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준 한국관광공사 상하이 지사장
# 1 (서울 광화문 광장) 후줄근한 짙은 회색 양복, 다림질하지 않은 꼬깃꼬깃한 와이셔츠, 헝클어져 정리 안 된 뒷머리, 어젯밤 한 잔 한 것 같은 피곤한 얼굴, 상당히 근엄하지만 어색한 표정으로 쉴새 없이 떠들어대며 때지어 걷는 아저씨 무리
# 2 (강남 신사동 가로수길) 마치 인기 연예인처럼 반쯤 얼굴을 가린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무장한 젊은 여성 서너 명이 지하철 신사역 8번 출구를 빠져나와 곧바로 가로수길 커피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거품 가득한 카라멜 마끼야또를 탁자에 두고 각자 가져온 백화점 할인 쿠폰을 종류별로 정리하며,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들춰내며 깔깔거리는 모습. 둘러보니 그런 테이블이 주변에 가득
# 3 (부산항 국제터미널) 부산항 국제터미널 부두에 빨간색 관광버스 120대가 기차처럼 꼬리를 물고 장장 1.5㎞가 넘게 길게 늘어서 있다. 버스 너머로 명동 롯데호텔 한 10개쯤 합쳐놓은 것만한 10만 톤급 초대형 크루즈가 예인선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다. 거기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오는 4000명의 관광객. 부산항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흔한 광경
# 4 (서울 홍대 근처) 택시에서 막 내린 젊은 남녀 한 쌍, 남자는 여자 것까지 캐리어 2개를 힘겹게 끌고,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휴대폰 위치추적장치를 켜고 검색을 시작한다. 대충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한 후, 일단 주변 편의점에 들러 생수와 교통카드를 구입한 다음 휴대폰 즈푸바오(支付□, 중국 휴대폰결제시스템)로 결제를 하고 예약해놓은 게스트하우스 주인과의 도킹을 위해 쌍방 위치추적장치를 연신 검색하고 있다. 드디어 편의점 창문 너머로 마중 나온 게스트하우스 주인을 발견하고 번지는 환한 미소
위의 장면들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중국인들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1992년 정식 수교 이후, 199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중국 관광객들은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왔으며,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비즈니스 공무여행과 단체관광이 대부분이었던 2000년대 초중반
중국 관광객, 유커가 우리나라를 공식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하반기부터다. 정확히 말하면 그해 5월, 런던 아셈회의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중국의 주룽지 총리가 전격 합의한 이후 중국인이 관광 비자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방문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우리로서는 비교적 발 빠른 조치인 셈이다. 일본은 그로부터 7년 지난 2005년에야 일본은 중국인에게 관광 비자를 전면 개방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만 해도 중국인의 해외여행은 일부 제한적인 계층에서 이루어졌으며, 방한 중국인 수는 불과 50만 명이 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장면 1은 중국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관광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중반 광화문 광장이나 청계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중국 관광객의 모습이다. 당시 2005년 우리나라를 찾은 중국 관광객은 70만 명 수준이었다. 2015년 작년 한 해 600만 명이 방문했으니, 불과 10년 사이 10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그 중 절반은 위 장면에서 보는 것처럼 40~50대 남성 위주의 공무 단체이고, 일반적인 패키지 단체관광객은 30% 수준, 혼자 알아서 다니는 이른바 개별관광객의 수는 10% 미만이었다. 즉 단체관광과 개별관광의 비율이 9:1 수준으로 단체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고, 특히 비즈니스 공무여행이 많았다.
경제 성장과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한 중국인들의 여행 형태의 변화
이러한 추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거치면서 여행 행태가 서서히 변하게 되는데, 스마트폰 시대와 맞물려 단체 패키지관광에서 개별 자유여행 형태로 빠르게 전환됐다. 이 시기 8%대 중국 경제의 높은 성장과 올림픽과 엑스포라는 양대 메가이벤트를 통해 중국 젊은이들이 국제무대에서 자신감을 가지면서 해외여행도 젊은 20~30대 여성 위주로 변하고, 우리 대중문화 한류와 맞물린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수요가 장면 2와 같은 새로운 풍속도를 낳게 된 것이다. 2010년경부터 시작된 이러한 수요는 우리나라 화장품, 패션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면서 면세점 업계와 패션 관련 회사의 주식들이 고공행진을 하는 등 관련 산업 전반의 지형도를 흔들어 놓았다.
유커라는 거대시장이 순식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2012년경부터 시작된 크루즈 관광이다. 대형 크루즈는 보통 4000명 정도의 승객을 실어 나른다. 비행기가 보통 250명 정도의 승객을 태우지만, 그중 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그렇게 따지면 비행기 한 대당 타고 오는 유커는 120명 정도이다. 하지만 크루즈는 4000명이 전부 유커다. 크루즈 1대가 비행기 30대보다 낫다는 얘기다. 숫자만 보면 그럴싸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마냥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크루즈는 속성상 우리나라 항구에 체류하는 시간이 짧게는 5시간, 길게는 10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장면 3에서 보듯이 부산항 들어온 크루즈는 하선, 상선에 들어가는 3~4시간 정도를 빼고 나면 고작 5~6시간 정도 체류한다. 그 사이 식사하고 면세점 쇼핑을 하고 나면 사실 관광코스는 한두 군데 둘러보는 게 고작이다. 이렇게 둘러보고 간 유커들은 한국에 다시 오지 않는다. 별로 재미있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크루즈 관광의 문제는 마치 ‘공유지의 비극’처럼 미국, 유럽의 크루즈 선사들이 이기적인 여행업계와 손잡고, 중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이용해 한국이나 일본 관광시장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미래의 좋은 시장을 지금 당장 빼먹고 있다는 것인데, 조금 천천히 오더라도 길고 좋은 시장흐름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숙제를 남기고 있다.
20~30대가 이끌어가는 유커 여행 트렌드
한편, 2014년도 이후 유커의 개별 자유여행 비율은 60%를 넘어서고 있다. 크루즈와 반대로 자유 여행객의 만족도는 거의 90점에 가깝다. 장면 4에서 보듯이 스스로 기획하고 오는 관광객들은 자의적이고 편안한 일정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사람의 본성 때문에라도 스스로 만족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흔히 말하는 ‘바링호우(1980년대생)’, ‘지우링호우(1990년대생)’라 불리는 20~30대 여성층이 주축인 이 자유여행객들은 장면 4와 같이 항공 티켓팅, 숙박예약, 결제는 물론 관광코스, 의사소통까지 모든 관광 행위를 스마트폰으로 진행한다. 보통 7~10일 가까운 긴 체류기간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우리나라 음식이다. 특히 좋아하는 음식은 ‘간장게장’, ‘삼겹살’, ‘치킨’,‘불고기’와 같이 단체관광 식단에는 없는 메뉴들이다. 지하철은 평균 10회 정도, 택시는 평균 4회 정도 이용하고 평균 300만 원 정도 소비하는 질 높은 손님인 셈이다.
전 세계 유커 전성시대 도래하나
2016년 올해 중국인 해외여행 수는 약 1억30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중 홍콩, 마카오 등 중국 변방지역으로 나가는 약 8000만 명을 제외하면 순수 해외여행객은 5000만 명 선이 될 것이다. 순수 해외여행 수요만 놓고 볼 때 일반적으로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어서면 국민의 15% 정도가 해외여행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복잡한 요소가 있지만 단순하고 보수적으로 2025년이 되면 1억 명 이상이 순수 해외여행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중국 시장을 놓고 세계 여러 나라가 뜨거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에게는 특히 일본과 태국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데, 미국과 유럽이 원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후발주자로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지리적인 면에서는 우리나라가 가장 우세하다. 가격경쟁력에서는 태국이, 품질이나 이미지 측면에서는 일본이 우세한 것도 사실이다. 2016년 현재, 다른 제조업 분야와 마찬가지로 중국 시장에서 우리의 관광산업 경쟁력은 가격과 품질이라는 선택적 요소에서 태국과 일본에 끼어있는 형편이다.
‘소비하는 중국’에 대해서 제조업이 됐건 서비스업이 됐건 소품종 고품질만이 해답이 될 것이다. 거기에 중국이 아직 혼돈하고 있는 수준 높은 문화적인 이미지가 잘 전달이 된다면 우리에게 중국은 정말 멋진 시장이 될 것이고, 그저 당장의 물량에 눈이 어두워 정신없이 해치우다 보면 ‘문전옥답’이 ‘비극적인 공유지’로 변해 버릴 것이다.
2016년 올해는 ‘한중 상호방문의 해’ 이기도 하지만 ‘중미(中美) 관광의 해’이기도 하다. 그렇게 깐깐하게 굴던 미국도 유커 유치를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한때 우중충한 회색양복을 걸치고 어색한 웃음으로 해외여행을 왔던 유커는 이제 전 세계가 반기는 관광시장의 큰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야흐로 ‘유커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5 (서해안 고속도로) 중국 연태를 출발한 중국 자동차가 서해해저터널을 지나 우리나라 군산항에 도착한다. 이미 해저터널 안에서 해저자동인식패스를 통해 통관절차를 마친 자동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구글 GPS를 통해 한국 자가운전 관광을 시작한다. GPS는 서울을 목적지로 찍고 모든 도로에서 한국어, 중국어 자동변환기를 사용한다. 차가 서해안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톨게이트 전광판에 환영 메시지가 뜬다.
“ 당신은 2030년 56만7765번째 관광 전용 중국 자동차입니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전 운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