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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17일 수요일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수도회] 어디에 중심을 두고 어디로 가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5,1-6
† 복음 요한 15,1-8
◈ 오늘의 묵상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해 주는 가장
적절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포도나무의 뿌리에서 얻어 내는
생명력으로 가지는 열매를 맺습니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곁에 머물게 해 주셔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비유는, 우리가 예수님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느끼며
산다면, 우리 삶이 무심결에 지나쳐 버리는 작은 순간들조차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은 혼란스러운 분쟁과 논란 속에서 잠시
멈추어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어 보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서
바리사이파 출신의 신자들이 자신들이 고집해 온 할례 전통을
이방인들에게도 강요하려고 했을 때, 바오로 사도는 멈추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의 기쁨을
되새기고 그분 말씀 안에 머물렀기에, 편협한 할례 논쟁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단순한 진리를 기억한 것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삽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본당에서도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삽니다. 우리의 관계들을 지탱해 주는 포도나무의 생명력은
하느님 말씀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내 힘으로 그
관계를 지탱하려고 할 때 편견과 아집의 늪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성당에 가고 싶지 않다면, 내가 붙어 있던 포도나무가
예수님이 아닌, 나의 욕심과 편견의 나무가 아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랑의 계명을 일순위에 놓고서 살아가는 것
2017년 가해 5월17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할례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1-6
복음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저는 형제가 많습니다. 제 위로 형과 누나가 합쳐서 다섯이나 됩니다.
지금이야 형제 많은 것이 너무나도 좋지만, 사실 어렸을 때에는 형제
많은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종종 학교에서 호구조사를 했는데,
한 명에서 시작해서 보통 다섯 명 정도까지 물어보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더 없지?”
그때 저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서 “여기 6명 있는데요?”
라고 말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너희 집 부자인가
보다.”라고 웃으며 말씀하세요. 당시만 해도 정부에서 인구 억제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1960년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71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78년) 등의 표어는 형제 많은 저를 괜히
죄인인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인구 억제 정책이 60년대부터 시작해서 80년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민들의 저 출산
경향으로 인해 결국 90년대 중반에 인구 억제 정책을 공식 폐지하였고,
2004년부터는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2004년 6월)라는 표어가 등장하는 출산 장려 정책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요즘에는 어떤가요? 자녀를 넷만 낳아도 ‘애국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20년 전에 자녀를 넷 낳으면 뭐라고 했을까요?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20년 만에 짐승에서 애국자로 변한 것이지요. 불과 20년 만에 세상은
확 바뀌었습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변화의 속도가 빠릅니다. 하긴 20년 전에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지금 현재에는 일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힘 있게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주님의 말씀이
더 이상 우리에게 힘 있게 다가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과연 세상의 것들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반드시
행복할까요? 풍요로움을 얻었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져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붙어 있다는 것은 곧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일순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일순위에 놓고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 역사를 통해서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엔 모른다. 이렇게 좋은 날이 평생에 그리 많지 않다는
걸(이동영).
제 아버지 팔순 때의 가족사진입니다. 다 비슷하죠? ㅋㅋㅋ
행복을 위하여...
에디슨은 2390번의 실패 끝에 필라멘트를 만들어냈고, 에이브라함
링컨은 초등학교 중퇴 후 상,하원에 네 번 낙선한 뒤에 비로소
당선되었습니다. 아이는 평균 2000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걸을 수 있고,
겨울에 자란 나무의 나이테 부분은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더
단단합니다.
행복이란 고통과 시련 없는 것이 아니라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에서 성인남녀들을 대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조사한 결과를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 대상의 66.9%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과거의 행적을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근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과거로 되돌아가 그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멋진 미래는 지금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이
머지않은 미래에는 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마 행복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은
다음의 세 가지가 아닐까요?
첫째, 나와 남을 비교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둘째,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마음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셋째, 지금 이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느껴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붙어 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어디에 중심을 두고 어디로 가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17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어디에 중심을 두고 어디로 가는가?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받으시기 전에 포도나무의 비유로 당신과 제자들,
또 제자들끼리의 일치를 강조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15,4-5)
하느님께 충실한 포도나무로 불림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따랐기에 참 포도나무이시며(15,5), 아버지께서 심으시고
돌보시며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인 당신 안에 머물 때 그 가지들인 교회는 생명의 수액(樹液)을
받아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15,5).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하는 그 어떤 일도 영원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 풍성한 결실을
맺어주실 뿐 아니라, 그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어주십니다
(15,7). 그로써 주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15,8).
참으로 달콤한 유혹과 강력한 도전들이 널려있는 속화된 세상에서
신앙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오늘 나에게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며, 내 삶에 어떤 의미이십니까? 예수님을 참 생명이요, 내 삶의
궁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입니까?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려면 그분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
안에 머물면 생각할 때도 예수님에게서 시작하고 그분 안에서
마칩니다. 예수님을 판단기준, 삶의 가치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그분의 가지에 붙어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상과
시대사조, 다양한 문화들 속에서 복음을 으뜸 가치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일 것입니다. 나 자신을 중심에 두는 교만과
밖으로 눈을 돌리는 세속화를 특히 경계해야겠지요.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물론
자신을 느끼고 받아들일 중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롭고 자비로운 눈,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의 눈빛으로 만사만인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그분처럼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사랑이 결핍되고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비우고
낮추며 다가갑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늘 예수님께 사로잡혀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들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면 생명을 소유하고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순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잊고, 다른 데서 힘을
얻으려 하며, 의미를 발견하려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생각과 말과
행동의 뿌리를 헛되고 헛된 세상에 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예수님
안에 머무는 복된 우리로 머물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17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5)
꽃들과 잎들을 피어나게 하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생명의 호흡을 통해서도 주님이심을 깨닫게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믿습니다.
결국 우리 힘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날 수 없듯이 우리또한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머무름을 통해 사랑을 배웁니다.
끝없이 너그러우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열매맺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하실 생명의 일을 믿기에 걱정을 내려놓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포도나무의 비유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17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포도나무의 비유
복음: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것 그리고 당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결합된 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린 이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분께 결합된 이들은 가지이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우리는 삶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경작하시어 우리 마음에서 사악한 씨앗을
없애고,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가지들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가지들은 모두 잘려 나가고 만다.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포도나무도 세상 곳곳으로 심겨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그래서 버려지고
말았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라고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 가지는 잘릴 것이고, 농부는 잘린 가지들을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깨끗이 손질하시어”라는 말씀을 박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박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어머니인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되어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지는 자신의 생명의 수단이 되는 것을
나무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지가 잘려 나가도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움트며, 잘려나간 가지는 뿌리와 떨어지기
때문에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가지들이 포도나무와 본질이 같고, 거기에서 생겨나듯,
주님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지닌 우리도 그분의 충만함을 받으며
그것을 부활과 구원의 뿌리로 지닌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육체인 포도나무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행을 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에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아버지는 경작을 하시는 분이며 동시에 심판관이시다. 그분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보시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처럼 그들을
잘라 불에 던져 버리시고,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신께서 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더욱 많은 열매를 맺도록 보살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7절 참조)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나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영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고 하신 것이다. 그런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우리 주님 덕분에 우리는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쓰여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수원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부활 제5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5월17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 15,1-8
신학생 때입니다. 뜨거운 논쟁이 있었습니다. ‘제도와 영성’의
문제입니다. 어떤 조직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설립자의 영적인 능력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설립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조직과 규정입니다. 물론 조직과 규정은 설립자의
영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성상 자유로움을 제한하게 되고, 여러
의견을 하나로 통합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다수의 사람들이 수긍하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소국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을 모두 신학교에 추천하고 싶지만 몇 가지 규정이 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하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공동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성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지성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영성, 지성, 건강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젊은이들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성이
바탕이 되지 않는 지성은 자칫 독선과 독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성이 바탕이 되지 않는 영성은 교회의 가르침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영성과 지성은 그릇에 담지
못하는 물과 비슷합니다. 영성과 지성이 바탕이 되지 않는 몸과 마음은
내용물이 없는 포장지와 비슷합니다.
신자분들이 질문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전화로 고백성사를 보아도
되는지, 방송으로 미사 참례를 해도 되는지, 평일에 미사 참례를 해도
주일 미사로 인정해 줄 수 있는지’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논쟁을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혼한 사람들의 혼인, 사제 독신제,
여성 사제’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조직과 규정을
만드는 것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설립자의 영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자유와 관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성전이라는 샘에서 사랑과 지혜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 물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바로 포도나무입니다. 교회에 속한 우리들이
바로 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부이신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잉태됩니다. 세례를 통해서 태어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젖을 먹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납니다.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됩니다. 지혜와 결합하여 혼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희망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유산과 재산은
낙원의 기쁜 삶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두운 죽음이 아니라
지복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들 신앙의 여정을 잘 표현해 주는
가르침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당신 뜻대로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5월17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요한 15,1-8)
당신의 뜻대로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 할 때가 많습니다. 내 것이 관철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가
만든 ‘신념’이나‘가치체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서 한 차원 더 높은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서문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
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 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효과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되려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논리를 펼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찾으며 더 많이 사랑하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 일치의 상태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하기 때문에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제가 기도할 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구하기보다 문간에 있는
것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 부드러운 비, 드맑은 하늘, 가정과 친구,
평화와 기쁨, 무엇보다 사랑에 감사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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