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24
10월28일[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연중 제3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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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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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FQ213HuH_o
[의정부교구 이동현 베드로(풍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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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은혜로운 만남!>
제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마다 정말이지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때 저는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토록 부족한 저를 부르신 주님께서는 이런저런 단련과 정화의 과정을 겪게 하신 후, 남 앞에 서게도 하시고, 크게 영양가는 없지만, 당신 말씀의 선포자로 거듭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최측근 협조자로 부르신 12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명 한명 면면을 살펴보면 대체로 존재감이 없던 사람들, 가방끈도 길지 않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분은 사도단 안에서도 10번째, 11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분들입니다.
시몬 사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그가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며 전직 열혈당원이었다는 것뿐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유추할 뿐입니다.
“유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폭력과 살상도 마다하지 않던 독립군 유다가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군사로 변화되었다.”
유다 사도의 이름은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딱 세 차례에 걸쳐 아주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대신 타대오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유다 사도를 예수님의 형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유다 사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 성경 학자들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모호한 인물에 대해서는 신뢰할만한 정보가 없다.”
두 사도들에 대한 관련 자료나 문헌이 적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베드로 사도나 요한 사도처럼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도단 내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해서 그 영향력이 미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쪽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묵하면서도 충직했습니다. 고민하고 따지기보다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스승님의 모든 말씀은 내게 있어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목숨걸고 준수해야 할 명령입니다!’라고 여기며 목숨걸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사도로서 자신의 신원에 걸맞게 살려고 애를 쓰다보니 따로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추수할 일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앞에서 말하기 보다는, 하루 온종일 죽기살기로 헌신하고 뛰어다닐 일꾼이 필요했었는데, 그들이 바로 시몬과 유다 사도였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까지 불사하던 시몬 사도가 사랑과 자비의 열혈당원으로 탈바꿈한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매국노를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던 그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선포자로서의 열정으로 끓어오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강렬한 애국심과 저항정신은 이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변환되었습니다.
결국 유다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던 그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한 인간의 만남은 그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혼동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 안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 어떤 것이 더 큰 것인지? 삶의 질서를 잡게 도와주십니다.
마침내 이승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삶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과 한 인간의 참 만남은 이렇게 큰 은총과 선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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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간절한 기도와 그 기도에 걸맞은 과감한 결정, 그리고 단 한 치 오차도 없는 실행!>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지속해나갈 직제자 선발이라는 큰일을 앞두시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큰 영감과 교훈을 선물합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계십니까? 결혼이나 새로운 출발, 중요한 결단이나 큰 수술 앞두고 계십니까? 아니면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 서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잘 따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셨을 때는 어김없이 외딴 곳으로 가셔서 홀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피땀까지 흘려 가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을 때,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쌓여 있다고 느껴질 때,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고 여겨질 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정은 과감하고도 용기있는 결단과 실행입니다. 간절한 기도와 신중한 식별 작업 끝에 이루어진 결정이라면 흔들리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결정한대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발표한 사도들의 명단을 들은 군중은 아연실색했습니다. 다들 예상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기본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중에 제자들을 선발하리라는 것을. 적어도 당대 ‘인싸’ 그룹이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을 중심으로 제자단을 구성하시리라 추측했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이름 하나 하나가 호명될 때 마다 다들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들, 열혈당원, 세리, 죄인....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번 선택하신 결정을 뒤엎지 않으셨습니다. 그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선발된 열두 사도들과 함께 평지에 내려서시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멋진 장면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갖가지 질병과 악령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떨어지셔서 간절히 기도하신 다음, 그 기도에 걸맞은 과감하고도 단호한 결정, 그리고 단 한 치 오차도 없는 실행, 바로 예수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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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hr6tfwXw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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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대한 성인들은 책이 아니라 제자를 남기려 했을까?>
오늘은 성 유다 타대오와 성 시몬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중요한 점은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살다 보니 생긴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복음을 더 많이 전파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처럼 더 넓은 곳으로 가셨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나 채프먼은 딸 바네사 제임스(Vanessa James)와 ‘이름 없는 소녀’(The Girl with No Name)라는 책을 공동 집필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유괴범들에게 버림받은 후 콜롬비아 정글에서 꼬리감는원숭이 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원숭이 그 자체였습니다. 사냥꾼들에게 발견되고는 사창가에서 살았습니다. 나중엔 탈출하여 결혼하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렸습니다.
누구나 성장은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처음부터 교회를 만들 생각으로 열두 사도를 뽑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가 된 싯다르타도 모두 책을 한 권도 쓰지 않고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데 생을 바쳤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알았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제자 공동체를 통해 전달하는 게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자 공동체를 세우려 했던 더 큰 이유는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2015년에 방송된 KBS 인생극장 ‘뇌 병변 장애 부모가 삼 형제를 키우는 방법: 그렇게 부모가 된다’라는 내용은 많은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안겼습니다. 자기 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두 장애인이 결혼하고 아기를 낳겠다는 꿈을 가졌을 때 가족들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 형제를 낳았고 누구보다 자녀들을 잘 키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나라에서 나오는 돈으로 살아도 어느 정도는 살림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함께 일합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는 백수였어!’라는 소리를 하지 않기를 바라요.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훌륭한 분이셨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해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내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천덕꾸러기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어요.”
공동체를 낳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면 둘이 사랑을 해봐야 그렇게 남자와 여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녀를 낳아도 그렇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사람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결혼해야만 자녀를 낳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도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아이들아!”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자녀를 낳음, 곧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움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세상에 사는 의미가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라는 것을 3년 동안 굴에서 기도한 끝에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그 이전부터 그러한 공동체를 낳으려는 이유로 자신을 갈고닦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첫 정식적인 수도회가 탄생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결혼하기 전부터 자녀를 정신적으로 잉태하고 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고 준비합니다. 그런 부모와 그냥 살다가 우연히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모는 다릅니다. 낳으려는 목적으로 살아야 나도 성장하고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어떤 공동체를 낳고 기르고 파견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나의 성장과 완성이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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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1년 8월 2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9월 5일에 첫 본당인 중곡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았습니다.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이 앞으로의 사제 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의 세례명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였습니다. 타대오의 이름은 ‘유다’였는데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스카리웃 유다와 구별해서 ‘타대오’라고 부릅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에게서 ‘자유’를 배웠습니다. 신부님의 자유는 두 개의 날개를 타고 날았습니다. 하나는 ‘기도’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루에 3시간 이상씩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 방의 기도 초는 신부님의 기도와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수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린이처럼 순수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제 막 새 사제가 된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매일 동네 산책을 같이하였습니다. 보좌신부가 더 필요하다면서 용돈도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33년 저의 사제 생활에 큰 힘이 되어주셨던 타대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게 영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동창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시몬’입니다. 제가 예수님 시중을 들며 분주했던 마르타와 같았다면 그 친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던 마리아 같았습니다. 제가 눈에 띄는 ‘꽃’을 지향했다면 그 친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와 같았습니다. 제가 소리만 요란한 ‘빈 그릇’ 같았다면 그 친구는 속이 꽉 찬 ‘그릇’이었습니다. 저는 활동과 만남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면 그 친구는 홀로 있음에서 힘을 얻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뭔가 한 것 같은데 내세울 것이 별로 없었는데, 그 친구는 침묵 중에 뭔가를 만들었습니다. 2년 전입니다. 저는 북미주 파견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 지도를 제안받았습니다.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난감했습니다. 그때 제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동창 신부였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매년 수도원 피정 지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피정 자료를 보내 줄 수 있는지 부탁했습니다. 친구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귀한 자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북미주 파견 수도자 피정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산과 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그런 친구를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와 시몬 사도는 기도와 겸손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가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주변에 있는 분, 나와 함께 일하는 분, 내 가족들의 강점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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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2-19: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두 사도는 열두 사도 중의 두 사도로서, 시몬은 사도들의 이름 목록에서 열한 번째에 놓인 사도이고, 가나 출신으로서 유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혁명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성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하며 최후 만찬 때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여쭈어본 사도였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 안에,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당신을 각자가 처한 삶의 장에서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교육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사업의 중책을 맡기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제자는 본시 배우는 사람이요, 스승이란 가르치는 분이다. 제자의 본분은 스승에게 배우고, 스승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따르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부름을 받은 우리의 할 도리이며,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에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두 사도가 믿음에 있어서 또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은 있다. 그러나 나를 선택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주님의 제자의 삶이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처럼”(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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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언젠가 성공회에서 옮겨 온 분의 세례와 견진 문제로 이리저리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세례와 견진에 대한 증명이었습니다. 세례는 간단하였습니다. 누가 세례를 주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공회에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없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로 일치되는 예식도 이미 거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견진은 어떻게 될까요? 의문스럽기는 한데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할 수는 없어서 교회법, 교리, 전례 전공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교회법을 전공한 분이, 교황청에 있는 친구에게까지 물어 답을 주었습니다. 견진을 준 주교의 성품이 사도 계승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견진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이천 년 전에 살았지만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사도 계승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래전에 살았던 조상이 있고 우리가 그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우리는 사도들에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에페소서는 우리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2,20)이라고 말합니다. 족보에서 첫 조상이 다르면 다른 집안이 되듯이, 하나의 집안인 교회는 모두 사도들을 기초로 하고, 그 기초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사도들에게서 전하여 오는 신앙을 잘 간직하면서,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초인 사도들과 결합하여 “하느님의 한 가족”(에페 2,19)인 교회의 일치를 지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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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정>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2-19)
1) ‘열혈당’은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했던 단체인데, 우리나라의 의열단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혈당원으로 기록되어 있는 시몬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가 그 열성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또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변화된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열정’(뜨거움)입니다.>
열정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일편단심’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오로지 예수님의 뒤만 따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실제 삶에서 그대로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인의 열정입니다. 열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말에서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가 연상됩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내는 것은 ‘미지근한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열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 말씀에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인은 가다가 힘들면 중단하지만, 진짜로 뜨거운(열정적인) 신앙인은 힘들어도 끝까지 갑니다.
2) 사도들이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미숙한 점도 있었고, 부족한 점도 많았고, 흔들리기도 했고,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계속 단련되었고, 강해졌고, 결국 신앙과 충성심과 열정과 사랑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는데, 그 모습은 오히려 다른 사도들의 신앙과 충성심과 열정을 부각시키는 일이 되었습니다. <등불 빛을 더욱 밝게 보이게 하는 그림자 같은 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의 명단 뒤에 기록되어 있는 군중의 모습을 보면, 병을 고치려고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쓰는데, 그 ‘간절함’도 겉으로는 열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병을 고친 다음에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신앙인이 된 사람도 분명히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병의 치유에만 만족하고서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간절함’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아니라, 병고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라는, 단순한 소원일 뿐입니다. <물론 그 ‘간절함’ 자체를 무시하거나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희망이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신앙인은 거기서 멈추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완성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4) 주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묵시 2,3-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겉으로는 여전히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한데, 생동감도 없고, 활기도 없고, 기쁨도 없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의 사랑도 식고 열정도 식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그 동안 하던 대로 하면 잘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쁨이 없다는 것은 억지로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모두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식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식어버린 사랑과 열정을 다시 뜨겁게 하는 방법은 ‘회개’, 그리고 ‘다시 뜨거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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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의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친 두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걸어간 여정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은 복음에 자주 등장하기에 그다지 낯선 장면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실 뿐 아니라,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시는 순간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일치하는 가운데 그 일을 진행하십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귀한 마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을 위한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모든 주도권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간 이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심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이천 년 전 열두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준비와 응답을 기다리시며 우리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간절함,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기 전에 보여 주신 간절한 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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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복음을 선포하실 때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분 주변에 몰려 들었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모세에게 열두 지파가 주어졌듯이,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이스라엘을 모으기 위한 열두 제자가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3년 내내 이 열두 제자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던 활동에 동행시키시며 사도로 양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다가왔을 무렵, 세족례와 성찬례를 통해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때 당신의 신원을 명확히 드러내시며 전권을 위임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나를 보았으면 곧 하느님을 본 것이다. 너희가 땅에서 풀면 내가 하늘에서도 풀리라.”
사도들의 후계자로 이루어진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의 정식을 확립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교회에 현존하실 양식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말씀과 성찬과 섬김. 말씀은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도 포함시켰고, 성찬은 성체성사로, 섬김은 특히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공동체의 형제애를 으뜸으로 쳤습니다.
이렇듯 성령의 이끄심으로 교회가 받은 계시를 가르치는 예언직과 더불어 사도직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 가르침에는 신적인 권위가 서려있었고, 기적에는 신적인 권능이 서려있었기로, 군중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들었고 그분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모인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수행하는 모든 사도직에서는 자신들의 지식이나 힘으로만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도직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권능으로 해야 합니다.
그 옛날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든 군중이 그분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은 하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던 것처럼, 온갖 문제와 갈등과 한계로 어려움을 겪는 세상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사도직을 수행하는 모든 이들이 말씀과 성찬과 섬김이라는 그분의 현존 양식에 충실해야 합니다.
말씀과 성찬과 섬김으로 현존하시는 그분의 힘을 충만히 받아 우리 교회의 사도직이 세상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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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신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내게는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성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성인들은 우리처럼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이나 당신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노력할 것인지를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미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아직은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이지만 당신의 이끄심에 신뢰하고 의탁할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시몬과 유다 사도 역시 인간적 약점과 부족함을 지닌 분들이었기에 다른 사도들처럼 두드러진 활동이나 활약은 전해지고 있지 않았지만, 두 사도는 분명 자신들의 한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최선을 다하며 충실하게 살았다, 고 생각합니다.
사도 ‘시몬’(=응답하셨다, 들음이란 뜻)은 가나안 출신으로서(마태 10,4;마르3,18) 열혈 당원이었습니다.(루6,15;사도1,13) 또 유다(=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는 타대오(=마음이 크고 높음이란 뜻)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모든 사도의 이름이 나타나는 구절과 예수 형제들의 이름을 열거한 “예수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라는 구절에만 이름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 먼저,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6,12) 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늘 기도하신 예수님이지만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 가운데 사도들을 뽑는 일은 예수님 자신에게서는 가장 중요한 일 곧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데 초석과도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 하느님께서는 이미 자신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셨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포도원을 경작할 성실한 일꾼으로 적합한 자질과 소양을 겸비한 인재를 발탁할 힘을 청하셨던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세상적인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등용하는 기준과는 다른 영적인 자질을 갖춘 사람을 선택하고 선발하기 위한 신중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라고 느껴집니다. 애당초부터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었을까요. 쓸 만한 인재들은 아마도 이미 ‘부모 찬스, 일명 자녀 스펙용 무더기 사례’를 활용해서 좋은 곳에서 좋은 대우 받으며 출세 가도를 걷고 있지, 변방의 인물로 아직 불확실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예수님을 따랐겠어요. 시체말로 ‘인재 pool’이 빈약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사도들을 선발하고 선택에 있어서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고심한 것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고심보다 무엇이 아빠 하느님의 뜻일까에 대한 심사숙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알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서 아빠 하느님이시라면 누구를 원하실까 기도하셨던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결국 그런 예수님의 뜻이 사도들을 뽑고 발표하신 인물들의 면면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출신 배경이나 직업, 배움 그리고 성격이나 인성 면에서도 과히 천하의 인재들을 등용했다고 활동 초기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신과 함께 파스카의 여정을 겪고 난 뒤 비로소 성령을 통해서 그들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확연히 증명되었으니 말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사도 시몬은 카나 출신으로 열혈 당원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 유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부름을 받았을 때 부족하고 나약하며 허물 많은 분이셨지만 성령을 받고서는 참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투철한 믿음을 바탕에서 하느님의 뜻을 죽음으로 증거한 분들이었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투철하신 안목에 감탄할 뿐입니다.
오늘 독서 에페소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 공동체를 건물에 빗대어 설명하시는데,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2,20)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교회라는 건물은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세워지고 연결되어서 자라나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됩니다. 어느 성당 제의실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하군요. 『하느님은 가끔 사람들에게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원망하여 걷어차 버리다 발가락 하나가 부러지고 왜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주춧돌로 만들어 집을 짓는지.』 오늘 복음의 한 문장과 위 문장을 함께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다음 ‘열두 개의 돌멩이를 세상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 돌멩이는 어떤 것은 모난 것, 예쁜 것, 둥글넓적한 것, 뾰쪽한 것, 깨진 것, 큰 것, 작은 것 등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지극히 하찮고 평범한 것 같은 돌멩이 열두 개를 기초로 삼아 교회라는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중에서 하나의 모난 돌멩이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의 가슴을 세차게 때리고 밭에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돌멩이 하나가 그 빈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사도 마티아는 조지아에서 순교하시어 바투미에서 묻혔습니다.) 이렇게 열두 개의 돌멩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비록 못생기고 모난 돌이라 해도 예수님의 눈에는 교회라는 건물의 아주 쓸모 있는 기초로 사용되어 유용한 돌멩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로 쓰시고자 부르고 뽑아 주셨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하느님의 성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각자도 사도들과 더불어 교회의 재료로 쓰임 받고 있음에 감사하고, 우리를 필요한 곳에 적절히 당신 도구로 선택해 주신 예수님께 다 함께 토마스 머튼의 「신뢰의 기도」를 함께 바치도록 합시다. 『내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할 지 제 앞에 어떤 길이 놓여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어디서 끝이 날지는 전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은 저 자신도 알지 못하고,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따르려는지도 모릅니다. 하오나, 주님. 저는 당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으며,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런 소망이 표현되기를 바라고, 그런 소망을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비록 제가 아둔하여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올바른 길로 저를 인도해주옵소서.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주 하느님께 신뢰심을 잃지 않게 해주소서. 그러하오면, 주여. 저는 행복하겠나이다. 아멘.』
* 오늘 유다와 시몬의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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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보면, 대체로 80년대의 노래입니다. 당시에는 라디오를 통해, 아니면 엘피판이나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음악을 들었습니다. 특히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서 들고 다니며 들었습니다. 음질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당시에 들었던 것들입니다. 지금 훨씬 더 좋은 음질과 멋진 사운드 그리고 다양한 노래가 있음에도 잡음이 잔뜩 들어가 있는 노래에 감탄사를 내뱉었고 지금도 좋아합니다. 부족한 삶에 대한 낭만일까요? 부족했기에 더 집중했고 그래서 사랑했던 것입니다. ‘찌지직’ 거리는 잡음 소리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긴 영상을 보는 것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튜브의 짧은 영상만 보고, 책도 두꺼운 것이 아닌 얇고 글씨 적은 것을 본다고 하더군요. 집중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만큼 풍요로움 속에서 보고 들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족함이 있어야 작은 것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부족함보다 풍요로움을 미덕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부족함 속에 있으면 불행한 것으로 단정짓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을 지냅니다. 열두 사도의 일원인 두 사도의 축일이기에,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장면을 보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싶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의심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셨고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배고프고, 그리고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시니 분명히 풍요로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부족함 투성입니다. 이 부족함 안에 계속 머물라고, 전교 여행을 보내실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족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부족했을 때 행복의 이유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모범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삶은 풍요로움이 가득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삶도 부족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함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런 모범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할까요? 부족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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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름>
루카 6,12-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름>
바로 그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홀로 산에 올라
밤을 새워
갈림 없는 하느님께
오롯이 기도합니다
나와 함께 걸어야 할
그대이기에
마침내 내가 되어야 할
그대이기에
나 스스로
부르기에도 때론
부끄럽기 그지없는
나의 이름을
당신께서
그리 불러주시니
당신과 함께 걷는
나이렵니다
당신이 되어가는
나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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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스승과 제자>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는데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2) 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뽑혔습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예수님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이들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스승의 참모습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제자들은 부족함이 많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 제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 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나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쇄신을 갈망하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 3,2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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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 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곧 신분이나 능력이나 지위에 있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히었기에 거룩한 이들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에 의해 뽑히었고, 거룩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건물’이 되고, 거룩한 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십니다.”(에페 2,20)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도 이 '건물'(집)은 '자라납니다'. 곧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1) 그렇게 자라나면서 신령스런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2)
참으로 신령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이 사실!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다’는 이 사실!
이토록 우리 안에 당신의 신비가 살아있다니, 헤아릴 수 없이 크나큰 분이 나보다 작아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사랑의 신비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하고 경탄할 뿐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가정’을 건설합니다. 바로 내가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 집의 건축 자재요, 그 가정의 식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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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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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 주님의 사도>
교황청 소식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교황님의 주일 강론과 삼종기도후의 강론주제가 신선했습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움직이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는 주일 강론 주제 였고,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예수님께 향하자”라는 삼종기도후 강론 주제였습니다.
두 강론 모두 눈먼 거지 바르테매오가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고 이어 주님을 따르게 된 내용을 깊이 다뤘던 강론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찾는 바르티매오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이요 우리는 모두 제자임을 확인시키는 강론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크게 알려진바 없는 두 사도이지만 예외없이 순교로서 주님께 생명을 바친 사도들이고 예수님의 친척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오늘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복음에서 역시 두 사도 이름이 나옵니다. 배반자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 유다 대신 타대오로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대한 일에 앞서서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제자들중 12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우며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로 성서 곳곳에서, 시나이산, 갈멜산, 타볼산, 시온산등 유명한 산 이름이 나옵니다만 오늘 산 이름은 알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산에 관계된 일화를 소개합니다. 조선시대의 집 중 최고는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있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던 남명 조식의 산천재(山天齋)라 합니다.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라는 뜻의 산천재입니다. 그가 산천재에서 읊은 시도 일품입니다.
“덕산에 터를 잡고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겠냐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이 마음에 들어서
빈손으로 왔지만 먹을거리 걱정하랴?
십 리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새삼 불암산을 배경으로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요셉수도원 역시 산천재라 불릴 수 있겠고 이 또한 거룩한 축복이다 싶습니다. 10월 한달 내내 계속 저를 행복하게 하는 ‘산앞에 서면’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예수님께 불림받은 12사도 공동체는 그대로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12사도처럼 우리는 모두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모두가 주님의 제자지만 모든 제자가 사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제 우리 세례받은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의 제자도 되고 주님의 사도도 됩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제자(disciple)의 어원은 라틴어 ‘배우다(discere; to learn)’입니다. 바로 배우는, 공부하는 제자들입니다. 하루이틀이 아니고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제자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평생배움과 공부를 제공하는 매일미사가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공부에서는 예나 이제나 동서방이 공통적입니다. 모두가 성인이 되는 공부, 군자가 되는 공부, 참사람이되는, 참제자가 되는, 바로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였습니다. 오늘의 실용적인 공부와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바로 이런 옛 공부전통을 고스란히 전수받고 있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어제 “자신을 속이지 않는 공부, 공자부터 정약용까지 위대한 스승들의 공부법”이란 책을 감명깊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와 구별되는 것이 공부만 있고 기도와 선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오늘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도로서 탄생한 공동체요 예수님 중심의 다양성의 일치 공동체입니다.
새삼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인 우리의 일은 “기도, 공부, 선교”로 크게 셋으로 구분됨을 봅니다. 선교의 사도직에 앞서 제자로서의 기도와 공부가 본질적임을 배웁니다. 기도와 공부는 선교를 통해 완성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열두 제자이자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치유활동을 하면서 선교활동에 돌입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중심의 거대한 교회공동체 모습입니다.
기도하고 공부하는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제1독서 에페소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배웁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가족으로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 건물의 모퉁이돌이 됩니다. 이어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는 살아 있는 유기적 역동적 공동체이자,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자라나는, 지어지는 성전임을 배웁니다. 바오로 사도가 잘 요약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교회 공동체임이 잘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바오로의 교회론을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공부하고 확인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제자로서 기도하고 공부하는 미사시간이요, 이어 주님의 사도로서 선교하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우리들의 평생 일인 “기도하라, 공부하라, 선교하라” 셋을 다시 확인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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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잘 결합된?>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에 듣는 에페소서 독서는 에페소 교회가 예수님이라는 모퉁잇돌과 사도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건물이라는 뜻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 명단을 보면 열두 사도는 기초로서 부실하고, 그들의 결합은 잘 이루어지기 어려운 엉성한 공동체였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을 배반할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구성원이 서로 삐걱거릴만한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눈여겨보는 것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열혈당원 출신의 시몬과 세리 출신의 마태오 관계이고, 잘 아시듯이 이들의 출신 곧 열혈당원과 세리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지요.
그런데 출신으로만 보면 엉성하고 삐걱거릴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잘 결합된 주님의 거처로 자라난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출신으로만 보면 잘 결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뒤 그리고 성령으로 변화된 뒤 이들은 든든한 기초가 되었고 그 위에 전체 교회는 잘 결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이질적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용광로에서 성령이라는 불에 정련되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이질적인 우리도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서로 잘 결합되어 하느님의 거처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정련돼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같이 이루는 것이 목적이 돼야 하고, 경쟁적이고 분열적인 개성이 조화롭고 통합적인 개성으로 바뀌어야 하며, 나만 정의롭고 너는 불의하지 않고 같이 하느님의 정의를 이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 축일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 공동체이고 오늘 에페소 말씀대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거처로 지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 특히 성령의 사랑은 눈곱만큼도 없고,
그래서 한 번도 그리스도 공동체다운 적이 없거나,
모래 위에 세워져 서서히 무너져가는 공동체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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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6,12)
<뽑힌 존재들!>
오늘 복음(루카6,12-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과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으로 나가셔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열두 사도들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 6,14-16)
오늘은 열두 사도 가운데에서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타대오)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형제 자매님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신 후 뽑으신 열두 사도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아주 평범하고 부족해 보이기까지 하는 보통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뽑으시어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유다 이스카리옷도 도구로 뽑으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19-20)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으로부터 뽑힌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로 선택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갖고 당당한 존재로 살아갑시다!
그리고 그렇게 뽑힌 너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함께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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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 12)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함께하는
선택과 응답의
삶입니다.
구원의 길은
기도로 시작합니다.
밤을 새운
간절한 사랑의
기도로 사도들은
선택됩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 필요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사람들을 통해
깊어집니다.
사도들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사는 곳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망가뜨린
세상을 우리가
치유하게 하십니다.
사랑의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기도안에
가득찬 사랑을
만나는 시간 되십시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걸어갑시다.
구원의 역사가
다시 쓰러진
이들을 향합니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응답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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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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