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논술에서 출제되는 많은 논제에서는 생태와 문명간의 갈등에 대해 고민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최근에는 평화나 여성, 소수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변화하는 삶의 양식이 갖는 긍정성 등에 대해 묻는 문제들도 자주 출제되곤 합니다. 생태적 패러다임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관계성과 상호연관성, 그리고 다양성에 기반한 정체성 등은 수많은 대안적 사고나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습니다. 근대 과학이 가져온 이분법과 그에 따르는 어느 한 쪽의 중심주의,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다른 것을 종속하고 지배하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환원주의적 논리들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들을 찾아나가려는 이들의 논의에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지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패스트푸드에 담긴 진실
한 패스트푸드사의 광고에서는, 아이들이 집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졸라서 어느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일회용 컵에 담긴 치킨조각을 콜라와 함께 나누어 먹으며 화기애애하게 한 때를 보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가족들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이며 패스트푸드 회사들은 그러한 가족과 자녀의 건강과 행복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광고의 이면에는 한때는 진통제로 제조되었다가 지금은 음료로 쓰이는 콜라가 치아나 뼈에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는지, 패스트푸드의 과잉섭취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비만이나 아동 성인병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패스트푸드산업에 쓰이는 육류생산을 위해 지구의 전체 환경이 얼마나 오염되고 있는지 등이 철저하게 위장되어 숨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치킨 조각으로 그 가족들 앞에 놓여있는 닭들이 살아있을 때 어떠한 방식으로 제조(현대의 대규모 공장식 축산에서 생명은 길러진다기보다는 물건처럼 제조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수 있겠지요)되며 그 닭들 속에 어떠한 성분이 포함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제조 과정 속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죽어가는지를 우리는 광고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업들이 가족과 환경,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의미 있는 활동들을 한다고 선전하고 있지요.
패스트푸드와 미국 축산 환경
지난 14일 미국에서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리콜 사태가 있었다. 이 회사에서 생산하는 육류 제품중 일부가 식중독을 유발하는 리스테리아 균에 감염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의사인 루스로프씨는 4년 전에 한 패스트푸드 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살모넬라균에 감염됐다. 그녀는 이후 17차례에 걸쳐 혈액투석을 해야 했다. “내가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인생이 언제든 순식간에, 극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건강한 것에 감사하고 음식 한 가지 때문에 인생이 극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죽음 직전까지 가며 인생을 새롭게 보게 만들었던 자신의 경험이 미국 축산업의 대량 생산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소들은 이제 초원의 목장이 아닌 좁은 우리에서 사료를 먹으며 집단으로 사육된다. 미처 땅에 흡수되거나 처리되지 못한 분뇨는 이콜리 균 등의 발생을 위한 좋은 토양이 된다. 다 자란 소들은 대규모 도축 공장에서 시간당 300마리의 속도로 도축된다. 프라이드 치킨이나 치킨버거의 재료가 되는 닭고기도 마찬가지다. 병아리 때부터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공장의 부품처럼 취급되다 결국 최후를 맡게 된다. 패스트푸드 사들은 미국 최대의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구매자이다. 이런 대량 생산 방식은 패스트푸드의 생산 단가를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대량 생산을 위해 불가피했던 항생제 투여는 지금 신종 바이러스와 질병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항생제는 내성을 가진, 치료가 불가능한 이상한 박테리아들이 새롭게 만들어내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치료법이 없었던 1900년대 초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KBS 일요스페설 <치명적 유혹, 패스트푸드와의 전쟁> 10월 20일 방송분 중에서)
<패스트푸드의 제국>을 썼던 에릭 슐로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먹음직스러운 햄버거 빵 사이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햄버거 빵 사이에는 각종 화학첨가물과 항생제, 과다한 지방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오염과 착취, 아동노동에 대한 착취, 세계화 속에서 억압되는 지역 문화 등 현대 문명이 뿜어내는 온갖 독소들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이 속에는 우리가 알아야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중요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수많은 동물들에게 주어지는 고통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에서 생산되는 육류의 절반 이상이 패스트푸드 회사들에 공급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패스트푸드를 포함한 전반적인 육류 수요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거대한 집약적 공장식 축산을 통한 가축사육을 야기하였으며, 이러한 공장식 축산에서는 더 이상 동물들이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위해 고기를 생산해내는 기계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집에서나 외식을 할 때 먹는 육류를 그것이 생전에 소였든, 돼지였든, 닭이었든, 혹은 개였든 간에 상관없이 모두 ‘고기’라 부르지요, 그것의 살아있을 때의 모습이나 생활, 종류 등과 관계없이 모두 통틀어 ‘고기’라고 부르는 것에는,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을 비가시화하고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좀 더 그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게 하려는 인간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그 속의 패티가 살아있을 때에 어떤 대접을 받는 소였는지를 알게 된다면, 아마도 먹기가 조금은 꺼려질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 강의에서는 근대 과학의 체계에 따라 발전해 온 우리의 문명이 어떤 희생들을 숨기면서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그동안 숨겨왔던 희생들이 어떻게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는지 등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 속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각자의 대안들을 찾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2. 지배와 종속 - 중심주의의 여러 양상들.
1) 무지와 지식 근대 과학은 꿈같은 미래를 열어 주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기반한 그것은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자유로운 지식체계로 간주되어 왔지요. 그러한 지식체계를 충실히 전달하는 우리의 교과서에서도 역시 이러한 사고의 방식이 나타납니다. 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는 장소로 파악했던 홉스의 사상을 가르치고, 경제 과목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이득이 될 것이라 가르치지요.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생존법칙인 끝없는 생존경쟁 속에서 자연의 진화나 사회의 변동이 일어난다고 파악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적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에 의심을 한 번 품어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탐구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관찰을 해서 계속 같은 결과가 나오면 그것은 진리라 인정되는 형식의 방법을 채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우선 세계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분절적인 요소로 파악하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연구대상을 분리하여 실험실에 격리시키지 않고서는, 물질의 신비를 밝혀내거나 생명의 신비를 밝혀내기 위해 연구대상을 조각내어 분석하지 않고서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지식을 얻을 길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캐롤린 머천트같은 학자는 이러한 형식의 과학이 세계의 전체적 공생의 조건들을 무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강제야말로 근대 과학과 지식 개념의 내면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방법론적 원칙이라 비판하였습니다. 여기에 근대 과학의 미분화와 전문화라는 특성은, 인간이 탐구해야 할 대상들을 수없이 많은 체계로 분류하고 그것만을 전문적으로 탐구하는 연구자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현대로 올수록 점점 그 분야는 더욱 세분화되지요. 그러나 문제는 전문가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우리는 전문가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지식을 제외한 다른 지식들은 무지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생태주의자들은 인간과 생명을 끝없이 미분화하고 이것을 분열시켜 왔던 근대의 과학 체계를 비판하며, 끝없는 성장과 진보, 그리고 끝없는 진리를 추구해 왔던 근대 과학 체계가 사실은 끝없이 ‘나’와 ‘타자’를 양분하고 이것을 위계화하여 서로 적대시하는 논리 속에서 발전해 온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자연과 인간, 여성과 남성, 소비와 생산, 지역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 등 끝없는 이분법과 한 쪽의 희생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지요.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타자’보다 우위에 두는 중심주의적인 사고들이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전문가들의 등장은 이러한 한 쪽의 중심성과 그에 따른 지배와 종속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합리화시켜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보통 아기는 산부인과에서 낳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부터 출산은 병원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을까요? 사실 여성이 일반적으로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서구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1930년대에는 전체 출산 중 30%가 집에서 분만할 수 있는 정상적인 경우로 간주되었지만 1950년대에는 70%가 병원에서 분만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경우로 분류되었다고 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행위는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행위와 마찬가지이지만 이것을 일단 차지하고서라도, 이 결과를 통해 우리는 예전에는 산모와 아기간의 유기적 통일성에 맞추어서 이루어졌던 출산 행위가 이제는 마치 병처럼 취급되어 병원에서 의사의 전문적인 처치를 받고 그에 따라 태아라는 결과물을 생산해 내는 행위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여성운동가들은 출산의 의료화가 여성의 신체를 전문가들이 관리할 수 있는 일련의 파편적이고 기계화된 인식과 그 궤도를 함께 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지요. 산모와 아기 사이에 의사가 존재함으로써 이제는 산모가 아니라 의사가 아기를 생산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성의 진통과 대대로 전해지던 출산의 지식은 무지로 규정되고, 모든 것은 전문가인 의사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과정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근대적 지식이 이전의 지식들을 희생시키며 지배적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과정은 농업 분야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흔히 녹색혁명이라 부르는 농업과 식량생산 분야에서의 변화는 자연을 미분화하고 공생의 한계를 뛰어넘은 작업이 어떤 파괴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보통 인도의 원주민들이 몇 천년동안 지어왔던 농사의 방법보다는 미국의 종자회사에서 개량한 종자를 사용하고, 기계와 비료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는 방법이 더욱 과학적인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지요. 물론 공장에서 제조된 종자와 비료는 전통적인 자연의 종자와 땅의 생산력보다 우수하다고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료와 개량 종자들은 결과적으로 토지의 재생성을 약화시켰고 녹색혁명과 산업적인 농사를 위한 원료들로 사용되었던 토양과 종자는, 지금은 특허를 부여하고 기업의 이윤을 위해 조작되며 소유가 가능한 '유전자원'으로 변모되기 시작하였지요. '원시적'인 전통적 식물의 재생 방법보다 더 많은 생산량을 자랑하게 되었고, 생명체 번식에서의 자연의 한계였던 종의 장벽은 유전자교배를 통해 극복되었지만, 아직 우리는 이러한 변모들이 가져올 위험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상태인 것이 문제입니다. 과학의 혁명은 우리의 무지를 밀어내기 위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여성과 자연을 희생시켰고, 그리고 자연의 한계를 존중했던 우리의 전통적인 지식을 구속이며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에 의존하는 이러한 새로운 전통은 일반인들을 엄청난 무지를 가진 사람들로 변모시켰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지배는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생명공학의 영역에서 가속화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2) 인간과 자연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근대 과학의 사고가 자연을 지배하는 것에서부터 급속도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것으로 우리가 성장과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아무 것도 없던 시절, 인간에게 자연은 극복하기 힘든 존재였죠. 그러나 고대 지중해 문명에서 ‘어머니 지구’라고 지칭했던 지구 자연은 인간의 이성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정복하고 개발해야 할 적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되기 시작합니다. 근대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베이컨이 과학적 지식으로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근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많은 자연을 탐구하고(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에 대한 정복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경제에 힘입어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윤의 극대화라는 효율성의 논리는 이윤을 발생시키는 것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고려하게 만들고, 더욱 전문화되고 대량 생산되는 상품만을 가치 있게 만듭니다. 나아가서 이것은 상품의 생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모두 그 상품을 위해 종속되는 하나의 자원으로 취급하는 것을 정당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토지는 그 안에 무수한 생명들로 인해 살아 숨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전문가들에 의해 가치를 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수동적인 장소로 변화하게 되지요. 이제 단지 ‘원료’를 제작하는 곳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자연이 제공하고 그대로 내버려둔 상태로부터 인간이 무언가를 끌어낸다면, 어떤 것이든 거기에는 인간의 노동이 섞여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든다”라고 말했던 로크의 소유권개념을 굳이 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제 공기나 물, 혹은 땅에서 얻어내는 모든 것들은 지구가 우리에게 준 ‘공짜’ 산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지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자연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들은 당연히 ‘공짜’이지요.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냄으로써 인간이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있다면, 또한 더욱 용이하게 끌어내고 소유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인간이 자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바로 자연을 ‘공짜’로, 그리고 ‘원료’로 인식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분리하여 인식하게 되는 이 과정이 바로 인간이 타자를 지배와 종속의 대상으로 파악하게 되는 시발점이라고 생태주의자들은 파악합니다.
3) 인간과 인간 근대 과학은 무제한적인 성장과 진보에 대한 욕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장에 대한 욕구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어느 것이나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성장에 대한 욕구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거나 생존을 위한 욕구를 해결하고 만족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더 넘어선 지점, 즉 다른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성장을 하겠다는 욕망으로 한없이 커져가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근대 과학이 추구하는 끝없는 진리 탐구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진보를 위해서라는 말속에 이러한 성장과 진보에 대한 욕망을 합리화시키는 과정을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며, 물질적 조건 또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지지요. 그렇지만, 그 한정 없는 욕망을 채우는 것은 한정된 땅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땅, 아직 그들의 ‘원료’가 공짜로 널려있는 비어있는 땅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1492년 4월 17일,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트왕은 콜럼버스에게 ‘발견과 정복’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1493년 5월 4일에는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증여의 칙서’를 통하여 아조레스(대서양 중부에 위치한 현 포르투칼령 제도)의 남서쪽 인도 방향으로 100리그(서양에서 사용되던 거리단위, 1리그=3마일) 내에서 이미 발견되었거나 앞으로 발견될 모든 섬과 본토를 카톨릭 군주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트왕에게 증여하였다. 그러나 이 땅들은 1492년 크리스마스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 국가의 국왕과 왕자들이 점유하거나 소유하고 있지 않은 땅이었다... (중략) ... 1492년에 7200만 명에 이르던 아메리카 원주민 수는 그로부터 몇 세기 후에 40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반다나 시바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중)
“1889년 루즈벨트는 ”정착민과 개척지는 그들 편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정당성을 갖는다. 그들이 없었던들 이 거대한 대륙은 오로지 지저분한 야만인들을 위한 사냥금지구역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에코 페미니즘> 중)
위의 두 글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부여한 근거들을 추측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발견’과 ‘정복’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비어있는 땅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단면을 엿보게 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공짜’이니까 쓸모 없이 버려져 있을 때 소유와 정복은 정당화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그 빈 땅을 ‘증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빈 땅에 들어가 보니 원주민들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미 그들의 눈에는 그 땅에서 살고 있는 낯선 ‘타자’들이 위협적이고 ‘나’와 다른 존재들로 각인되었겠지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설파해 왔던 논리들을 막상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 적용시키려니 그에 대한 타당한 근거들이 필요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글에서 그러한 근거 중의 하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일제 식민기를 거치면서 익히 들어 왔던 ‘개화’의 논리였지요. 인간이 인간을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개량하고 개발하여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아닙니다. 서구식으로 문명화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던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백인들이 마음 편하게 가질 수 있게 해 준 하나의 근거였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마음대로 쳐들어와서 이제 그 땅이 원주민들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는 백인들을 보고 원주민들이 그저 넘어가기만 했을 리는 없었겠지요. 또한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을 더 넓은 땅을 소유하고 싶었던 백인들이 그냥 넘어가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전쟁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물론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던 백인들의 승리로 이어지지만, 자신이 살던 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저항했고, 이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백인들은 대대적인 원주민 살육전을 벌이게 됩니다. 한편으로 백인들은 돈을 주고 땅을 샀음에도 불구하고(지금의 뉴욕은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 총독이 한 인디언 추장에게 24달러 상당의 유리구슬과 장신구들을 주고 사들였다고 합니다) 자꾸만 자신의 가축과 농작물, 심지어는 가족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원주민들에게 공포를 느끼기도 했고, 한편으로 그들은 수많은 원주민들을 죽이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기도 했겠지요. 여기에서 ‘타자’를 마음 편하게 학살하기 위한 또 하나의 근거가 생겨납니다. 즉, 이들을 이미 인간보다 낮은 지위의 존재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동물 혹은 식물로 대체하여 각인하는 것이었지요. 아우슈비츠의 학살 당시, 가장 먼저 나치의 군인들에게 시작했던 세뇌 중의 하나는 유태인을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이나 식물, 혹은 곤충으로 대체시켜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아무런 생각 없이 죽일 수는 없으니,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인식하는 세뇌가 이루어졌던 것이었지요.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들은 인간보다 못한, 즉 인간이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는 인간 외의 다른 생물체로 인식되고, 그러한 속에서 비로소 대량 학살이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전에 내가 머스코기에 있는 사립 인디언 대학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한번은 사람들과 함께 시카고에 간 적이 있었다. 아주 큰 예배가 열렸는데 성가대가 찬송가를 부르다가 잠시 쉬는 동안 내가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내가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작은 백인 소년이 그곳으로 와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이봐, 꼬마야, 지금 누구를 찾고 있니?” “예, 그래요.” 소년은 급히 달려왔기 때문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인디언을 찾고 있어요.” “그래? 그럼, 나를 한번 자세히 보거라. 내가 바로 인디언이다.” 소년이 정장을 하고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나를 자세히 보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얘기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인디언이 아니에요. 당신은 인간일 뿐이에요.” 어렸을 때 나는 삼류 서부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던 장면은 역마차가 인디언들의 고함 소리를 듣고 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팝콘을 먹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야, 드디어 인디언들은 나타나는구나!” 인디언들이 역마차를 둘러싸고 고함을 지르며 화살을 쏘았다. 그러고는 백인들이 장총을 발사하면 세 명의 인디언이 단 한 방에 말에서 떨어졌다. 영화에서는 그렇게도 총을 잘 쏘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병대의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야, 마침내 원군이 나타나는구나.” 초창기의 서부 영화는 인디언들이 피에 굶주린 이교도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역사에서는 우리 인디언들이 거칠고 짐승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그런 영화를 보고 우리에 대한 책들을 읽고 나서야 우리가 거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거친 짐승들’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네 발 달린 짐승들의 친척이라고 생각했고 자연보다 높거나 낮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유럽 인들과 성경이 오기 훨씬 전에 그 ‘위대한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어하트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중) 서구의 식민 지배는 그들을 ‘우리와 다른 존재’, ‘우리보다 못한 존재’로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인디언이 인간이 아니며 그들은 짐승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면서, 서구인들은 한편으로는 이들을 ‘지배’하고 ‘정복’해서 ‘개화’시켜 ‘문명’인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난폭’하고 ‘위험’한 ‘짐승’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구인과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듯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차이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말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은연중에 우리의 의식에 숨어들어 우리가 ‘우리보다 덜 문명화된’ 사람들을 차별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줍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 이라는 말속에는 이전부터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과의 공존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시각 속에서 원주민들은, 마치 근대 과학의 인식체계 속에서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했던 것처럼, 서구인들에게 정복되고 개발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4) 인간과 생명 “1세기 전에 바이즈만이 했던 고전적인 실험은 획득형질의 유전 불가능성에 대한 증거로 여겨졌다. 그는 생쥐의 꼬리를 22세대 동안 연속적으로 잘랐으나, 그 이후 세대는 여전히 정상적인 꼬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수백 마리의 생쥐를 희생시킨 결과는, 다만 이런 종류의 불구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을 뿐이다.” (반다나 시바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중)
동물실험이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라고 합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용되는 동물의 수도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 종의 수도 증가하였다고 하지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실험동물의 수는 한 해 5억 정도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일년에 약 400만 마리가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동물실험은 ‘인간을 위해’라는 모토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제 정당화된 단순한 하나의 제도가 되었으며, 앞으로 과학의 이름으로 동물들에게 어떤 현실이 닥칠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동물실험이 별다른 문제제기나 생명윤리적 성찰 없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는 것에는 인간이 다른 생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시각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동물 실험이 서구에서는 실질적으로 매우 문제가 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생물에 대한 지적 재산권 문제는 아직도 일반적인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부터 강화하기 시작해 왔던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연장선에서 모든 생명에 대한 지배의 구조를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WTO와 생물다양성협약(92년 리우회의에서 기후변화협약과 함께 채택된 조약)과 같이 세계적으로 논의되는 협약들, 미국 무역법의 슈퍼 301조 등에서 우리는 지적 재산권이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과학자의 연구나 창조에 동기를 부여하는 의미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비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갖고 있던 다양한 생명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들을 서구적이고 근대 과학적인 지식 속으로 편입해 나가는 과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 특산의 님(neem)나무는 여러 세기동안 인도의 사람들에게 생물 농약과 약재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서구에서 화학물질, 특히 농약에 대한 반발이 커져가면서 님나무의 약리적 특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1985년 이래로 미국과 일본 기업들은 님나무에 함유된 천연화합물에 대해 12개가 넘는 미국 특허를 획득하였지요. 이 중 미국의 그레이스사는 특허 획득 이후 인도에 공장을 세우고 님나무를 원료로 한 제품의 생산과 판매를 시작하였고, 에이지 바이오테크놀로지 뉴스에서는 그레이스사의 가공설비를 “님나무를 원료로 한 세계 최초의 생물농약 제조시설”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환경운동가들은 인도에 있는 거의 모든 가정과 마을들은 생물농약을 만드는 설비장치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했지요. 실제로 인도의 면화산업단체인 카디와 마을산업위원회에서는 님나무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해온 지 40년이나 되었고, 토착기업들에서는 님나무 치약을 제조해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사에서는 님나무에 대한 특허권을 정당화하며 근대화된 천연화합물 추출공정이 이전의 낡은 기술로 지역공동체에게만 그 이익을 부과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세계적으로 님나무의 중요한 성질을 이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내는 새로운 혁신이라 주장하고 있지요. 우리는 여기에서도 전통적 지식이나 토착 기술이 근대적, 서구적 기술과 지식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지적재산에 관한 GATT 조항의 기본틀>에서는 “생명공학, 즉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미생물을 이용하는 기술은 보건, 농업, 폐기물 처리 등의 산업에서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특허 보호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많은 국가들은 관련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특허보호제도를 수립하는 것을 보류하고 있다. 이러한 보호제도는 생명공학 공정과 미생물 및 미생물의 일부 및 식물체를 포함한 생산물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배타적인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특허제도가 실효성을 가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데, 일부 국가에서는 특정 분야에서의 특허를 제 3자의 요구에 의해 의무적으로 허가를 받도록 명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음식, 의약품 및 농화학 물질이 바로 이런 형태의 차별의 표적이 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특허 소유자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행위”라며 생명공학과 관련한 특허권을 인정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국가마다 지적 재산 보호체계가 다름으로 인해서, 지적 재산권의 소유자는 자신의 권리를 추구하고 지키기 위해서 불필요한 시간과 재원을 낭비한다. 또한 시장접근을 제한하거나 이윤의 본국 송환을 가로막는 법과 규제로 인해서 소유자들의 지적 재산권 행사가 방해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지적 재산권의 보호가 전세계적으로 단일한 기준 속에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명 공학에서의 특허권이나 지적 재산권은 생태계 파괴를 조장하고 종의 소멸에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 패러다임이 생명을 지배하게 되는 순간, 지역 공동체는 파괴될 수 있으며 문화적 다양성은 사라지게 되겠지요. 그래서 생태주의자들은 자연의 창조성과 지역 문화의 창조성의 결과물인 생명체를 특정 기업의 소유물이라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며, 종에 대한 사소한 조작을 새로움의 근원이라 주장하면서 그러한 특성을 오래도록 이용해왔던 지식의 근원이 지역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형태의 세계적으로 보호받는 유전자에 대한 지적 재산권이 새로운 형태의 생물에 대한 엔클로저가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또한 이러한 작업은 마을의 농민들 사이에서, 숲의 부족민들 사이에서, 심지어 대학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지적 공유물’ 형태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지식이나 아이디어, 혁신을 허용하지 않게 됩니다. 지적 재산권의 가장 강력한 보호 형태인 특허가 과학적 연구와 관련을 맺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그 결과가 의사소통의 단절로 나타났습니다. 또 이것은 공적으로 창출된 지식을 사적 재산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지적 창조성의 자유스러운 공간을 사유화하지요. 미국의 한 과학자는 “도둑맞거나 어떤 사람의 작품이 상품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두려움은 동료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을 침묵하게 한다… 일에 대한 사랑은 평범한 상품으로 바뀌고 있다… 돈이 점차 과학발전의 가치를 중재하는 결정자가 되어가고 있다”라며 특허가 확산된 이후의 연구 분위기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생명에 대한 특허는 유기체에 내재한 창조성을 경제적 이익에 종속시키고 사유화합니다. 암환자인 무어의 세포주에 대한 특허는 그의 주치의가 갖고 있으며, 파푸아뉴기니의 하가하이와 파나마의 구아미 인디언의 세포주는 미국 상무부가 특허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근대 과학이 보여주는 요소의 분리와 전체적 유기체를 고려하지 않고 각 요소들을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환원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겠지요. 초국적 기업들이 WTO의 무역관련 지적 재산권(TRIPs)에 근거해서 지적 재산권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유럽의 식민통치자들이 1492년 이래로 지속적으로 주장해오던 자유일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비유럽인들을 정복할 수 있는 면허를 유럽인들의 자연스러운 생리로 간주함으로써 이에 대한 선례를 남긴 지 50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형태의 정복의 면허가 생명체에 대해 제공되고 있는 것입니다.
3. 침묵의 봄
우리에게 놓여져 있는 상황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세계 2차 대전 이후에 유럽에서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에 처음으로 스모그 현상에 대한 발표가 나왔고, 1944년에는 처음으로 DDT가 광범위하게 살포되었으며, 1946년에는 지금은 누구나 사용하는 합성세제가 처음으로 비누를 대체하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 개발되기 시작한 핵무기로 인해 핵의 위험성이 처음으로 제기되기도 했지요. 그래서 이 때부터 환경 대재앙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가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62년에는 레이첼 카슨이라는 여류 생물학자가 <침묵의 봄>이라는 책으로 봄이 와도 꽃이 피고 새가 울지 않는 지구에 대해 경고하지요.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환경 문제는 근본적으로 발전의 산물이다. 발전은 인간이 기술문명을 추구하면서 내건 가장 중요하고 광범한 지지를 받은 모토였다. 발전이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와 집단이 나아가고자 하는 공통된 목적이지만 인류의 발전, 곧 진보 자체가 반드시 미덕일 수는 없다. 발전을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의 결과 역시 많은 해악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바로 인간의 발전의 기치 아래 이룩한 현대 기술문명 사회의 제반 문제점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드러내고 있는데, 슈마허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바로 ‘진정한 발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현재 인류가 비인간적인 기술과 조직 속에서 신음하고 있고,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자연 환경이 파괴되어 붕괴 직전의 징후를 보이고 있으며, 인간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연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물질 지상주의, 기술에 대한 무한신뢰, 왜곡된 풍요의 추구를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슈마허는 환경 문제에 대처하는 인류의 입장을 두 가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그는 과학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는 입장을 맹진파라고 분류하면서 이들은 물질적인 발전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 입장으로 “더 많이, 더 멀리, 더 빨리, 더 풍족하게”를 현대 사회의 모토로 삼을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슈마허가 소개하는 또 다른 입장은 “새로운 생활 양식을 모색하여 인간과 환경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진리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로 이른바, 고향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고향파는 맹진파와는 달리 현재 인류가 누리고 있는 물질 문명을 발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향파는 자연계의 조화를 이룬 법칙을 모두 무시한 채 이루어지는 현대의 기술문명이 인류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파악한다. 편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술은 오히려 인간과 자연을 파괴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오히려 현재의 기술문명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라고 규정하고 있다. 슈마허는 고향파를 기술의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식하는 피상성을 경계한다. 그리고 슈마허 역시 그러한 비현실적인 주장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조금씩, 천천히, 간소하게‘라는 작은 세계관의 모토를 통해 우리가 발전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때, 왜곡된 세계로부터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슈마허의 견해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로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1960년대부터 그로 인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한 환경운동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환경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우리 주변을 둘러싼 것)이나 환경개발론(환경을 보호하면서 개발하자는)에 대항하여, 생태운동으로 촉발되기 시작합니다. 1980년대에는 그야말로 지구를 놀라게 했던 비참한 사고가 발생하지요. 그것이 바로 1986년에 일어난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입니다. 31명이 사망하고 인근 지역이 방사능 물질에 오염되었던 이 사고는 그 후로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 출산되는 무뇌아들이나 인근 지역의 황폐화 등으로 우리에게 인간의 과학이 초래한 생명 파괴의 비극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 사고는 정말로 유럽의 지식인들이나 일반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에 유럽의 주부들은 혹시나 야채들이 방사능에 오염되었을까봐 야채를 사먹지도 못하고, 위험하지 않고 안전한 음식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전전긍긍했다고 하니까요. 오죽하면, 당시 수상이었던 헬무트 콜 총리의 부인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생야채도 안심하고 드시라고 상추를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서도 툭하면 보건사회부 장관이 나와서, 자장면에 문제가 생기면 자장면 먹는 것을 보여주고, 라면에 문제가 생기면 라면 먹는 것을 보여주고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어찌 되었던, 이 이후로도 미국에서는 1979년 펜실베니아의 원전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고, 일본에서는 1999년 도까이무라의 핵연료 전환시험동에서 작업 종사자들이 방사능에 피폭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안전할 것 같나요?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역시 지난 2000년 8월 이후 원자력 발전소에서 170건의 작은 사고와 고장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지금의 사회를, 전세계적인 위험이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위험사회’라고 표현했지요.
4. 중심/주변의 구획을 넘어서-다양성과 전체성의 패러다임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강의를 듣고 있는 여러분 역시 그런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파괴된 지구의 모습이 그렇게 단시일내에 극복될 수 있는 모습은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대체 에너지의 개발이나,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러한 과학의 발전으로 생겨나는 경제적 부를 이용해서 환경 비용에 대한 부담금을 늘리면 이 문제는 많이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계속 이야기해 왔던 근대 과학이 갖고 있는 체계에 대해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 아닌 다른 것들을 미분화하고, 분리시키고, 어느 한 쪽의 중심성을 강조하기 위해 위계화하는 그러한 사고 속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다시금 관계성과 상호연관성, 다양성에 기반한 전체성을 이야기합니다. 자연을 수동적이지도, 난폭하지도 않으며 그 자체로 전체적 연관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여기에 인간은 지구 생명체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 속에서 관계와 연관에 대해 고민하고, 다른 대상들의 다양성을 전체성 속에서 존중하는 존재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없는 우리의 성장에 대한 욕망은 우리에게 끝없는 파괴와 소비를 촉구합니다. 한해에도 수조 원의 음식물 쓰레기를 내보내는 한국의 현실에서 무차별적인 소비의 욕망은 이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대상을 지배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지속적인 성장을 누리려는 경제양식의 변화가 있지 않는다면, 덜 소비하고 자연에 영향을 덜 주는 삶을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으로 우리의 삶의 양식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인간이 낭비하며 사용해왔던 지구 에너지가 가져온 결과물이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시애틀 - 수꾸아미 인디언 추장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냈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가족이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 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 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은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냄새를 사랑한다. 만물이 숨격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 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으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대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늘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 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나날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는 간다. 자기네 하나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헤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 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전화선)로 더렵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렌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는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Chief Seattle Speech
How can you buy or sell the sky, the warmth of the land? The idea is strange to us. If we do not own the freshness of the air and the sparkle of the water, how can you buy them? Every part of the Earth is sacred to my people. Every shining pine needle, every sandy shore, every mist in the dark woods, every clear and humming insect is holy in the memory and experience of my people. The sap which courses through the trees carries the memory and experience of my people. The sap which courses through the trees carries the memories of the red man. The white man's dead forget the country of their birth when they go to walk among the stars. Our dead never forget this beautiful Earth, for it is the mother of the red man. We are part of the Earth and it is part of us. The perfumed flowers are our sisters, the deer, the horse, the great eagle, these are our brothers. The rocky crests, the juices in the meadows, the body heat of the pony, and the man, all belong to the same family. So, when the Great Chief in Washington sends word that he wishes to buy our land, he asks much of us. The Great White Chief sends word he will reserve us a place so that we can live comfortably to ourselves. He will be our father and we will be his children. So we will consider your offer to buy land. but it will not be easy. For this land is sacred to us. This shining water that moves in streams and rivers is not just water but the blood of our ancestors. If we sell you land, you must remember that it is sacred blood of our ancestors. If we sell you land, you must remember that it is sacred, and you must teach your children that it is sacred and that each ghostly reflection in the clear water of the lakes tells of events in the life of my people. The waters murmur is the voice of my father's father. The rivers of our brothers they quench our thirst. The rivers carry our canoes and feed our children. If we sell you our land, you must remember to teach your children that the rivers are our brothers, and yours, and you must henceforth give the rivers the kindness that you would give my brother. We know that the white man does not understand our ways. One portion of land is the same to him as the next, for he is a stranger who comes in the night and takes from the land whatever he needs. The Earth is not his brother, but his enemy and when he has conquered it, he moves on. He leaves his father's graves behind, and he does not care. He kidnaps the Earth from his children, and he does not care.
BIRTHRIGHT
His father's grave, and his children's birthright are forgotten. He treats his mother, the Earth, and his brother, the same, as things to be bought, plundered, sold like sheep or bright beads. His appetite will devour the Earth and leave behind only a desert. I do not know. Our ways are different from yours ways. The sight of your cities pains the eyes of the red man. But perhaps it is because the red man is a savage and does not understand. There is no quiet place in the white man's cities. No place to hear the unfurling of leaves in spring, or the rustle of an insect's wings. But perhaps it is because I am a savage and do not understand. The clatter only seems to insult the ears. And what is there to life if a man cannot hear the lonely cry of a whippoorwill or the arguments of the fros around a pond at night. I am a red man and do not understand. The Indian prefers the soft sound of the wind darting over the face of the pond, and the smell of the wind itself, cleansed by a midday rain, or scented with the pinon pine.
PRECIOUS
The air is precious to the red man, for all things share the same breath - the beast, the tree, the man, they all share the same breath. The white man does not seem to notice the air he breathes. Like a man dying for many days, he is numb to the stench. But if we sell you our land, you must remember that the air is precious to us, that the air shares its spirit with all the life it supports. The wind that gave our grandfather his first breath also receives his last sigh. And if we sell you our land, you must keep it apart and sacred, as a place where even the white man can go to taste the wind that is sweetened by the meadow's flowers. So we will consider your offer to buy our land. If we decide to accept, I will make one condition - the white man must treat the beasts of this land as his brothers. I am a savage and do not understand any other way. I have seen a thou - sand rotting buffaloes on the prairie, left by the white man who shot them from a passing train. I am a savage and do not understand how the smoking iron horse can be made more important than the buffalo that we kill only to stay alive. What is man without the beasts? If all the beasts were gone, man would die from a great loneliness of the spirit. For whatever happens to the beasts, soon happens to man. All things are connected.
RESPECT
You Must teach your children that the ground beneath their feet is the ashes of our grandfathers. So that they will respect the land, tell your children that the Earth is rich with the lives of our kin. Teach your children what we have taught our children, that the Earth is our mother. Whatever befalls the Earth befalls the sons of the Earth. If men spit upon the ground, they spit upon themselves. This we know - the Earth does not belong to man - man belongs to the Earth. This we know. All things are connected like the blood which unites one family. All things are connected. Whatever befalls the Earth - befalls the sons of the Earth. Man did not weave the web of life - he is merely a strand in it. Whatever he does to the web, he does to himself. Even the white man, whose God walks and talks with him as friend to fri - end, cannot be exempt from the common destiny. We may be brothers after all. We shall see. One thing we know, which the white man may one day discover - Our God is the same God. You may think now that you own Him as you wish to own our land, but you cannot. He is the god of man, and His compassion is equal for red man and the white. The Earth is precious to Him, and to harm the Earth is to heap contempt on its creator. The whites too shall pass, perhaps sooner than all other tribes. But in your perishing you will shine brightly, fired by the strength of the God who brought you to this land and for some special purpose gave you dominion over this land and over the red man. That destiny is a mystery to us, for we do not understand when the buffalo are slaughtered, the wild horses tamed, the secret corners of the forest heavy with scent of many men, and the view of the ripe hills blotted by talking wires. Where is the thicket? Gone. Where is the Eagle? Gone. The end of living and the beginning of survival. -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왜 세상은 하나의 위기에서 또 하나의 위기로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는가? 항상 이러했는가? 과거에는 더 나빴던가? 아니면 더 좋았던가? 티베트 고원 위의 오래된 문화의 나라 라다크에서 16년 이상의 경험이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우리의 산업화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라다크에 가기 전에 나는 ‘진보’의 방향은 어쨌든 불가피한 것이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공원 한가운데를 질러가는 새 도로나 200년 된 교회가 서있던 자리에 철골과 유리로 된 은행이 들어서는 것이나, 길모퉁이의 가겟집 대신에 수퍼마켓이 생기는 것이나 우리 삶이 나날이 더 힘들고 빠르게 느껴지는 사실을 모두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라다크가 나에게 미래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고 커다란 힘과 희망을 나에게 주었다. 라다크에서 나는 보다 건전한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나 자신과 문화를 밖에서부터 바라보는 특권을 가졌다.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회에서 살았고 현대세계가 그 문화에 끼치는 충격을 목격했다. 내가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온 외부인으로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 라다크는 아직 본질적으로 서구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변화는 빠르게 왔다. 두 문화의 충돌은 특히 극적이었고 강력하고 생생한 비교를 보여주었다. 나는 우리의 산업화 된 사회를 지지해주는 심리, 가치기준, 사회구조와 기술구조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고대의, 자연에 기초한 사회를 지지하는 것들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사회 경제 체계를 더 근본적인 또 하나의 존재양식,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에 기초를 둔 양식과 비교해 보는 드문 기회였다. 라다크를 통해 나는 파괴적인 변화 앞에서의 나의 수동성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가 자연과 문화를 혼동한 데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가 본 많은 부정적인 경향이 우리의 통제력 너머에 있는 어떤 자연적인 진화의 힘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이 속한 산업문화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또 정말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쟁하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고, 이보다 더 협동적인 사회는 유토피아적인 꿈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았지만 모두가 산업문화의 나라였다. 덜 ‘개발된’ 나라들로 꽤 광범위한 여행을 했지만 내부로부터의 관점을 제공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올더스 헉슬리나 에릭 프롬의 글을 읽는 것과 같은 지적 여행이 한 두 개의 문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산업사회의 산물이었고, 모든 문화가 자신을 영속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눈가리개를 한 채 교육을 받은 것이다. 나의 가치기준, 역사에 대한 이해, 사고의 양식이 모두 산업적 인간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었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프로이드와 오늘날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서구적 주류 사상가들은 실제로 서구의 경험이나 산업사회의 경험적인 것을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드러내 놓거나 또는 암시적으로 그들은 그들이 묘사하는 성향이 산업문화의 산물이기보다 인간본성의 표현으로 여긴다. 서구 문화가 유럽과 북아메리카로부터 뻗어 나와 지상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침에 따라 서구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경향은 거의 불가피하게 되었다. 모든 사회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자신의 채색된 렌즈를 통해 다른 문화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서구문화의 두드러진 점은 그것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또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을 비교해볼 ‘타자’가 없다.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여기고 있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무지와 질병과 끊임없는 노역이 산업화 이전 사회의 운명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에게서 우리가 보는 가난의 질병과 굶주림이 처음 보기에 그러한 가정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날 제3세계의 문제들은 그 대부분은 아닐지 몰라도 많은 문제들이 상당한 정도로 식민주의와 잘못된 개발의 결과이다.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알래스카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는 많은 다양한 문화가 산업적인 단일문화의 침략을 받았다. 오늘날의 정복자들은 개발, 광고, 대중매체 그리고 관광산업이다. 전 세계의 가정에 <달라스>가 방영되고 있고 가는 줄무늬 옷이 유행이다. 올해에 나는 거의 똑같은 장난감 가게가 라다크와 스페인의 산골마을에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푸른 눈에 금발을 한 바비인형과 기관총을 든 람보를 팔고 있었다. 산업적인 단일문화의 확산은 대단히 심각한 비극이다. 하나 하나의 문화의 파괴와 함께 우리는 수세기 동안 누적된 지식을 말살하는 것이고, 다양한 인종집단이 그들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낌에 따라 거의 불가피하게 갈등과 사회의 붕괴가 뒤따른다. 점점 더 서구문화가 정상적인 것으로, 유일한 길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이고 탐욕스럽고 자기중심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성향들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사회의 주된 생각은 오랫동안 우리가 본래 공격적이고 끊임없는 다윈주의적 투쟁에 갇혀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에서 이러한 관점이 내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내재하는 선이나 악을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인간본성에 대한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정치적 이념의 밑에 깔려있고 따라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제도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주류문화 속에는 ‘개발’이나 ‘진보’라는 이름의 구조적 변화에 우리 자신이 어떻게 개입했는가는 무시하고 우리의 문제들을 인간에 내재하는 감정 탓으로 돌린다. 기술 발전은 진화의 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인간이 수천 년 간 진화해온 것 - 두발로 걷기 시작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도구를 사용하면서 진화해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원자폭탄과 생명공학을 발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유럽이 산업화에 의해 변화되는 동안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원칙과 다른 가치 기준에 따라 계속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진화와 산업혁명이 초래한 변화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서구인들이 전통적인 민족들보다 더욱 진화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술의 변화를 변화하는 날씨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고, 그것이 어디든 과학적 발명이 가는 곳으로 우리는 따라가야 된다는 믿음에 갇혀있다. 인간성에는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이나 개발의 과정이 이익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라다크는 나에게 이 과정이 파괴의 잠재력을 크게 증가시킨 한편 탐욕과 경쟁과 공격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주었다. 전에는, 우리가 오늘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속도로 기후에 영향을 미치고 바다에 독을 집어넣거나 숲과 생물의 종과 문화를 말살시킨 일이 없었다. 우리의 파괴력의 규모와 속도가 이렇게 컸던 적은 없었다. 역사상의 전례가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유일한 것이고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 대규모의 환경파괴, 인플레이션, 실업 등은 우파나 좌파 정치학과는 별 상관이 없는 기술경제학적 변천의 결과이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한가지 유형의 과학과 기술에 기초를 둔 한가지의 개발 모델만을 경험하였다. 그에 따른 전문화와 중앙집중화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보다 더 심각한 차이를 압도하는 극적인 삶의 변화를 초래했다. 라다크에서 나는 낭비도 오염도 없는 사회, 범죄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는 건강하고 튼튼하며 10대의 소년이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유순하고 다정스럽게 대하는 것을 어색해 하지 않는 사회를 알게 되었다. 그 사회가 근대화의 압력 밑에서 붕괴되기 시작하는 지금 그것이 주는 교훈은 라다크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관련된 것이다. 티베트 고원의 ‘원시적인’ 문화가 우리 산업사회에 가르쳐줄 것이 있다는 사실이 터무니없는 일로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잡한 문화를 더 잘 이해할 기준선이 필요하다. 라다크에서 나는 진보가 사람을 땅에서 갈라놓고, 서로서로 갈라놓고 그리고는 결국 자기 자신들로부터 갈라놓는 것을 보았다. 나는 원래 행복했던 사람들이 서구의 규범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평온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문화가 개인을 형성하는 데 훨씬 더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점점 더 좁은 관점이 많은 우리의 문제의 뿌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서구문화는, 보다 넓은, 장기적인 관점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전문화되고 당장 눈앞의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전문가들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세력들은 점점 더 심한 전문화와 중앙집중화와 그리고 자본집약적, 에너지 집약적 생활양식으로 이 세계를 빠르게 끌고 가고 있다. 우리는 긴급히 존속 가능한 균형 - 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사이의 균형 - 향해 방향을 돌려야 한다. 라다크는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상호 관련된 세력들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줌으로써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러한 보다 넓은 견해가 우리 자신과 지구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는 필수적인 단계라고 나는 믿는다. - <오해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