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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여름의 그 맛 아쉽다면, 화악산 용담계곡에 발 담가볼까요
2024년 8월 고을학교는 강원도 북단 <화천고을>
8월, 가는 여름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10강은 우리나라 최북단 접경지역인 <화천고을>로 가서 화악산 아래 용담계곡에 발을 담그고 김수증(金壽增, 1624- 1701)과 곡운구곡(谷雲九曲)에 얽힌 이야기를 나눈 후, 자작나무숲을 지나 장쾌한 파로호를 감상하는 시간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많지 않은 화악산 가는 길. 화천군 사내면과 경기도 가평군 북면의 경계에 위치한 화악산은 한국전쟁의 격전지로 유명하며 정상을 38선이 가르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화천군
화악산은 강원도 화천군과 경기도 가평군 경계에 있는 명산으로, 예부터 경기5악(화악산, 운악산, 감악산, 송악산, 관악산)의 으뜸으로 꼽혔습니다. 산이 높는 만큼 골이 깊어 아름다운 용담계곡을 품고 있으며 여기에 은둔 선비의 삶터를 보여주는 곡운구곡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화천고을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화천군
고을학교 제110강은 2024년 8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0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용담계곡(화음동정사지/곡운구곡)-계성리석등(원천초교)-화천향교-화천시장-점심식사 겸 뒤풀이-화천대교-화천박물관(위라리칠층석탑)-거례리수목공원-미륵바위-파로호안보전시관(화천댐)-해산자작나무숲-평화의댐-서울의 순입니다.
▲<화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0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화천의 역사는 고구려 생천군에서 시작됩니다.
화천고을은 86%가 산지로 형성된 산악지대로, 서부에는 한북정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있고 동부는 백두대간의 지맥들이 험준한 고산지대를 이루면서 불규칙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수계는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을 본류로 하여 남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화천(華川)의 역사는 원래 고구려 때는 생천군 또는 야시매로, 통일신라 때는 낭천이라 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994년(성종 14) 삭방도의 관할에 있다가 1177년(명종 8) 춘주도가 설치됨에 따라 삭방도를 폐하고 춘주도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현감을 두었다가 1645년(인조 23)에 폐현하고 지금의 금화에 있던 도호부 관할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복현되었으며 1901년(고종 39) 화천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1910년 하서면과 남면을 하남면으로, 상면과 서면을 상서면, 간척면과 원동면을 간동면으로 각각 통폐합하였고, 1941년의 화천댐 건설로 인하여 간동면의 사무소를 구만리에서 유촌리로 옮겼으며 동촌리와 미수몰된 태산리의 일부가 화천면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춘천군 관할이었던 사내면은 광복과 더불어 공산 치하의 금화군 관할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군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포천군에 속하였다가 1954년 화천군 관할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화천면은 1979년 화천읍으로 승격되었으며 현재 화천군은 1개 읍, 4개 면, 81개 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용이 천 년간 머물다 승천한 계곡이라는 용담계곡은 시원하게 펼쳐진 바위와 맑은 물, 울창한 숲이 아름다워 옛 문인, 화가들에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명소로 사랑을 받았다.Ⓒ화천군
읍치 구역의 유적은 화천향교만 남아 있습니다.
화천향교(華川鄕校)는 역대 지리지에 향교의 위치나 건물의 규모에 대하여 대략 기술하고 있을 뿐으로 창건 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1735년 김시민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의 전사청을 건설하고 외문루를 창건하였으며 1773년 조무가 명륜당을 중수하고 외삼문을 중건하였으며 1786년 이재항이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대성전을 비롯한 건물이 불에 타버리고 남아있던 문서들도 소실되었습니다. 1960년 이종석 등 관내 유림의 주선으로 대성전과 내삼문을 재건하였고 중단되었던 석전 행사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1963년 향교 주위의 분기를 이장하고 담장공사를 하였으며 1975년 전교 박제묵의 주관으로 명륜당, 제기고, 외삼문을 중건하였습니다. 1973년에 향교 전체를 단청하고 1979년에 번와 작업, 1980년에 원장의 보수를 하였으며, 1982년에는 홍살문을 건립하였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로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제기고 등이 남아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공문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는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구곡 경영을 많이 하였습니다.
구곡(九曲)의 연원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찾습니다. 주자는 1183년에 중국 무이산 아래 30리 되는 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이듬해 1184년에 12수의 무이구곡가를 지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주자의 행적은 자연스레 주자학을 국학으로 삼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끼쳐 주희처럼 은거지에서 구곡을 명명하고 경영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는데 특히 서인, 후대에는 노론에 속한 선비들이 구곡 문화를 즐겼습니다.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김수증의 곡운구곡이 유명하며 남인들은 불경하다고 생각해 구곡을 거의 경영하지 않았습니다.
▲곡운구곡은 김수증이 1670년부터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농수정사를 짓고 용담천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지어 곡운구곡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화천군
용담계곡에는 김수증이 은거한 곡운구곡이 있습니다.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는 화악산으로 올라가는 길, 맑은 계곡 사이로 송풍정, 삼일정 두 개의 정자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창건 당시에는 송풍정, 삼일정, 부지암, 유지당 등 몇 채의 건물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산재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복원된 삼일정과 송풍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평강 현감을 지낸 김수증이 벼슬을 사직한 후 정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정자 근처의 큰 바위에는 얼핏 보면 의미를 알기 어려운 무늬들과 한자들이 새겨 있는데 이는 성리학자의 세계관을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이라는 구조로 조경에 나타낸 것으로 태극도, 하도 낙서, 선후천입궤도 등을 바위에 새겨 놓은 인문석입니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은 김수증이 1670년부터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용담천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지어 곡운구곡이라 명명하여 비롯되었습니다. 곡운은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 ‘운곡(雲谷)’의 앞뒤 글자를 바꾼 것으로 그의 호 곡운도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김수증은 1670년 3월 곡운에 들어왔고 1675년에는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제6곡 와룡담 위에 곡운정사와 농수정, 가묘, 외양간, 부엌을 지었습니다. 1680년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1681년 지병과 출사를 위해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은거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곳을 마음 속에 담아두기 위해 1682년, 당대의 유명 화가인 조세걸에게 부탁해 이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김수증의 그림 제작 동기는 이처럼 그의 생애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후 영의정까지 지낸 그의 두 아우가 당쟁으로 희생당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화음동정사’를 짓고 성리학을 탐구하면서 탈속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듯 곡운구곡도는 이전의 구곡도와는 경영의 동기가 다릅니다. 16세기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도는 율곡이 황해도 고산에서 구곡을 경영한 것으로 후학들에게 주자의 도학적 삶을 따르는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김수증의 구곡 경영은 당시 사화와 당쟁 때문에 은거지로 들어가면서 시작된 것이고, 일정 기간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았던 것으로 보아 고산구곡의 경영 배경과는 같지 않습니다.
김수증이 유거지 주변에 구곡을 설정한 것은 이와 같은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유거지인 농수정 그림에 따로 화면을 할애한 점 등은 결국 성리학적 자연관을 따르기 위한 구곡 경영 그림이라기보다는 성리학자로서의 자신의 공간을 그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조선 시대 구곡도라는 의미도 있지만 조선 시대에 자연 속에 있는 개인의 거주지를 산수화로 제작한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서 의미가 더 큽니다.
괴산의 화양구곡과 함께 우리나라 구곡 6개소 중에서 실경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일찍이 정약용은 곡운구곡의 아름다움을 중용의 미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제1곡은 봄에 강가에 피는 철쭉이 아름다운 방화계(傍花溪)입니다.
제2곡은 맑은 물빛이 옥색과 같다는 청옥협(靑玉峽)입니다.
제3곡은 신녀협(神女峽)입니다. 신녀협 옆의 벼랑은 계곡을 전망하기 좋은 곳으로 김시습이 신녀협의 풍치를 굽어보고 삼미(三味)에 빠진 곳이라 하여 그의 법호를 따서 청은대(淸隱臺)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정자는 근래에 지어진 것입니다.
제4곡은 안개와 구름이 머무는 백운담(白雲潭)입니다.
제5곡은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여울이라는 명옥뢰(鳴玉瀨)입니다.
제6곡은 와룡이 숨었다는 깊은 못인 와룡담(臥龍潭)입니다. 와룡담은 구곡 중 가장 뛰어난 절경으로 손꼽히며 김수증은 와룡담 상류가 모이는 귀운동 골짜기에 7칸짜리 띠풀집을 짓고 곡운정사도 운영하였습니다. 정사는 서원으로 발전하기 전 학당을 말합니다. 이곳은 실로 학문을 닦는 선비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농수정은 이 와룡담 한쪽에 세워졌는데 그림 중간에 보이는 작은 초막입니다. 조세걸은 와룡담에 이어 농수정을 더욱 근접하여 그렸는데 농수정 뒤편으로 많은 건물과 소를 몰고 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김수증은 이곳에 농수정 외에도 곡운정사와 가묘(家廟),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지었습니다.
제7곡은 밝은 달이 비치는 계곡물이라는 명월계(明月溪)입니다.
제8곡은 의(義)를 높인다는 융의연(隆義淵)입니다.
제9곡은 층층이 쌓인 바위인 첩석대(疊石臺)입니다. 화폭 중간 왼쪽에 희미하게 그려진 탑은 예전 그곳에 있던 신수사(神秀寺)라는 절의 탑이라 합니다.
▲조선시대의 화가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 1682년 무렵 김수증이 조세걸에게 화천군 사내면 용담천 하류를 이루는 약 8㎞의 구불구불한 계곡을 열 폭 비단 위에 그리게 하여 남긴 실경산수화이다.Ⓒ국립중앙박물관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는 1682년 김수증이 당대의 유명 화가인 조세걸을 화천으로 불러 화음동정사지를 포함한 약 8km의 아홉 구비의 곡운구곡의 경치를 열 폭 비단 위에 그리게 하여 후세에 남겼고, 그림 안에는 발문과 제화시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곡운구곡도>에는 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세필로 자세히 묘사하여 실경의 명칭과 거리, 방향, 자연의 특징까지도 상세히 적혀있습니다. 그림을 통해 1600년대의 곡운구곡과 2000년대의 곡운구곡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선비의 기품이 남아 있는 화음동정사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곳이 신선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곡운구곡도첩>은 글씨 23면, 그림 10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림은 곡운구곡에 농수정까지 포함하여 10점입니다. 그림을 그린 조세걸은 1636년에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지역에서 성장하며 활동하던 화가로, 중년 이후에는 한성을 오가며 어진 제작과 도사(圖寫)에도 참여하였으며 인물화, 산수화에 두루 능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세걸이 김수증의 부름을 받아 <곡운구곡도>를 그린 때가 47세였습니다.
도첩의 제서(題書)는 1682년에 조세걸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김수증이 직접 쓴 것입니다 (龍水亭主人書). ‘임술복월(壬戌復月)’의 임술은 1682년, 복월은 양(陽)의 기운이 회복된 달이라는 뜻으로 음력 11월을 가리킵니다.
김수증은 예서에 많은 애착을 가졌던 서예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쓴 <곡운구곡도> 제서는 예서 특유의 삐침이나 갈고리, 파임 등이 굴곡 없이 매끈하고 곧바로 지나간 획으로 변모되어 있습니다. 예서임에도 점획이 많이 해서화되었습니다. 단아하고 말쑥한 느낌은 있지만, 고전적 예서체는 아닙니다.
김수증은 1671년에 먼저 유학의 영수 송시열에게 <곡운정사기>를 쓰게 하고, 다른 여러 문인과 같이 <무이구곡도가>에 차운한 시를 짓게 하여 모아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어 그의 조카 농암 김창협이 쓴 발문에 의하면 10년 후 곡운 자신과 아들, 조카, 사위, 외손까지 합한 아홉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무이도가’에 차운하여 곡운의 모든 골짜기를 묘사하는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곡운구곡도> 화첩을 완성하였습니다. 제1곡은 김수증 자신이, 제2곡은 아들 창국이, 제3곡은 조카 창집이, 제4곡은 조카 창협이, 제5곡은 조카 창흡이, 제6곡은 아들 창직이, 제7곡은 조카 창업이, 제8곡은 조카 창즙이, 제9곡은 외손 홍유인이 지었습니다. 당대의 문인이 지은 시와 궁중 화가의 그림이 만난 합작품으로 <곡운구곡도첩>의 가치는 매우 높습니다.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주전론자였던 김상헌의 손자입니다. 그의 동생 김수흥과 김수항은 모두 영의정을 지냈고, 겸재 정선의 스승으로 알려진 김창흡, 김창협 형제는 그의 조카들이고 훗날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된 김조순 역시 이들의 후손입니다. 안동 김씨로 대표적인 서인 노론 집안이었던 만큼, 정국에 따라 집안은 많은 부침이 있었습니다.
김수증은 효종 1년인 1650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형조 정랑, 공조 정랑을 역임하였습니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했던 김수증은, 47살이 되던 1670년에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지역의 산수에 끌려 그곳에 땅을 마련하고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을 기리는 농수정(籠水亭)을 지었습니다. 또한 원래의 지명인 사탄(史呑)을 곡운(谷雲)이라 개칭한 뒤, 용담천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지어 곡운구곡이라 부르면서 이곳에 곡운정사도 지었습니다. 숙종 1년인 1675년, 성천 부사로 있던 김수증은,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들어가 은거를 시작하였습니다.
▲파로호에도 곧 가을이 찾아온다.Ⓒ화천군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의 아픈 상흔도 있습니다.
파로호(破虜湖)는 화천호라고도 불리는데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하며 1944년 5월에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입니다. 화천댐은 북한강에 있는 높이 81.5m, 길이 435m, 총저수량 10억 1, 800만 톤의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일제에 의해 1939년 착공되어 1944년 완공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38선 이북으로 8.15 광복 직후에는 소련 군정이었고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 수복된 지역입니다.
댐 건설 당시 호수에 붙여진 이름은 ‘화천호’이며, ‘파로호’라는 이름은 한국전쟁 파로호 전투 때 화천호 근방에서 조선인민군 및 중국 인민지원군 24,000여 명을 사살하고 전사자 시체를 화천호에 수장시킨 곳이라 하여 1955년 11월 18일, 이승만이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로 명명하고 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인 황쏘가리를 비롯해 50여 종의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1급수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수달과 원앙, 찌르레기 등 많은 조류가 있으며 삵, 고라니, 너구리 등 다양한 생물다양성을 자랑합니다. 과거 평화의 댐 건설 이전 이곳은 낚시 명소로 각광을 받아 왔으나 외래 육식어종인 배스가 토종 어종인 쏘가리와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며 생태계에 교란을 가져와 토종 어종이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파로호 인공습지는 수중의 부유물질과 인을 침강시켜 하류의 부영양화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와 거대하게 형성된 나대지에서 무단 경작으로 인한 수질오염과 불법 토사, 불법투기 등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에 대처하기 위해 저류보를 설치하게 되면서 조성되었습니다. 인공습지는 환경적 기능뿐만 아니라 육지 환경과 호수 생태계 사이의 독특한 환경을 조성하여 경제적 측면의 수확뿐 아니라 휴양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고 또한 멸종 위기의 생물종의 서식지로 이용되어 생물다양성을 많이 높이고 있습니다.
평화의댐은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따른 수공(水攻)과 홍수 예방을 위해 1987년 2월에 착공하여 1989년 1월에 1차 완공(높이 80m)된 뒤, 2002년부터 2단계 증축 공사를 하여 2005년 10월에 최종 완공(높이 125m)되었습니다. 최대 저수량은 26억 3천만 톤이며 평상시에는 물을 가두지 않는 건류 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건설 과정에서 제5공화국 정권이 북한의 수공 위협을 과장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여 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정황이 이후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의 증언과 감사원 조사 등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 때문에 제6공화국 이후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평화의댐의 저수량 26억 3천만 톤은 금강산댐의 저수량보다 1천만 톤이 더 많고, 소양강댐(29억 톤), 충주댐(27.5억 톤)에 이어 셋째로 많은 저수량을 가지며, 댐 높이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습니다.
북한강 변에는 자연 친화적인 명소가 많습니다.
해산자작나무숲은 화천에서 평화의 댐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습니다. 해산은 일출이 아름답고 아침 해를 가장 먼저 받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산(日山), 호랑이산으로도 불립니다. 해산은 오랫동안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여행객의 출입이 통제되어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원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계절마다 다양한 빛깔을 뽐내는 곳입니다. 특히 겨울날 눈이 내렸을 때의 새하얀 은빛 설경은 마치 동화 속 눈의 나라에 온 듯 포근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날이 좋을 때 정상의 해산 전망대에 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파라호의 전망은 답답했던 마음을 가라앉혀주며 상쾌하게 만들어줍니다.
미륵바위는 북한강의 최상류인 화천읍 대이리에 있습니다. 이곳의 미륵바위는 그 형태에 기이합니다. 조성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절터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륵바위는 모두 다섯인데 이중 가장 큰 것은 높이가 170cm이나 됩니다.
미륵바위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화천읍 동촌리에 살았던 장씨 성을 가진 선비가 가끔 이곳에 와서 음식을 차려놓고 극진하게 치성을 드렸는데 과거 길에 미륵바위가 사람의 모습으로 동행해 과거에 급제, 양구 현감까지 되었다는 전설과, 다른 하나는 미륵바위는 원래 강에 있었는데 소금 배를 운반하던 선주의 꿈에 미륵바위가 나타나 이곳으로 옮겨달라고 해서 이 자리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숲으로다리를 걷다보면 마치 깊은 숲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특히 물안개가 그득한 날이면 발밑의 길이 보이지 않아 더욱 신비롭다고 한다.Ⓒ화천군
숲으로다리는 화천읍에서 북한강을 따라 화천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숲으로다리가 보입니다. 다리의 이름은 작가 김훈이 지어주었습니다. 물 위에 뜨는 구조물을 뜻하는 폰툰 다리로서 푹신한 튜브형의 폰툰 보트를 띄워서 그 위에 나무 바닥을 촘촘히 얽어 만든 다리입니다. 강과 산의 경계선을 이루는 숲으로다리는 미륵바위에서부터 화천읍 원시림 숲길까지 1.5km 길이로 제법 긴 다리이며 이보다 더 길이가 짧은 폰툰 다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숲으로다리는 화천 산소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구간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동구래마을의 ‘동구래’는 ‘동그란’의 어원에서 유래되었으며, 모든 사물의 시작인 씨앗과 꽃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약 1000여 평 되는 야생화단지엔 복수초, 금낭화, 매발톱꽃, 초롱꽃 등 50여 종에 달하는 토종야생화가 있으며 예전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미스킴 라일락도 있습니다. 동구래마을의 야생화단지는 우리 토종야생화 종자를 보존하고 증식하는데 매우 큰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거례리수목공원은 ‘아를수목공원’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프랑스의 아를 지방에 온 듯한 느낌 때문에, 아니면 아를의 여인처럼 아름답지만 슬픈 사연이라도 간직하고 있어서일까요. 이곳에는 10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화천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 느티나무가 사랑나무라 불리기 시작하고 그 주변은 사람들의 정성을 들여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에는 해바라기를,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구절초를 심어 계절마다 다른 공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는 여름의 그 맛 아쉽다면, 화악산 용담계곡에 발 담가볼까요
2024년 8월 고을학교는 강원도 북단 <화천고을>
8월, 가는 여름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10강은 우리나라 최북단 접경지역인 <화천고을>로 가서 화악산 아래 용담계곡에 발을 담그고 김수증(金壽增, 1624- 1701)과 곡운구곡(谷雲九曲)에 얽힌 이야기를 나눈 후, 자작나무숲을 지나 장쾌한 파로호를 감상하는 시간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많지 않은 화악산 가는 길. 화천군 사내면과 경기도 가평군 북면의 경계에 위치한 화악산은 한국전쟁의 격전지로 유명하며 정상을 38선이 가르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화천군
화악산은 강원도 화천군과 경기도 가평군 경계에 있는 명산으로, 예부터 경기5악(화악산, 운악산, 감악산, 송악산, 관악산)의 으뜸으로 꼽혔습니다. 산이 높는 만큼 골이 깊어 아름다운 용담계곡을 품고 있으며 여기에 은둔 선비의 삶터를 보여주는 곡운구곡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화천고을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화천군
고을학교 제110강은 2024년 8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0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용담계곡(화음동정사지/곡운구곡)-계성리석등(원천초교)-화천향교-화천시장-점심식사 겸 뒤풀이-화천대교-화천박물관(위라리칠층석탑)-거례리수목공원-미륵바위-파로호안보전시관(화천댐)-해산자작나무숲-평화의댐-서울의 순입니다.
▲<화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0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화천의 역사는 고구려 생천군에서 시작됩니다.
화천고을은 86%가 산지로 형성된 산악지대로, 서부에는 한북정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있고 동부는 백두대간의 지맥들이 험준한 고산지대를 이루면서 불규칙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수계는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을 본류로 하여 남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화천(華川)의 역사는 원래 고구려 때는 생천군 또는 야시매로, 통일신라 때는 낭천이라 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994년(성종 14) 삭방도의 관할에 있다가 1177년(명종 8) 춘주도가 설치됨에 따라 삭방도를 폐하고 춘주도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현감을 두었다가 1645년(인조 23)에 폐현하고 지금의 금화에 있던 도호부 관할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복현되었으며 1901년(고종 39) 화천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1910년 하서면과 남면을 하남면으로, 상면과 서면을 상서면, 간척면과 원동면을 간동면으로 각각 통폐합하였고, 1941년의 화천댐 건설로 인하여 간동면의 사무소를 구만리에서 유촌리로 옮겼으며 동촌리와 미수몰된 태산리의 일부가 화천면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춘천군 관할이었던 사내면은 광복과 더불어 공산 치하의 금화군 관할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군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포천군에 속하였다가 1954년 화천군 관할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화천면은 1979년 화천읍으로 승격되었으며 현재 화천군은 1개 읍, 4개 면, 81개 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용이 천 년간 머물다 승천한 계곡이라는 용담계곡은 시원하게 펼쳐진 바위와 맑은 물, 울창한 숲이 아름다워 옛 문인, 화가들에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명소로 사랑을 받았다.Ⓒ화천군
읍치 구역의 유적은 화천향교만 남아 있습니다.
화천향교(華川鄕校)는 역대 지리지에 향교의 위치나 건물의 규모에 대하여 대략 기술하고 있을 뿐으로 창건 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1735년 김시민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의 전사청을 건설하고 외문루를 창건하였으며 1773년 조무가 명륜당을 중수하고 외삼문을 중건하였으며 1786년 이재항이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대성전을 비롯한 건물이 불에 타버리고 남아있던 문서들도 소실되었습니다. 1960년 이종석 등 관내 유림의 주선으로 대성전과 내삼문을 재건하였고 중단되었던 석전 행사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1963년 향교 주위의 분기를 이장하고 담장공사를 하였으며 1975년 전교 박제묵의 주관으로 명륜당, 제기고, 외삼문을 중건하였습니다. 1973년에 향교 전체를 단청하고 1979년에 번와 작업, 1980년에 원장의 보수를 하였으며, 1982년에는 홍살문을 건립하였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로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제기고 등이 남아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공문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는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구곡 경영을 많이 하였습니다.
구곡(九曲)의 연원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찾습니다. 주자는 1183년에 중국 무이산 아래 30리 되는 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이듬해 1184년에 12수의 무이구곡가를 지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주자의 행적은 자연스레 주자학을 국학으로 삼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끼쳐 주희처럼 은거지에서 구곡을 명명하고 경영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는데 특히 서인, 후대에는 노론에 속한 선비들이 구곡 문화를 즐겼습니다.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김수증의 곡운구곡이 유명하며 남인들은 불경하다고 생각해 구곡을 거의 경영하지 않았습니다.
▲곡운구곡은 김수증이 1670년부터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농수정사를 짓고 용담천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지어 곡운구곡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화천군
용담계곡에는 김수증이 은거한 곡운구곡이 있습니다.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는 화악산으로 올라가는 길, 맑은 계곡 사이로 송풍정, 삼일정 두 개의 정자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창건 당시에는 송풍정, 삼일정, 부지암, 유지당 등 몇 채의 건물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산재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복원된 삼일정과 송풍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평강 현감을 지낸 김수증이 벼슬을 사직한 후 정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정자 근처의 큰 바위에는 얼핏 보면 의미를 알기 어려운 무늬들과 한자들이 새겨 있는데 이는 성리학자의 세계관을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이라는 구조로 조경에 나타낸 것으로 태극도, 하도 낙서, 선후천입궤도 등을 바위에 새겨 놓은 인문석입니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은 김수증이 1670년부터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용담천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지어 곡운구곡이라 명명하여 비롯되었습니다. 곡운은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 ‘운곡(雲谷)’의 앞뒤 글자를 바꾼 것으로 그의 호 곡운도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김수증은 1670년 3월 곡운에 들어왔고 1675년에는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제6곡 와룡담 위에 곡운정사와 농수정, 가묘, 외양간, 부엌을 지었습니다. 1680년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1681년 지병과 출사를 위해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은거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곳을 마음 속에 담아두기 위해 1682년, 당대의 유명 화가인 조세걸에게 부탁해 이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김수증의 그림 제작 동기는 이처럼 그의 생애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후 영의정까지 지낸 그의 두 아우가 당쟁으로 희생당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화음동정사’를 짓고 성리학을 탐구하면서 탈속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듯 곡운구곡도는 이전의 구곡도와는 경영의 동기가 다릅니다. 16세기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도는 율곡이 황해도 고산에서 구곡을 경영한 것으로 후학들에게 주자의 도학적 삶을 따르는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김수증의 구곡 경영은 당시 사화와 당쟁 때문에 은거지로 들어가면서 시작된 것이고, 일정 기간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았던 것으로 보아 고산구곡의 경영 배경과는 같지 않습니다.
김수증이 유거지 주변에 구곡을 설정한 것은 이와 같은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유거지인 농수정 그림에 따로 화면을 할애한 점 등은 결국 성리학적 자연관을 따르기 위한 구곡 경영 그림이라기보다는 성리학자로서의 자신의 공간을 그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조선 시대 구곡도라는 의미도 있지만 조선 시대에 자연 속에 있는 개인의 거주지를 산수화로 제작한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서 의미가 더 큽니다.
괴산의 화양구곡과 함께 우리나라 구곡 6개소 중에서 실경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일찍이 정약용은 곡운구곡의 아름다움을 중용의 미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제1곡은 봄에 강가에 피는 철쭉이 아름다운 방화계(傍花溪)입니다.
제2곡은 맑은 물빛이 옥색과 같다는 청옥협(靑玉峽)입니다.
제3곡은 신녀협(神女峽)입니다. 신녀협 옆의 벼랑은 계곡을 전망하기 좋은 곳으로 김시습이 신녀협의 풍치를 굽어보고 삼미(三味)에 빠진 곳이라 하여 그의 법호를 따서 청은대(淸隱臺)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정자는 근래에 지어진 것입니다.
제4곡은 안개와 구름이 머무는 백운담(白雲潭)입니다.
제5곡은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여울이라는 명옥뢰(鳴玉瀨)입니다.
제6곡은 와룡이 숨었다는 깊은 못인 와룡담(臥龍潭)입니다. 와룡담은 구곡 중 가장 뛰어난 절경으로 손꼽히며 김수증은 와룡담 상류가 모이는 귀운동 골짜기에 7칸짜리 띠풀집을 짓고 곡운정사도 운영하였습니다. 정사는 서원으로 발전하기 전 학당을 말합니다. 이곳은 실로 학문을 닦는 선비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농수정은 이 와룡담 한쪽에 세워졌는데 그림 중간에 보이는 작은 초막입니다. 조세걸은 와룡담에 이어 농수정을 더욱 근접하여 그렸는데 농수정 뒤편으로 많은 건물과 소를 몰고 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김수증은 이곳에 농수정 외에도 곡운정사와 가묘(家廟),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지었습니다.
제7곡은 밝은 달이 비치는 계곡물이라는 명월계(明月溪)입니다.
제8곡은 의(義)를 높인다는 융의연(隆義淵)입니다.
제9곡은 층층이 쌓인 바위인 첩석대(疊石臺)입니다. 화폭 중간 왼쪽에 희미하게 그려진 탑은 예전 그곳에 있던 신수사(神秀寺)라는 절의 탑이라 합니다.
▲조선시대의 화가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 1682년 무렵 김수증이 조세걸에게 화천군 사내면 용담천 하류를 이루는 약 8㎞의 구불구불한 계곡을 열 폭 비단 위에 그리게 하여 남긴 실경산수화이다.Ⓒ국립중앙박물관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는 1682년 김수증이 당대의 유명 화가인 조세걸을 화천으로 불러 화음동정사지를 포함한 약 8km의 아홉 구비의 곡운구곡의 경치를 열 폭 비단 위에 그리게 하여 후세에 남겼고, 그림 안에는 발문과 제화시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곡운구곡도>에는 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세필로 자세히 묘사하여 실경의 명칭과 거리, 방향, 자연의 특징까지도 상세히 적혀있습니다. 그림을 통해 1600년대의 곡운구곡과 2000년대의 곡운구곡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선비의 기품이 남아 있는 화음동정사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곳이 신선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곡운구곡도첩>은 글씨 23면, 그림 10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림은 곡운구곡에 농수정까지 포함하여 10점입니다. 그림을 그린 조세걸은 1636년에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지역에서 성장하며 활동하던 화가로, 중년 이후에는 한성을 오가며 어진 제작과 도사(圖寫)에도 참여하였으며 인물화, 산수화에 두루 능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세걸이 김수증의 부름을 받아 <곡운구곡도>를 그린 때가 47세였습니다.
도첩의 제서(題書)는 1682년에 조세걸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김수증이 직접 쓴 것입니다 (龍水亭主人書). ‘임술복월(壬戌復月)’의 임술은 1682년, 복월은 양(陽)의 기운이 회복된 달이라는 뜻으로 음력 11월을 가리킵니다.
김수증은 예서에 많은 애착을 가졌던 서예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쓴 <곡운구곡도> 제서는 예서 특유의 삐침이나 갈고리, 파임 등이 굴곡 없이 매끈하고 곧바로 지나간 획으로 변모되어 있습니다. 예서임에도 점획이 많이 해서화되었습니다. 단아하고 말쑥한 느낌은 있지만, 고전적 예서체는 아닙니다.
김수증은 1671년에 먼저 유학의 영수 송시열에게 <곡운정사기>를 쓰게 하고, 다른 여러 문인과 같이 <무이구곡도가>에 차운한 시를 짓게 하여 모아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어 그의 조카 농암 김창협이 쓴 발문에 의하면 10년 후 곡운 자신과 아들, 조카, 사위, 외손까지 합한 아홉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무이도가’에 차운하여 곡운의 모든 골짜기를 묘사하는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곡운구곡도> 화첩을 완성하였습니다. 제1곡은 김수증 자신이, 제2곡은 아들 창국이, 제3곡은 조카 창집이, 제4곡은 조카 창협이, 제5곡은 조카 창흡이, 제6곡은 아들 창직이, 제7곡은 조카 창업이, 제8곡은 조카 창즙이, 제9곡은 외손 홍유인이 지었습니다. 당대의 문인이 지은 시와 궁중 화가의 그림이 만난 합작품으로 <곡운구곡도첩>의 가치는 매우 높습니다.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주전론자였던 김상헌의 손자입니다. 그의 동생 김수흥과 김수항은 모두 영의정을 지냈고, 겸재 정선의 스승으로 알려진 김창흡, 김창협 형제는 그의 조카들이고 훗날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된 김조순 역시 이들의 후손입니다. 안동 김씨로 대표적인 서인 노론 집안이었던 만큼, 정국에 따라 집안은 많은 부침이 있었습니다.
김수증은 효종 1년인 1650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형조 정랑, 공조 정랑을 역임하였습니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했던 김수증은, 47살이 되던 1670년에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지역의 산수에 끌려 그곳에 땅을 마련하고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을 기리는 농수정(籠水亭)을 지었습니다. 또한 원래의 지명인 사탄(史呑)을 곡운(谷雲)이라 개칭한 뒤, 용담천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지어 곡운구곡이라 부르면서 이곳에 곡운정사도 지었습니다. 숙종 1년인 1675년, 성천 부사로 있던 김수증은,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들어가 은거를 시작하였습니다.
▲파로호에도 곧 가을이 찾아온다.Ⓒ화천군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의 아픈 상흔도 있습니다.
파로호(破虜湖)는 화천호라고도 불리는데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하며 1944년 5월에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입니다. 화천댐은 북한강에 있는 높이 81.5m, 길이 435m, 총저수량 10억 1, 800만 톤의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일제에 의해 1939년 착공되어 1944년 완공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38선 이북으로 8.15 광복 직후에는 소련 군정이었고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 수복된 지역입니다.
댐 건설 당시 호수에 붙여진 이름은 ‘화천호’이며, ‘파로호’라는 이름은 한국전쟁 파로호 전투 때 화천호 근방에서 조선인민군 및 중국 인민지원군 24,000여 명을 사살하고 전사자 시체를 화천호에 수장시킨 곳이라 하여 1955년 11월 18일, 이승만이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로 명명하고 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인 황쏘가리를 비롯해 50여 종의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1급수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수달과 원앙, 찌르레기 등 많은 조류가 있으며 삵, 고라니, 너구리 등 다양한 생물다양성을 자랑합니다. 과거 평화의 댐 건설 이전 이곳은 낚시 명소로 각광을 받아 왔으나 외래 육식어종인 배스가 토종 어종인 쏘가리와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며 생태계에 교란을 가져와 토종 어종이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파로호 인공습지는 수중의 부유물질과 인을 침강시켜 하류의 부영양화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와 거대하게 형성된 나대지에서 무단 경작으로 인한 수질오염과 불법 토사, 불법투기 등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에 대처하기 위해 저류보를 설치하게 되면서 조성되었습니다. 인공습지는 환경적 기능뿐만 아니라 육지 환경과 호수 생태계 사이의 독특한 환경을 조성하여 경제적 측면의 수확뿐 아니라 휴양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고 또한 멸종 위기의 생물종의 서식지로 이용되어 생물다양성을 많이 높이고 있습니다.
평화의댐은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따른 수공(水攻)과 홍수 예방을 위해 1987년 2월에 착공하여 1989년 1월에 1차 완공(높이 80m)된 뒤, 2002년부터 2단계 증축 공사를 하여 2005년 10월에 최종 완공(높이 125m)되었습니다. 최대 저수량은 26억 3천만 톤이며 평상시에는 물을 가두지 않는 건류 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건설 과정에서 제5공화국 정권이 북한의 수공 위협을 과장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여 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정황이 이후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의 증언과 감사원 조사 등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 때문에 제6공화국 이후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평화의댐의 저수량 26억 3천만 톤은 금강산댐의 저수량보다 1천만 톤이 더 많고, 소양강댐(29억 톤), 충주댐(27.5억 톤)에 이어 셋째로 많은 저수량을 가지며, 댐 높이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습니다.
북한강 변에는 자연 친화적인 명소가 많습니다.
해산자작나무숲은 화천에서 평화의 댐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습니다. 해산은 일출이 아름답고 아침 해를 가장 먼저 받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산(日山), 호랑이산으로도 불립니다. 해산은 오랫동안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여행객의 출입이 통제되어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원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계절마다 다양한 빛깔을 뽐내는 곳입니다. 특히 겨울날 눈이 내렸을 때의 새하얀 은빛 설경은 마치 동화 속 눈의 나라에 온 듯 포근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날이 좋을 때 정상의 해산 전망대에 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파라호의 전망은 답답했던 마음을 가라앉혀주며 상쾌하게 만들어줍니다.
미륵바위는 북한강의 최상류인 화천읍 대이리에 있습니다. 이곳의 미륵바위는 그 형태에 기이합니다. 조성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절터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륵바위는 모두 다섯인데 이중 가장 큰 것은 높이가 170cm이나 됩니다.
미륵바위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화천읍 동촌리에 살았던 장씨 성을 가진 선비가 가끔 이곳에 와서 음식을 차려놓고 극진하게 치성을 드렸는데 과거 길에 미륵바위가 사람의 모습으로 동행해 과거에 급제, 양구 현감까지 되었다는 전설과, 다른 하나는 미륵바위는 원래 강에 있었는데 소금 배를 운반하던 선주의 꿈에 미륵바위가 나타나 이곳으로 옮겨달라고 해서 이 자리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숲으로다리를 걷다보면 마치 깊은 숲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특히 물안개가 그득한 날이면 발밑의 길이 보이지 않아 더욱 신비롭다고 한다.Ⓒ화천군
숲으로다리는 화천읍에서 북한강을 따라 화천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숲으로다리가 보입니다. 다리의 이름은 작가 김훈이 지어주었습니다. 물 위에 뜨는 구조물을 뜻하는 폰툰 다리로서 푹신한 튜브형의 폰툰 보트를 띄워서 그 위에 나무 바닥을 촘촘히 얽어 만든 다리입니다. 강과 산의 경계선을 이루는 숲으로다리는 미륵바위에서부터 화천읍 원시림 숲길까지 1.5km 길이로 제법 긴 다리이며 이보다 더 길이가 짧은 폰툰 다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숲으로다리는 화천 산소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구간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동구래마을의 ‘동구래’는 ‘동그란’의 어원에서 유래되었으며, 모든 사물의 시작인 씨앗과 꽃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약 1000여 평 되는 야생화단지엔 복수초, 금낭화, 매발톱꽃, 초롱꽃 등 50여 종에 달하는 토종야생화가 있으며 예전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미스킴 라일락도 있습니다. 동구래마을의 야생화단지는 우리 토종야생화 종자를 보존하고 증식하는데 매우 큰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거례리수목공원은 ‘아를수목공원’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프랑스의 아를 지방에 온 듯한 느낌 때문에, 아니면 아를의 여인처럼 아름답지만 슬픈 사연이라도 간직하고 있어서일까요. 이곳에는 10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화천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 느티나무가 사랑나무라 불리기 시작하고 그 주변은 사람들의 정성을 들여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에는 해바라기를,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구절초를 심어 계절마다 다른 공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