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1. 큐티
창세기 35:16 ~ 29
라헬과 이삭의 죽음
관찰 :
1) 라헬의 죽음
- 16절.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이들을 이끌고 아버지 이삭이 있는 헤브론으로 이동했습니다. 벧엘에서 영적 부흥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동 중에 라헬이 둘째를 해산하게 되었는데, 늦은 나이에 해산하게 되어 난산이 되었습니다.
- 17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 라헬이 기력을 다해 죽게 되었는데, 산파는 둘째 아들을 낳는다고 하며 힘을 내게 하고자 했습니다.
- 18절.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 라헬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엄마 없이 자라야 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베노니”라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는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베냐민”, “내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 19절.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 라헬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장사되었습니다. 막벨라 굴에 매장된 것은 레아였습니다. 그러나 레아의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야곱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라헬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 20절.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지점마다 돌 비를 세웠습니다. 라헬의 죽음에도 야곱은 돌기둥을 세웠고, 그것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던 시기, 최소한 43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남아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기록을 보면 800년 이상이 지난 사무엘 때에도 라헬의 묘비가 남아있었습니다(삼상 10:2).
2) 이스라엘의 자녀들
- 21절.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 “에델 망대”는 “가축떼의 망대”라는 뜻입니다. 들판에 양떼와 염소떼, 소 떼 등을 살피기 위해 높게 쌓은 망대라 여겨집니다. 당시에 잘 알려진 장소였고, 그곳을 지나서 장막을 치고 머물게 되었습니다.
- 22절.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과 근친상간을 범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르우벤은 장자의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영적 부흥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문의 콩가루 같은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 23절.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 중요한 분기점에서 성경은 족보를 정리하곤 합니다. 이제 한 세대를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게 됩니다.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여섯 명의 아들들의 이름입니다.
- 24절.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 25절.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 26절.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 라헬의 아들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을 정리했습니다.
- 27절.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 야곱은 드디어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긴 여정이었습니다. 믿음의 후사가 되는 축복을 억지로 빼앗고자 했던 야곱이 돌고 돌아 아버지 이삭에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3) 이삭의 죽음
- 28절.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 이삭은 백 팔십세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기준으로도 매우 장수한 나이였습니다. 137세 때, 이삭이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몰라 아들들에게 축복하고자 했는데, 그 이후로도 43년을 더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 야곱은 147세, 요셉은 110세를 살았던 것을 볼 때, 이삭은 아주 장수한 것입니다.
- 29절.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 이삭이 죽었습니다. 열조에게 돌아갔다는 것은 선조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이삭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막벨라 굴에 매장했습니다. 이 막벨라 굴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에서가 아닌 야곱과 레아가 들어가게 됩니다.
가르침 :
1) 라헬이 죽었습니다. 라헬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레아보다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아들들에게 이름을 짓는 것을 통해서 알게 되는 부분입니다. 둘째 아들을 생각하며 다른 세 명의 엄마들, 그리고 형제들 틈에서 힘들게 자랄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요셉이 있지만 아직 어렸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마음으로 “내 슬픔의 아들”이란 뜻의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결코 믿음으로 짓는 이름이 아니라 저주와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베냐민”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은 믿음의 가문, 믿음의 족속, 믿음의 왕이 태어나는 것을 바라고 소망한 사람입니다. 12번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이루실지 모르기에 “나의 슬픔의 아들”과 같은 “베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막았습니다. 실제로 본인이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불편하고, 불쾌하게 살았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노니”라는 이름을 허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어 드디어 헤브론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형 에서와의 일로 도망치던 순간으로부터 참 길고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험악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4명이었던 아내들이 이제 3명이 되어 도착했습니다. 12명의 아들들과 함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깨달아 가게 되었습니다.
3)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본인이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존재로 빚어져 가게 됩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야곱의 본성을 꾸준히 갈고 닦아서 이루신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만나는 과정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험악한 시간이 지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이 풀려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요셉이 받아서 찾아가게 됩니다.
4) 족보이야기가 나오면 성경에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분기점입니다. 이삭이 죽었습니다.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의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만, 핵심은 요셉과 유다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이 이들을 통해서 풍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고 이제 구속사적 여정이 이어지게 됩니다.
적용 :
1)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브론으로 돌아왔습니다. 30년이 넘는 긴 시간의 돌고 도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삭과 함께 10여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 시간이 요셉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게 되고, 그가 구속사적 차원의 신앙으로 발돋음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라는 부족한 자를 갈고 닦으시며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고 계십니다. 결국 어떤 모습으로 사용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나라는 존재를 사용하시고 복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삭의 일생, 야곱의 일생을 통해서 확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시간 속에서 주님을 알아가고 빚어지는 것을 기뻐하겠습니다.
2) 믿음은 스스로 만들고 발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공급해 주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말씀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온전하게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오늘도 기대하고 기대합니다.