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그는 누구인가...
1927년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6세에 일본에 가서
와세다대 공대 2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육사 6기로 임관한 그는 당시 경기 포천지역 1연대 중대장시절 6.25가 일어
난다.군에서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육군대학 수석 졸업 후 최연소 육사 교무처장, 1군 참모장 등을 지낸다.
1961년 34세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맡음.
그는 이후 50년 동안 중요 요직을 맡는다.
육군 소장예편→대한중석 사장(3년)→포항종합제철 사장·회장(25년)·명예회장 →민정당 대표·민자당 최고위원·자민련 총재·4선 국회의원→국무총리….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과 부의 중심에 있으면서
부패 인사로 비난 받을수
있었다. 좌파 소설가 조정래의 평은 “박태준은 한국의 간디다. 나는 그의 이름에 마하트마를 붙여 ‘마하트마 박’으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
(2011년 12월 17일
서울 현충원 영결식장 ).
사람의 일생이 ‘성스러운’ 이라는 뜻을 가진 ‘마하트마’로 칭송받는 것은 아주 특별한일이다.
박태준(호는 청암)이 통상대신 시절 포항제철을 방문했던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는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종업원들이 너 나 없이 마음으로부터 박태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표현할수없는 감명을 거기서 받았다.”
청암의 좌우명은 ‘짧은 인생을 영원히 조국에’
1964년 12월 그는 국영 기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을 맡은지 1년만에 만년 적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킨다 보통 4~5년 걸리는 제철소건설 작업을 제철소 구경도 못한 38명과 착공 3년 3개월만에 준공을 마친다.
1973년 조업 첫해부터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불
순이익 1200만불을 낸다.
가동 후 50여년 적자였던 일본의 동종 업계와 비교 하면 ‘기적’같은 일이다.
포항제철은 가동 첫해부터 이익을 낸 세계 유일한 제철기업이다.
청암은 제철소 공기단축을 위해 하루 24시간 작업을 지시해 놓고 자신도 매일 3~4시간 잠자며 현장을 챙긴다. 1968년 포항제철 출범부터 92년 광양제철 2기 완공까지 그는 대부분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포항 효자동 사택과 회사 에서 지내 ‘효자사 주지 스님’으로 불렸다고한다.
그는 ‘솔선수범’ 하며 ‘무사욕 ’의 리더였다.
포스코에서 25년 만에 물러날 때, 그는 공로주와 퇴직금 1원도 거부했다. 1988년 포철 2만여명의 임직원에게 발행 주식의 10%를 우리사주로 배정 했을때도 같았다.
명예회장으로 복귀한 뒤
“노후를 생각해 스톡옵션을 받으시라”는 주변의 권유에 그는
“포항제철은 선조의 피로 세운 회사이다.
공적인 일을 할때 사욕을 갖지 말라!”고 일갈했다.
“청암의 도덕성은 무서울 정도였으며 그의 리더십 근간은 청렴결백이었다” 황경로·포스코 2대 회장의 증언 그대로다.
포철 사장 시절 아버지가 “문중 사람들을 좀 써주면 안되겠냐”고 하자, 청암은 그대로 방을 나와 회사로 갔다. 1962년 박정희국가 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준 하사금을 합쳐 서울 북아현동에 집을 마련하기 까지 그는 8년동안 15번 전셋집을 전전했다. 38년간 살던 집을 2000년 팔아 생긴 돈 14억 5000 만원 중 10억원은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고 73세에 전세로 들어간다.
사후에 남긴 그의 재산은
전무했고, 말년 생활비와 병원비는 자녀 5명( 4녀 1남)도움으로 해결했다.
청암을 다룬 평전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의 저자 이대환 작가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
였던 포항제철 25년 동안
박태준은 단 한 푼의 비자금도 만들지 않았다.
이는 누구도 찬사 보내지 않을수 없는, 20세기 후반 한국사에 길이 기록될 업적이다. 이거야말로 박태준의 이름을 포철 용광로만큼이나 칭송해야 할 일이다.”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는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 의 것이다.
이 말은 청암의 생애를 평하는 정신적 기둥이다.
1970년 포철에 6000만원 보험회사 리베이트가 생겨
청암은 이 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포항제철의 예산이 아니고 공돈이니
통치 자금에 보태 쓰시라” 건네자, 박 대통령은
“임자 마음대로 써라” 며 돌려주었다.
청암은 이 돈에 회삿돈을 더 보태 임직원 자녀들을 위한 제철장학회를 설립 한다. 이렇게 세운 학교만 포항과 광양에 27개다.
기업 최초로 임직원 자녀 대상 전액 장학금 제도와 한국 최초 연구 중심대학 (포항공대)의 탄생비화다.
국영기업 최고경영자로 30여년간 재임하는 동안, 청암에게는 고가의 설비 구매나 원료 도입 결정을 둘러싼 정치 자금 협조와 인사 청탁,리베이트요청이 쏟아졌다.
그는 불법 정치자금을 내지 않고 ‘정치 무풍 지대’ 를 고수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무한 신뢰와 청암의 공과 사에 대햔 철저한 정신이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가 실패하면 조상에게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다.
만약 그러면 모두 영일만 바다에 투신하자” 외쳤다. 그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돌파구를 혜처나갔다.
1979년 박정희 서거 후 청암은 “포항제철을 정치 외풍에서 지키기 위해” 정치권에 들어간다.
1990년 3당 합당 후 민정계의 수장이 된 그는 김영삼 대통령 후보와의 불화로 1992년 말 민자당 최고위원·포항제철 회장과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난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다른 추도문에서...
“너나 없이 돈에 홀려 정신 잃은 세상에서 박태준의 길을 따라가기란 너무 어렵고, 어쩌면 그 분은 이 시대의 마지막 애국자인지 모른다. (중략) 정직·청렴한 그 분을 바로 아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바르게 세우는 길이다.”
청암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으로 일본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평생 잊지 못할’ 기억 두 개를 회고했다.
이야마 북중학교 1학년때 교내 수영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조선인’이란 이유로 일본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우승을 빼앗긴 일과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도쿄 시내에 미군의 폭탄이 쏟아지던 날 방공호에서 겪은 일이다,
“방공호는 질서 정연했다.
노인들, 특히 할머니들은
‘젊은이는 안으로 가라. 위험한 곳은 우리가 막는다. 왜 책을 들고 오지 않았느냐? 젊은이는 책을 펴고 공부해라.’ 방공호 입구에 천막이 쳐지고 젊은이가 모인 안쪽에는 두개의 촛불이 켜졌다."
청암은 “1등을 뺐겼을 때 참고 다스렸다”며 “방공호에서 할머니의 질책을 들었을 땐 식민지 청년을 고국에 대한 책임감에 몸서리쳤다” 고
회고했다. 그는 일본이 준 분노는 참고, 감동은 받아 들여 조국의 재건을 위한 동력으로 삼았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했고, 이듬해 11월 미국·영국·독일 등 5개국 8개 회사 연합체인 대한 (對韓) 국제제철차관단
( KISA)이 발족됐다.
1969년 “한국에서 제철소 건설은 채산성이 없다”며 KISA는 최종 불가 결론을 내리고 해체됐으며 IBRD (세계은행)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한국은 제철소 건립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는 고립무원이 되었다.
청암은 ‘농림수산업 지원 용도’로 정해져 있는 대일 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 건설 자금으로 일부 전용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제안을 반대한 오히라 마사요시 대장상을 69년 8월 한주 동안 세 차례를 만난다.
청암은 일본 정부간행물
보관소를 샅샅이 뒤져 일본 사례를 분석한 뒤
“한국에 제철소를 지으면 일본 안보에 큰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설득한다.
“한국에서의 제철 산업은 불가능 하다”고 할 때, “난국에 빠진 조국을 구하 겠다”는 청암의 애국심이 일본 지도층을 감복시켰다
당시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는 “나는 박태준 의 단호함에 너무 놀랐고,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감정적인 반일데모가 계속됐던 1960~70년대, 청암은 “일본을 알고
일본을 활용해 일본을 극복하자”는 ‘지일(知日) ·용일(用日)·극일(克日)’ 의 3단계 일본관을 주창 했다. 청암은 포항제철의 ‘스승’이던 신일본제철을 1990년대 추월하여 그 타당성을 증명했다.
불굴의 용기와 투지로 청암이 이뤄낸 한·일간의 협력 모델은 대한민국의 진정한 산업화와 선진화를 추동시킨 출발점이었다.
대한해협의 양쪽에 자유민주·시장경제라는 동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국은 일본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고도성장을
질주한 것이다.
1978년 중국 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 제철회장을 만나 “중국에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하자, 요시히로는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포항제철은 그의 생전에 품질 경쟁력 세계 1위 철강사가 됐으며,
양적으로 75년 세계 46위 에서 89년 3위, 97년에는
세계 1위로 성장했다.
철강 불모지의 ‘절대 절망’ 에 좌절하지 않고 세계1등 과 ‘초격차 경영’을 이뤄낸 박태준은 “후세의 경영자 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다.
그는 1977년 8월 공정률 80%에 이른 건물 부실을 발견하고 서슴없이 폭파 명령을 내렸다.
“조국의 백년대계가 여기서 출발한다.
이것은 폭파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폭제다”라고 했다.
청암의 양보할수 없는 근본의 기준은 선조들의 핏값과 후손들의 미래라는 대의였다.
그는 어떠한 부실이나 부정·불의와 거래하거나 눈 감기를 단호하게 거부 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표현이다.
박태준은 지(志)와 의(義), 그리고 렴(廉)과 애(愛)를 행동으로 실천한 ‘현장의 선비’이다.”
세계 어느 나라 보다 사익 추구가 심한 한국에서 청암은 국민의 사표이며
리더들의 롤 모델이다.
그가 평생 지켜온 4가지 화두를 보면 분명해진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 절망은 없다.
어느 분야든 세계 1등이 되자.
10년 후를 내다보라.
위대한 애국자 청암의 혼을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