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가 전하는 서정
박미정
초여름 들길을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작은 꽃 하나가 바람 속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때다. 사람들은 흔히 장미나 백합처럼 이름난 꽃 앞에서는 감탄을 쏟아내지만, 들녘 가장자리에서 소리 없이 피어나는 개망초 앞에서는 쉽게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보면 안다. 세상에는 소리 큰 아름다움보다 조용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개망초는 그런 꽃이다. 작고 하얀 꽃잎 사이에 노란 마음을 품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면서도 끝내 제 자리를 지킨다. 마치 오래전 어머니의 미소처럼 수수하고, 어린 시절 골목길 풍경처럼 따뜻하다. 개망초들도 그렇다. 흐릿한 초록 배경 속에서 하얀 꽃송이들이 서로 기대어 피어 있다. 어느 하나만 돋보이려 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래서인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도 본래 저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빛나려 애쓰기보다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것.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고개 숙이더라도 함께 피어 있는 것 말이다.
개망초는 들꽃 중에서도 유난히 강인하다. 척박한 길가에서도 피어나고, 비바람 속에서도 쉽게 꺾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생명력을 잡초라 부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끝내 살아내려는 의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화분 속 꽃은 정성 어린 물을 받아야 살지만, 개망초는 스스로 하늘의 비를 기다리고 땅의 숨결을 견디며 자란다. 그래서인지 개망초를 바라보면 삶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나는 어린 시절 논두렁 길에서 개망초를 자주 보았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이 해질녘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친구들과 뛰놀던 흙길에도, 어머니가 밭일을 마치고 걸어오던 길목에도 개망초는 늘 피어 있었다. 그때는 그 꽃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꽃을 다시 바라보니 비로소 알 것 같다. 개망초는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가장 조용히 피어 있던 꽃이었다는 것을.
사람의 삶도 개망초와 닮았다. 누군가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으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이름 없이 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짜 삶의 향기는 어쩌면 조용히 견디는 사람들에게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침 일찍 시장 문을 여는 상인,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어머니, 말없이 땀 흘리는 노동자의 하루 속에도 개망초 같은 서정이 숨어 있다.
개망초는 자기 존재를 과장하지 않는다. 그저 피어날 계절이 오면 피어나고, 바람이 오면 흔들린다. 그리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꽃잎을 내려놓는다. 인간은 너무 많은 욕심 속에서 살아간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화려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개망초는 말없이 가르쳐 준다. 삶은 반드시 화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작아도 아름다울 수 있고, 조용해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초록빛 배경 속 흐릿하게 번지는 빛은 마치 지나간 세월 같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몇 장면뿐인데, 그 기억 속에는 늘 작은 꽃들이 있다. 유년의 냇가, 들판의 바람, 땀에 젖은 어머니의 손등, 그리고 저녁노을 아래 흔들리던 개망초. 사람은 결국 기억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제나 소박한 풍경 속에 숨어 있다.
나는 때때로 삶이 너무 복잡하게 느껴질 때면 들꽃을 바라본다. 특히 개망초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용해진다. 세상은 끊임없이 빠르게 달려가라고 말하지만, 개망초는 천천히 흔들리며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듯하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햇살을 독차지하려 하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계절을 살아내는 꽃. 그것이 개망초의 철학이다.
어쩌면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억지로 누군가를 이기려 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자기 빛으로 살아가는 것. 크지 않아도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조용한 꽃 한 송이처럼 남는 것. 바람이 스친다. 작은 꽃잎들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시 한 편 같다. 소리 내어 읽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천천히 번져 오는 문장들. 개망초는 오늘도 말없이 서정을 전하고 있다.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피어 있는 순간들의 모음‘이라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들길에서 개망초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작은 꽃 앞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