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2월 목포상고를 졸업한 김대중은 1944년 여름 목포상선주식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 따르면 사환이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미국에 항복하고 이 나라는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 국내에서 항일 독립전선을 구축하며 광범위한 인망을 얻고 있던 여운형은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하기 전날인 8월 14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遠藤)에게 치안유지 요청을 받았다.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 과도기의 치안 유지와 통치권의 순조로운 이양을 위한 권한을 넘겨받고 즉각 조선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여운형은 8월말까지 전국에 145개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를 결성하여 세력을 떨쳤다.
박헌영 또한 전남 광주에서 은신해 있다가 상경, 8월 20일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조선 공산당 재건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은 미국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10월 26일 귀국, 하지 미군 사령관이 주선한 조선호텔에 묶었다. 김구 주석이 이끄는 상해 임시정부는 “임시 정부 간판을 걸고는 귀국할 수 없다”는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11월 23일 김규식 등 일부 임정요인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28일 선언과 강령을 발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간부진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 안재홍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민족주의 세력, 박헌영 등 극좌파 세력 등 연합전선으로 구성되었으나 좌파세력의 비중이 컸다. 안재홍은 8월 31일 극좌파 세력이 득세한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했다. 전남 목포시에서도 8월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김대중은 목포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 임영춘(林永春)의 권유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선전책으로 활동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러 정파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한 데다 박헌영 계열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미군정청이 탄압하여 9월 7일 해산하고 말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청 장관 아놀드가 부인하는 가운데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목포시 인민위원회에 가담했으며 조선 민주청년동맹 목포지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김대중의 선배였던 송재경(宋在慶)이 조선 민주청년 목포지부 위원장이었다.
경찰은 1945년 11월 14일 목포시 인민위원회에 해산령을 내리고 주요 간부들을 검거하려 나섰다. 피해다니던 송재경은 1946년 10월 31일 새벽 5시 목포시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방화하는 등 좌익의 봉기를 이끌었다. 송재경은 11월 10일 체포되었으나 곧 광주 경찰서 유치장에서 탈출, 한국전쟁 때까지 줄기차게 지하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위원장이었던 김대중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무렵의 정국을 보면 우익 진영은 김구중심의 한국독립당, 김성수 중심의 한국민주당으로 양분되고 있었으며 좌익진영은 ‘조선 인민공화국’아래 박헌영 계열의 조선 공산당, 여운형 계열의 조선 인민당, 백남운 계열의 신민당으로 나누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김대중은 신민당에 가입해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신민당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의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의 혁명세력이 연합성을 띠게 되며, 민족해방이 이루어진 후의 사회해방은 주로 무산계급이 담당한다.“는 백남운의 ‘연합성 신식민주의’ 이론에 바탕을 두었다. 신민당은 1946년 11월 23일 조선 공산당, 인민당과 함께 남한 좌익정당의 집결체인 남로당으로 합당했다.
김대중은 1980년 8월에 열린 ‘김대중 등 내란음모 사건’ 공판에서 20대 초반의 정치활동과 관련하여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변호인: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한 적이 있는지? 있다면 언제부터 좌익과 관계를 끊고 민주투쟁을 시작했는지?
김대중: 본인은 만20살에 해방을 맞았고 당시 나는 일제하에 배운 것밖에 몰라 사상적으로 빈약했다. 해방이 되자 건국을 준비한다고 건국준비위원회가 생겼는데 목포지부는 목사님이 위원장이었다. 임영춘을 따라 선전책으로 들어가 심부름을 좀 한 적이 있다. 건준이 해산된 후에는 좌우익 합작인 신민당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한민당에 계시던 장인이 공산사상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만 두라고 하셨고 그때 좌익과 싸우고 나왔다. 1946년 10월에 목포 남로당의 파출소 습격 사건이 있었는데 동사건에 관련이 있다 하여 10여 일간 잡혀 있다가 범인이 잡히고, 또 그날 처가 출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파와 같이서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무혐의로 석방된 적이 있다. 좌익에게 자금을 대준 적이 있다는 것은 친척 유재식이 서울 가는 차비를 좀 달라고 해서 주었는데 나중에 그가 좌익으로 잡혀 본인이 호출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모르고 주었다 해서 무혐의로 석방되었던 것이다. 1947년부터는 한민당에 정식 입당해서 활동하였다.
법무사: 좌익활동을 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인가?
김대중: 1946년까지는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
변호인: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한 사실이 있는가?
김대중: 가입한 사실이 없으며 사업하는 사람은 운영위원으로 되게 되어 있었고 나도 해운업을 하고 있어서 운영위원으로 협찬한 사실이 있다.
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1949년 6월에 세워진 단체이다. 서울지검 검사인 선우종원(鮮于宗源)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정부가 좌익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묶어서 교양하고 보호한다는 취지로 만들었으므로 어용성을 띠었다. 이들은 한국전 당시 북한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이 학살당했다. 선우종원은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사람이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0년 초 전남의 보도연맹 가입자 가운데 반공 교육 강사로 추천받았다. 김대중의 유창한 공산주의 비판에 의심이 들어 선우종원은 ‘오늘 강연을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그렇게 잘 알았다면 일찍 전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질문하였고 이에 김대중은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하였다.
김대중의 좌익 활동과 관련, 김대중을 수사한 군검찰관 정기용(鄭基用)은 1988년 11월 30일 국회청문회에서 민정당 의원 권해옥(權海玉)의 증인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권해옥 : 증인은 김대중씨의 해방 후… 좌익관계에 대한 수사나 심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정기용 : 예. 있습니다.
권해옥 : 거기에 대한 몇 가지 사실 여부를 묻겠습니다. 김대중 총재는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고 하였는데 사실입니까?
정기용 : 예. 그것은 본인이 시인하셨습니다.
권해옥 : 시인하셨지요?
정기용 : 예.
권해옥 : 예. 김대중 총재는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사실입니까?.
정기용 : 예. 그것도 본인이 전부 시인하셨습니다.
권해옥 : 당시로서는 앞서 말한 사건들에 관련된다면 상당한 우익인사나 관직에 있는 분의 신원 보증없이는 절대로 풀려나기 어렵다고 본 위원은 알고 있었는데 과연 누구의 도움으로 또는 누구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었습니까?
정기용 : 그때 구속된 것이 두 번 구속되었는데 지금 제가 기억나기는…
권해옥 : 본 위원이 질문하는 것은 첫 번째 구속된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정기용 : 그때 보증을 하셨나요… 두 번째 보증을 하셨는데 해병소장까지 지내신 박성철(朴成哲) 당시 소위입니다. 그 양반이 신원보증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권해옥 : 지금 내가 얘기하는 것은 그 당시에 차보륜씨가 신원보증을 섰습니다. 차보륜씨는 당시 김대중 총재의 전처 장인된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정기용 : 예.
권해옥 : 그리고 김대중씨는 그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알고 계십니까?
정기용 : 예.
권해옥 : 그 당시의 신민당 당수(黨首)는 본위원이 알기로는 김두봉(金枓奉) 당시 북한 부주석을 지낸 바 있고 대남공작책으로 남파된 줄 알고 있는데 사실입니까?
정기용 : 거기까지는 제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신민당 당수가 누구였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권해옥 : 김두봉씨라는 것을 몰랐습니까?
정기용 : 몰랐습니다.
권해옥 : 그리고 김대중 총재는 1949년 4월경 신안군 임자면 출신 남로당 연락책 유재식에게 자금활동을 제공한 사실로 전남경찰국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던 중 당시 해군 목포헌병대장 박성철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된 일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알고 있습니까?
정기용 : 예. 알고 있습니다.
권해옥 : 예. 조금 전 정승화 증인께서도 모 정치인의 사상관계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습니다. 본 위원이 여러 가지 재판기록을 보면 김대중 총재는 젊은 시절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좌익활동을 계속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라는 사람이 조선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동지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청원서에 보면 장금성은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을 들고 있고, 다른 부문에서도 김대중씨의 활동관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6년 6월 16일 “민주청년동맹 목포시지부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께서 민청사업(民靑事業)의 취지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있다”는 대목도 있고 또한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재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 교양을 받았으며”등의 기록이 있는데 증인께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정기용 : 예. 그런 사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권해옥 : 기록만 있는 것만 알고 있습니까?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까? 기록만 보셨습니까?
정기용 : 예. 입당 청원서인가요? 그 기록을 제가 봤고 그것은 김총재께서도 시인을 하셨습니다.
권해옥 : 예. 알겠습니다. 다음 질문하겠습니다. 또한 김대중씨는 7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간첩 정태묵으로부터 선거운동방법 등 지원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정기용 : 예. 알고 있습니다.
권해옥 : 그 간첩에 대해서 증인께서 조금 설명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정태묵 간첩에 대해서 말이지요.
정기용 : 오래된 일이라 제가 전부 잊어 버렸는데요. 그 양반이 정태묵씨가 아마 김총재님의 목포상고 1년 선배로 제가 지금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 분이 서대문 형무소에 있다가 인민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석방된 분이다 말이지요. 그렇게 하고 60년대 말인가 70년대 초인가 그 양반이 간첩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 알고 있습니다.
김대중의 신원보증을 한 박성철은 1980년 김대중의 경호실장역을 수행했다.
김대중은 이상과 같이 수사기관에 노출된 좌익활동을 벌인 것 이외에도 좌익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946년 2월 15~16일 서울 YMCA에서 ‘일체의 반민주적 요소를 소탕하여 건실한 인민의 정부 수립에 기여’하기 위해 전국 기구로 조직한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중앙위원 391명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여운형 허헌 박헌영 김원봉 백남운을 공동 의장으로, 백용희 홍남표 이여성 김성숙 장건상 윤기섭 성주식 정노식 유영준 등을 부의장으로 하는 의장단 15명, 상임위원 73명, 중앙위원 391명을 간부로 선출했다.
김대중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전남 출신 주요 좌익 인사는 국순홍(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 부위원장, 인민당 목포지부장 역임), 선태섭(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재무부장, 조선 공산당 간부 역임) 등 중진급이었다. 김대중은 누군가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올려졌는지, 실제로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여하여 활동했는지 이 기록만으로는 확실하지 않다.
김대중은 자신의 좌익 경력과 우익으로의 전향동기를 자서전에서 기술한 바 있다.
나는 한때 공산주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공산주의가 참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국민의 행복을 위한 유익한 주의인가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공산주의와는 깨끗이 결별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나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독립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데 당시 접촉하고 있었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는 민족의 독립보다도 소련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 조직 그 자체가 인간의 자유와 인간성을 무시한 강압적인 존재라는 것에 관해서도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다.(김대중,『행동하는 양심으로』서울: 금문당, 1985, 45~46쪽에서)
김대중은 또한 1987년 10월 30일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자신의 경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제 시대에 목포상업고등학교를 나와 가지고 바로 일본군에 끌려가게 돼서 대기하고 있던 중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해서 참 그때 스물 한살에 너무도 기뻐서 건국준비위원회니 인민위원회니 그땐 또 지방에서는요, 우익․좌익이 같이 가담을 했습니다. 그래 거기도 또 조금 관계했고 신민당이라고 하는-당시 지방에서는 남북좌우 합작을 하는 정당이었는데 나중에는 좌익정당으로 갔습니다- 에 또, 거기에 조금 가담을 했습니다. 한 10개월 동안 관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46년부터는 당시 전처의 아버지 즉 장인이 한민당 목포시 당부위원장이었는데 저는 거기를 이탈하고 그래서 우익측에 가담을 하고, 6․25 당시에는 해상청년단 목포시 부단장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해운업을 하고 있었습니다.(1987년 관훈 클럽 토론회에서, 全文은 자료집의「1987년 김대중 관훈 클럽 토론」참조)
김대중의 좌익 정치 활동은 짧았다. 김대중은 해방공간의 초기에 건국준비위원회에 민첩하게 투신하였고 인민공화국 산하의 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신민당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우익으로 전향했다. 이 전향을 의심하는 이들도 많은데 사람 속마음을 알기는 불가능하므로 전향의 진정성 여부는 그 후의 행적을 살펴보고 각자 판단할 수밖에 없다.
김대중의 이러한 전력은 전두환 집권까지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박정희씨도 해방 후의 혼란기에 남로당에 입당, 군부 내에서 연락책 역을 맡았다가 1948년의 여수․순천 반란 사건에 연좌되어 죽음 직전까지 몰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친했던 군 수뇌부의 구명운동으로 살아난 그는 사상문제에 있어 누구보다 불리했다.
1963년 10월 15일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민주 공화당 후보는 민정당 후보 윤보선에게 15만 표 차인 470만 2640표 대 454만 6614표로 누르고 간신히 이겼다. 이때 표의 남북현상이 나타나 농업인구가 많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박정희 후보는 많은 표를 얻어 이겼다(박 후보는 자신의 연고지인 경북에서 55.6%를, 전라도에서는 57.2%를 득표했다). 이때 윤보선 후보측에서는 박정희씨의 좌익 경력을 문제 삼아 주요 쟁점으로 내걸어 바람을 일으켰으나 역효과도 보았다. 연좌제에 시달리던 많은 유권자들이 연좌제 폐지를 공약으로 건 박정희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다(1946년 대구 폭동 등으로 연좌제 피해를 많이 보았던 경북지방과 여순 반란사건으로 연좌제에 많이 걸렸던 전라도 지방에서 박 후보는 많은 표를 얻었다. 김형욱의 회고록에 따르면 좌익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일수록 박정희 표가 많이 나왔다 한다).
그러나 사상문제에서 걸릴 것이 없는 전두환은 김대중의 좌익 활동을 크게 문제 삼았다. 해방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휩쓸린 경향을 볼 때 김대중의 당시 활동을 쟁점으로 거는 것은 공정한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김대중이 인민의 복지를 위해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심지어는 고난을 마다 않는 이상적인 사회주의적 지식인상을 이후 보여주지 못한 점은 매우 유감이다.
대한민국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대혼란을 겪었기 때문에 1945년 해방이후 개개인의 수년간의 행적이나 경력은 알거나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김대중의 행적도 예외는 아니다. 박 정권 시절 김대중에 대한 중앙정보부 존안 자료에는 심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1979년 계엄 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보여준 3개의 파일을 보고 크게 놀라 기자들에게 3김씨 중 김대중만은 대통령이 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당시에는 물론 1987년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위는 출처입니다.
50년대의 활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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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대중은 목포상선주식회사 사장으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다음은 김대중이 해운업을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글이다.
해방후까지도 나는 한동안 일본인이 社主였던 선박회사에 근무했다. 그때 나는 아직 젊었지만 종업원 단체가 조직한 위원회의 위원장에 선출돼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에 얼마 뒤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종업원들은 급여 등 대우개선 요구를 회사측, 곧 나에게 강요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라서 경영상태가 몹시 좋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다가 미군정청이 회사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관리를 맡기는 사건도 일어났다.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때려주는 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물러 나와 스스로 해운업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62에서)
김대중의 열렬한 추종자인 김형문이 지은『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의 설명은 이와 다르다.
미군이 진주하자 이윽고 9월 25일 유명한 군정법령 제2호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移轉) 제한의 건’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종래의 일본인 소유의 모든 재산은 동결되고, 그 재산의 매매취득에 대한 권리행사가 금지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군정법령 제33호 ‘재(在)한국 일본인 재산의 권리 귀속(歸屬)에 관한 건’이 공포됨에 따라 미군정청은 한편으로 귀속재산을 접수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물론 김대중씨가 근무를 계속하고 있는 목포상선도 귀속재산의 하나였다.
당시 귀속재산-적산(敵産)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을 위요하고 얼마나 추악한 사건이 많았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어께나 하거나 기독교를 믿는다고만 하면 즉석에서 적산 가옥을 그냥 안겨줄 정도였고, 또 관리인을 선정하는데도 일정한 기준이 없이 영어를 지껄일 줄 알거나, 혹은 군정청 한국인 관료의 친지, 일제 때 사업에 경험이 있는 자에게 대부분 지명하곤 했으니만큼 적산관리가 무질서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영어가 능통했던 것도 아니었고 미군정청에 외삼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믿을 데라고는 일본인 소유자가 본국으로 철수해 간 후에도, 예의 직장 노조(勞組) 따위를 결성하여 아무 탈없이 꾸준히 해 온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더욱이 이 회사의 정식사원은 김대중씨와 아우 대의(大義)의 늙은 장인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조선공사(造船公社)에서는 약관의 김대중씨에게 목포상선의 관리인으로 선정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여름에 정식으로 불하를 받아, 회사 명의를 흥국(興國) 해운상사로 고쳐 그 사장이 되었던 것이다.(김형문,『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서울: 금문당, 1987, P44~45)
김형문은 김대중이 적산을 불하받은 것이라 하고 김대중은 스스로 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김대중이 적산 불하를 숨기는 것인가, 김형문이 잘못 알고 쓴 것인가. ‘김대중 선생을 20여 년 하루같이 오직 한 길로 모시며 이 분이 누구인가를 알 만큼은 안다고 자부하는’ 김형문이 잘못 알고 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형문의 경력으로 보아 김대중이 출판 이전에 내용 검토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에 나오는 김형문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40년 전남 여천군 돌산면에서 출생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종신회원 금문당 출판사 대표(現) 유신치하 긴급조치시 투옥 민주헌정연구회(민헌연) 상임이사(現) 민주인권문제연구회(민권회) 이사(現)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 통일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총무분과위원 및 간사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총무국장(現)
김대중은 6․25 발발 당일 서울에 사업상 체류 중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어렵게 목포로 돌아간 김대중은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 수감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김대중은 자서전이나 토론회 등에서 여러 차례 그 사연을 말했다.
목포에 돌아와서 가족과 지낸 것은 겨우 이틀밤이었다. 사흘째에는 인민위원회 지배하에 있던 경찰에 연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1950년 9월 18일의 일이었다. 교도소측은 죄수들 전부를 불러내더니 넓은 강당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명씩 수갑으로 채웠다. 그래서 두 명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강당에는 계속해서 죄인들이 끌려와 강당 안이 가득찼다. 전부 200명 가량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끌려온 사람들이 구석쪽으로 들어가고, 가장 나중에 끌려온 사람은 입구 근처에 앉혀졌다. 그리고 곧이어 그 입구 근처에 앉아 있던 50명 정도가 밖으로 끌려나갔다. 끌어 낼 때의 모습을 보고 이내 밖에서 처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무렵, 저녁 7시경이었다. 갑자기 실내의 공기가 바뀐 것 같다고 느끼고 주위를 돌아다보니, 지금까지 그곳에 있던 인민군 병사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가 철수한 것이다. 대신에 그 지역 공산당원이 우리를 다시 감방으로 집어넣었다. 우리들은 인민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용기가 생겼다. 지역 공산당원은 처음에는 “조용히 하시오”라며 부드럽게 말했는데, 밤 9시경쯤 되자 그들이 잠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지금 탈출하지 않으면 개죽음 당합니다. 우리 모두 용기를 내어 탈출합시다!”라고 호소했다. 그런 다음 나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문을 발로 차거나 쓰러뜨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각 감방문 자물쇠를 밖에서 부수면서 안에서도 발로 차라고 말하고, 전원이 교도소를 빠져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때는 음력 8월 중순으로 달은 교교히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달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경찰서와 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던 우익계 사람들은 약 220명 정도로 그 중에서 약 100명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동생과 장인까지도 나와 함께 목숨을 구한 기적같은 일이 있었다. 이때 우리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당황한 인민군이 일제히 철수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인천상륙 작전이 지연되었다면 우리는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던 남동생과 나는 감옥에서 빠져 나와 옷을 바꿔 입을 때 재회했다. 우리들은 모두 죄수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마을로 가면 인민군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교도소에 보관된 옷을 아무거나 골라 입게 되었다. 옷을 빨리 갈아입느라고 서로 정신이 없는 판국에 게다가 일각을 다투는 그 순간, “놔! 이건 내 옷이야”라고 말하는 남자가 있었다.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내 동생이었다. 동생 말에 따르면 그날 자기가 있던 방에서는 아홉 명 중 여섯 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전부 아홉 명 중에서 세 명이 살아남았는데 그 중에 동생이 있었던 것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나는 동생과 형무소를 바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항구 근처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가서 천정 뒤쪽을 넓히고 거기에 숨어 있었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P76~79)
『행동하는 양심으로』와『나의 삶 나의 길』에도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있다(김대중,『행동하는 양심으로』서울: 금문당, 1985, P 53~56 참조.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68~73 참조)
그러나 김대중과 함께 겨우 탈출해 살아났다는 한일수 씨의 증언은 이와 내용이 다르다.
목포에서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의 학살은 크게 세 차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목포시 연동에 있는 미곡창고에서 있었던 학살이다. 추석 직전 무렵인 9월말께 교도소가 포화된 상태에서 미곡창고에 수용되었던 300여 명의 인사들이 죽창에 의해 거의 살해된 것이다. 두 번째 살해는 목포시 석현동에서 있었다. 김대중(현 평민당 총재)씨와 함께 기적적으로 탈출한 한일수씨의 증언이다.
"9월 28일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내무서 소속인 듯한 사람들이 교도소로 트럭을 몰고 와 50명씩 굴비 엮듯이 묶어 태워왔습니다. 세 대 정도로 기억되는데 한 트럭당 50명씩 실었습니다. 물론 쇠고랑으로 손발을 묶은 상태였습니다. 무언가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운이 좋았다고 할까, 수가 맞지 않아 제일 끝 트럭에 김대중씨와 둘만 묶여서 태워졌습니다. 농촌시험장쯤에 이르렀을 때 둘이 뛰어내려 도망쳤습니다. 정말 구사일생이라고 할까. 뒤에 그때 실려갔던 사람들은 전부 석현동에서 살해당했다고 들었습니다"
한편 인공 치하의 목포에서 거주했던 모든 시민들은 자술서를 쓴다. 부역자 색출을 위해 경찰이 요구한 자술서는 인공치하에서의 자신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었다. 경찰은 이 자술서를 심사하여 부역자를 선별, 처단하였다. 민신고도 병행되었다. 시민신고는 당시 인공에 부역했던 인물에 대한 시민의 자발적 고발제도로 이 과정에서 “본래 좌익이 아니었던 사람, 덕망있고 인심이 있는 사람들조차 허위신고로 인해 부역자로 몰려 화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증언자들은 전한다. 목포 인근 지역의 상황 또한 비슷했다. 아니 도시인 목포보다 질서와 치안면에서 혼란의 정도가 더 심했던 무안, 함평, 영광, 신안 등 서남해안 지역에서의 상황은 더욱 혼란했다고 보아야 한다.(『광주전남 현대사』제 2권 실천문학사 발행, 1991, P 224~227 참조).
그러나 김대중은 이외에도 이미 6월 달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설도 있다. 미국의 교민 신문「워싱턴 투데이」가 이 설을 보도한 바 있다.
1950년 6월 29일경에 김대중은 체포되었다. 즉 미국의 극동 사령부에 소속된 CIC와 미 헌병에 의하여 체포되어 즉결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때의 상황은 6․25 전쟁직후인지라 서울이 1950년 6월 27일에 함락되자마자 과거 남로당계통의 요원들이 준거 난동을 부리게 됨에 따라 한국의 보도연맹과 미국 헌병대가 합작하여 공산당 요원을 체포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김대중이 목포에서 체포되었었다. 그때는 시급한 때인지라 (1) 사형 (2) 방면 (3) 이주 로 분류하였는데 김대중은 사형으로 심판되어 있었다. 이때 김대중은 목포항구 근처의 어느 부두에 있던 미군 소속의 선박의 선창 밑에 구속상태였는데 수분 후에는 ‘즉결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평양의 지령에 따라 목포(해방구)지역 해방구의 활동을 활성화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때 그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친구 김진하 씨가 나타났던 것이다. 김진하 씨는 그의 고향 친구로서 김대중의 위기를 보고서 그냥 넘길 수 없어 사형직전에 놓인 친구 김대중을 위해서 일대 모험을 하였다. 즉, 그가 미 극동사령부의 정보처에 근무하고 있음을 이용하여 김대중을 살리기로 하고 그가 그날 새벽에 달고 있던 '자신의 명찰'을 김대중에게 달아 주고 “김대중이라 부르면 절대로 대답하지 말라. 김진하라 부르면 대답하라” 부탁했다. 김대중의 즉결처분 차례가 되자 김대중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실제의 김대중에게 다가가 “네가 김대중이 아니냐”고 했으나 김대중의 가슴에 '김진하'의 명찰이 보이므로, “우리가 잘못 잡았군…” 하면서 김대중을 석방했다는것이다.
이 설은 김대중의 한국전쟁 당시의 행적에 대한 여러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또 다른 얘기로는 김대중의 신원보증을 한 바 있는 해병대 장교 박성철이 살렸다고 한다.
어쨌든 인민군이 목포를 점령하자 김대중은 인민군에 의해 변절자로 몰려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것이라고 한다(「87년 대선에 대한 김대중의 회고」참조).
김대중은「워싱턴 투데이」의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한 바 있다.
『6․25 때 난 서울에 있었어요. 大田 이남은 유엔군이 지킨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난 서울 천안 장항을 거쳐 목포로 내려갔어요. 목포는 이미 공산당에 점령된 상태였어요. 난 6․25 직전 목포에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해상단원이었으므로, 이틀만에 공산당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9․28 서울 수복이 되니까 포로 2백20명 중 1백40명을 배에 실어다가 학살해 버렸어요. 나머지 80명은 탈옥해 살아왔어요. 그 기록이 목포 경찰서에 전부 있어요. 내 사상 문제는 5․16 때 이미 스크린됐고, 80년 때도 스크린 당했어요. 그런 이야기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조작이오』(1996년 월간조선 4월호에서)
“그러다가 9․28 서울 수복이 되니까 포로 2백20명 중 1백40명을 배에 실어다가 학살해 버렸어요” 라는 말은 김대중이 글로 밝힌 부분보다는「워싱턴 투데이」기사와 부합한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읽은 김대중 자료철에는 김대중이 8․15 해방이후 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으며, 6․25때는 예비 검속되어 총살 대상자로 분류되었으나 실무자의 착오로 총살을 면했고, 이후 인민군이 목포를 점령하자 돈을 빌려주고 못 받은 사람들의 고발로 내무서에 구금되었다가 국군이 목포를 탈환할 때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었다.
김대중은 이후의 자신의 參戰 경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쨌거나 이쯤에서 밝혀둘 사실이 하나 있다. 몇몇 사람들은 괜한 트집을 부리며 내 군 경력에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첫번째 죽음의 사선을 넘었던 그해 연말, 나는 ‘해상 방위대’에 참가했다. 해상 방위대는 육군 방위대와 함께 한국군의 보조기관이었다. 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기 위한 것이 임무였다. 육상이든 해상이든, 방위대 소집에 응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었다. 공산당 치하를 겪어보고 스스로 애국심에 불타서 참가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방위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1951년 3월에 일어났던 ‘국민 방위군 사건’을 떠올리면 된다. 해상 방위대에서 나는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까지 올랐다. 어쩌면 그 무렵에 내가 비록 작은 규모나마 해운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선이든 화물선이든 당시는 그게 다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속했던 영광스러운 해상 방위대는 앞서 언급한 ‘국민 방위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해산되고 말았다. (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73~74에서)
첫번째 죽음의 사선을 넘었던 그해 연말, 나는 ‘해상 방위대’에 참가하여,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는 이 무렵에 내가 작은 규모나마 해운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상 방위대’는 육군 방위대와 함께 한국군 보조기관으로 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부대의 소탕이 그 임무였다. 그 당시 여기저기 숨어 있는 게릴라가 전선 후방에서 출몰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김대중이 한국전 당시 어떻게 지냈는지, 군복무 경력은 어떤지는 상당히 논란거리이다. 김대중은 ‘해상 방위대’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말하는데 ‘해상 방위대’의 실존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많다. 김대중은 ‘해상 방위대’ 부사령관 경력을 전에는 말하지 않다가 70년대부터 말하고 있다. 위 두 책의 설명이 차이가 나는데, 하나는 처음부터 부사령관이었고 또 다른 이야기는 부사령관까지 승진했다고 한다.
승진은 공훈이 있어야 하는데 배를 소유하고 있으면 부사령관으로 승진이 되는지 모르겠다. 우선 ‘해상 방위대’의 실존이 입증된 후에 논할 일이다. 김대중은 1980년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었을 때 자필 진술서를 썼는데 여기에도 “해상 방위대”에 대한 언급이 있다(자료집의「김대중 自筆 진술 조서」참조). 1993년에 발간된「후광김대중대전집」15권 말미에 나오는 김대중 연보에는 해상 방위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김대중이 말하는 해상 방위대는 무엇이고 대한청년단 해상단은 또 무엇인가. 어지럽기만 하다. 대한청년단은 서북청년단과 더불어 대표적인 우익단체였다. 김대중은 늘 좌경용공이라고 모함을 당했다고 떠드는데 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으로 활동했다고 변호하지 않았을까. 김대중 속마음은 알 길이 없다.
위는 출처입니다.
50년대의 활동-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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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김대중의 징집기피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대중이의 복잡한 생년월일 관계를 이와 결부시켜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1971년 대통령선거와 김대중」참조)
김대중은 1987년 10월 30일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같이 자신의 연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위원장의 나이, 연세문젠데 저희가 71년 선거때 기억하기로 박정희씨와 치열한 다툼을 벌일 때 김위원장은 나는 돼지띠요, 박정희씨는 뱀띠라 뱀이 돼지한테는 꼼짝 못한다, 그래서 이 선거는 필연코 내가 승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돼지띠로 계산하면 지금 예순 다섯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1925년 출생 으로 되어 있어 어느 쪽이 맞는가를 말해 주십시오.
김대중 : 나이는 돼지띠입니다. 그런데 호적은 달라서 만으로 두 살 차이가 납니다. 우리 나이로는 12월 생이지만 65세입니다.
김대중이 돼지띠라면 1923년 생이 된다.
김대중은 1988년 11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민정당 정동호 의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동호 위원 : 다음 증인께서는 출생신고시에 최초 생년월일인 1924년 1월 16일을 43년도에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하였습니다. 그후 TV 기자회견시에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3년 1월 6일로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인의 3개의 생년월일 중 정확한 것은 어느 것이고, 생년월일을 두 번씩이나 수정한 것은 흔치 않은 일 이라고 생각되는 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대중 : 이것은 정말로 광주하고 관계없는 일인데, 물으시니까 답변드리겠습니다. 세 번은 아니고 한번 고쳤는데, 호적 이전에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1924년 1월 6일 생입니다. 그런데 호적은 1923년 12월 3일인가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것을 1925년 12월 3일로 고쳤는데, 고친 때를 보면 알지만 그때 일본 군대에 걸려가지고 제가 1기생으로 군대에 가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24년 12월로 하면 한 기가 늘어지고 25년 12월로 하면 또 한 기가 늘어져요. 그래서 되도록 군대를 안보내겠다는 가정의 생각에서 그렇게 호적을 바꾼 것입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김대중은 1997년 10월 8일에 있었던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도 자신의 연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대중 : 제가 태어난 것은요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달이에요. 그런데 호적은 1925년 12월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느냐, 일제시대 때 징병제도가 취해져 가지고 한국사람들을 군으로 끌어갔어요. 그런데 23년을 그대로 두면 일본병대 1기로 들어가더라고요. 그런데 25년 12월로 해놓으면 2기 늦어져 가지고 11 월말까지 가니까 3기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 나는 호적이 잘못되었지 나이는 더 많습니다. 이래 가지고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얘야 일본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걸 용납할 리가 없다. 지원병은 30세도 들어가지 않냐. 그러니까 오히려 너는 줄여 가지고 한 2기쯤 늦게 하면 그동안 전쟁이 끝날 수도 있지 않냐. 이렇게 판단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호적신청을 했더니 다행히 제 것만 통과가 되었어요. 그래서 1기는 모두 군대를 갔는데 2기도 일부 가고 저는 안 갔습니다. 그래서 생년월일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으로 1923년 1월입니다. 그런데 음력으로는 12월달이에요”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1923년 1월이 양력 생일이고 음력으로는 생일이 1922년 12월로 해석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 띠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므로 김대중은 개띠가 된다.
김대중 비서실에서 펴낸 자료에는 김대중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김대중은 1925년 12월 3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4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뒷날 그의 호를 후광이라 붙인 것도 동네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마을 이름을 자기의 호로 삼음으로써 이 마을 이름을 세계에 심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출생은 1925년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실제 나이는 1923년 생이며, 돼지띠로 지금 우리 나이로 쳐서 67세이다. 대부분의 그 무렵 시골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자기가 난 지 몇 년 뒤에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 (김진배 지음, 김대중 비서실 편『인동초의 새벽』도서출판 동아, 1987)
김대중 자서전에는 김대중의 생년월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궁리 끝에 호적의 생년월일을 정정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50살 때도 입대시키는 시대였기 때문에 징병연령이 2년이나 3년이 지났다고 해도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군대에 갈 수밖에 없다면 되도록 늦춰보려고 한 것이다. 나도 될 수 있으면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아서 호적정정을 찬성했다. 아버지와 둘이서 머리를 짜낸 끝에 태어난 생년월일을 일년 늦춰서 1925년 12 월 3일로 했다. 정확히는 처음 신고한대로 양력 1924년 1월 6일, 음력 1923년 12월 3일이었는데 그것을 바꾼 것이다.
그때 징병은 1924년 11월 말일까지 태어난 사람에게 해당되었기 때문에 1년 늦춰서 12월 3일생으로 신고하면 실제 징병연령에서 2년 늦춰지는 셈이었다. 제대로 갔으면 1기였을 텐데 이렇게 해서 3기가 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도 정확하게 호적에 넣는 일이 거의 없었다. 몇 년이나 신고를 하지 않기도 하고 종종 형과 아우의 순서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호적을 정정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에 본래대로 해놓으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1925년 12월 3일 생이다. 대통령 후보로서 정식으로 신청한 생년월일은 호적대로 1925년 생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호적상 스무살이 되던 1945년 봄에 나는 징병검사를 받았다. 본적지에서 검사받는 것이 규정이어서 어머니와 고향인 하의도로 갔다. 장소는 옛날에 다니던 초등학교였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P38~39)
김대중이 말한 생년월일 중 1923년 1월 6일이 있는데, 한국전 당시 정부는 1924년 출생 이후부터 징집을 했다. 이 때문에 김대중의 생일 중 1923년 1월 6일 생일은 군 징집기피용이라 해석하는 이도 있다. 좀 더 검증을 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전 당시의 군 복역 기피여부는 많은 이들을 괴롭힌 문제이다. 나이를 올려 군복무를 기피했다가 이른 나이에 정년퇴직을 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군복무를 했다고 해서 또는 한국전 당시 사관학교를 다녔다 해서 모두가 떳떳한 것은 아니다. 묘한 재주를 부려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만 머문 자도 상당수다. 전시 중에 모집했던 정규육사 1기(나중에 11기로 고침) 2기 3기 생도들은 4년이 보장되므로 한국전 도피 차원에서 입교한 자가 많다. 11기 멤버 중 하나회 핵심인 김복동 노태우 등은 징집을 피해 김복동 집에 숨어 있다가 정규육사 모집에 응했던 자들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인 상황에서, 전선에서는 매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불구가 되는 판에 최후방인 진해에서 세월을 보낸 자들이 남들 보고 군대 안 갔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부정부패가 어지간히 많은 한국사회에는 남의 잘못, 정치인의 비리에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보통 사람’이 많은데 이들이 “너희들 중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쳐라”는 말을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
1951년 부산으로 사업근거지를 옮긴 김대중은 정부산하기관인 금융조합연합회(현재의 농협)와 비료․구호 양곡의 전국해상운송계약체결에 성공하여 거액을 벌었다. 이것은 대부분 미국의 원조 물자였으므로 김대중은 미국 덕에 부를 쌓은 것이다. 김대중이 1980년 5월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어 쓴 자필 진술서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본인은 1951년 초부터 회사를 새로이 창립하여 목포상선(木浦商船)주식회사라 하고 일본서 부가 구입한 선박 3척을 은행융자로 사서 해운업을 확장시켰음. 한편 금융조합연합회와의 곡물 및 비료 등 수송을 직접 계약하게 되자 1952년부터 회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상호를 흥국해운(興國海運)주식회사라 하며, 회장에는 당시 해남 출신 국회의원(2대) 윤영선씨가 앉고 본인은 사장이었는데 사실상 본인 개인회사였음.
본인은 부산서 당시의 농공은행 본점에서 1억환을 융자해서 사업을 확장했으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함. 결국 1954년경부터 당시 흥국해운의 군산출장소장인 '○成烈'(편집자 주 : 원본불량으로 확인불가)에게 회사를 인계하고 본인은 해운업에서 손을 뗌.
정경유착을 잘 하는 기업들은 정치인이나 고위관료 출신들을 영입하여 회사 대표 자리 주기를 잘 한다고 하는데 김대중은 이 분야에서 선구자요 개척자인 듯하다. 김대중이 국영 기업과 대규모 계약 체결에 성공했다고 하여 뇌물 등의 부정한 방법을 썼다고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해운공사, 조선공사, 조선운수주식회사 등 3개 국영기업체는 매우 부패하여 3대 국회가 개원한 1954년의 국정감사에서 큰 문제가 되기는 했다.
『인동초의 새벽』과『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에는 번창하는 김대중의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전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으나 육상 교통은 곧 복구되지 않았다. 도로 사정이 엉망인데다 공비의 출몰을 우려하여 상대적으로 해상 교통의 번창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은 해운에 대해 웬만한 식견이 있는데다, 한 번 손을 대면 뿌리를 뽑고야 마는 왕성한 투지를 가진 청년 실업가 김대중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청년 실업가로 그는 6․25 그 이듬해 봄 재빨리 목포 해운 회사를 일으켜 사장 자리에 앉는가 하면 전남 해운 조합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한국 조선 조합 이사 자리도 곁들여 굴러 왔다. 거기에다 목포 지구 해상 방위대 부대장이라는 자리는 해군 또는 해안 경찰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거기에다 목포 형무소에서 처형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것은 그의 반공 사상을 보증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금융 조합(오늘의 농협) 연합회와 전국의 비료 및 양곡의 운송 대행 업무를 맡음으로써 임시 수도인 부산 출장이 잦아지고 그의 당좌 거래 통장에는 몰라보게 많은 동그라미가 그어졌다.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1971년 당시 김대중 후보 경호 실장으로 일한 박성철 장군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당시 해군 목포 헌병 대장이었다는 것이다. 부산의 고급 호텔에 묵으면서 정치인과 고급관료들에게 자기의 위세를 보이는 것도 청년 실업가 김대중으로서는 즐거운 일이었다. 미남인데다가 부지런하고 공손하여 거기에다 지난 날 목포 일보 사장으로서 언론을 경영하고 직접 논설을 휘두르기도 한 그의 식견은 26~27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숙되어 있었다.(김진배 지음, 김대중 비서실 편『인동초의 새벽』도서출판 동아, 1987, P56~57)
젊은 사장은 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돈벌이에 나섰다. 아무튼 요새 돈으로 수십억원을 벌었을 것이다. 재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흥국해운은 당시 금융조합연합회(농협의 전신)와 구호양곡이나 비료 따위의 전국 해상수송 계약을 체결하고 그 일을 도맡아 했으니 돈벌이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던 것이다.
목포의 유지들이, 일취월장하는 이 풋내기 부르조아에 대해 주목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6․25후, 김대중 사장에게 목포일보를 맡아 운영해 보라는 청이 들어온 것이다. 이 신문사는 목포 역전 근처에 있는 아담한 2층 빌딩인데, 원래는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던 것을 김 모씨가 이를 불하받아 그동안 운영해 왔었다. 그러나 이 경영자는 정미업에 종사하는 이 고장의 부자이기는 했으나, 언론기관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매일 신문을 발간하기에는 적이 힘겨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편집국 기자들의 쥐꼬리만도 못한 월급조차도 제대로 지급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 그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수하는 청을 쾌히 승낙한 것이다. 그리하여 돈과 시간이 넉넉해진 김대중씨는 곧장 스스로 사설을 갈겨쓰곤 했다. 그의 사설은 특히 농민이나 근로자, 혹은 실업자 구제 문제에 있어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또 돈과 시간이 넉넉한 사람에겐 감투를 씌워주기를 좋아하는 계층이 있는 법으로 해운상사의 사장이자 신문사 사장인 그에게 이번에는 쟁쟁한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 부단장 직함을 주겠다고 간청해 왔다. 이 감투에 무슨 꿍꿍이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사양하는 법 없이 받아들였다. 그의 인생은 바야흐로 순풍에 돛을 달고 쾌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 생애 최고의 해였을지도 모른다. (김형문,『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서울: 금문당, 1987, P45~46)
김대중 말로는 ‘6․25 직전 목포에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해상단원’이었다는데 실제로는 6․25 종전 후에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 부단장 감투를 쓴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전 당시 군복무를 한 적이 없고 돈벌이에 바빴다.
김대중의 생애를 다룬 책은 김대중과 추종자들이 쓴 것만도 수십 권이 된다. 정치에 입문하기 이전의 김대중의 행적에 대해서는 조금씩 그 기술에 차이가 있다. 특히 쟁점이 되는 행적에 대해 그러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 5월 20일 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김대중은 재력을 믿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간의 일을 김대중은 설명한다.
1951년 가을! 전쟁의 포연이 아직 다 내리지 않았는데도 오륙도를 끼고 도는 바닷물은 마냥 푸르렀다. 나는 고향땅 하의도에서 바라보던 바다와 비교해 보기 위해서 눈을 동래쪽으로 옮겨 끝 가는 데까지 응시했다. 주변의 지형이 조금 낯설 뿐, 바다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물빛이며 파도가 휘몰아오는 모양이며 작은 돛단배까지. 더구나 한반도를 삼면으로 두르고 있는 세 개의 바다는 서로 한 몸이 아닌가.
나는 거주지를 옮겨 이제 막 부산으로 이사를 해온 터였다. 사업을 크게 한번 일으켜 보고 싶었다. 당시 부산은 임시 수도였기 때문에 모든 정부기관이 모여 있었다.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사업상 가장 큰 고객이다. 그래서 아예 거주지를 옮겨 이사를 결심한 것이다.
부산에서 나는 국영기업의 하나인 금융조합연합회와 계약을 체결했다. 오늘날의 체제로는 농협중앙회였다. 우리 회사는 계약에 의해 곡물과 비료 그리고 농약 따위를 독점적으로 운송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회사는 기존의 두 척 이외에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구입한 세 척의 일본 중고선, 그리고 다른 회사로부터 세를 낸 배들이 있어 화물선 10여 척 정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목포에 신문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목포일보사’였다. 목포일보는 일본 통치시대에 일본어로 발간되던 신문이었다. 한반도의 지방지로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기도 하는데 해방 후에는 경영자없이 종업원만으로 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형무소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오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이 신문사를 인수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목포일보사 운영에도 사업적 수완을 마음껏 발휘하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언제나 한 식구처럼 지내던 그들과 끝내 함께 하지는 못했다. 종업원들마다 끝까지 함께 일하자고 졸랐고 다른 사업은 아예 넘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붙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 때문이었다. ‘정치’라는 보다 큰 경영을 목표로 그들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서서히 떠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민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한 것은 1954년 목포에서였다. 해방 후 세 번째 치러진 민의원 선거였다. 내가 아직은 만 서른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물론 나는 당선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있었다. 당시는 노동조합의 동향이 목포의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 전의 총선에서도 노동조합 출신이 당선됐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이 모두 내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내가 노동자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고 또 하나는 내가 경영자로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던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노조는 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또 조직의 이름으로 천거하기도 했다. 그들이 제시한 조건이 있다면 당시의 보수 야당인 민주국민당에 가입하지 말라는 한 가지뿐이었다. 나로서도 민주 국민당에 입당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받아 들이지 못할 조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론 여당인 자유당에 입당하는 것도 싫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에 반대해서 정치가가 된 이상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무소속을 선택했다.
선거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조의 힘을 등에 업고 선거를 치른다면 땅짚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자유당 정권이 경찰에 압력을 가해 노조 간부들을 전원 체포해 버린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면 국가 기간단체인데 여당이 아닌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는 게 그 죄목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노조간부들로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내 지지를 철회하고 대신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풀려 나왔다. 그리고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조합원들을 모아 집회를 열고 다니면서 조합의 방침이 바뀌어 자유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마소가 자다 깨어나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이런 식의 얼토당토 않는 부정선거는 그 뒤로도 오래오래 끈질기게 계속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최대의 피해자가 바로 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내 자신의 기록은 한국 부정선거 약사(略史)나 부정선거 피해자 기록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나는 최초의 선거에서 졌다. 8명의 입후보자 중에서 4위였는지 5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참담한 패배였다.(김대중,『나의 삶 나의 길』서울: 산하출판사, 1997, P75~80에서)
노조를 믿고 출마한 것이 아니라 재력과 신문사 사장이라는 것을 믿고 나왔다는 것이 상식에 맞다. 김대중이 떠드는 대로라면 김대중이 낙선한 이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는 강력한 야당세를 바탕으로 조직을 키워온 정계의 중진 정중섭(鄭重燮, 제 1야당인 民主國民黨 소속)씨가 8,710표를 얻어 당선되었고, 차점자는 자유당의 유정두 후보였다(득표수 5,806). 김대중은 3,392표를 얻어 5위였다.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면 유정두 후보가 당선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부정선거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유권자에 대한 금품공세 등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부정과 투개표 단계에서의 부정이 있다. 자유당 후보가 낙선한 것을 보아 부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투개표 부정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김대중의 부정선거 주장이 거짓말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1. 자유당의 부정선거 전략은 자유당 후보의 표를 많이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대중이 표를 깎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네가티브 전략이었다. 자유당은 현역 의원인 민주국민당의 정중섭 후보보다는 무소속으로 처음 출마하는 대중이의 당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판단하여(그 이유는 아마도 대중이의 엄청난 재력과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대중이를 집중 목표로 하여 부정선거를 했다. 그래서 대중이는 5 위로 낙선시켰지만 정중섭 후보 등 다른 후보에 대한 부정선거를 소홀히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아서 정중섭 후보의 당선은 막지 못했다.
2. 자유당도 부정선거를 했지만 정중섭 후보측이 더 심한 부정선거를 하여 당선했다.
3. 자유당의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유권자가 정당한 선거운동을 한 정중섭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4. 부정선거가 아니라 공정한 선거였다.
1954년 총선 때 목포 지역구에서 여당이 부정 선거했다는 것은 김대중의 주장이고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김대중이 말하는 양심을 ‘良心’이 아니라 ‘兩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 따르면 김대중 반대자들은 모두 해석을 잘못해 쓸데없이 김대중을 경멸한다고 한다).
1999년 초에 도서 출판 인동에서 나온 김대중 자서전에도 위의 인용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자서전은 일본 독자를 상대로 일본에서 먼저 나온 것을 번역한 것이다. 한국인이면 자유당의 유정두 후보가 낙선했다는 것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나 그 당시의 신문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일본 독자는 당선한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일본어 개정판에서는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제 1야당후보가 당선되었다’는 부가설명을 꼭해서 일본인들이 기본적 사실이 아닌 왜곡된 지식을 갖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독자들이 왜곡된 사실을 접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대중이 쓴 모든 글에는 제대로 된 주석을 많이 달아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김대중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출판한 출판사들의 잘못이 크다.
김대중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정선거’로 떨어졌어도 나라 체면을 위해 왜놈들에게 책으로 알리는 것은 삼가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든다. 조병옥 박사 같은 이는 해외에 나가면 이승만 정권 비난을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했다. 이는 초기 야당 지도자가 보여준 미덕이었다.
위는 출처입니다.
50년대의 활동-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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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정계에 입문하려다 고향에서 낙선한 김대중은 해운 회사를 처분하고(1억 5천만원에 매도했다고 한다) 서울로 가서 정계의 거물들과 면식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대중은 서울 퇴계로에서『태양』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고 웅변학원을 차리기도 했다.
김대중은 한국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지녔던 종합교양지『사상계』(발행인 장준하) 1955년 10월 호에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란 제목으로 노동문제에 관한 시사논문을 처음으로 기고함으로써 공부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一. 서언 二. 정치적 진로 1. 반공투쟁의 전위 2. 자주적인 정당 관계 3. 협동주의적 정치의 추진 三. 경제․사회적 진로 1. 관료 자본주의와의 투쟁 2. 양심적 기업가와의 협조 3. 적극적인 복리활동의 전개 4. 농민 及 상병(傷兵)과의 동맹 四. 조직적 진로 1. 노동자의 적극적인 교육 2. 사이비 지도자의 제거 3. 인테리 노동자의 조직화 4. 활발한 이론의 전개 五. 결론
개량주의적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자신을 ‘노동 문제 연구가’라고 쓴 김대중은 결론의 말미를 “끝으로 필자가 충심으로 권고하고 또 열망하는 바는, 한국의 노동 운동 지도자들이 현재와 같이 우선 당면 목적의 이해와 권모술수에만 열중하지 말고 좀더 성실한 태도와 스스로의 주체적 質의 향상에 깊이 관심하는 동시에 진실로 이 나라 노동운동의 유구한 발전을 위해서는 먼저 능금나무 씨를 심는 현명과 원칙을 고수하여 주기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라고 맺고 있다.
1954년 9월 초대 대통령의 무제한 연임을 인정한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이 억지로 통과되자 이승만 정권에 대한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다. 여기에 힘을 얻어 민국당(민주국민당)과 야당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 60명은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라는 교섭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단일 야당을 결성하기 위한 신당 운동이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혁신계라 평가받는 조봉암(曺奉岩)의 참여 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조봉암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여 1년간 복역하였다. 일본 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에 기초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모스크바를 방문,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였다. 모스크바에 2년간 머물며 수학하다가 귀국하였다.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7년간 복역하였다. 8․15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다. 1946년 박헌영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내고 조선공산당을 탈당, 우익으로 전향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주도하였다.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차점으로 낙선하였다.
신당 추진 세력 중 ‘민주대동파’는 조봉암의 신당 가입을 찬성하였고 조병옥(趙炳玉), 장면(張勉), 김준연(金俊淵), 정일형(鄭一亨) 등 ‘자유민주파’는 반대하였다. ‘자유민주파’가 조봉암의 참여를 반대한 이유는 이념 성향의 차이 외에도 그가 강력한 경쟁자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찬반 논의 속에 참여 교섭을 받은 조봉암은 김성수의 요청에 따라 ‘반공’ 성명을 내고 신당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결국 조봉암 뿐 아니라 ‘민주대동파’도 신당에 참여하지 못했다.
1955년 9월 19일 민국당과 무소속, 자유당을 탈당한 의원 등 여러 정파가 모여 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민주당에 참여한 의원들은 민국당 계 13명, 무소속 동지회 10명, 무소속 5명, 자유당 계 5명 등 모두 33명이었다. 조봉암을 배제하는 등 민주당은 처음부터 보수 색채를 띠었다. 민주당 내에서 민국당 계열은 구파, 무소속 출신은 신파라 불렸다.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 후보 - 이기붕 부통령 후보로, 민주당은 구파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 신파의 장면 부통령 후보로 선거에 나섰다. 당시의 헌법으로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러닝메이트로 선거하는 미국과 달리 2명을 모두 직선으로 뽑았으므로 대통령과 부통령이 여야로 갈리는 것이 가능했다.
폭발적인 인기로 신익희 후보는 당선이 유력해 보였으나 선거를 10일 앞둔 5월 5일 유세 기간에 서거하였다. 당시의 선거법으로는 대통령 후보가 선거 기간 중 사망해도 교체할 수 없었는데, 민주당의 대안 가운데 하나는 조봉암 후보 지지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민주당은 조봉암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부통령 후보 장면 당선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승만 후보는 유력한 경쟁자가 없는 가운데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조봉암 후보는 농민 인구가 많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예상외로 많이 득표하여 얻어 모두 220만 표의 지지를 얻었다. 장면은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부통령으로 당선되어 대통령과 부통령이 여야로 갈리게 되었다.
이후에도 조병옥과 장면을 중심으로 신․구파간의 파쟁이 심했다. 조병옥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당권에 집요한 도전을 하는 신파를 존중하고 설득해 파쟁을 극복해 나갔다.
웅변학원을 운영하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연을 맺을 기회를 찾던 김대중은 민주당의 실력자이며 부통령인 장면을 만나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김형문의 기록인데, 이것은 김대중의 주장이라 볼 수 있다.
그가 장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정치파동 때이다. 계엄사에 연행된 외삼촌 장홍염 전 국회의원을 이른바 발췌 개헌안 표결에 참석시키기 위해서 석방한 뒤의 초가을 어느 날, 수상 지서(水上支署) 앞 한식당에서 삼촌과 점심을 들고 있는데, 우연히 장박사가 그 식당에 들 합석하게 되자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때 삼촌과 장 박사는 같은 야당계로, 이승만 정권의 장기화를 위한 책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두 번째 상면은, 장박사가 저격을 받고 입원 중에 있을 때다. 당시 김씨는 퇴계로에서 종합잡지『태양』의 발행인이자 주간을 맡아 보고 있었다. 취재도 할 겸해서, 평소에 장 박사의 정치이념을 흠모해 오던 터였기 때문에 시공관에서 개최(1956년 9월 28일)하는 제 2차 민주당 전당 대회를 참관하러 들렀다가 저격사건을 목격하고 그만 흥분해 버린 것이다. 그 뛰어난 저항정신에 일관해 오신 어른께서 지금 어찌되었을까.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병원엘 찾아간 것이다. 입원실은 아예 구치소였다. 경호원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이튿날 또 찾아갔다. 경호원이 미주알고주알 캐묻고 나더니 두 시간인가를 기다리게 한 다음에 비로소, 이렇게 철저히 해야 한다며 호주머니를 모두 뒤지고 난 뒤, 턱으로 도어를 가리켰다. 들어가고 싶거든 알아서 하라는 거다. 그런데 이런 실수가 없다. 도어를 열고 들어서서, 누워있는 장박사의 수척한 얼굴을 보자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린 것이다. 이때의 경호원은 훨씬 뒤에 김대중씨의 열렬한 선거운동원이 된다.
그가 민주당에 입당할 때, 장박사의 추천인 서명을 받으러 찾아갔을 때도 지나친 검문을 받고 들어갔다. 응접실 소파에서 서명을 하면서 장 박사는 숙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 재작년인가 목포서 출마했더라면서?” 1954년 5월에 있었던 제 3대 국회의원 선거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막스 베버의『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읽었겠지?” “네, 감명깊었습니다.” “그 학자가 말했지. 직업 정치가의 조건은 첫째 정열, 둘째 책임감, 셋째, 통찰력이었지 아마.“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세 가지 조건 외에도 민주적인 지도력과 조정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지, 일전에 누가 자네 얘기를 하더군. 자넨 목포선거의 정견 발표 때 말했다면서. 나는 키이를 잡는 조타수가 되겠다고 말이야. 다년간 해운업에 종사하면서 얻은 비유였겠지만 아주 적절해요. 참다운 정치가가 되려면 눈앞의 이해(利害)에 눈이 어두워져선 안돼. 그건 정상배나 하는 짓이야. 언제나 대국적 견지에서 그 시대의 민중의 키잡이가 돼야 하구말구.“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노파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지금 폭력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렇다고 폭력으로 대항하거나 정권교체를 기도한다는 건 절대 반대야. 젊은 정치가들은 특히 그 점에 염려가 된단 말이야. 나에게 만일 사명감이란 것이 있다면, 설득이나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만 정권을 이양하고 또 인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요, 이 땅에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걸세.”
이렇게 간곡하게 당부했다고 한다.
그 후 장 박사는 다른 사람에게 그를 소개할 때마다, 전라도에서 유능하고 지성적인 청년 정치가가 하나 탄생했다고 극구 칭찬해 주었고, 이 정치 초년생을 일약 당 선전부장으로까지 발탁해 주었다고 한다.(김형문,『김대중 그는 누구인가』서울: 금문당, 1987, p 84~86)
이 책에서는 제헌 국회의원 장홍염을 김대중 외삼촌이라고 기술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거짓 기술이 실린 이유를 별도로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소설가 박화성(朴花城)의 소개로 민주당 신파의 중진 의원인 박순천(朴順天), 조재천 등을 알게 되어 민주당에 입당했다는 것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이었던 최서면(崔書勉)의 소개로 장면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56년 10월 민주당에 입당한 김대중은 장면의 천거로 곧장 중앙 상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인 장면은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심복이 된 대중이를 당요직에 앉힌 것이다. 당시 민주당 조직부차장이었던 조연하(趙淵夏)씨는 김대중과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장면박사의 정치비서나 다름없었던 김철규 신부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 삼청동의 한 식당으로 갔을 때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젊은 친구가 앉아 있었다.
“서로 인사나 하시오. 우리 천주교의 신자인데 장 박사께서 조군에게 부탁해 입당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김대중이라 합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입당이라면 굳이 저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김 신부가 나를 불러내 장 박사까지 들먹이며 수선을 떠는 것이 이상해 물었다.
김철규는 신부이면서 별난 사람이었다. 성격이 호방한데다 술이라면 대주불사요, 엉뚱한 데가 많은 분이었다. 장 박사는 그에 대한 애정이랄까 아니면 그분의 번뜩이는 재치랄까, 아무튼 그 분의 이야기 특히 정치문제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수용했다.
“그래서 이렇게 모신 것이 아니오. 이분은 젊기는 하지만 앞으로 큰 재목이 될 것이니 중앙상무위원을 시키시오!” 상무위원이란 오늘의 당 정무위원에 해당하는 요직으로 그때 현역의원도 지명받기가 힘든 자리였다. “아니 상무위원으로…….” “그러니 소석(素石, 편집자 주: 이철승의 아호)과 상의를 해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며칠 후 나의 이야기를 들은 소석은 의원경력도 없는 사람을 어찌 앉히느냐고 펄펄뛰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집요한 설득으로 상무위원을 시켰다.(조연하,『세상에 이럴 수가…』서울 : 동춘 서림, 1992 P165~166)
장면이 김대중을 중용한 이유가 김대중이 요긴한 정치자금줄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김대중은 장면의 권유로 1957년 7월 3일 장면을 代父로 하여 김철규 신부의 집전 아래 노기남 대주교가 입회한 가운데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이다. 김대중은 카톨릭 신자가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1956년 5월 15일에 있었던 제3대 대통령 선거 후에 정식으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부통령인 장면 박사의 계보 신분에서 정당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한국 정치사에서 양심적인 정치인의 하나로 손꼽히는 장면 박사에게 인정을 받아, 내 자신이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소장 이론가로서 점차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나는 또 장면 박사를 대부로 하여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세례는 명동성당에서 받았고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로 정했다. 이 세례명을 주신 김철규(金哲圭) 신부님은 “토마스 모어는 16세기 영국 사상가이자 정치가로서,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 독립해 나온 헨리 8세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고 설명해 주셨다. 신부님은 내가 토마스 모어와 같은 정치인으로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 되기 바란다.”고 덧붙이셨다. …
카톨릭 신자가 된 까닭은 당시 나의 아내였던 차용애(車容愛)의 친정집이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장면 박사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 장면 박사의 인격과 정치에 대한 자세에도 끌렸고, 나중에 성당에 따라 다니는 동안 교리도 알게 되어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신자가 된 후에도 ‘신이 정말 있을까?’라는 의문은 늘 지니고 있었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유사 이래 사상가를 고뇌하게 한 그 문제가 내 나름대로 풀린 것은 세례를 받은 지 20년이 지나고 나서였다.(『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제1권 P100~101)
한마디로 신앙에 따라 입교한 것이 아니라 정치 보스의 종교에 자신을 맞춘 것이다.
김대중은 1958년에 실시된 제 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강원도 인제(麟蹄)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등록을 방해받아 출마하지 못했다. 이에 김대중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상대로 선거 무효소송을 내어 1959년 6월 대법원의 선고무효 판결을 받아 승소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어 실시된 재선거에서 자유당 후보 전형산(全亨山)에게 패배했다. 전형산은 2만 1000여 표를 얻은 데 비해 김대중은 8400여 표에 그쳤다.
어느 나라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출마자가 연고가 있는 지역구에서 출마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런 경향이 강해 지연․혈연․학연이 있는 곳, 생활기반이 있는 곳, 하다못해 처가집이라도 있는 곳에서 출마하지 이상의 것이 전혀 없는 지역구에서 출마하지는 않는다. 김대중은 왜 어떠한 연고도 없는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했던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편. 민주당에 입당한 뒤 나의 선거구가 문제였다. 고향인 목포에서는 이미 민주당의 정중섭(鄭重燮)씨가 의석을 갖고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을 밀어내고 선거에 나설 수는 없었다. 여러모로 궁리한 끝에, 38선 근처의 강원도 인제(麟蹄)에서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그곳은 한국전쟁 결과 새롭게 남으로 편입된 땅이었다. 타향이었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유권자의 70~80%는 군인들과 군속,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당시 군은 압도적으로 야당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야당인 내가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입후보하게 된 것이다. 물론 타향이라고 하지만 ‘지역감정’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대였다.(『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제1권 P101~102)
김대중이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한 이유는 금전 문제가 얽힌 스캔들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 | | |
첫댓글 더 지겹다~~~~~~~~~~
아~~글이 너무 길어요. 나누어서 올리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