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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운현 시조정가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운현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 강영우 박사 -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에 임명
◆ 강윤석 골퍼 - "다른 장애인들에게 자신감을 나눠 주고 싶어요."
◆ 강진희 발레리나 - "음악은 들리지 않지만, 느낌으로 춤을 추죠."
◆ 김동화 체조선수 - 시각장애 극복해 금메달 획득
◆ 김종환 벤처이사 - 소아마비 장애딛고 '벤처중역' 신화
◆ 김홍빈 산악인 - 등반 사고로 양손을 잃은 장애 산악인.
세계 등반사 초유의 ‘7대륙 최고봉 등정’
◆ 박대운 대학생 - 휠체어 타고‘유럽 2002km 대장정’
◆ 신순우 산림청장 - 한쪽 다리를 잃은 장애인으로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차관급 고위직에 임명
◆ 이성재 변호사 - "장애우 권익문제 연구소"를 세워
장애인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
◆ 이수길 소아과 전문의 - 소아마비로, 독일로 유학. 獨 국가훈장 수여
◆ 이재원 교수 - 성신여대 전산학과 교수
◆ 이희아 피아니스트 - " 네 손가락의 소녀 피아니스트"
◆ 조창영 변호사 - "장애가 오히려 내 삶의 지표를 세워줬습니다."
◆ 차인홍 지휘자 - 미대학 지휘자 된 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 차인홍씨
◆ 홍여형 , 박재화 특수 교사 - 장애를 딛고, 특수교사 임용고시에 합격
실명딛고 美한인 최고위직 오른 강영우 백악관 차관보
실명(失明)을 극복하고 2001년 재미 한인으로서는 최고 공직인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에 임명돼 활동 중인 강영우(姜永佑·59) 박사.
그는 7일 아시아 국가들의 명절인 설을 계기로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아시아계 미국인 고위 공직자 78명이 초청된 백악관 축하행사에 부인과 함께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5명의 재미 한인들이 초청됐지만 강 박사는 78명의 참석자 가운데 상원에서 인준받은 공직자 17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긍지를 느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시아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한 행사였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이뤄져 감개무량하기도 했어요.”
미 국가장애위원회는 차관보급 위원 15명으로 구성된 대통령 직속의 연방정부 독립기구로 연간 예산이 300만달러에 이른다. 상근 직원 14명이 조사한 장애인들의 사회 통합, 자립, 권리 증진 등의 문제를 보고서로 만들어 3개월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에 제출하고 정책에 반영토록 하고 있다.
“미국에선 전체 인구의 약 20%에 해당하는 5400만명이 장애인으로 분류됩니다. 이중 약 10%는 생활이 어려운 심각한 장애가 있지만 10%는 정서장애나 장기적인 지병을 가 진 사람으로 한국에서는 장애인으로 잘 인정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이들은 인권과 직업, 사회활동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차별받지 않기 위해 장애인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게 한국과는 다른 거죠.”
강 박사는 한국의 장애인 정책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96년 유엔이 제정한 ‘루스벨트 국제장애인상’을 한국이 처음 수상하게 된 것은 당시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위원이었던 강 박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김영삼(金泳三) 당시 대통령은 국제장애인상 수상을 계기로 ‘올해의 장애극복상’을 제정하고 장애인편의시설법을 제정했다. 강박사는 1992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지원으로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을 설립해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의 장애인 정책에 대해 그는 “법과 제도가 갖춰져 있어도 그게 제대로 지켜지고 예산이 뒷받침돼야 하며 특히 국민의 의식이 더 변해야 한다”면서 “권력자가 선심 쓰듯이 장애인 정책을 다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실명한 뒤 서른이 다 돼서 미국에 이민와 고위 공직자가 된 제 경우는 젊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며 “지난해 11월 저서 ‘내 안의 성공을 찾아라’(생명의 말씀사)를 출간한 것도 그런 뜻에서였다”고 말했다.
강 박사는 가정적으로도 성공했다. 부인 석은옥(石銀玉·60)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의학박사인 장남 진석씨(30)는 듀크대학병원 안과 전공의이며, 법학박사인 차남 진영씨(27)는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일리노이주)의 고문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동아일보,2003.2-9,권순택특파원>
장애인 골퍼 강윤석 "장애인에게 자신감을"
"다른 장애인들에게 자신감을 나눠 주고 싶어요." 남자프로골프 2부투어인 KTF투어 3차 대회에 출전하는 강윤석(42)씨는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
5살 때 마비증세가 와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짧지만 대학 때 아버지의 권유로시작한 골프 덕으로 건강 뿐 아니라 성격도 한층 밝아져 지금은 장애인임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장애를 극복하고 자연스런 스윙을 하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한 그는 지난 88년 세미프로테스트를 통과하며 드디어 노력의 열매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하체의 힘 이동을 중시하는 다른 골퍼들과는 달리 어깨 등 상반신을 최대한 이용,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균형을 잡는 데 주력하는 등 '자신만의 스윙 비결'을 개발한 결과였다.
강씨는 20차례 도전에도 프로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여전히 세미 프로에 불과하지만 비록 2부투어지만 정규 투어 경험이 있는 프로 선수들과도 당당히 겨루고 있다.
강씨의 첫번째 목표는 우선 KTF 투어에서 상위권에 오르는 것.
그 다음은 프로테스트를 통과해 국내 정상급 선수들과 당당히 겨루며 다른 장애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 싶다는 게 그의 당찬 포부다.
최근 미국의 장애인 골퍼 케이시 마틴이 법원으로부터 경기 중 카트를 사용할수 있다는 판결을 얻어내 장애인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카트 없이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강씨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연합뉴스,2001.6.8>
발레리나 강진희씨 「장애극복상」받아
듣지 못하는 발레리나 강진희(26)씨는 17일 [올해의 장애 극복상] 수상소식에 {하느님께서 큰 선물을 주셨다}고 소감을 적었다. 한국장애인복지 체육회(회장 김석원)가 제18회 장애인의 날을기념해 강씨를 수상자 1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 것
"음악은 들리지 않지만, 느낌으로 춤을 추죠."
강씨는 보청기를 끼고 미세한 진동으로 전달되는 음악을 수없이 듣는다. 그리곤 스승의 사인에 맞쳐몸을 움직인다. 무대에 설 때면 누구도 그녀가 청각 장애인임을 눈치 못챈다.
강씨가 고난청 장애 판정을 받은 건 2살 때. 하지만 춤추고 싶은 열정으로 부산 대연여중 시절 담임인 무용 선생님에게 매달렸다. 강씨는 {음악 따로 몸 따로 놀아서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남들보다 5배는 더 연습한 것 같아요}라고 회상했다. 발톱이 다 빠질 지경에 이른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보람이 찾아왔다. 90년 전국 학생 무용 콩쿠르 1등, 92년 전국 대학 콩쿠르 금상, 93년 일본 북큐슈 국제 양무 콩쿠르 준우승…. 한때 국립발레단 오디션 탈락으로 절망한 적도 있었지만, 조승미 발레단 주역 무용수로 세계를 누볐다. 작년 12월엔 딸 출산 넉달 반 만에 무대에 서 관객을 놀라게 했다. 이제 강씨 목표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 프리마 발레리나였던 나타샤 마카로바.
"너무 힘들어 가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기엔 발레가 너무 매력적이에요."
오는 24∼25일 과천 시민 회관에서 창작 발레 [삼손과 데릴라] 주역으로 춤출 강씨는 "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신체장애가 인생의 장애는 될수 없다" 고 적었다
<조선일보,98.4-17>
시각장애 극복 금메달 딴 - 김동화
"아시안게임에서도 꼭 금메달을 따내 성원해준 분들께 보답하겠습니다
지난 26일 제주시 한라체육관에서 열린 체조 일반부 개인종합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남의 김동화(22,한양대)는 실명에 가까운 장애를 극복하고 남자체조의 1인자로 우뚝선 "불굴의 스타"다.
국가대표 김동화는 종합점수 54.10으로 이주형(53.90점,대구은행)과 "뜀틀의 1인자" 여홍철(52.65점,광주시체육회)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동화는 28일 열리는 종목별 경기에서도 자신의 특기인 링과 철봉등에서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선천적으로 눈이 좋지 않은 김동화는 초등학교 1학년때 이미 사물의 형태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약시」판정을 받았다. 민첩한 동작과 균형 감각이 필수인 체조경기에서 눈이 실명에 가깝다는 사실은 치명적이었으나 「꼭 해 내겠다」는 강한 정신력으로 장애를 극복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김동화는 경남체고 1학년때인 92년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수촌에 입촌해훈련 도중 오른쪽 손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해 골반뼈를 이식하는 대수술을 받아 선수생명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히 재활훈련을 거듭한 끝에 다시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끈기를 발휘, "인간승리의 표본"이 됐다.
지난 6월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당당히 1위로 태극마크를 다시 단 김동화는 8월 제주도에서 열린 시도대항 체조대회에서도 개인종합과 링, 철봉, 단체전을 석권해 대학부 4관왕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한 국내 남자체조의 최강자다.
<세계일보,98.9-28>
소아마비 장애딛고 '벤처중역' 신화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사에 오른 벤처 기업인. 증권 전문 사이트 팍스텟의 정보기술담당을 총괄하는 김종환 이사다. 내노라하는 벤처기업이 몰려 있는 테헤란밸리를 휠체어를 타고 누비는 김이사를 처음 만나본 사람은 그의 자신감 있는 태도에 놀라게 된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위축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상대방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는 소아마비로 인해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이 남달라 삼육재활학교, 서울고등학교로 진학할 때마다 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다. 대구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원에 진학한 후 1학기만에 휴학을 결심,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컴퓨터. 쌍용정보통신 부설 교육기관에서 사무자동화 프로그램부터 하나씩 배워나가 면서 그는 또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고.
컴퓨터 프로그래머 6개월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지만 취업의 벽은 높기만 했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도 장애인에 대한 눈길이 차갑기만 하더군요.
서류 전형에서 통과하더라도 면접에서 번번이 미끄러져야 했습니다."
김씨의 소식이 우연치 않게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지난 91년 쌍용컴퓨터에 입사하게 된다. '무대에서 진가를 발휘한다'고 그는 탁월한 전산 능력을 바탕으로 쌍용컴퓨터 경영정보 시스템 플랫폼을 개발했으며 95년부터 4년동안 연합뉴스 실시간 금융정보 서비스 단말기인 '인포맥스' 시스템 설계 및 개발도 총괄했다.
지난해 팍스넷에 합류한 그가 맡고 있는 역할은 시스템 관리. 지난해 3월문을 연 팍스넷은 현재 하루 조회수가 2,000만에 달한다. 그가 하는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조회량을 소화해 내는 것.
"장애인들이 신체적으로 인해 위축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자신감이 중요합니다. 업무 능력도 탁월해야겠지만 상대방에게 내가하는 일을 설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뒷받침돼야 장애인의 사회진출도 활발해질 것입니다."
<서울경제신문.2000.4-21>
장애산악인 7대륙 최고봉 도전
' 육체적인 장애가 의지를 꺾진 못한다.
등반 사고로 양손을 잃은 장애 산악인이 장애인으로는 세계 등반사 초유의 ‘7대륙 최고봉 등정’에 나서 화제다. 김홍빈씨(36). 1991년 북미 매킨리(6,194m) 등반 중 조난을 당해 두 손을 자르는 불운을 겪은 산사나이다
“ 매킨리에서 헬기 앵커리지에 옮겨갔는데,
그때만 해도 동상 때문에 두 손을 잃을 줄은 몰랐습니다.”
고향 순천. 사고 후 그나마 다니던 문화센터 강사 자리도 그만두고 두문불출, 술로 1년을 보냈다. 김씨가 다시 산을 찾은 이듬해.“ 다들 ‘병신’이 된 팔만 보는 것 같아 땅만 보고 올랐습니다. ”
다시 산사나이로 돌아온 김씨는 97년 유럽최고봉 엘부르즈(5,642m), 킬리만자로(아프리카·5,895m), 98년 아콩카과(남미·6.959m), 매킨리(북미)등정에 성공했다. 오는 8월 초 세계 최고봉에베레스트(아시아·8848m) 원정 후, 칼스텐츠(오세아니아·4,884m)와 빈슨매시프(남극·5,140m)등을 오를 계획이다. 7대륙 최고봉은 딕 베스(미국)가 1985년 세계 처음 완등한 이후, 국내 산악인으론 1995년 허영호씨(46)가 유일하게 완등했다.
김씨가 장애인으론 세계 산악계에 유래가 없는 ‘7대륙 최고봉등정’에 나선 데는 아내 박옥연씨(32·간호사)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 사고 이듬해, 월출산에서 김씨를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한 박씨는 “보험설계사, 골프장직원 등 고된 생활을 마다 않고 가장으로서 안간힘을 쓰는 그이가 산에 대한 열망을 포기 못하는 것을 보고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고 말한다.
97년 봄, 김씨 부부는 없는 살림을 쪼개 ‘7대륙 최고봉 등정’전초전으로 일본 도야마현의 다테야마(3,105㎙) 원정 등반을 떠났다.
“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아내와 함께 한 그 등반 이후,
해외 원정에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
그해 여름,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 등반에 나섰다. 엉덩이 살을 붙여놓은 손목에 서리는 냉기를 어깨까지 올라오는 스키장갑으로 막으며, 스키스틱(눈덮힌 고산 등정 때 사용하는 지팡이)도 없이 오르는 걸음이었다.
“산에선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운데, 장애인이라고 챙겨줄 여유가 있나요.
쓰러지면 죽는다는 생각에 정말 죽기살기였죠.”
오는 8월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김씨는
“에베레스트는 두손을 잃기 전부터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산이었습니다. 에베레스트를 넘어, 칼스텐츠 빈슨매시프까지 올라 사람들에게 ‘할 수있다’는 꿈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한국일보.2000.6-26>
휠체어 타고‘유럽 2002km 대장정’
다리 잘린 철각 거침없는 질주 - 기나긴 하루였다. 5천리가 넘는 길을 달려야 하는데 백리도 못 가서 손목에 심한 통증이왔다. 박대운군(27·연세대 신방과 2년)이 휠체어를 몰고 독일 뒤셀도르프 시를 떠나 2천2㎞ 대장정에 오르던지난 7월25일 일이었다.
독일 경찰이 박대운군과 자전거를 타고 먼길을 동행한 친구 이동건군(26·연세대 인문학부 3년)의 초행길을 인도해 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뒤셀도르프 지역 관할 경찰들이 ‘바통 터치’를 해 가며자동차나 오토바이로 앞서가는 동안, 이들을 뒤쫓아야 했던 박군은 손목 인대가 늘어나 곤욕을 치렀다. 제때 쉬지 못한 탓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1주일전에야 기증받은 ‘마라톤 휠체어’도 아직 손에 익지 않았다. 하루 일정을 간신히 마친 뒤 살펴보니 손목과 팔뚝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암담했다. 예정한 날짜에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하루 평균 50㎞씩 잡아도 쉬지 않고 40일을 계속 강행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박군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첫날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손목을 붕대로 동여매고 쉴 때마다 얼음찜질을 해가며 버텼다. 통증은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병원에 가려고 생각한날이 가까워지자 희한하게 손목의 부기가 서서히 빠지면서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낮에는 34℃를 웃도는 뙤약볕 아래에서 비지땀을 흘렸고, 밤에는 체감 온도가 0℃까지 떨어지는 급격한 일교차에 떨며 텐트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일반 도로를 달리다 어느덧 고속 도로를 질주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많았다. 고속 도로를 벗어 나려다 자갈길이나 모래밭에 접어들어 애를 먹기도 했다. 어느 곳을 가든 사람들은 친절했다. 박군 일행 때문에 길이 막혀도 경적을 울려대는 차량을 보기 힘들었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휠체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잘 발달되어 인상적이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차도 옆에는, 박군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드시, 기필코’ 자전거 도로가 있어서 차도로 다닌 예가 거의 없었다.
독일·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를 차례로 통과한 박군은 닷새를사투한 끝에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총연장 3백여㎞, 해발 1천4백62m에 달하는 마의 고갯길이었다. 8월30일 박군은 스페인 사라고사 시에서 열린 98·99 시즌 프로 축구 개막 경기에 참석했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를 들은 수만 관중이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박군은 9월2일 최종 목적지인 스페인 마드리드 시에 도착해 환영 행사에 참석함으로써 2천2백64㎞의 대장정을 마감했다.
박군은 강인한 인상에 충분히 어울릴 만한 정신력을 가졌다. 박군의 평소 좌우명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도전에 성공한 박군의 기쁨은 단순히 장애인이 하기 힘든 일을 해냈다는 데 있지 않다. ‘비장애인들’은 ‘성공한 장애인’을 치켜 세울 때, 더 큰소외감에 시달려야 하는 ‘평범한 장애인’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박군이 기뻐하는 진짜 이유는 단지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깼다는 데 있을 따름이다.
박군이 늦깎이 대학생이 된 것도 ‘주어진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93년 대구대 미술대학에 들어갔으나 그림을 그리는 장애인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2년 뒤 학업을 중단했다. 미술이 싫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장애인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분야에서 정상인과 똑같이 경쟁하고 싶었다. 그는 다시 대학 입시를 거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해 광고회사 AE가 되려는 꿈을 키우고 있다.
박대운군의 언행은 거침이 없다. 성격이 직선적이어서 어릴 적부터 싸움도 많이 했지만, 자신이 수긍하지 못하는 일은 어느 누가 강요해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박군의 어머니이다. 그는 어머니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박군이 다리를 잃은 것은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형 친구와 장난하다가 그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려고 좁은 골목길을 달려나 가다가 달려오던 삼륜차에 들이받혔다. 그런데 박군을 친 삼륜차는 잠깐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차를 후진시켜 다시 그를 뭉개고 달아나 버렸다.
사고로 망가진 박군의 오른쪽 다리는 병원에서 즉시 절단되었다. 왼쪽 다리는 근육만 여기저기 떨어져나가 철심을 박아 가며 버텨 보려 했으나 남은 살마저 차츰 썩어들어갔다. 그는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줄곧 병상 신세를 지며 여섯 차례나 수술을 받다가 결국 두 다리를 모두 잃었다
인복 많은 박군 “다리 팔아 사람 샀다”
그러나 박군은 자신에게 모진 시련을 안겨준 삼륜차 운전 기사를 원망하며 살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고 현장에 버려진 자기의 신발을 부여잡고 통곡한 어머니를 늘 떠올린다.
박군은 중학교 2학년 때 자기가 사랑하던 개가 차에 치여 죽은 곳에서 핏자국을 보았다. 가슴이 미어지면서 문득 어머니의 슬픔에 생각이 미쳤다. 개가 죽어도 마음이 그와 같은데, 사고 현장에서 자식의 버려진 신발을 본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입학 원서를 받아 주지 않는 초등학교와 석 달 동안이나 싸워 결국 허가를 받아냈다. 박군은 자기가 정신적 갈등 없이 밝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과잉 보호를 받았던 것도 아니다. 고집 세고 장난기 많았던 그는 어머니한테 ‘빗자루가 부서지도록’ 맞은 적도 있다.
박군은 “나는 다리를 팔아서 사람을 샀다”라고 말할 정도로 늘 인복이 많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서울에 갈 때에도 걱정하는 가족·친지들을 오히려 그가 달랬다.
박군에게 왜 휠체어를 타고 먼길을 떠났느냐고 묻자 그는 “예전부터 장거리 여행을 하고 싶었다.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걸어서라도 갔을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당한 끔찍한 사고를 자연스럽게 끄집어내는 그의 화법에는 ‘평범한 비장애인’들의 선입관을 무색하게 하는 힘이 담겨 있다. 박군은 내년에 대한해협을 헤엄쳐서 횡단할 생각이다.
<시사저널98.10-1>
산에서 취임식 갖는 `장애인' 산림청장
"`강한 산림청장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산에서 취임식을 갖겠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장애인으로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차관급 고위직에 오른 신순우(59) 전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는 주위의 우려를 떨쳐버리려는 듯 산에서 산림행정의 첫 업무를 시작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산림청사가 위치한 대전 인근의 생명의 숲 가꾸기 현장에서 취임식을 겸해 산림행정 계획을 밝히겠다는 것이다.신청장은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매주 청계산이나 우면산등 근교 산을 오르내리는 `악바리 근성'을 과시해왔다.
신청장이 다리를 잃은 것은 보성중 2학년 시절. 하교길에 자동차에서 뛰어내리다 오른쪽 다리가바퀴에 깔리면서부터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이 시작됐다.
대문밖을 한번도 나서지 않은채 3년간 집에서 독학을 했던 그는 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의족을얻어 신은데서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의족으로 자신감을 되찾고 장충고에 2학년으로 편입한 것이다.
꿈을 키우던 그는 치과의사가 되고싶은 욕심에 서울대 치대에 응시, 필기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면접시험에서 "치과의사는 장애의 몸으로 불가능하다"는 학장의 통보로 결국 불합격 처리되면서 장애인으로서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1년 재수끝에 고려대 법대에 합격한 신청장은 69년 제7회 행정고시에도 장애인으로선 처음으로 합격, 농림수산부 수출진흥관실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별탈없이 공무원 생활은 이어졌지만 승진 때마다 `장애인'이라는 꼬리표는 항상 걸림돌이 되기 마련이었다.
국장 승진 때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두번이나 미끄러진 끝에 겨우 과장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한번은 농림부 국장이 국방대학원의 일까지 맡아야 했던 때가 있었는데 `국방대학원에서는 구보를 해야하기 때문에 장애인이 겸임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승진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신청장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다리의 장애가 정말 싫었다"며 "장애인이기 때문에일을 그르친다는 말을 들을까봐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했다"고 말했다.
국장 승진후에도 고난은 이어졌다. 93년 5월 농안법 파동 등으로 그는 직위해제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동고동락해왔던 부인 김영애씨도 이때 불치병에 걸려 4년여간의 투병 끝에 97년 숨지는등 개인적인 역경이 계속됐다.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93년 7월부터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수석부회장을 맡아 장애인 주차장설치, 장애인 의무고용 등 장애인 복지활동을 펴기도 했다. 복직 만료기간(3개월) 5일 전에야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결국 농림부 원예특작국장, 국립농산물검사소장 등을 거쳐 지난 97년 5월부터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를2기째 지내다 산림청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98년 5월에는 교회 신도의 소개로 인근 교회 집사이던 김복순씨와 재혼,안정을 되찾은 상태.
신청장은 "지체장애인의 90%가 후천적인 사고로 인한 것"이라며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장애인을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차관 입성이 장애인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라며 그것만으로도 이미 족하다고 환하게 웃었다.
<한겨레신문.2000.1-28>
국민회의,장애인 변호사 이성재씨
소아마비로 양쪽 목발을 짚고 다니는 이성재(李聖宰,38)변호사가 정계에 입문한다.
李변호사는 그동안 장외(場外)에서 장애인 고용촉진법, 장애인복지법 등 장애인 관련 입법을 위해 활동해 왔다.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김대중(金大中)국민회의 총재가 전국구로 영입했다
인연이 라면 인연이다.
김총재는 지난 연말 이해찬 전 서울시 부시장에게 4백만 장애인을 위해 일할 장애인 대표를 영입하라고 지시했다. 이전 시장은 역시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김성재(金聖在)한신대 교수를 통해 이변호사를 추천받았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이변호사는 경희대를 졸업하고 8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뒤 "장애우 권익문제 연구소"를 세워 월간 "함께 걸음"을 발행하고,"장애인 인권상담소"를 만들어 장애인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 등을 해왔다.이변호사를 추천한 김교수는 이 연구소 이사장.
이변호사는 이밖에도 장애인 복지관계법률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 위 사무총장,장애인 특수교육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 사무총장 등을 맡아 여야 국회의원들과 접촉하며 입법 청원 활동에 앞장섰다. 이 바람에 알게 된 이전부시장은 장애우연구소 이사까지 맡아가며 보사부,서울시 등의 지원금도 받게 해줬다. 이변호사는 지난해는 일본 장애인 단체회원 80명을 한국에 초청하기도 했다. 김총재는 총선이 끝나면 미국에 가 다리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지팡이를 버리게 된다. 李변호사의 목발이 김총재의 지팡이를 대신해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대변하게 되는 셈이다.
<중앙일보.96. 1-10>
소아과 전문의 이수길씨, 獨국가공로훈장 받아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독일에서 소아과 전문의로 명성을 얻은 교포 이수길(李修吉·69)박사가 최근 독일의 국가공로십자훈장을 받았다.
국가공로십자훈장은 독일정부가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
독일 정부는 공적서에서 이박사가 △60, 70년대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진출을 성사, 의료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독일에 큰 도움을 줬고 △한국의 선천성 심장기형아동 34명을 미국과 독일에서 무료치료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으며 △한독 의료계의 교류에 크게 기여했다고 밝혔다.
함남 풍산에서 태어나 3세때 앓은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가 불편한 이박사는 59년 독일에 유학, 소아과와 방사선과를 전공했다.
<베를린연합.1998.2-18〉
장애극복 교수꿈 이룬‘인간승리’ -성신여대 전산학과 이재원교수-
2살때 드리워진 "장애인"의 멍에. 휠체어나 목발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던 학창생활.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는 낙관적인 생활태도와 불굴의 의지로 모든 역경을 이겨냈다.
지난 3월 임용된 성신여대 전산학과 이재원(32)교수. 장애인의날(20일)을 하루 앞둔 19일 이 학교 학생들은 이교수에게서 「인간승리」의 감동을 느끼게 된다.
" 거동하시는 게 힘들어 보이지만 강단 곳곳을 움직이며 활동적인 강의를 하십니다" ,
" 쉽게 가르치시는데다 수업분위기도 유쾌해 강의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
경력 한달반의 풋내기 교수지만 그의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명강의로 소문났다.
이교수는 현재 주·야간 학생들을 상대로「운영체제 이론」,「비주얼 프로그래밍 실습」등 3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줄곧 전교 수석을 거의 놓치지 않으며 대학교수를 꿈꾸던 우등생이었지만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그가 넘어야 했던 산은 많았다.
" 고3 때 제가 등교할 때마다 현관에서 기다렸다가 3층 교실까지 업어주던 친구를 잊을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도와주던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던 것을 보면 제가 친구복은 있나봐요 "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 지난 86년 3월부터 박사과정을 마친 98년 8월까지 12년5개월 동안의 기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강의실에 갈 때마다 하루에도 몇번씩 과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올라야 했고 가파른 언덕 위 공학관을 오르며 비오듯 땀을 흘렸다.
" 박사과정을 밟던 94년에 심한 허리통증을 이기지 못해 척추수술을 받았고 결국 한 학기를 쉬었습니다. 2년 뒤에는 어머니가 폐암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1년여를 절망 속에 보냈죠 "
그는 혼자서는 공부밖에 할 수 없었던 머리좋은 공학도였다.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교수들의 격려로 그는 97년 다시 놓았던 책을 붙잡았고 지난해 8월 컴퓨터언어에 관한 논문으로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연말 성신여대 교수 공개채용에 응시, 연구실적·대학원 성적 등에서 높은 평점을 받아 7대1의 경쟁률을 뚫고 교수가 됐다. 이교수는 현재 성신여대 근처에 전셋집을 얻어 살고 있다.
" 컴퓨터의 냉철한 지능과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함께 가르치고 싶다 "는 이교수는 " 학문을 향한 열정과 제자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도 뜨겁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고 말한다.
<경향신문.1998.4-20>
[장애인의 날]「장애극복상」받은 14세 이희아양
동아일보에 소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네 손가락 소녀 피아니스트’ 이희아양(14)이 ‘올해의 장애극복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희아양은 20일 오전 10시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리는 제19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수상한 뒤 김모임(金慕妊)보건복지부장관 등 각계 인사 4천명앞에서 5분 간 기념연주도 하게 된다. 연주곡은 쇼팽의 즉흥환상곡. 희아양을 모델로 한 동화책 ‘네 손가락의 즉흥환상곡’을 통해 희아양의 대명사처럼 돼버린 곡이다.
희아양은 동아일보 보도(1월25일자 A23면)가 나간 뒤 방송과 자선음악회 등에 20여차례 출연해 연주솜씨를 선보였으며 각종 언론매체에 보도돼 ‘국민의 마스코트’로 떠올랐다.
장애극복상 선정위원회측은 “희아양이 어린 나이에 장애를 딛고 네 손가락만으로 수준급 피아노 솜씨를 쌓아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며 “희아양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바로잡고 장애인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여는 등 장애인복지에도 큰 기여를 해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희아양은 5월5일 어린이날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청와대에 초청돼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오찬을 함께한다. 한국방송공사는 이를 ‘대통령과 꿈나무’라는 프로그램으로 방영할 예정이다.
〈동아일보.1999.4.19, 선대인기자〉
'장애인 도우미'신체장애 2급 조창영변호사
"장애가 오히려 내 삶의 지표를 세워줬습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소장 김정렬) 부설 '장애우인권센터'원장 조창영(43) 변호사. 두 다리를제대로 쓰지 못하고 허리를 반듯이 세울 수 없는 신체장애 2급 장애인이지만 그의 삶은 열정과 희망에 차있다.
고교 3년이던 1975년 12월 그는 입시공부를 위해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친척 집에서 귀가하다 과속으로 달리던 승용차에 치였다. 옷조차 남의 도움을 받아야 입을 수 있고, 마음대로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 인생. 갑자기 그의 삶은 잿빛으로 변했다. 거리에서 택시를 잡으려 해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사회 곳곳에 도사린 편견과 차별을 실감했다.
"한때는 절망도 했지만 이를 개선하는 게 내 삶의 의미임을 깨달았지요."
한국외대 법학과를 졸업한 조씨는 83년 사법고시에 합격, 86년부터 덕수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하지만 업무량이 많아 당초 생각했던 만큼 장애인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기 어려웠다.
그간 모은 돈으로 마침내 88년 개인사무소를 내고 장애인과 여성 등 사회의 약자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89년 강간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상해죄로 기소된 변월수씨를 무료 변론해 무죄를 이끌어냈다. 그는 그 해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설립에도 앞장섰고 지난해 부설연구소 장애우 인권센터를 세웠다.
지난 2월 1급 시각장애인 황선경(28)씨와 6급 시각장애인 김훈태(18)군이 청주대와 서울교대에서 입학을 거부당하자 그들과 함께 두 대학을 장애인복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고발했다.장애인 차별적으로 여론화되자 두 대학은 결국 이들의 편,입학을 허용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데 또 하나의 값진 승리를 거둔 것이다.
조 변호사가 무료 상담-변론, 일반변론을 해온 장애인과 여성등은 월평균 20여명. 지난 10년 동안 수천명에 이른다. 그의 장애인 사랑이 알려지면서 이남진 이성재(전의원)씨 등 뜻을 같이하는 동료변호사 5명도 힘을 보탰다. 부인 김주분(38)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는 조 변호사는 "장애인 교육기회를 넓히고 정보통신의 혜택을 두루 받을 수 있는 제도 확충에 온힘을 쏟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세계일보.2000. 4-19>
미대학 지휘자 된 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 차인홍씨
한국의 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가 휠체어를 탄 채 미국 대학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재미 바이올리니스트 차인홍 (42)씨는 최근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시에 있는 라이트(Wright) 주립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됐다. 두 살 때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차교수는 오는 8월 현재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동북부 라크라센터에서 오하이오로 이사가, 9월부터 휠체어를 탄 채 강단과 지휘대에 선다.
작년 10월 교수와 학생 80여명으로 구성된 라이트주립대 음대교수 채용시험에 응시한 차씨는 다른 대학 현직 정교수 7명 등 00여명에 가까운 경쟁자와 겨뤄 5차례의 실기·이론·인터뷰 시험을 통과했다. 행크 달먼 교수채용위원장은 “장애인이라고 해서 교수 임용에 불리하지도, 유리한 점도 없다”며 “우리는 능력에 따라 선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차 교수는 “내가 교수와 지휘자가 된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장애인을 정상인처럼 동등하게 대우하는 미국 사회의 훌륭한 면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차씨는 지난 82년 미국의 세계적인 실내악단 라살 현악4중주단의 초청으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시작했다. 88년 오하이오 주립 신시내티 음대를 거쳐 뉴욕 시립 브루클린 음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지휘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91년 귀국해 5년간 대전 아마빌레 실내악단의 상임지휘자 겸리더로,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두 아들을 두고 있는 차교수는 차를 직접 운전하고, 장애인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경력도 갖고 있다. <조선일보.2000.5-27>
청각-시각장애 홍여형-박재화씨 특수학교 교사로
듣고 보는 것이 불편한 장애인 2명이 서울지역 특수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해 장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됐다.
청각장애 2급으로 이화여대 특수교육과를 졸업한 홍여형씨(27·여)와 시각장애 2급으로 올해 우석대 특수교육과를 졸업하는 박재화씨(23)가 주인공.
홍씨와 박씨는 올해 서울지역 초중등교 특수학교 교사 임용시험에서 2 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5일 최종 합격했다.
지금까지 지방에서는 간혹 장애인이 교사에 임용되기는 했지만 임용 경쟁이 치열한 서울의 경우 장애인이 합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보청기 없이는 다른 사람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홍씨는 1999년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 중이었으나, 청각장애인학교인 서울삼성학교에서 미술 보조교사로 일하다 진로를 바꿔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홍씨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어 유학을 가려 했지만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워 포기했다”며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작가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을 통해 깨달았다”고 말했다.
홍씨는 대학 1학년 때 한 기업에서 후원한 ‘청년정신탐사단’에 3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돼 동부 아프리카 횡단과 킬리만자로산 등반했을 정도로 진취적인 정신도 뛰어나다.
시각장애인으로 일반학교에 다녔던 박씨는 장애학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적응하기도 힘들어 공부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되새기면서 특 수교사로 봉사하기로 결심한 끝에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임용고사에 합격했다. 박씨는 “수업 시간에 칠판 글씨를 보기 어려워 선생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게 제일 힘들었다”며 “장애학생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교사가 꼭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올해 서울시 교육청이 실시한 교사 임용시험에는 중등교사 362명과 보건교사 19명, 특수(중등)교사 41명 등 모두 422명이 최종 합격했으며 합격자 명단은 시교육청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첫댓글 장애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