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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묵상글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key man에게 필요한 것.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6:50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5:38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오늘부터 추가합니다.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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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22 05:54
- key man에게 필요한 것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권력형 비리와 관련 있는 말이지요.
필요 없는데도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직위에 있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인데
환경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고 노력으로 그리되기도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교회와 교회의 자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교회는 당신이 세우시겠다고 하시고,
교회의 자리들에 필요한 사람도 오늘 당신이 임명하시며,
임명하신 다음엔 자리에 필요한 힘을 주십니다.
사실 베드로를 보고 또 베드로가 적합하여
당신 교회를 그 위에 세우시기로 작정하거나
그를 교회의 기초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교회설립의 Key man이 아니라는
곧 열쇠를 쥔 인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교회는 당신이 세우시겠다고.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Key man으로 삼으시고 만드시겠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에게 열쇠(key)를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열쇠는 본래 베드로의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셔서 쥐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과 의탁과 순종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앉히시고
주님께서 그 자리에 필요한 힘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나의 교회가 아니니 내가 너무 걱정하지 않고
주님께 현재와 미래를 맡기겠다는 자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한번은 작은형제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크게 의혹에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번민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의 기도에 나타나시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야, 누가 이 수도회를 세웠냐? 너냐? 나냐?
누가 이 수도회의 주인이냐? 너냐? 나냐?”
그때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수도회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때 이후로 자기가 세운 수도회마저 주님께 완전히 내어드리고 맡겼습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교회와 공동체를 끌고 가려는 자세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뜻대로 이끌려는 순종의 자세가 필요하고
형제들의 뜻이 주님의 뜻이라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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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우리의 빈틈을 뚫고 비쳐 나오는 하느님 사랑의 빛!
✠ 마태오 복음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전에도 한두 번 언급해 드렸듯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반석은 바위라는 뜻을 지닌 이름의 베드로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베드로가 선언한 믿음 고백, 즉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축일들을 두 번씩 지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 축일에다 바오로는 '회심 축일'을 한 번 더 지내고, 베드로는 초대 교종으로서 베드로의 사도좌(교황좌) 축일을 지냅니다. 이 두 분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서 지니는 의미가 참으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의 사도좌 축일을 지낼 때마다 약간의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날을 위해 교회가 선정한 복음 내용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어제 우리는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 내용을 들었고,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어서 마태오 복음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같은 이야기인데, 어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포함되어 있다는 예수님의 확언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을 반박하고, 그로 인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질책과 호된 권면을 받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 사도좌 축일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주님께서 그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내용만을 듣게 됩니다.
아쉬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황좌 축일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베드로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함께 들어 있는 복음 내용이 선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사실 좌(座)는 임금과 황제 등의 자리, 즉 권위와 거기에서 나오는 가르침(혹은 명령?)이 지니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기에 교회는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냅니다.
하지만 이 '좌'는 모든 신앙인들의 귀감 혹은 모범으로서의 자리(좌)여야 하기에, 교황의 "무류권" 같은 것이 강조되지 않고 오히려 베드로의 부족함이 풀풀 풍기는 "자리"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베드로의 모범이 무언지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신앙의 여정을 해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 이런 부족함과 실패의 과정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디딤돌(반석)로 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있으니 넘어지더라도 끈기 있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이 여정을 걸어가라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 귀감이요 모범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실패가 그저 실패요 패배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이런 완벽주의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적어도 겉으로라도 그 완벽함에 이르지 못하게 되면 자괴하고 절망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베드로 사도의 이 "빈틈"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베드로 사도의 이런 "빈틈" 있는 신앙 여정이 우리 신앙의 여정에 있어 크나큰 귀감이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곁에는 베드로 곁에서처럼 그 "빈틈"을 메워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서 꿋꿋이 이 신앙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저는 베드로 사도가 오늘 고백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지니는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이들과 달리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믿음 고백 위에 서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질물하셨을 때, 엘리야나 예레미야, 혹은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라고들 한다고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이들은 모두 죽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만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달리 말해서 죽은 이는 우리가 아무렇게나 이야기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이득을 위해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참된 하느님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하느님을 두고 그렇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하느님이 바로 니체가 "하느님은 죽었다."고 말했던 그 하느님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통제할 수 없지만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빈틈"이 크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우리가 깊이 새기고 다짐하고 간직해야 할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늘 특별히 우리에게 있는 빈틈이 하느님 사랑을 받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듯이, 다른 이들의 빈틈도 그렇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히려 어쩌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빈틈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이런 빈틈이라도 없다면 우리는 아마 숨이 턱턱 막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부족함과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도 그러려니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것들도 다 어쩌면 우리에게 완벽주의라는 허황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희망의 빈틈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빈틈이 바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옆으로 치워지는 빈틈이고, 이 빈틈을 통해 그 어두운 무덤 안에서 환히 빛나는 그분의 빛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죽음으로터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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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22 05:25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은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 말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아퀴나스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구원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믿음의 대상도 모르고,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구원 대신 ‘돈’이 자리 잡으면서, 믿음의 대상도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는 것에, 원하는 것도 돈이고, 돈 벌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부로 살면서 분명한 깨달음은 돈이 나를 편하게 해 주기는 하지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돈, 돈, 돈’ 하면서 돈을 애지중지하던 사람도 돈을 들고서 하늘 나라에 가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처럼 여겼던 ‘돈’이었는데, 더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자녀들이 이 돈 문제로 남남보다 더 나쁜 관계로 돌아서는 경우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무엇을 지향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해 줄 하느님을 믿어야 하고,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원해야 하고, 이를 위해 지금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복음에도 나오듯, 베드로가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또 이 세상 안에서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누구를 믿고,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 베드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을 분명히 알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 5,2.3)
구원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베드로 사도가 보여 주셨던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마음, 그리고 지금 열성을 다해 기쁜 소식을 전했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시달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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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거나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미워하거나,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 생활 전체를 볼 때, 겨우 1%를 차지할 뿐 나머지 99%는 다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다자이 오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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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우선,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3중의 고백, 곧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곧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성을 지니신 분이요,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그리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열쇠”는 권한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주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의 축제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권한”이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오직 하늘에서 오는 그 “매고 푸는” 능력으로 모든 형제들에게 믿음을 굳게 해 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과 신앙으로 일치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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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이날 사도들의 후계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하자“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질문 앞에서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하는 답을 해야 합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로 표현하셨습니다. 연필을 사용하는 것은 주인 몫입니다. 설사 부러지더라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환시를 통해 만난 아기 예수님의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묻는 데레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데레사의 예수’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에 “‘사랑’이십니다.”그리고 “저는 당신의 연장입니다.”하고 답합니다. 저의 삶의 여정에 많은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고 저도 끝까지 주님의 도구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텔레비전 시청, 핸드폰 보는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잡지를 보는 시간 중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봉헌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겨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 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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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책길에 가끔 코요테와 같은 동물을 만납니다. 보통은 서로 갈 길을 가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저를 보더니 멈추어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순간 당황해서 멈추었습니다. 옆을 보니 나뭇가지가 있어서 손에 잡았습니다. 그러자 코요테는 가던 길을 갔고, 저도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저의 길을 갔습니다.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를 향해 다가오는 유혹의 코요테가 많았습니다. 시기, 질투, 욕심, 게으름, 분노, 이기심의 코요테입니다. 저는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런 유혹의 코요테를 만났고, 쉽게 넘어졌습니다. 유혹의 코요테를 몰아낼 영적인 나뭇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나뭇가지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나눔이 있습니다. 기도, 말씀, 나눔의 나뭇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유혹의 코요테가 저에게 다가와도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유혹의 코요테가 우리를 보고 무서워서 자기 갈 길을 가도록 영적인 나뭇가지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푸른 녹지와 사막이 있습니다. 녹지는 좋고, 사막은 나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사막은 필요하고도, 소중한 존재라고 합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 덕분에 지구의 대기는 흐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는 바람을 타고 멀리 아마존까지 도달한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에 있는 미네랄 성분이 아마존 나무들을 울창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막에는 많은 지하자원이 있어서 우리의 삶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지구에 사막이 없고 모두 울창한 녹지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지구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지금 대기 중의 산소는 20%인데 만약 사막이 모두 녹지가 되면 산소의 농도가 40%까지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에는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에 그런 환경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석탄, 석유는 모두 그때 화재로 인해서 생겼다고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결정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자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생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자리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이라고 생각하였고, 기꺼이 베드로에게 사도좌의 권위를 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는 교황은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나누는 이곳이 이미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는 불의와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나의 체면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권위일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가 푸른 녹지라면 열매를 맺으면 좋습니다. 그 자리가 뜨거운 사막이라면 정화와 단련의 기회로 만들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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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축일이 아닌 베드로 사도좌의 축일입니다. 우리는 왜 사도좌의 축일을 지내는 것일까요? 사도좌라는 그 자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면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베드로의 고백이 참으로 멋진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나누어 받고 그분을 믿는 것이 곧 영광과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님의 고난은 멀리합니다. 아픔과 고통은 늘 바라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의 열쇠를 주십니다. 고난의 증인에게 하늘의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사도좌의 모습입니다. 이런 고백의 자리가 바로 사도좌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증언하고 동참하며 훗날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사랑으로 살아가는 모습. 사도좌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또 전하는 자리입니다.
베드로부터 이어져 오는 이 사도좌는 오늘날의 교황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민이 우울증에 걸리면?
다음 네 가지를 묻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래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춤춘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이 언제인가?"
이 네 가지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오래전이라면 몸과 마음이 병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하루빨리 위 네 가지를 실행하라는 것이 부족 치료사의 처방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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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도자의 의무와 권위
“리더십의 모범; 예수님과 베드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네.”(시편23,1-3ㄱ)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시고 교회를 이끄는 특별한 권위와 권한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로마시대 2월22일 오늘은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행사를 거행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로 이 관습을 받아들여 4세기부터 베드로 사도 무덤을 참배하고 추모했으며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여기서 기원됩니다.
사도좌는 전 세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법률적, 사목적 최고 권위를 지닌 교황의 직위를 뜻합니다. 이 용어는 7세기 이후부터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직이 계승되는 로마교회의 권위, 교황을 뜻하게 됩니다. 이런 권위는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베드로 사도에게 수여됐으며, 그 후계자인 교황에게 계승된다는 면에서 사도좌의 본질적 특징은 사도적 계승과 수위권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니 교황은 로마교회의 주교일뿐 아니라 사도들의 후계자인 모든 주교들의 머리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이 세상 보편교회의 목자가 됩니다. 보편교회에 대한 최고의 권위뿐만 아니라 각 개별교회에 대해서도 직권의 수위권을 지니며 자신의 임무 수행을 통해 모든 목자들과 친교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베드로의 후계자들인 교황의 리더십입니다.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위와 리더십은 얼마나 탁월하고 모범적인지요! 아니 역대의 교황들이 대다수 성인들처럼 생각됩니다. 교황뿐만 아니라 작고 크고 작은 공동체에 상관없이 공동체 지도자의 권위와 리더십은 참으로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입니다.
작금의 탄핵사태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혼란한 현실만 봐도 통감하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 공동체의 흥망성쇠가 좌우됩니다. 조선시대 500년 최고의 지도자로 꼽히는 성군이라 칭하는 세종과 정조의 역사적 사례만 봐도 지도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정말 하느님의 선물인 좋은 지도자는 공동체의 복입니다.
오늘 우리 가톨릭교회는 성 베드로를 그대로 닮은 참 훌륭한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새삼 베드로 사도의 권위 역시 하느님의 은총으로 역대 교황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봅니다. 좋은 리더십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 리더십의 모범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사도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은 물론 모두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섬김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물음을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누구인가? 평생 물어야 할 것이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그 삶을 고스란히 보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공부란 세월과 함께 쌓이는 주름과 같으니, 배웠다면 몸에 새겨 일상에 드러내야 한다.”<다산>
“시 삼백편을 외워더라도,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배웠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논어>
언행일치로 표현되어야 하는 지도자의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맡은 바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언행일치의 삶에서 저절로 권위있는 삶이요 리더십의 발휘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수제자답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신원을 직시하고 있었던 베드로였음을 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자신에 대한 정답의 신원고백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격찬과 더불어 베드로에게 권위와 권한을 선물하십니다. 베드로에 대한 전적 신뢰의 축복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축복과 이에 따라 주어지는 의무와 책임이 엄중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베드로라는 참나의 신원을 발견한 시몬 바르요나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믿음의 반석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 모두가 또 하나의 베드로입니다. 이런 사도 베드로를 필두로 믿음의 반석 같은 이들을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지어지는 교회입니다. 사상누각의 공동체가 아니라 반석같은 믿음위에 지어지는 교회공동체요 각자 몸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공동체 삶의 절정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베드로 사도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이라 믿어도 참 유익하겠습니다. 교회공동체는 물론이요 믿는 모든이들의 크고 작은 공동체 책임자는 물론 공동체의 성원들도 필히 배워 실행해야할 참목자의 영성입니다.
1.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떼를 잘 치십시오.
2.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3.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4.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마지막 권고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에서의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서 양떼의 중심이, 모범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위에서 지배하는 수직적 피라미드 모델의 교만한 수직적 리더십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섬김의 모범이 됨으로 겸손한 수평적 중심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비단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지상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물론 공동체 형제자매들 모두가 경청해야 할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지도자의 삶의 모범을, 겸손하고 충실한 섬김의 삶을 고스란히 보고 배우는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어지는 으뜸 목자 예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희망이 되는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착한목자 섬김의 영성을 살게 하시며 주님 친히 앞당겨 보이지 않는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씌워 주십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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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잇는 나>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당신과 나
곱게 이으신
하느님께서
당신 닮은
잇는 나
되라고 하시니
하늘과 땅
땅과 하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하느님과 나
나와 하느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하느님과 벗
벗과 하느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벗과 나
나와 벗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벗과 벗
벗과 벗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나 있음에
모두 이어지기를
하느님의 믿음대로
하느님의 희망대로
하느님의 사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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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 16,15)
또 다른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신 예수님
그때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라고도 하고 예언자 기운데 한 분이라고도 한다’며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전한 대답이 당신의 존귀함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암시하시며 그들을 더 고원한 깨달음으로 인도할 두 번째 물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또 다른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군중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이 두 번째 물음을 던지십니다. 그들은 당신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위대한 기적들을 행하신 것을 보았고 그분을 인간으로 보기는 했지만 헤로데가 생각했듯이 다시 살아난 인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줄곧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으며 나와 함께 많은 이적을 행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하느님은 모세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모세는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온전한 신성을 약속하셨지만, 모세는 하느님이 화를 내시지 못하도록 말렸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애원했습니다. “당신께서 손수 쓰신 기록에서 제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탈출 32,32). 영성의 대가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모세는 자신의 행복보다 백성올 더 사랑했는가?” 그러고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백성 앞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백성 앞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일에서 자신의 이익을 쫓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선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위하는 데만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보다 특정인의 이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33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하느님 신앙과 동학의 시천주
사실 동학의 종교성과 사회 정치적 혁명성은 동전의 앞뒤 관계 혹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같아서 , 어느 한쪽을 도외시해서는 온전히 이해되기 어렵다. 동학과 천도교의 핵심은 ‘시천추 侍天主) 신앙이다. 신일철은 시천주 신앙이 동학농민혁명과 한국사 속에서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학의 중심 신앙은 경신(庚申) 4월 5일에 대각(大覺)한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해서, 만인이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 말가’의 시천주 주체로서의 자각이며, 이 자각이 양반과 서민의 차등을 철폐하고, 모두가 다 같은 군자로서 인간 평등의 인간관을 마련해 준다. . . . . . . 시천주 신앙에서는 봉건적 신분 차등은 부정되고, 시천주의 주인으로서 만인은 평등하다. 실로 수운의 시천주사상은 천주의 각 개인에의 내재화를 통해, 인간관의 세속화에 성공했고, 그 때문에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인간 존엄성의 원리를 선각(先覺)한 근대인의 발견자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수운운 보편자인 천주, 천도를 소수 양반의 가치에서 널리 서민 대중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전기를, 서학에서와 같이 만인의 신앙 대상으로서의 천주(天主)를 시천주(侍天主)히는 데서 찾고 있다.”
신일철이 간명하게 핵심을 짚어 말한 대로, 동학혁명이라는 ‘태풍의 눈’은 ‘하느님을 모신다’는 시천주 신앙 체험에 있다. 흔히 동학(천도교)의 종지를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의미의 ‘인내천' (人乃天)에 있다고 말하지만, ‘인내천' 사상은 어디까지나 시천추 신앙의 종교철학적인 후대의 해석이지 동학의 종지가 이니다.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에 나타나는 핵심어는 ‘시천추.’ 이지 ‘인내천'이 아니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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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반석 위에 세운 하느님 교회 /
박윤식 [big-llight] 250221. 17:49 ㅣNo.180235
고대 로마는 2월 22일에는 가족 중 죽은 이의 기억으로 빈 의자를 마련해 놓았다나. 그리고 관습상 이날 베드로와 바오로의 두 사도 무덤서 공경 예배를 드렸단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 자유 선언으로 6월 29일이 신앙의 선조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기념일로 정해지면서, 이 날은 베드로를 교회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만 남았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며 답하였다. 그러자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그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베드로는 순박한 여느 어촌의 어부였고 본디 이름은 시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반석’이란 뜻으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다. 튼튼한 머릿돌로 여기신 거다. 그런데 세속의 눈으로만 본다면 사실 베드로는 그다지 반석과 같은 인물감이 되지 못한다. 반석이라면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다. 믿는다면서 물 위를 곧장 걷다가도, 분심이 들어 허우적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를 반석으로 삼으셨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너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열쇠도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세 가지 핵심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허락하신 권능이 베드로라는 수제자를 통해 사도와 교부를 통해 계승하고 그들에게 용서의 권한을 주신다는 거다. 이는 넓은 뜻에서 ‘교황권의 인정과 회개를 전제로 한 용서의 권능’이 교회 전체에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곧 베드로의 후계자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그분 권능에 대한 정통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손수 알려주신 답이다. 그렇다면 과연 베드로가 위대해서일까? 그 이유는 우리의 소관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만이 답하실 몫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나약하고 의심 많은 베드로를 당신의 지상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다. 이를 예수님을 통해서 제자들과의 문답으로 직접 확인시키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그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다.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악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은사가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다. 이게 지금 우리의 가톨릭교회이다. 그래서 이런 약점과 모순투성이에도 교회는 권위와 아름다움을 갖는다. 성령께서 늘 함께하시기에 그렇다.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구성원이다. 우리역시 반석이 될 수가 있다. 그러기에 이제는 예수님의 그때 그 물음에,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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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던 제자도, 첫눈에 거짓 없다고 칭찬하시던 제자도,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제자도 아닌 어부 출신의 단순하고 우직하며 열정적인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이유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뚜렷하고 분명한 신앙 고백에서 찾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신앙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직무 수행에는 지식이나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끌리는 신앙이 무엇보다 먼저 요구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는 사목의 큰 책임을 맡는 사람에게 먼저 신앙 고백을 요구하는 전통이 이어져 옵니다.
이미 초세기 교부들이 인정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언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확인한 교황의 수위권은 하느님 백성의 ‘친교’인 교회 일치의 중심이자 주교단의 머리로서 가지는 권한입니다.
교황께서 국제 사회에서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시기는 하지만 베드로에게서 이어받은 직무는 행정이나 조직 운영, 또는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일 곧 사목을 위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당신을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의 본당 사제요 로마의 주교라고 즐겨 부르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바로 그러한 목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사람으로 소개하고, 다른 목자들에게 자진해서, 열성으로, 모범으로 양 떼를 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돌보는 임무를 맡은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특히 교황님을 위하여 오늘 더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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