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4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코
3,20-21)
Knowing what was
happening his relatives
came to take charge of
him:
"He is out of his mind,"
they said
말씀의 초대
대사제는 지성소에
들어가 사람들이 마련해 놓은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새로운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성소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를 봉헌하시는 분이시다(제1독서). 새로운 대사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느라 식사도 못하실
지경이었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에 몰두하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유다인들에게는 물론 친척들에게까지도 이해받지 못했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는 장남이고
올해로 아흔이 되신 어머니가 계신다. 가끔 서울에 일 보러 나가면 하룻밤이라도 어머니 곁에 자려고 늦은 밤이라도 찾아간다. 머지않아 돌아가실
터이다. 그러면 나는 이 시간에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동창 신부의 사제관으로 갈까? 아니면 야간열차를 타고서라도 우리 마을로 가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어머니의 존재감이 한없이 클 것만 같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자는 아들에게 밥을 차려 주시는 것을 무척 기뻐하신다. 생선도 발라 주시면 나는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저수지 갈대 끝의 잠자리
허물처럼 껍데기만 남은 몸인데도 아들에게 마지막 밥을 지어 먹이시려는 듯하다. 집을 나서면 잠시 뒤 어김없이 베란다 창을 여시고 아들의 뒷모습을
내다보시며 ‘잘 가라.’ 손짓하시면, 나는 ‘어서 들어가시라.’며 손을 흔들며 답한다. 이런 순간도 이제 몇 번이나 있을지 생각하며 나는
정류장을 향한다. 나는 사제가 된
뒤로 어머니와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혈연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신자들의 혼인 미사 주례는 멀리라도 가서 해 주면서 친척 결혼식에는 참석도 하지
못했다. 바빠서가 아니다. 어머니는 ‘성당 일에만 열심인 것이 신부의 도리’라면서 친척들의 장례조차 알려 주시지 않았다. 아들을 온전히 봉헌하고
싶었던 마음임을 이해한다. 혈육이란 무엇일까?
부모 형제 친척은 출가 뒤라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는 소문에 그분을 찾아 나섰다는 것도
공감하고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출가와 혈연 사이의 최소한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이해해 주는 것도 나이 든 나의 태도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오늘의 묵상 도대체 누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소문을 냈는지요? 예수님을 만난 세리나 창녀, 병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이런 소문을 내고 다녔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한다고 떠들고 다니던 사람들, 안식일 법을 어기고 사람들을 치유한다고 예수님을 없앨 것을 궁리하던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어울린다고 불평을 터뜨리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악성 소문을 내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당시 유다 사회의 지도자라는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바리사이들일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가진 온갖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 권력과 명예, 재물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정상으로 보는 사회라면, 분명 예수님이 미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회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면, 그 반대편을 사는 자신들이 미친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먼 옛날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질적 탐욕으로 끊임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론자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짐을 지우는 사람들, 정의를 가장해서 또 다른 권력을 누리는 사이비 지도자들 ……. 이런 세상이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시대라면, 여전히 예수님을 닮은 ‘미친’ 사람이 필요합니다. ☆☆☆ 갓난아기는 부모가 주는 애정을 듬뿍 받습니다. 부모가 웃으면 아기도 웃습니다. 부모가 신경질을 내면 아기도 찡그립니다. 차츰 아기의 뇌는 부모의 ‘감성적 신호’에 반응하도록 발달됩니다. 느낌이 눈을 뜨는 것이지요. 이렇게 아기들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바탕으로 감정을 읽는 ‘기본 틀’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이 기본 틀에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군요. 부모를 닮은 사람을 쉽게 사랑하게 되는 이유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기본 틀이 있습니다. 처음 믿음을 접했을 때의 느낌일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준비할 때의 생활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신앙의 길로 이끌어 준 분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의 ‘기본 감정’ 위에 ‘믿음의 체험’을 쌓아 갑니다. 그 ‘체험들’을 언젠가는 예수님 안에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관점에서만 그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닮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빠지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을 섬기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말 -박대남 신부- 사람의 말은 끝이 없이 퍼져 나갑니다. 퍼져 나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영원히 남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말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누가 그랬다더라”라는 말을 시작으로 참으로 많은 말들이 공동체 안에서 떠돌아 다닙니다. 어느 선배 신부님이 사석에서 이런 가르침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 특히 신앙인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어느 누가 다쳤다더라’라는 한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 사람 내일 장례미사 한다더라, 라고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앙인들이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경우가 더 많고, 사제의 입은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주님의 사제들이 말을 잘못하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 인간 사제의 말보다는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의 말을 하라.” 우리는 주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우리의 근본을 흔들어 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 많은 말들로 사람을 살렸습니까? 아니면 사람을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드셨습니까? 아니면 미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존재감 - 박 공식- 지난 가을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던 박지성 선수에 대한 보도가 생각난다. 한 시즌 38경기 중에 3분의 1 정도의 경기를 소화한 가운데 3위를 달리고 있던 박 선수 팀은 중요한 경기를 맞게 된다. 하위팀과의 경기지만 선두권에 달라붙느냐 아니면 중위권으로 밀려나느냐의 기로에 서 있고, 이 경기를 마치면 강팀들과의 대결이 남아 있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그날 경기에 나서는 스타급 주전들이 부상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대거 결장하고 박지성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대부분 신예들이었다. 박 선수 팀은 상대팀에게 시종일관 밀리며 졸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박지성 선수만은 달랐다. 그는 전반 종료 직전에 골을 성공시켰고, 후반에도 일대일 무승부 상황에서 경기가 끝나기 직전 드라마 같은 골을 성공시켜 팀을 승리로 이끌고 선두권 진입에 교두보를 마련한다. 이러한 박지성 선수를 두고 언론에서 미친 ‘존재감’ 이라는 표현으로 극찬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미쳤다는 소문이 나고 그 소문을 들은 성모님과 친척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오신다. 당신 아들이 남다른 데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미쳐 있었다. 사람들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미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귀 들려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하느님께 미쳐 있었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미쳐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유다인들의 스승이라고 자처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그냥 평범한 존재감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 예수님은 그야말로 하느님 아버지께, 하느님 나라를 위한 ‘미친 존재감’ 을 지닌 분이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살면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내놓을 만큼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야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 사람은 미쳤다.’ 는 ‘미친 존재감’ 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은 다음 산다 -김찬선신부- “염소와 황소의 피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 피와 관련한 추억은 별로 없지만 오늘 히브리서에서 정화의 피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고등학교 때 얘깁니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삶에 대한 고민이 크고 저 자신에 대한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꽉 차 있을 때였는데,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와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정상에서 한참을 머물다 나무를 꺾어 그것을 짚으며 내려오는데 마침 완전히 술에 취한 군인이 마주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린 저희에게 시비를 걸다가 제 친구의 몽둥이를 뺏어 제 친구를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제가 먼저 그 군인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그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시뻘건 피가 막 흘러내리는데 놀라거나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뭔가 제 안에 있던 나쁜 것들이 싹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평온이 제 안에 깃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의 피가 내 안의 나쁜 것들을 제거하고 평온케 하였을까? 그의 흐르는 피가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피를 식히고 저에게 평온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피는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것입니다. 피가 있으면 살고 피가 빠지면 죽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수혈을 하면 살아납니다. 그러니 피를 본다는 것은 삶의 다른 모든 주제들을 잠재우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극단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불평불만이 불 뱀에 의해 쏙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랜 기간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은 그 불편한 상황과 거친 음식 등 모든 것이 불만이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최고조에 달하자 불평을 한꺼번에 쏟아놓았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 불평을 한 사람을 물어 죽게 하자 불평은 싹 사라지고 살려만 달라고 합니다. 죽게 되자 삶이 보이고 그렇게 큰 문제였던 것들은 하찮은 것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살기 위한 처방이 바로 자기들을 죽게 한 그 불 뱀을 보는 것, 그것도 불 뱀을 높이 매달아 놓고 모두 올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우러러봐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욕정을 잠재우고 피는 모든 욕구들을 정화한다. 그렇게 피는 죽음으로 살린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고 죽기 전에 죽어야 죽은 뒤에 산다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그 참사랑의 피는 우리의 피를 대신하여 우리의 욕구들을 정화하고 욕정에 죽게 함으로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을 섬기게 합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 -이수철신부- 오늘은 ‘미침(狂)’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미치다’라는 뜻이 재미있습니다. ‘1(일정한 곳에)가 닿거나 이르다. 2(언행이)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다. 어떤 일에 지나칠 정도로 푹 빠지다.’였습니다. 어떤 경지에 미치기 위해서는 그 일에 몰두하여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정상인과 미친 사람은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치고 싶은 갈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무엇에, 어떻게 미치는가가 문제입니다. 제대로 하느님 사랑에 미치면 성인이고, 시에 미치면 시성, 그림에 미치면 화성, 음악에 미치면 악성이요, 제 분야에 제대로 미치면 장인이나 명인입니다. 반면 이상하게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술에 미쳐 술중독이요, 돈에 미쳐 돈 중독, 성에 미쳐 성 중독, 일에 미쳐 일중독, 도박에 미쳐 도박 중독 등 끝이 없고 결과는 폐인입니다. 누구나의 미치고 싶은 열정을 어떻게 발산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사랑으로 제대로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정상인의 시각으로 볼 때 집과 친척, 직업을 버리고 무리들과 떠돌아 다니며 생활을 하는 예수님은 미쳤음에 분명합니다. 하늘나라의 비전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미친 예수님이셨습니다. 제대로 미친 사람들이 역사를 이루어 갔고 하늘의 별들처럼 세상의 어둠을 밝혔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인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지 상상해보십시오. 미친 사람들 없는 세상 참 재미없을 것입니다. 미치기로 하면 예수님의 후예들인 우리 수도승들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사랑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머리 깎고 검정 수도복에 수도원 안에서 죄수(?) 같은 생활은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미치기 위해 하느님 안에 정주하면서 하느님 찾는 열정을 기도와 일에 쏟으며 균형 잡힌 삶을 사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잘 못 미친 게 아니라 하느님 사람에 제대로 미쳐 매력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미친 사람들에게 괴력이 나오듯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미친 예수님이나 성인들, 수도승들에게 나오는 내적 힘의 괴력입니다. 얼마 전에 저도 제대로 미친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 감동했습니다. 연상의 불구의 여자와 연하의 카이스트 박사 출신의 부부 간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정상인의 상식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남자 쪽 부모의 집요한 반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막을 수 없어 결혼하게 되었고 몇 년 만에 뜻밖에 만난 두 분의 밝고 행복한 모습에 안심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 안에서 제대로 미친 두 분을 기적처럼 부부로 맺어 주신 것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이상하게 미치면 폐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사랑에 미치는 것입니다. 바로 매일 거행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이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새 계약의 제사는 바로 미사성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완전한 성막의 미사 안에서 대사제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함으로 영원한 해방을 얻어 하느님을 향해 제대로 미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은총)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충실히 섬길 수 있게 합니다. 이 모두 새 계약의 제사인 미사 은총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여 당신 사랑 안에서 제대로 미친 성인의 삶을 살게 해 줍니다. 아멘.
저는 특별히 바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번은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에 갑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파트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서, 관리원이 출입하는 차량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 차량이 들어올 때면 “어디 가세요?”라고 항상 묻습니다. 그러면 아파트 동과 호수를 불러주어야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아파트 입구에서 “어디 가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글쎄 부모님 사시는 아파트의 동과 호수가 어떻게 되는지 도대체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백 몇 동인데……. 그리고 호수는 어떻게 되지? 13층 맨 왼쪽이니까 1301호인가?’
결국 ‘잠깐만요.’ 라고 말한 뒤에 수첩을 보고서야 제대로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모님 집이라고 해서 저절로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부모님 집이라도 자주 가지 않으면 아파트 동과 호수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잘 아는 사이라는 이유, 나와 가깝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서 “나는 그 사람을 너무나 잘 알아. 그 사람은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자주 만나고 가까이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아닌 남이기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하면서 섣부르게 판단합니다. 그 결과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전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친척이라는 가까운 관계이기에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지금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히 미쳤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서는데, 이는 아마도 가문의 명예를 염려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판단만을 내세우다보니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었고 심지어 하느님 아들의 행동을 미친 행동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과 가깝다면 가까울 수 있는 친척이라는 점에서 우리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반대자가 되어 예수님의 행동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 믿은 지 오래되었다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요. 죄를 지으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아.”하면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그러면 안 되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면서 엄격한 잣대를 내세웁니다.
혹시 지금 내 자신이 예수님의 반대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뜻에 먹칠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어렵게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계속 바쁘게 움직이며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가질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루실 볼)
정말 미쳤어! -김연희 수녀- 가톨릭 신자가 겨우 한 명밖에 없었던 우리 동네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던 그 신자는 동네에서 자신의 종교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앙의 불모지에서 어찌된 일인지 그 아랫집에 사는 어린 남매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라서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수녀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모두 영세하여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동네 사람들은 그 집안은 이제 망했다, 그들은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반응을 들으면서 ‘그들이 미쳤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우리의 신앙상식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지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그분을 붙잡으러 몰려오는 친척들을 만납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이 표현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는지 생략하고 있습니다. 자기실현을 위해서만 투자하고 그것을 최선의 가치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적인 가치에서 벗어난 이들을 보며 ‘제 정신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어쩌면 참 신앙인은 제 정신이 아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뜻,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의 삶을 매순간 살아갈수록 “정말 (주님께) 미쳤어!”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믿는 구석 -전삼용신부-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두 자매인데 언니는 그래도 부모를 무서워해서 야단치면 그것이 먹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워낙 당돌해서 부모가 아무리 겁을 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아빠가 두 아이를 야단치고 있는데 언니는 울먹울먹하며 반성의 기미가 보였지만 막내는 여전히 눈만 말똥말똥 뜨고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아빠는 이번에야말로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턴 너 내 딸 아니니까 어서 고아원가게 엄마한테 입을 옷 달라고 그래.” 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딸은 겁도 안 먹고 엄마에게 가서 옷을 달라고 챙겨 입는 것입니다. 아빠와 엄마는 여기서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차로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겁도 없이 부모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차에 태워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 아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제부턴 네가 알아서 살아!” 그래도 아이는 겁을 먹지 않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차를 타고 떠나는 시늉을 했습니다. 몇 미터쯤 가니까 아이가 차로 막 뛰어오는 것입니다. 아빠는 이제 됐다 싶었지만 창문을 내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아빠 아니라고 하는데 왜 따라와?” 아이는 아빠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아저씨, 고아원까지만 태워주시겠어요?” 부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이를 태워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는 사연입니다.
저는 이 사연을 들으며 많이 웃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요? 사실은 저도 조금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왔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나가라고 한다고 그냥 나간다고 어머니가 더 열이 받으셨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나를 버리실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두 아이 중 부모를 끝까지 신뢰한 아이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막내가 아니었을까요? 막내가 아주 부모가 싫어 정말 고아원에 가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면, 실제로 막내는 부모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겁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그런 당당함이 나올 수 없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시고 그 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당시엔 지금과 달라 가문의 집결력은 매우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라의 지도층들에 대항하고 모세의 율법을 고쳐가며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한다는 말을 듣고 가문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입니다. 가장 믿고 힘을 주어야 할 친척들로부터 예수님은 배척을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복음에 보면 가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동네인 나자렛에서 배척당하고 심지어 재판 받으실 때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백성들까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함께 해 왔던 제자들도 한 명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예수님을 홀로 남겨놓고 모두 도망쳐버립니다.
세상에 예수님만큼 큰 사랑을 주신 분도 없고 또 예수님만큼 사랑 때문에 실망하셨어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은 하시되 실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성모님은 당신을 실망시키시지 않을 것을 굳게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힘은 두려움과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들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아 다시 사랑이나 정을 주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신자들에게 상처받은 신부님들은 다시 본당 나가기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지 말고 영원히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는 하느님께 먼저 모든 희망을 겁시다. 주님께 거는 이 믿음이 나를 실망시키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게 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성소 밖에도 계시는 성소의 하느님
-김찬선신부- 이스라엘의 성전에는 ‘성소’가 있었고,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구별된 지역입니다. 이방인은 들어갈 수 없는 聖所가 있었고 정해진 사제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至聖所가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인도에 가서 빛의 축제 때 힌두 사원에 들어갔습니다. 힌두 신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들어간 것입니다. 저는 외국인이기에 괜찮았지만 그 바람에 저를 안내하던 인도 신부님이 무차별 구타를 당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區別心을 경계하는 그들이 구별 정도가 아니라 차별을 하니 말입니다. 실제 있었던 얘기인지, 지어낸 얘기인지 모르지만 어느 관광객이 인도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바닥을 닦던 더러운 걸레로 식탁을 닦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더러운 걸레로 식탁을 닦느냐고 따졌더니 당신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구별하느냐고 반문하더랍니다. 실제로 제가 강가(갠지스) 강에 갔을 때 시체가 떠다니는 더러운 물에서 목욕을 하고 이빨을 닦고 성수라 하여 집에 가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걸레와 물은 더럽고 깨끗하고를 구분하지 않지만 강가 강은 다른 강과 달리 성스러운 강으로 구분하고 사람은 카스트 제도에 따라 철저히 구별하고 더 나아가 차별까지 합니다. 우리의 성당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는데 굳이 성당이라는 곳을 따로 정해 놓고 하느님을 거기에 가둬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은 성당이라는 장소에 갇혀계실 분은 아니시지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이 산이냐 예루살렘이냐 하고 장소를 따지지 않아도 될 때가 온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얘기하듯 “그리스도께서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실”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두 가지로 편재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기에 성당 안에서도 만나고 성당 밖에서도 만납니다. 성당 안에 성체로서 현존하시는 하느님도 만나고 성당 밖에 모든 것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도 만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성당 안에서만 하느님을 만나고 성당만 벗어나면 하느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당은 또한 우리 신자들의 독점적 장소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 장소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나 이곳에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합니다. 일본에 갔을 때 신자들이 아닌데도 성당에서 결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일본 교회가 허용한 것이고 많은 일본인들이 성당에서 결혼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 저도 정동 수도원에서 두 차례 비신자 결혼을 주례하였습니다. 친구 결혼식 때 저희 수도원 혼배 미사에 참석했다가 자기도 친구와 똑같이 결혼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말씀의 전례 형식으로 결혼을 주례하였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고 누구에게나 당신을 주시고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양승국신부- <눈도 있지만 눈꺼풀도 있지 않느냐?>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 사람이란 존재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와 알고 지내고, 오랜 날들 그와 한솥밥을 먹었고, 숱한 희로애락을 그와 같이 해서 이제는 충분히 그에 대해 알겠노라고 자신하지만, 그래도 장담해서는 안 될 존재가 사람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 안다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라고 합니다. 나란 존재 안에는 4측면이 공존한다고 합니다.
① 나만 보는 부분이 있습니다. ② 나는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는 부분이 있습니다. ③ 나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④ 오직 하느님만 보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나간다는 것, 인간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무한한 가능성, 끝도 없는 성장의 가능성을 지닌 대단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물론 “그냥 둬! 제발.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하시는 분에게는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을 알면 아는 만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좀 더 파악한다면 그만큼 더 하느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은 역시 아무도 못 보는 부분입니다. 사각지대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바깥은 쳐다보기 전에 먼저 바라봐야 할 곳은 내 안입니다. 이웃의 흠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쳐다봐야 할 곳이 내 발끝입니다. 한 공동체에 큰 과오를 범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정도를 넘어선 큰 실수였기에 다들 뭔가 큰 벌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도 스승께서는 잘못을 범한 제자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과오에 대한 아무런 질책이나 벌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흘이 지나도 스승님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아하게 생각한 다른 제자들이 달려가서 따졌습니다.
“스승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저희에게는 눈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그 말끝에 한참을 껄껄 웃으시던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눈도 있지만, 눈꺼풀도 있지 않느냐?”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 인한 작은 소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이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활발히 사목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기적도 일으키시고, 치유도 행하시며, 엄청난 메시지가 담긴 강론도 서슴없이 해나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매료되어 그분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 앞에 예수님의 친척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미쳤다는 자체 진단을 내리고 예수님을 광에 가두려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 충만한 영성생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의치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우리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우리 신앙생활의 깊이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더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그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참맛을 조금 더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나가는 것,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점점 바뀐 모습이 자연스럽고 - 이창걸- 1999년 3월 미국연수에서 돌아오자 과에서 큰일이 벌어져 있었다. 전임 과장님이 장비관련 뇌물수수라는 이름으로 억울하게 구속된 것이다. 과거부터 고가의 장비가 도입되면 장비회사는 과의 발전기금으로 얼마씩을 기부해 왔는데 그 돈은 대부분 학술활동에 사용되고 사적인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병원에서 개인 용도로 사용된 사례가 드러나면서 이런 기금을 받은 것 자체가 불법이라며 구속되었다. 나는 당시 새 과장님과 상의해서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것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기도모임이 열렸다. 직원들은 처음에는 전임 과장님이 구속되었기 때문에 모두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와 성경을 읽고 나눔을 했다. 차츰 일이 해결되면서 기도모임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교회를 나가지 않는 직원들도 돌아가며 기도하게 되었다.
모두들 내가 이상하다고 했고 미국에 다녀와서 180도 달라졌으니 한 번 더 다녀와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기도회 중에 기사장인 박 선생님이 나를 원망과 약간은 분노에 찬 모습으로 바라보던 것이 생각난다. 토요일 아침에 교회도 다니지 않는 자신이 왜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직원들은 서로를 위하는 기도, 환자를 위하는 기도로 발전했고 과의 분위기가 과거와는 달리 서로가 이해해 주고 환자들에게 친절한 과로 변하게 되었다.
영동세브란스병원으로 파견되어 오면서도 직원들이 당연히 기도모임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세상 것을 추구하던 나는 어느 순간 변화되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변했다(미쳤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다. 그러나 내 삶의 방향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다. 삶의 방향이 바뀌고 처음에는 새옷을 입은 듯 어색했지만 점점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변화됨을 느낀다.
새벽을 열며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저와 반대 방향의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할머니! 손을 놓으세요. 제발 손을 놓으세요.”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면서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를 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할머니가 “사람 살려”를 외치면서 소리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할머니의 손을 어떻게든 떼어놓으려고 안달입니다.
상황은 아주 간단합니다. 할머니는 난생 냅?에스컬레이터를 타셨나 봅니다. 당연히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겠지요. 그 두려움에 에스컬레이터의 옆 부분에 고정되어 있는 난간을 꼭 잡고 올라타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발은 에스컬레이터 위에 올라져 있으니 올라가고, 손은 고정되어 있는 난간을 꽉 잡고 있으니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손을 놓으시라고 제발 좀 손을 놓으라고 이야기하면서 손을 떼이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신속한 조치로 할머니께서는 다치시지 않고 지상으로 나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주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맡겨야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어떤 스승이 자신의 제자와 함께 숲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에 달라붙더니만,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깜짝 놀랐지요. 그래서 얼른 나무에 매달린 스승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나무에 매달린 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무가 스승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도리어 나무를 꼭 잡고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스승님, 스승님께서 손을 놓으시면 나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맞다. 물질과 명예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물질과 명예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괴롭다고 그리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이란다.”
지금 나의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에 찬 시선으로 미쳤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꼭 잡고서 힘들다고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손을 놓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이 새벽에 뜨거운 마음으로 묵상을 하게 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보세요. 새로운 것을 많이 볼 수 있답니다. 빠다킹신부 객기와 투신 -이중섭 신부- 마르코 복음 1장 9-11절부터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숨가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고 했겠는가 말입니다(마르 3,20). 그런데 여기 3장 21절에 와서 이야기는 갑자기 제동이 걸립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문은 그렇지만, 예수님은 몸 바쳐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바쳐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투신(投身)이라 합니다. 투신의 반대는 객기(客氣)이지요. 객(客)이라는 말이 가리키듯 밖에서 들어와 일시적으로 덧씌워진 기(氣)의 발로입니다. 객기에 대비되는 말은 투신입니다. 평소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일상의 삶이 쌓이고 쌓여 그쪽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 투신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에 투신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마음만 앞서서 늘 객기만 부리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객기와 투신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 신명(神明)입니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신명이 나서 기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명이 나서 일을 하다보면 투신할 날이 올 것입니다.
바람에 꽃잎 지듯 -문화순 수녀-
바람에 꽃잎 지듯 가볍게 눈이 내린다. 눈송이가 얼마나 큰지 몇 송이만 받아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다. 알래스카의 나뭇가지는 겨울이 긴 탓에 실핏줄같이 가늘다. 굵으면 눈에 가지가 부러지겠지. 가지마다 눈꽃이 아름답다. 하느님께서는 꽃도 없는 긴 겨울을 백색의 눈꽃으로 꾸며주셨다. 참 놀랍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이 온통 얼음 궁전으로 변해 있다. 얼음 요정들이 나올 것 같은 숲속이 궁금해 자꾸 숲으로 눈길을 둔다. 하얀 도화지로 변한 성당 마당에 가끔 사람 이름을 적는다.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그냥 밟기엔 너무 죄송스러워 하느님께서 보시고 기억해 주셔야 할 분들의 이름을 적어보는 것이다. 우리 수녀원 옆집에 혼자 사는 남자분이 이사를 왔다. 아직 인사는 나누지 않았지만 마음이 자꾸 쓰인다. 좋은 이웃들이 있다고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 할까? 그러나 남자 혼자 있는 곳에 수녀들이 찾아가기엔 뭣하고. 가만히 보니 참 부지런도 하다. 새벽같이 커튼을 젖히고 눈이 내리자 즉시 눈사람 두 개를 만들어 집 쪽으로 거리 쪽으로 세워두었다. 그분의 마음이 우리한테도 전해지는 것 같다, 따뜻하고 포근한 마음씨 좋은 이웃으로. 예수께서도 참 부지런히 다니시며 일을 하셨다. 예수님이 동네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와 병을 치유받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좋은 일을 못마땅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대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저 말은 시기심에서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분명히 좋은 일을 가지고 부정적인 말로 매도하거나 옳은 일을 한 사람을 그릇되게 판단하는 일들이다. 위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를 매장하려 한다. 남의 말은 방수처리가 잘된 옷처럼 스며들지 않게 하면서 남에게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이다. 대개 착한 사람들은 그 위선자들의 영악한 머리를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착한 사람이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잘못되게 보인다. 그래서 세상?죄는 더 크다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보고 마귀가 들었다고 하는가 하면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저렇게 한다고 떠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사람의 심성이 똑같은지. 시편에 보면 ‘마음이 올바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먼저 마음을 고쳐야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를 시기하거나 미워하거나 그리고 나와 다른 그 누구를 비난하는 일은 없는지 마음을 살펴보아야겠다. 예수님이 미치셨다? -- 김홍태 신부 -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분의 일행이 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몰려들어 음식을 들 겨를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그분을 찾아다니는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다니!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못 받는가 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이들이 예수님이 베엘제불, 곧 마귀 두목에게 사로잡혔다고 떠들어댔기 때문일 것입니다(마르 3,22). 그러나 오로지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위로와 용서를 전하며 진리를 선포한 예수님이 어째서 미쳤다는 말입니까? 미치고 마귀 들린 건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선을 베풀 때에도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 스스로 나팔을 분다(마태 6,2). 그들은 기도할 때에도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6,5). 그들은 단식할 때에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침통한 얼굴을 하고 다닌다(6,16). 그들은 부모에게 해드릴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말만하면 부모를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15,5-6).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23,4).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23,5). 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란다(23,6-7), 그들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성전보다 황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23,16-17).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23,23).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율법학자들이요 바리새이들입니다. 도대체 누가 미쳤고 마귀 들렸다는 겁니까?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는 인도 마발 지방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 지방에서는 악마의 상을 희게 칠한다고 합니다. 악마는 흔히 정결과 정직의 탈을 쓰고 인간에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이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고 실천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마귀 들렸고 미쳤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날 현대 사회도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을 미쳤다고 말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거꾸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아무리 세상이 뒤집혀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 -이수철신부-
갈 곳은 많은 것 같은 데 막상 가려하면 갈 곳이 없고, 만날 사람은 많은 것 같은 데 막상 만나려하면 만날 사람이 없는 우리의 역설적 현실입니다. 그래서 매일 주님을 만나기 위해 미사에 오는 우리들입니다. 또 여기 수도원을 찾는 많은 이들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고, 여기 아니곤 마음 털어 놓고 이야기 할 곳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많은 장소들에, 사람들인 데 갈 곳이 없고, 만날 이가 없다는 사실이 참 신기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통하는 장소나 사람이 생기면 한없이 빠져들게 됩니다. 이래서 삶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것입니다.
외로움, 쓸쓸함, 고독함, 인간의 본질적 현실 같기도 합니다. 하여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탈선하여 방황하기도 하고 미치기도 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 되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됩니다.
제대로 미쳐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온전하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요 세상입니다. 하여 돈에 미쳐 돈 중독이, 마약에 미쳐 마약 중독이, 도박에 미쳐 도박 중독이, 술에 미쳐 술 중독 등 갖가지 중독으로 폐인이 되기도 하고, 반면 자기 전문 분야에 제대로 미쳐 예인(藝人)도 되고, 철인(哲人)도 되고, 장인(匠人)도 되고, 도인(道人)도 됩니다. 그러니 제대로 미쳐 나름대로 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성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사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의성(醫聖)이라, 시인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시성(詩聖)이라, 음악으로 일가를 이룬 이를 악성(樂聖)이라, 바둑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기성(棋聖)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결국 하느님께 제대로 미쳐 성인으로 사는 게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별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에 미쳐 하느님 중심으로 참 나를 살아가는 이가 성인입니다. 이래야 욕심의 구름 걷혀 맑고 튼튼한 영혼으로 세상 것들에 중독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도 깊이 있고 거룩하게 살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제대로 미친 분입니다.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친지들 예수님이 미쳤다 하여 붙잡으려 왔다 합니다. 가정을, 고향을, 친척을 버리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예수님,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미친 행색이었을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이 단조로운 반복의 일상,
미치지 않고는 살아내기 힘들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께 미쳐야 풍요롭고도 새로운 정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매일 새 하늘과 새 땅을 살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 제대로 미쳐 사는 데 기도와 일의 규칙적 삶의 리듬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하느님 아닌 세상 것들에 미치면 중독되어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사실 미치기로 하면 가정, 고향, 직장, 재물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온 우리 수도자들도 예수님과 똑같이 미친 사람들입니다.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미쳐야
제정신의 성인으로, 참 사람으로 제자리에서 살 수 있습니다. 매일 미사 은총으로
세상 중독을 해독시켜 주시고 하느님께 제대로 미쳐 맑고 튼튼한 영혼으로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히브리서 말씀대로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더욱 잘 섬기게 하십니다. 한량없는 미사성제의 은총입니다. 아멘.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양승국신부-
<영양가 만점의 의미 있는 하루>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위해서, 형제들을 위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런 날, 저녁은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합니다. 잠자리에 들면 마음이 얼마나 뿌듯해지는지 모릅니다. 비록 ‘뒷골이 땡기고’, 삭신이 쑤시지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는 마음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듭니다.
반면 하루 온종일 허송세월할 때가 있습니다. 축 쳐진 몸으로 하루 온 종일을 TV 앞에서 보낸다든지, 쓸 데 없는 대화나 근심걱정으로 ‘영양가 전혀 없는’ 하루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 저녁은 얼마나 마음이 공허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 성인께서 후배들에게 이런 강조를 자주 하셨던가봅니다.
“형제들이여, 일, 일, 일을 하십시오. 휴식은 천국에 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끊임없이 몰려드는 군중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던 예수님과 제자들 삶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즘 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바쁘다고 합니다. 연세 지긋한 할머님들께서도 한번 모이자고 하면 바쁘다고 하십니다. 스케줄 확인해봐야 한다며, 서로 시간 맞춰야 한다며, 한번 모이는 것이 여의치 않습니다.
저 역시 바쁩니다. 때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 때문에 바쁜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조용히 제 일상을 관찰해보니 어떤 때 노느라고 바쁩니다. 쓸 데 없는 일, 무가치한 일, 교회나 세상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에 뛰어들어 헤매느라 바쁩니다. 전혀 아닌 길로 접어들어 다시 빠져나오느라 바쁩니다.
이제는 보다 의미 있는 일 때문에 바쁘면 좋겠습니다. 보다 사목적인 일로 인해 바쁘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좀 더 밝게 하는 일, 이웃들의 삶을 드높이는 일로 바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목적 열정으로 인해 바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얼마나 바빴던지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끼니마저 거르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복음 선포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으면, 얼마나 깊이 투신하셨으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오해까지 했습니다. 자기 몸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식사마저 건너뛰며,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치유활동에 전념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미쳤다는 소리까지는 아닐지라도 몸과 마음을 바쳐 복음 선포에 한번 투신해보면 좋겠습니다.
의미 없는 하루, 영양가 없는 하루, 그저 그런 하루, 그래서 허전하고 슬픈 하루가 아니라 우리의 에너지를 완전히 한번 쏟아 붓는 하루,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외로운 진보의 길 -박상대신부- 일년 중 가장 짧은 복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막상 오늘 이런 대목이 ’복음’으로 봉독될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복음도 복음(福音)이다. 문맥상의 뜻을 살피기는 좀 어렵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산에서 선발하여 뽑아 세운 12제자를 데리고 예수께서 다시 산을 내려오시어 집으로 가셨다. 여기서 집은 가파르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을 말한다.(1,29; 2,1) 그런데 예수께서 집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또 다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모여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필요한 청을 들어주셨을 것이며, 제자들은 스승 곁에서 시중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이 미쳤다는 소문과 함께 가파르나움에서 45Km 정도 떨어진 예수의 고향 나자렛의 친척들에게 전해졌을 것이고, 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예수를 붙들어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12제자의 선발은 마치 주교서품식이나 사제서품식과도 같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가 사제서품을 받았던 날(1988년 2월 6일)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혼미하다. 다음날 첫미사를 마치고도 한참 지나서 축하식장에 참석해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사실 그 때는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몰랐다. 서품식과 첫미사를 마치자마자 첫강복(benedictio prima)을 받을 신자들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었고, 정성껏 강복을 베풀던 필자는 결국 중간에 붙잡혀갔다. 그러나 그 때 ’미친’ 일을 하다가 붙잡혀 간 것은 아니다. 아무튼 지금도 서품식과 첫미사의 날은 생애 최고의 기쁨과 은혜의 날로 기억된다. 어찌 나의 날들을 예수님의 날들과 비교할 수 있으랴. 우리가 식음을 전폐하고 어떤 일에 몰두하면 ’정신이 나갔다’거나 미쳤다’는 말을 듣게된다. 또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종종 ’미쳤다’는 말을 듣게된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의 도래는 새로움의 시작이요, 그분의 활동은 새로움의 연속이다. 예수께서 몰두하시는 일은 기존의 관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와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도 바로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예수를 미쳤다고 보는 생각은 결국 당시 예수를 반대하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예수의 인척과 친척들도 예수를 오해하고 불신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예수의 반대자들이 백성의 지도층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이는 곧 가문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는 공존(共存)하기 힘들다. 예수님의 진보적 행보(行步)에 모두가 동감하고 동참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분명히 과욕이다. 진보는 늘 외로운 길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길을 묵묵히, 그러나 자신 있게 가실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또한 외롭고 쓸쓸한 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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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