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매극복에, 참돔이 최고
오늘 아침 할멈이
“여보, 오늘 뭐 먹지?” 하고 묻는다.
평소에도 자주 하는 말인데, 오늘은 왠지 조금 특별하게 들린다.
오늘이 9월 21일, ‘치매극복의 날’이라고 한다.
2011년에 치매관리법이 제정되고 법정기념일로 정해졌다니 벌써 15년이나 됐다는데, 나는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기념일 바로 전날, 참돔 한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어제 아침, 동서에게 전화가 왔다.
“형님, 치매에 좋다는 참돔 한 마리 가져갈게요. 11시까지 갈 테니 점심 같이 먹어요.”
‘치매에 좋다는 참돔’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7박 8일 고향길을 다녀오느라 지난주 예배를 거른 터라, 어제 아침에는 서둘러 1부 예배에 다녀왔다. 집에 돌아오니 10시 반. 그런데 점심 손님은 11시에 온다니 마음이 급해졌다.
“여보, 뭐 좀 준비해 놨어?”
아내가 평소답지 않게 멀뚱멀뚱 나를 쳐다본다.
“회가 오는 거야? 생선째 오는 거야? 그에 맞춰서 준비 조금 해야지요.”
그제야 우리도 정신을 차렸다.
아내가 급히 동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예요? 생선째 가져오는 거예요?”
“생선째 가져갑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내는 자전거를 타고 시장으로 바쁘게 달려갔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한마디 보탰을지 모른다.
“손님 온다는데 이것도 준비 안 해 놓고 어쩌려고 그래요?”
하지만 이제 우리는 팔순을 맞이한 부부다. 괜히 한마디 보태 할멈 마음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
나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시장 잘 보고 와.”
하고 편안하게 보냈다.
나이 들고 보니 침묵 한마디가 평화의 비결이다.
잠시 후 동서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웬 참돔인가. 족히 2kg은 되어 보이는 큼지막한 놈이었다. 배를 따고 비늘을 깨끗이 손질해 살점과 껍질만 남겨 놓은, 싱싱한 반건조 참돔이었다.
아내가 깨끗이 씻어 놓자, 내가 머리를 떼고 세로로 갈라 반쪽을 세 토막 냈다.
냄비에 무를 깔고 참돔을 얹은 뒤 파와 양념을 넣고 푹 끓였다. 동서가 매운 것을 잘 못 먹으니 고춧가루는 살짝만 넣었다. 고기가 다 익은 뒤 마지막에 미나리와 쑥갓도 듬뿍 올렸다.
그 사이 나는 햅쌀에 찹쌀과 검은콩을 조금 섞어 구수하고 쫀득한 밥을 지었다.
잠시 후 밥상 위에는 참돔 두 토막씩, 미나리와 쑥갓, 그리고 시원한 국물이 한 그릇씩 올라왔다.
조미료는 한 방울도 넣지 않았는데 국물 맛이 기가 막혔다.
“이게 바로 치매 예방 밥상인가?”
서로 웃으며 장수막걸리 한 병도 땄다.
동서와 한 잔, 두 잔 나누다 보니 나는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결국 참돔찜에 밥 한 공기 맛있게 얻어먹고, 막걸리 반 병에 취해 두 시간이나 단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보니 동서는 벌써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형님, 이제 가야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허허 웃었다.
참돔이 치매에 좋다더니, 나한테는 꿀잠까지 선물해 주는구나.
참 재미있고 기분 좋은 하루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작 고마운 것은 참돔이 아니었다.
그 큰 생선을 들고 와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한 동서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동서, 정말 고맙네.
지난 8월 19일, 처제가 손자를 보러 미국으로 떠난 뒤 동서는 한 달 가까이 혼자 지냈다. 젊은 날에는 혼자 있는 것도 괜찮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갈 곳도 마땅치 않은 영감이 혼자 지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며 그동안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처제가 추석 이틀 전인 9월 23일에 돌아온다고 한다.
“형님, 그러지 말고 10월 30경에 일에 우리 우리와 대구 누님네와 어울려 2박 3일 여행이나 한번 갑시다.” 이보다 더 정겨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어제의 참돔 한 마리는 단순한 생선이 아니었네.
고향길 다녀온 형에게 건넨 정이었고, 함께 웃으며 나눈 행복이었으며, 팔순을 바라보는 형제간에 나눈 온기 넘치는 한 끼였네.
동서는 걸어서 가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걸음과 자전거가 거의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송내역에서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손을 흔들었다. 오후 네 시 반쯤이었을까.
추분을 사흘 앞둔 햇살은 서쪽으로 한참 기울어 있었고, 가로수 그늘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늘이 치매극복의 날이라는데,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음식도 약이지만, 좋은 사람과 웃으며 밥 한 끼 함께 먹는 것이야말로 나이 들어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약이 아닐까.
치매는 극복해야 하지만, 동서가 남겨준 이 따뜻한 정만큼은 절대로 잊지 말고 가슴에 품어야겠다.
참돔 한 마리보다 더 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