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 미녀 진정한 경국지색 양귀비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4대 미녀 가운데 유일하게 생몰연대가 정확한 여인입니다. 성당시절 귀비라는 높은 직위를 가졌기에 기록이 정확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기도 하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장안에 “아들 낳을 필요 없다, 양귀비 같은 딸 하나만 잘 두면 된다”는 말을 만들어내며 뭇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양귀비(본명 양옥환(楊玉環), 山西省 永濟縣)는 관리 양현옥(杨玄琰)의 딸로 태어났으나 8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됩니다. 그러나 양귀비가 황후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게 되자 세 자매까지 덩덜아 열후국 부인으로 봉해지고, 오빠인 양국충(杨国忠)도 승상까지 올라 집안이 그야말로 벼락출세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잘 둔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말이 나올 법도 했겠죠.
17살에 현종(玄宗)의 열여덟 째 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된 양옥환은 22살에 시아버지인 현종(玄宗)을 만나 뜨거운 사이가 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약간의 사연이 있습니다.
현종은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정치도 싫고 매사에 싫증을 내면서 걸핏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측근들이 며느리 양옥환이 천하절색이라고 귀뜸하자 그녀를 온천탕이 있는 화청궁(华清宫)에 불러들입니다. 양귀옥환을 보고 삶의 활력을 되찾은 현종은 며느리를 곧바로 데리고 살 수 없어서 그녀를 여승이 되게 합니다. 일종의 신분세탁이죠. 정확이 말하면 아들과 며느리의 법률적 신분관계를 정리시킨 거죠. 그리고 태진(太真)이라는 법명을 줘서 출가하도록 합니다.
이 과정은 현종이 그의 조부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습니다. 즉 당 태종의 재인(才人, 정5품에 해당하는 후궁) 측천무후(则天武后,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则天)이라 함)를 그 아들인 고종(高宗)이 먼저 출가시킨 다음, 나중에 다시 맞아들인 사건을 너무나 닮았다는 거죠. 차이라면 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을 취한 것이고, 현종은 아들의 여인을 취했다는 정도입니다. 군왕무치(君王无耻)의 전형입니다.
어쨌든 황제에 의해 비구니가 된 양옥환은 현종과 지속적인 사랑을 나누다가 27살에 정식으로 귀비(贵妃, 정1품으로 황후 다음의 서열)에 책봉되고 사실상 황후의 대접을 받습니다. 현종은 황후가 죽은 다음 다시는 황후를 책봉하지 않았으니까요.
현종이 양귀비를 처음 만났을 때가 56세였고, 귀비로 책봉할 때가 61세였으니 노인네 주책이 상당했던가 봅니다. 무려 34살의 나이차를 뛰어 넘었으니까요. 어쨌든 현종은 양귀비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안록산의 난을 피해 도망가던 중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살을 명하면서 피눈물을 흘렸고, 난이 평정된 다음 환궁해서 양귀비 묘를 다시 써 준 일화는 유명하니까요.
그러면 아버지 현종한테 아내를 빼앗긴 아들 수왕(寿王)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당연히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죠. 당시 당 나라 황실은 무측천(武则天)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기까지 7년 동안 7번이나 크고 작은 골육상잔이 있었습니다.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도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는지라 감히 아버지에게 불평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랬다가는 곧 죽음이었으니까요. 그래도 현종은 아들한테 미안했던지 위조훈(韦诏训)이란 여자를 하사해 위로합니다. 아들은 겉으로는 감지덕지한 척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그 쓰린 속이야 오죽했겠습니까.
화제를 바꿔, 그러면 양귀비는 어떻게 현종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을까요? 양귀비는 확실히 여러가지 면에서 남성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풍만한 글래머 스타일의 양귀비 미모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중국에 “미인은 풍만하든 날씬하든 모두 다 미인이다”라는 환비연수(环肥燕瘦)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양귀비(본명 옥환)는 풍만했고 조비연(赵飞燕, 한나라 성제 때 미인)은 말랐지만 모두 미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미인은 어떤 경우도 다 미인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요즘 여성들에게 굳이 다이어트에 목매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요.
둘째, 양귀비는 대단히 명석했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귀재인 데다, 다른 사람의 뜻을 헤아리는 데도 능했습니다. 또한 시를 이해하는 데도 뛰어나서 현종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나 봅니다. 8월 어느 날 현종은 양귀비를와 연못에 핀 흰 연꽃을 감상하다가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알아듣는 이 꽃(양귀비)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양귀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 때 생긴 단어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의 “해어화(解語話)입니다.
셋째, 양귀비는 음악과 춤 등 예능에 뛰어났습니다. 현종이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므로, 양귀비가 음악을 잘하는 것은 사랑을 차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현종은 역대 황제 가운데 문예발전에 공이 가장 큰 황제로 기록되고 있으니, 두 사람은 요즘 말로 소위 코드가 잘 맞았나 봅니다. 양귀비는 비파를 잘 탔고 양주사(凉州词)라는 작곡도 하였으며,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라는 춤도 잘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넷째, 그녀는 미소가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요염한 미소를 지었는지 양귀비가 눈을 한번 들어 웃으며 온갖 요염기가 바람에 날린다는 회모일소백미생(回眸一笑百媚生)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런 양귀비를 현종이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서 삼천 궁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는 삼천총애재일신(三千宠爱在一身)이라는 백거이의 《장한가》 시 구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받기 위해 피부화장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는 명나라 황궁의 화장술을 기록한 노부금방(鲁府禁方)에 양귀비의 비방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채식을 위주로 하고 매일 체력을 단련했던 것은 지금 인기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섯째, 양귀비만의 특징일 수도 있는 매력은 옷을 파격적으로 잘 입었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유행을 만들어가는 스타였습니다. 당시 널리 유행하던 길게 끌리던 치마를 입기 보다는 종종 남장(男裝)을 하고 궁중을 활보했습니다. 많은 궁녀들이 이를 흉내냈다고 하는걸 보면, 요즘으로 치면 청바지도 즐겨 입고 캐주얼을 좋아했나 봅니다. 엄숙한 궁정에서 이렇게 대담하고 파격적인 옷차림은 황제에게 신선감을 주었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미모와 명석함 그리고 재능까지 겸비한 양귀비는 어떻게 해서 융성했던 당나라를 쇠퇴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경국지색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그녀는 변방의 이민족 출신 안록산이 장안에 오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를 양아들로 삼아 내전에 끌어드립니다. 아들 신분이라 금남 지역인 내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양귀비의 정부가 된 안록산과 오빠 양국충 등 그녀와 연관된 인물들이 국정을 농단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켜 8년 동안 당나라를 절단냅니다. 궁극적으로 정치는 남성들의 책임이지만, 그녀로 인한 전란의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참고로 좀 가벼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과일 “리즈(荔枝 여지)”는 양귀비와 관련이 많습니다. 리쯔는 남방과일이라 당시 장안에서는 맛볼 수 없었는데, 광동 출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아부하느라 이 과일을 장안까지 나무째 공수하면서 백성을 괴롭게 했다고 합니다. 양귀비가 가장 좋아한 이 남방과일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장안까지 과일나무를 통째로 옮겨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논밭을 가로질러 수 많은 농사를 망쳐 원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양귀비 무덤은 봉분이 벽돌로 덮혀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봉분의 흙을 파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석회석 성분이 많아 봉분이 흰색을 띠었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가 영험한 기운을 발휘한 것으로 믿어 그 흙을 화장품에 섞어 바르려고 했습니다. 유명세로 무덤조차 온전히 보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 희한한 일은 양귀비 묘가 두 개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야마구치현의 어느 절에 또 다른 묘가 있는데, 지금도 제사밥을 받아 먹으면서 동시에 관광상품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일본 묘지 사연은 이렇습니다. 전란을 피해 도망가다 농민에 포위된 현종이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했는데, 이를 집행한 장군이 그녀의 미모를 안타깝게 여겨 궁녀를 대신 죽게 하고 양귀비를 일본으로 피신시켰다는 좀 황당한 주장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까지 두 나라에 묘지가 있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여간 죽어서도 여러 이야기를 남긴 여인입니다.
참, 양귀비가 왜 꽃도 부끄러워한다는 수화(羞花)의 별칭을 얻었는지를 아직 말 안 했군요. 어느날 양귀비가 화원에서 무의식 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는데, 그 꽃이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자신이 부끄러워 바로 잎을 말아올렸답니다. 참 중국인다운 허풍이기는 하지만 이 일로 해서 수화(羞花)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사실은 해질녘에 꽃을 감상해 자연스레 봉우리가 닫혔겠죠.
이렇게 해서 중국의 4대 미녀는 모두 한 가지씩의 사연을 가진 말(침어, 낙안, 폐월, 수화)을 남기게 되었고, 이것이 합쳐져서 최고의 미인을 지칭하는 최고의 찬사가 탄생한 것입니다.
첫 장에 등장했던 그 말을 다시 옮겨보죠.
沉鱼落雁之容,闭月羞花之貌 (헤엄치던 물고기도 가라앉고 날아가는 기러기도 날개짓을 멈춰 떨어지며, 달도 부끄러워 구름에 숨고, 꽃도 그 앞에서 수줍어하는 용모와 자태)
보통 중국에서 폐월수화(biyue xiuhua)만 말해도 모두 알아 듣습니다. 저도 처음 중국 갔을 때 서툰 발음으로 "삐위에 시우화"라고만 했는데, 종업원이 얼굴 빨개지며 돌아가더니 주인 몰래 맥주안주 하나를 그냥 갔다주더군요. 중국말 연습하고 안주 서비스 받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익히면 곧 실전에 적용하는 것이 외국어 학습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끝으로, 무척이나 벼슬을 원했던 이태백이 양귀비를 찬양하는 시 한 수를 감상해 봅시다. 대표적인 어용시입니다. 그래도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데는 따라갈 시가 없는 명작이죠. 대신 중국 고전을 알아야 이해가 되는 작품입니다.
제목은 특별히 없고 청평조(请平调)라는 곡조에 가사를 지었다고 해서 청평조사(请平调词)로 알려진 세 수의 시인데, 그 중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잘 그려낸 두 번째 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 请平调 二》
一枝濃艶露凝香 한 떨기 모란꽃의 이슬은 농염한 향을 머금었고 雲雨巫山枉斷腸 무산의 운우지정도 헛되어 애간장을 끊는구나 借問漢宮誰得似 한나라 궁중에서 누가 이에 견줄까 묻노니 可憐飛燕倚新粧 어여쁜 조비연조차도 화장을 고쳐야겠구나
<현묵선생 고전노트> [출처] 역사: 중국 4대 미녀 진정한 경국지색 양귀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