을 찔렀다 .또한 폭우 아래 무너지는 흙 담처럼 죽어 가던 민중들의 처절한 절규가 들려왔다. 순간 두 손에 혼신의 힘을 주면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 쪽으로 힘것 떠밀었다. 왜장의 비명과 촉석루 위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왜장들의 비명이 들린 것은 같은 순간이었다. 남강 물은 여전히 도도하게 훌렸다.논개가 살해한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죽음은 뜻밖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왜군들은 그동안 진주성전투에서 입은 막대한 병력 손실과 그로 인한 전력의 약화로 사실상 호남 공략이라는 최대 목적이 좌절되고 말았고 그들의 궁국적인 목표 달성은 실패하고 말았고....결국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 시켜야만 한다는 호남 의병들의 당찬 의지는 수많은 죽음으로써 달성된 셈이였다. 그리하여 진주전투가 있었기에 왜적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고 .남방의 보급기지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된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다.죽음에 입 맞춘 논개의 의거는 민족적 결단이었다. 그의 죽음은 제2차 진주성 전투이후 깊은 울분과 회한에 싸여 있던 모든 민중들의 강렬한 저항의식을 드높였다. 논개가 왜장을 살해한 행위는 민족의 울분을 가시게 한 순국의 성소 (聖所)이고 한국 민족주의의 성지 (聖地)인 위암에 :의암 (義巖)이라 .새겨 시간을 넘고 공간을 초월하는 한국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삼았다 또한 그 곁에 의암사적 비를 세워 논개를 가슴속의 영원한 애인으로 삼았다.스스로가 창기 (娼妓)로서 받아야 할 수모와 모멸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반 외세 조국 전쟁의 신성한 목적에 복무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는 숭고한 사랑을 실천한 근대적 혁명적인 그 여인의 이름을 우리는 논개라 부른다.
5. 주 논 개 의 묘 소 한편 진주성 함락을 전후로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진 전라도 의병들의 수는 이전투의 참담함을 그대로 말해주었다.최경희와 함게 진주성으로 들어온 의병은 800명이였다 전투가 끝났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80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최경희와 함께 온 의병들은 대부분 화순과 능주 그리고 장수가 고향인 청년들이었고 그들 모두는 최경희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흠모의 마음으로 최후까지 그의 곁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가장 큰 희생을 기록했다. 그런 만큼 그의 의병들은 다른 의병장 휘하의 의병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특별히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최경희가 자결하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본 그의 의병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참담한 심정으로 최후를 맞았다. 그 의병 가운데 장수 출신들은 논개와 최경희의 관계가 지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중요하게 여겼다.최경희가 자결하던 날의 남강은 열흘이 넘게 계속된 폭우로 범람했다 수많은 시체들이 격랑 치는 강물에 떠밀려 갔다. 살아남은 80명의 의병들은 경제심이 다소 늦춰질 때까지 몸을 숨겨야만 했다 왜적들은 성 함락후 다시 진주 외곽지대의 초토화에 나섰고 그 며칠 후인 7월 초순 논개가 왜장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주주는 물논 진주에서 100여리 밖에까지 순식간에 퍼젔다.다시 그 며칠 후 왜적들은 울산과 부산 쪽으로 완전히 철수했다.논개의 죽음은 물러가는 왜적들을 숨어서 지켜보는 진주 사람들 가슴속에 새로운 의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논개가 조선을 건졌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진주 외곽지대에서 숨어 지내던 최경희의 의병들은 놀라운 소문을 들었다 진주에서 동쪽으로 30km 가량 떨어진 남강의 한 물급이에 수백구도 넘는 시체들이 떠밀려와 쌓여 있다는 소문이였다의병들은 서둘렀다 진주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남강 기슭을 따라 내려가면서 시체를 찾기시작했다 강을 따라가면서 소문으로 들은 그 시체가 쌓여 있는 곳이 어디인지 계속 묻다가 문산에서 그곳이 어딘지를 알아냈다 지수(智水)목이라는곳이라고 했다. 의병들이 지수목으로 찾아갔을 때 그곳은 시체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남강이 구비쳐 흘려 내려오다가 지수목이란는 곳에 이르러 직각으로 휘어졌다 남강은 지수목에 이르기 전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곡선이거나 짧지만 직선으로도 흐르면서 들판과 계곡을 지나다가 지수목에서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직각을 이루었다 .바로 그 직각을 이루면서 왼쪽으로 돌기 시작하는 꼭지점 부분이 안쪽으로 넓게 열려 있었다 마치 물고기를 잡기 위해 거대한 자루의 아가리를 그 꼭지점 부근예다 갖다 대는 자루 안에 물고기가 있는 형상이였다 .그곳을 지수목이라고 부르는데 대략 가로 세로가 2키로미터 되는 높은 남강보다 지면이 낮았다 따라서 지수목에 이르기 전 남강은 약 2키로미터 가랑을 직선으로 흐르는데 범람한 남강이 직선으로 곧장 흘러오다가 갑작이 외쪽으로 물길이 꺽이는 곳에서 오른쪽의 거대한 늪 쪽으로 물길이 쏠리게 되어 있었다 .지수목은 대곡면 .진성면. 사봉면. 세 지역의 경계지점이기도 했다 특히 시체나 통나무 등 무게를 지닌 물체들은 직각으로 꺾이는 그 지점에서는 예외 없이 오른쪽으로 치우치면서 지수목의 늪으로 빨려드는 것이었다의병들이 도착 했을때는 벌서 수많은 사람들이 시체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진주성이 함락되던 날부터 떠내려 오기 시작한 시체들은 밀리고 쌓이면서 부패하기 식작했다 악취가 인근 마을까지 진동했다.호남 의병들은 후회했다 빨리 이곳으로와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곳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진주성이 함락된 이틀 뒤 호남 의병 몇 명이 이곳으로 와서 한 의병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기슭에다 무덤을 짓지 않고 평장을 해 두었다던데 그 시신이 진주병사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 전에는 진주사람들이 배를 타고 내려와서 여자의 시신을 건저 역시 평장을 했다는 것이었다, 의병들은 평장을 해둔 두 곳을 조심스럽게 파혜첬다 먼저가 매장해온 것은 최경희 였고 뒤의 것은 논개임이 확인되었다 의병들은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급히 관 두개를 맞추어 짰다 의병들은 서둘렀다 일단 장수까지 운구해 가자는 목표를 세웠다 지수에서 의령쪽으로 건너 안의까지는 약 80키로미터 거리었다 6 주 논개 순국 (殉國)의 역사적 평가 1529년 임진왜란 당시 숱한 사람들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그죽음이 자발적이었던지.아니면 타율적이었던지 간에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임진왜란 당시 그 많은 죽음 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뚜렸한 영양과 의미를 남겨준 인물은 해전의 영웅 이순신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을 껴안고 죽은 논개 (論介)일 것이다. 우리가 논개의 죽음을 의 열 (義 .烈) 로 기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논개가 연약한 한 여인이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여러 장수들이 죽음을 택한 것은 그들이 국은 (國 恩)을 두터이 입어 왔던 사대부들이었으므로 국란을 당하여 (殺身保國)살신보국 함은 봉건사회의 신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논개는 6만여 성민의 학살 현장에서 가녀린 어린 여자의 몸으로 자신의 목슴을 아까워하지 않코 기꺼이 던졌을 뿐 아니라 이웃과 겨례의 원수였든 왜장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그녀의 죽음을 기릴 수 있는 것이다 계사년 칠월칠석 촉석루에서 승전에 도취한 왜장들이 아름답고 가날픈기만 했던 한 여인에 의하여 왜군이 가장 용맹한 선봉장을 잃어버린 왜군은 사기가 꺾이여 전의른 잃어 버린데다 2차 진주성을 지킨 장수들이 한결같이 호남 출신 장수이무로 호남 지방민의 투철한 호국정신에 미리 겁을 먹고 호남지방 침공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병력을 후퇴시키고 임진왜란이 일단락되었단 것이다국난을 당하여 살신보국 ( 殺身保國)함은 봉건사회의 신하된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논개는 6만여 성민의 학살 현장에서 선봉에선 관군이나 의병도아닌 일반 국민으로서 전쟁에 깊이 관여 하였고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죽음에 초연하여 왜장을 살해하였다. 임금이나 아버지 혹은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여 그냥 따라 죽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최대한의 적극적인 인간적 노력이 부가될때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가치 있는 삶이 될 뿐 아니라 후세의 귀감이 될 것이다. 물론 천하에 가장 흉한 일로서 자살 하는 것 보다 더 큰 일이 없으며,또한 자살한다고 해도 아무련 소용이 없다 오직 의리에 입각한 행위를 해야할 경우에 자신의 몸을 죽여야 하다면 당연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 호랑이나 도적에게 핍박당할 무렵에 아내가 뒤따라 호위하다가 죽으면 열부 (烈婦)이다또한 흉악한 사람이 음탕한 사람에게 핍박당하여 억지로 몸이 더러워질 경우에 굴복하지 않코 죽어도 열부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지식 없이 죽음을 너무 가벼이 여 여겨 쉽게 생을 포기할 경우에는 아무련 의미가 없다 .의리정신 (義理情神)에투철한 행위야 말로 당연히 높이 평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논개의 죽음이야 말로 의리정신에 투철한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죽음에 초연했기 때문에 자살 하여서는 아무련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죽임으로서 복수할 것을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이것이 삶에 대한 투철한 의지가 뒷받침된것이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신의 최선의 행위라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유몽인 (柳夢寅)은 어우야담 (於牛野談) 일륜편 (人倫篇)에서 논개를 관기의 신분인데도 효열 (孝烈)의 항목에다 기록하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정을 기리고 있다.논개의 의리정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불의에 철저히 죽음으로서 대항하여 임의적인 폭력성에 저항함으로써 그러한 것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역사 가 보여준 좋은 본보기다.나라를 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왜장과 함게 몸을 바쳐 순국한 의리정신이야 말로 오늘날 민족정기의 회복과 국민정신 교육의 계도적 차원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것이다 논개는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오히려 죽지않코 역사속에 다시 부활하여 400 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민족의 혼을 드높인 충절의 표상으로 많은 국민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고 있는 것이다 논개야 말로 죽었으되 죽지않았으며 모든 것을 버렸으되 오히려 모든 것을 얻게된 승리의 삶을 산 의인이였다 하지않을 수 없다출처 : 주덕주
의암 주논개님이 왜적 장수을 안고 수장 시킨 바위
장수군 논개님의 산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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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의암(義巖) 주논개(朱論介)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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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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