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비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 한비가 Taklamakan과 塔克拉玛干이 같은 말이며 (사막아 그만, 사막 저쪽 끝으로) ‘닿게 해주렴아, (하고 염원)한’다는 말임을 알아냈듯이, 혜초도 이 말의 뜻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는 10년동안 인도도 다녀왔고, 서역도 다녀왔으므로 온 세상이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往五天竺國傳을 존재한 적도 없었던 漢나라 문장으로 알고, “인도의 5국 여행기”라고 읽고 해석하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한비 만의 생각일까?”
(네이브에 의하면)
“천축은 고대 중국이 부르던 인도의 옛 이름이다.
최초의 인도 견문기는 동진시대 법현의 불국기로 서기 399년에서 414년까지 15년 동안 서역을 지나 인도에서 범어본(산스크리트어) 경전을 구해서 중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이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629년에 장안을 출발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경유, 북인도에 가서 대성불전을 구하고 645년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6년 동안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한 기록이다.
혜초 스님은 15살인 719년에(신라 성덕왕 18년) 당나라 광저우에 가서 인도의 승려, 밀교의 거장 금강지의 제자가 되었으며 금강지의 권유로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당나라 남쪽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를 항해, 각멸, 나선국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했다. 이후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지금의 파키스탄을 경유, 돌아오는 길에 페르시아, 아프카니스탄 와칸 회랑과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을 여행했다. 이후 787년 83세에 당나라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하였다.”(네이브)
위 글에서 보면 혜초이전에도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천축”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천축”은 인도를 뜻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인상적인 것은 동진시대 법현이 “인도에서 범어본(산스크리트어) 경전을 구해서” 돌아왔다는 대목이다. 그가 구해온 산스크리트 경전은, 한비가 여러번 언급했듯이, 우리말로 쓰이어진 글이다. 법현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법현은 고구려나 백제인이었다고 추정된다. 동진이라니, 말도 안된다.
그리고 당나라 현장이 갔던 길이나 혜초가 갔던 길이 무척 흡사하다고 느낀다. 현장도 혜초도 Taklamakan을 지나 갔다. 당시의 글자로 쓴 것은 塔克拉玛干(탑극랍마간)인데 종성을 떼어내야 ‘타크라마칸’이라는 말이 굴러나온다. 옛 (고) 조선 글자는 지금의 한자의 종성을 없애고 읽어야 한다는 그간의 한비의 주장을 그대로 입증시켜주는 중대한 예이다. 현장도 혜초도 다녀온 모든 나라들이 모두 하나같이 옛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느끼고, 깨닫고, 체험했다고 본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Taklamakan은, “중국 신장(新彊) 웨이우얼 자치구 중부의 텐산(天山) 산맥과 쿤룬(崑崙) 산맥 사이에 있는 사막”이다.” 워낙 이 사막을 통과하기가 어려워서 빨리, 저쪽 끝에 도달했으면 하고 염원하는 마음이 크서 어서 저쪽 끝에 ’닫그렴아, 카’ㄴ 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보현도, 현장도, 혜초도 뿌리가 같은 옛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다를 수가 있다. 그가 살았던 나라는 혹, 다를 수도 있지만,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달아날 수도 없고, 어디론가, 날아갈 수도 없었으니까!
젊은이들이여! 이제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는 왕오천축국전을 직접 보고,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확인하고, 세계에 우리말을 소개할 절호의 기회를 만드는 일은, 여러분의 몫이 되었다. 여러분의 놀라운 논문이 나오면, 혜초가 한반도에서 출발했는지, 중국 땅에 있던 신라에서 출발했는지도 밝혀질 것이다. 놀랄 일을 기대하며 이글을 마친다.
추기; 왕오천축국전이란?
혼자 생각에, 먼 여행끝에 옷이낡아 ‘와! 옻, 쭈구져’라고, 한 말이 아닐까, 사념에 젖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